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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구 이야기

작성자:허허
작성일:2010.02.06



내가 환장할 만큼 좋아하는 어휘가 있다. 지독(至毒)과 기우(奇遇)이다.
지독至毒, 몰입의 정도가 내게 독으로 이르도록 미칠 수 있다는 이 어휘에 나는 흠뻑 반했다. 불가에서 재를 지낼 때, 재를 지내주는 이를 일컷는 어휘로 복위(伏慰)와 기우(奇遇)로 나뉜다. 죽어서 재를 받는 이를 영가(靈歌)라고 하고, 그 영가를 위로하는 사람중에서 영가보다 아랫사람은 이름 뒤에 복위(伏慰)를 붙인다. 말 그대로 엎드려 위로 한다는 소리다.
하지만 영가가 자식이거나 아랫사람일 경우는 비록 두 번 절을 하지만 기우(奇遇-기이한 만남)라고 한다.
상상해보라. 자식의 영가에 절을 하는 부모(혹은 영가의 윗사람)의 표현으로 백 마디의 가슴이 째진다는 소리 보다는 '뭔 이런 좇같은 만남이 다 있노?...' 라는 의미를 함축한 표현으로 애절하다 못해 아름답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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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쯤 전 일이다.
감나무 아래에 군집을 이룬 머위 잎 사이에 삐죽삐죽 고개를 내밀고 있는 것이 아무리 보아도 코스모스 같았다. 형에게 물은 즉 "파종 시기는 아니지만 씨앗이 있기에 뿌리긴 했는데, 서리 내리기 전까지 꽃을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괜한 짓을 한 게 아닌지 모르겠다." 한다. 지금이야 개량된 품종으로 한여름에도 꽃을 피우긴 하지만 코스모스는 단일성 식물이라, 해가 짧아지기만 하면 꽃잎 분화를 기대해 봄직도 했다. 보통 코스모스는 봄에 싹을 틔워서 여름 내내 자라 9월에 들어서야 꽃을 피우는 식물인데, 5개월이나 늦은 파종이라서 뭐라고 장담을 할 수가 없었다.

'백구'는 십오 년 전에 부산의 어느 절에서 가져온 귀주견이다.
외관이 진돗개와 흡사하지만 눈초리가 찢어져서 못된 느낌을 주는 진돗개와는 달리 순하고 예쁜 눈을 하고 있다. 원산지는 일본이라고 한다. 언젠가 전자상가의 CF 광고에 "한번 주인은 영원한 주인" 이라는 문구와 등장했던 그 개가 귀주견이다. 소재는 진돗개에 얽힌 일화를 썼으나 모델로 쓰기엔 진돗개의 찢어진 눈매가 충직한 느낌을 주기 보다는 독한 인상을 준다는 이유로 진돗개와 흡사하나 눈매가 더 예쁜 귀주견을 썼다고 한다. 백구가 바로 그 종이다.
밖에 나갔다 올 때면 사람 먹는 찬보다 개먹일 것에 더 신경을 쓰는 형에게 된장 발라 버리자는 농담에, 정색을 하며 엄마가 생전에 밥 챙겨준 개라서 명대로 살게 뒀다가 죽으면 묻어줘야 한다 말에 무안하기도 했다.
그런 백구가 이제 노환으로 기력이 쇠하여 눈곱이 덕지덕지 끼고 털에 윤기도 없으며, 낯선 이가 와도 짖는 건 고사하고 내다보지도 않는다. 예전에는 아침으로 백구 밥그릇 주변에 까치가 몇 마리씩 죽어 있곤 했다.
사냥개답게 밥을 훔쳐 먹으려는 까치를 덮친 결과다.
지금은 까치가 밥그릇을 덮고 있어도 본둥만둥한다.

추석을 앞두고 모인 가족 앞으로 두 가지 희소식이 생겼다.
불과 일주일 전만해도 어린 싹에 지나지 않던 코스모스가 꽃을 피웠다.
파종 후 삼 주일 만에 꽃을 피워서인지 포기당 꽃 봉우리 수는 적지만 꽃의 자태가 아름다움을 넘어서서 신비감마저 준다.
또 하나는 아랫마을서 흑염소를 방목하는 이가 강아지를 한 마리 가지고 왔다.
형이 없는 사이에 흑염소를 방목하는 이가 백구의 혈통을 탐내어서인지, 그가 기르는 암캐가 발정을 할 때 데리고 와서 씨를 받았다고 한다. 백구가 사람으로 치면 팔순 노인인데 그런 무지몽매한 짓을 하였다고 흥분하는 형더러, 스님에게 개 사돈이 생겼으니 그게 부끄러워서 그러는 게 아니냐며 놀렸다.
그렇지 않단다. 교미를 붙인 그 즈음에 백구가 며칠간 운신을 제대로 못했고 음식을 보고도 못 먹기에 닭을 삶아 먹이고 통조림, 우유 등을 며칠 먹이니 그때서야 깨어났다고 한다. 사전에 양해를 구했더라면 거절했을 거란다.

코스모스의 개화와 강아지의 출현으로 다들 감동을 하는 반면 나는 왠지 아팠다.
/2005년 9월 18일(추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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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 21일, 엄마는 가덕도에 있는 집 인근에 모셔둔 아버지 산소 근처에서 벌에 쏘여 쇼크사 하셨다. 등산객이 엄마를 발견했을 때는 이미 숨이 멎은 상태였고, 엄마 옆에는 백구가 낑낑거리며 앉아있더라고 했다. 엄마에게 달려드는 벌떼를 쫓으려 했던지 백구도 벌떼에 쏘여 성한 곳이 없었다고 했다.
엄마 장례 후, 남매들과 백구를 어떻게 할지 의논하였다.
모두 아파트에 사는 관계로 애완견이 아닌 백구를 데려갈 수 없다는 딜레마가 있었다.
더우기 그때 백구 나이는 이미 일반적인 개의 자연수명을 훌쩍 지낸 늙은이였다.
결론은 백구의 자연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평생을 엄마와 함께 살았던 가덕도에서 생을 마감할 수 있게 가덕도에 그대로 두고 남매들이 순번제로 들어와서 보살피기로 했다.
그 당시 백구는 뇌졸중이 와서 뒷다리를 옳게 운신못했고, 치매끼도 보였다.
1년을 못 넘길 줄 알고 시작한 남매들의 백구 식모 역활은 3년 가까이 지속되었다.

2007년 3월 말경에 나와 교대하는 형으로 부터 아무래도 백구가 얼마 남지 않은 거 같으니 묻어 줄 구덩이를 파두라기에 백구 딸이 살던 집 옆에 깊게 파뒀으나, 그 구덩이에서 풀이 한 뼘 넘게 자라도록 백구는 잘 버텼다.


2007년 5월 4일 오후 2시경 백구는 노환으로 죽었고, 나는 남매들에게 애고애고(哀告)라는 문자를 날렸다.


백구가 죽기 10분쯤 전, 숨을 몰아쉬던 백구에게 어디서 어찌 알고 왔는지 알을 쐬려는 쇠파리떼가 새카맣게 덮고 있었고, 그게 괴로운지 귀찮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눈만 꿈벅일 뿐 꼼짝을 못하는 백구에게 직사는 해로울낀데 하면서도 에프킬러를 뿌려주었다. 백구를 구덩이로 안고 가서 묻을 땐 아무 생각이 없었다. 아니 생각이 없었던게 아니라 말로 표현할 수 없었을 뿐 있었다. 그 생각을 지금 표현하라면 기우(奇遇)다.



감나무 아래 머위잎 사이로 코스모스가 폈던 위치(올해는 코스모스를 안 심었다)




백구가 살던 집. 지금은 대나무가 솟고 잡초만 무성하다.




백구집 10미터 위 백구딸 흰순이가 살던 집(그 옆에 백구를 평장으로 묻다)




백구 무덤위에서 내려다 본 가덕도 풍경



written by ===허허===
(이 글의 저작권은 '허허'님에게 있습니다)

화양연화(花樣年華)

화양연화(花樣年華)
글쓴이:허허


오래 전 인터넷 서핑 중 발견한 글인데 한 번 올려볼까 합니다. 지금은 없어진 사이트이고, 이 글을 올린 분이 지금도 그때의 닉으로 활동하는지, 그 사이트가 없어지면서 인터넷을 떠났는지도 알 수 없기 때문에 닉은 밝히지 않고 그냥 올립니다. 비록 아마추어가 올린 글이지만 그 글을 읽을 때의 감동이 아직까지도 잊히지 않아서 고이 간직하고 있는 글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는 뜻을 가진 “화양연화” (花樣年華),

저는 화양연화라는 단어가 떠오를 때마다 인디언 썸머라는 말이 동시에 떠오르곤 합니다. 여름이 다 지난 후, 추워지기 전에 사막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한여름보다 더 기온이 높아지는 시기를 지칭하기도 하지만 인생의 가장 화려한 한 때를 뜻하기도 한다지요. 열풍이 부는 사막의 삭막한 이미지와 인생에서 가장 화려한 한 때의 이미지가 모양새 있게 연결되는 건 아니지만 화려함 속에서의 삭막함은 연결이 되기도 합니다.

작가는 화양연화라는 영화를 몇 번이나 보고나서 이 글을 썼던 모양입니다. 장만옥과 양조위의 끝내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을 보면서 작가는 그 사랑이 이루어진 이후의 상상을 했고, 그래서 첫 연이 아이를 지우러 간다고 시작하는 듯합니다. 지우러 가는 아이를 두고 습지에 부양된 창백한 식물이라는 표현도 멋들어지고, 장만옥이 매일 국수를 사러가던 묘할 정도의 외로움이 배어나던 장면이 오버랩 되기도 합니다.

차를 타고 가면서 뱃속의 아이와의 대화, 죄책감 그런 부분이 아주 간결하면서 담백하게 표현되어 있는 면면이 저는 다 좋기만 합니다. 어쩌면 작가는 아이를 지우러 간다는 표현 속에 아이가 아닌 타오르는 열정을 지우러 간다는 이미지를 남겨놓은 지도 모릅니다. 한동안 시끄러웠던 게시판에서 지친 분들, 오늘은 열정에 몸을 태우는 시를 감상하시면서 조금 심신을 이완시켜보는 것도 괜찮으리라 생각합니다.



화양연화 (花樣年華)


오늘은
맘먹고
매지게 맘먹고
아이 하나 지우러 간다

내 안에 습지
어둠에 부양된
너는 창백한 식물

뿌리 없는 이름인들
지난 밤 어찌 아무 예감 없었을까
쭐레쭐레 공범의 반역에 동행하는
생가슴 도리는 천연덕스런 행보야
이젠 온전히 내 몫이다

눈치만 파리하게 자란 더벅머리
데려 온 천더기처럼 나 혼자일 때만
내안에서 가만가만 말 걸어오는 아이
우리는 오늘 처음이 마지막인 세상 나들이를 한다
다정한 오누이처럼 우린 함께 창밖을 본다
초록은 언제부터 저리도 다채로워
명랑한 음표들 수 천 수 만
빛의 낱낱으로
뎅-뎅- 청량감 넘치는 종소리 보내온다
끔찍이도 환한 세상의 뒷골목에서
숨죽인 어둠의 밑바닥에서 우리는 얼마나 가엽게 퇴색되었나
보란 듯 만화(滿花)의 들판
어느 명망 높은 이의 화판이기에
원색물감 방탕하게 후려쳐도
신의 재능이라 이름 할 뿐인
봄은 누구를 보내기엔 한없이 부적절한 계절인가
궂은 날
비에 불어터진 국수처럼은 차마 너를 묻을 수 없다

(세상은 사랑하기에 알맞은 곳:
이 세상보다 더 나은 곳이 어디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가벼운 너의 어깨 흔들려
유행가 가사처럼 흔들흔들
산모롱이 돌아서면
또 산모롱
돌아 돌아
하늘 아래 첫 동네
이만하면 너도 날 찾지 못할 것이다
너는 헨델처럼 영악하지도 못하여
레일위로 흔적 두지 않았으리라
어서 네게도 아픔의 이완이 서운해지는 시간이 와야지
할미꽃 양지 마른 인연 하나 피워야지

묘비명도 없이
모든 건 순간이었다
잠시 손바닥 펴고 뒤집어 본 사이
지평에 걸린 빈집들 노을에 불살리고
나는 허깨비처럼 한식(寒食)의 냉방에
쫓기듯 돌아와 입은 채 꼬꾸라져
달뜬 신열에 몇 날을 가물거리면
꿈길에도 너
지운 문장(文章)처럼 백지 같을까
서늘한 새벽 한낮까지 길어져도
내 안에 누구 아무도 말 걸어오지 않을까

이별
그 지독한
리허설......

==작자 미상===
(이 시의 저작권은 '작자 미상'님에게 있습니다)


written by ===허허===
(이 글의 저작권은 '허허'님에게 있습니다)

엄마의 유산


엄마의 유산
글쓴이:허허


생강은 지상부(地上部)가 비비추처럼 생겨서 관상용으로도 그만인 식물이다.

화초도 아닌 생강을 칠천 원이나 들여 심었다고 형은 핀잔을 주었지만 엄마였다면 좋아하셨으리라.
엄마는 생전에 사람은 죽으면 그걸로 끝이지 영혼은 없다하셨고, 나 또한 같은 생각이다.
지금도 영혼의 존재여부에 대한 내 인식은 변화가 없지만, 엄마를 생각하면 영혼이라는 것이 실재하여 볼 수 없다 하더라도 느낄 수라도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십 수 년 전, 아버지는 뇌졸중으로 부산에 있는 동의의료원에 5년 가까이 계셨다.
이젠 재발 위험도 없고 물리치료도 한계가 있으니, 환경 좋은 곳에서 여생을 마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는 담당의의 권유를 받아들여, 수소문 끝에 가덕도에 있는 집을 구했다.
그곳을 생각하면, 집 앞으로 펼쳐진 일흔 평 남짓한 마당부터 떠오른다.
남쪽 끝은 언덕이라 담벼락이 없는 까닭에, 고개를 들지 않아도 가덕도와 거제도 사이의 하늘과 바다가 한 눈에 들어왔다.
젊을 때 결핵을 앓았던 아버지를 위해서는 더없이 좋은 곳이었다.

그러나 엄마로서는 생의 대부분을 살았던 본가를 버리고, 외딴섬으로 유배 온 기분이 아니었을까.
가덕도에서의 적응을 위해서였을까.
엄마는 마당의 절반 너머를 화단으로 바꾼 후, 자식 키우듯 화초에 애정을 쏟았다.
화단을 조성할 때, 남쪽은 키가 작은 식물을, 북쪽은 키가 큰 나무를 심는 것이 원칙이다.
그래야 키가 작은 식물도 해가림으로부터 보호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면 화초들에겐 적절한 환경이 되지만, 화단과 집의 배치 때문에, 미관상 가치는 떨어진다.
화단의 입구 쪽에 키 큰 화초가 배치되어서 울타리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뇌졸중 후유증으로 언어장애가 있던 아버지는 몸짓과 표정으로 불만을 표했지만 엄마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동물이던 식물이던, 사람의 입장이 아닌 그 대상의 입장에서 최선이어야 한다는 것이 엄마의 생각이었으므로.
결국 엄마의 가치관을 아버지가 호의적으로 받아들였다.

부부간에는 욕을 하면서도 닮는다는 말이 있다.
오랜 기간을 함께 살다보면 서서히 동화되어서, 내 정서로 못 받아들일 배우자의 인격적인 결함조차도 닮아간다는 뜻일 게다.
지금이야 달라졌지만, 유달리 부권(父權)이 강했던 우리 풍조를 감안하면 자녀들의 식성도 아버지 쪽을 닮게 된다.
식성이 서로 일치하지 않으면 엄마 쪽에서 포기하기 때문이다.
음식 맛의 핵심은 간(염도)이다.
그 간의 기준은 동일하지 않다.
싱겁게 먹는 이 에게는 짠 것이 고역이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희한하게도 엄마와 아버지는 사십여 년을 함께 살면서도 간에 대한 식성에는 일치점을 찾지 못했다.
아버지의 신경질적인 목소리…….
"짭다. 이십 년째 같은 소리다" …….
"짭다. 삼십 년째 같은 소리다"…….
그러나 엄마의 대꾸도 한결 같았다.
"암만 그래도 나는 싱거우면 앵꼬바서 못 묵는다." 였다.

올 명절에 부모님의 차례음식을 장만하면서, 언제던가 아버지의 생신이던 날, 엄마가 간을 맞춘 미역국을 두고, 형수가 느끼기엔 짠 것 같아서 밥상을 들고 가면서도 내심 걱정을 하였는데, 엄마는 싱거울 것 같다면서 거기다 간장 종지를 더 얹더라는 추억담을 꺼내서 모두가 웃고 말았다.

사십 년을 넘게 살아오면서 나와 가장 격의 없이 가까웠고, 가장 고마웠던 엄마가 돌아가셨는데도 나는 엄마를 묻고, 49재가 끝날 때 까지도 울지 않았다.
나를 제외한 남매들은 엄마의 사진만 보면 오열하는데, 나는 "내 엄마가 참 곱구나."라는 생각만 들었다.
그렇다고 엄마에 대한 정이 없는 것도, 추억이 적은 것도 아니다.
내가 살아온 궤적에서 엄마를 빼고는 말할 게 아무것도 없을 정도다.
모르긴 해도 엄마가 당신 사후에 가장 슬퍼할 자식을 꼽는다면 나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슬프지 않은 내 감정이 싫었다.
나도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기간을 정하지 않고, 엄마가 살았던 집에서 머물렀다.
그러길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엄마가 보이기 시작했다.
환영이나 환청이 아니라 모든 일상에서였다.
마당을 쓸 때도, 청소를 할 때도, 설거지를 하거나 빨래를 할 때도, 풀을 벨 때도, 자잘한 일상에서도, 어느 하나 그려지지 않는 모습이 없고 들리지 않는 음성이 없었다.
감광지에 인화된 필름으로, 영화가 과거의 영상을 복원하듯이, 엄마는 땅으로 돌아갔지만 나의 추억이란 필름에 저장된 실체로, 엄마의 영상은 언제나 복원된다.
진득한 그리움을 담고서…….

나는 엄마에게서 몸을 받았고, 엄마의 영적 영향을 받고 자랐으며 심성, 성품, 가치관등 내가 바로 엄마의 유산이라고 생각하면서, 너무 고마웠던 인연…….

엄마를 가슴에 담는다.

written by ===허허===
(이 글의 저작권은 '허허'님에게 있습니다)

군대 이야기 1


블로그 이전 기념으로 오래 동안 소장하고 있던 지인의 글을 꺼내 펼쳐본다. 혼자 보기 넘 아까바스리... 소변기 하나에 대고 동시사격으로 꼬추까지 넘나본 사이에(ㅋ~) 허락없이 올렸다고 불알 떨까마는 혹여 머라카면 꼼장어로 입막음하면 될끼다. 필명은 임시변통으로 '허허'로 작명해둔다. 필명'예'도 집착하지 않는 自由人이니 이 또한 바꾼들...허허헣ㅎ~

군대 이야기 1
글쓴이:허허




'84년 12월 19일 오전 11시,
마산역에서 집결하여 의정부에 있는 보충대로 가는 길은 내 고향 진영을 거친다.
열차에 오르는 순간, 개인은 사라지고 국방부 소속임을 강조하려는 듯 타자마자 대가리 박길 시킨다.
징집병 수송용이라 정기차편과 별개로 운영되는 특별열차였지만, 그래도 진영을 지나갈 때는 나도 모르게 역사 쪽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엄마와 큰 누나가 개찰구 쪽에서 기웃거리며 나를 찾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손을 흔들었으나 못 알아보는 것 같았다.
몇 시간 전, 함께 입대하게 된 종근이 집에 갔을 때 그가 장남이었던 만큼 첫 자식을 군에 보내는 감회는 부모님에게 각별했을 터였다.
종근이 어머니는 눈물 콧물 범벅이었고 아버지는 벌건 눈자위로 요긴하게 쓰라며 오만 원을 쥐어주고선 얼른 가라며 손사래를 쳤다.
그러면서도 손등으로 눈을 훔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형들을 줄줄이 군에 보낸 경험 탓인지 내 엄마는 덤덤하셨다.
다녀오겠단 덤덤한 내 인사에 오천 원을 주시며 "이것만 하면 되겠제?" 하셨다.
그랬던 엄마가 기차가 진영을 거쳐 갈 것이란 짐작만으로 무작정 개찰구에 나와 계신 것이다.
창문 쪽으로 돌아간 신병들의 눈길을 보고 호송병이 군기가 빠졌다며 단봉으로 어깨죽지를 내리쳤지만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슬며시 웃음만 나왔다.

1400여명이 의정부에 있는 306보충대에서 2박 3일간 머물면서 신체 재검을 받았다.
몇 명이 성병 감염으로 귀가조치를 당했고 나는 창동에 있는 국군병원에서 정신감정을 받게 되었다.
인성검사에서 형체가 추상적인 그림을 보여주면서 무엇으로 보이는 지 기술하라는 항목이 있었는데 '아무것도 아니다'란 답은 적지 말라는 당부를 잊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적었기 때문이다.
정신감정이라지만 구구셈 2단계를 시켰고, 이름을 묻고 군 생활 잘 할 수 있냐는 질문에 답한 게 모두였다.
그중 말을 심하게 더듬던 한 명을 제외하곤 모두 합격 판정을 받았으나, 군번 배정 때 생일 순이면 앞자리를 받아야 함에도 그 덕에 뒷 번호를 받게 되었다.
306보충대는 징집한 장정을 분류해서 주특기를 부여하여 각 부대로 나눠주는 역할을 담당한 곳이었다.
자연스럽게 장정(훈련을 받기 전의 징집병)들의 관심사는 어느 부대에 배치될 것인가였다.
지정 흡연공간인 화장실 옆 울타리엔 붉은 페인트로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한다'는 문구가 적혀있었다.
"씨팔~ 금성사 광고 카피가 장정을 협박하네."라며 낄낄거릴 때 누군가가 톤이 굵은 저음으로 말한다.
"친구들~ 이제 겨울이 왔으니 봄이 멀지 않았어. 힘내자~!!"
바짝 긴장해있던 종근이가 감격 먹은 표정으로 한 마디 한다.
"허허야~ 절마 저거 아무래도 전도사를 꿈꾸는 예수쟁이 같제?"

종근이는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을 한 반에서 지낸 옆집의 내 또래다.
군에 가기 전에 거지생활 3개월만 같이 해보기로 의기투합했던 친구다.
영등포역의 시계탑 근처 2층에 음악다방이 있었다.
심야에는 오백 원 더 주면 차를 마시고 의자에서 하룻밤을 잘 수 있었다.
가져간 삼만 원에서 합판으로 만든 신문 가판대를 만 팔천 원에 샀다.
무인 판매였던 관계로 일부는 그냥 가져가기도 했지만 하루에 삼사천 원 정도의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나는 색안경을 끼고 하모니카만 불면되었지만 종근이는 한 손은 내 손을 끌고 다른 한 손엔 소쿠리를 내밀고 다녀야 했다.
처음엔 창피하다며 불평을 했지만 하루가 지나고 나니 아무렇지도 않단다.
처음 며칠은 애초의 각오대로 세수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숙소로 사용하던 다방에 정양이라는 가슴이 크고 입술이 육감적인 여급이 오고부터는 사정이 달라졌다.
종근이는 낮에도 틈만 나면 다방에 가자고 졸랐다.
핀잔을 주면서도 은근히 좋았다.
오히려 먼저 말을 꺼내는 종근이가 고맙기조차 했다.
언제부턴가 하루 수입의 대부분은 정양에게 커피 사주는 비용으로 탕진됐다.
3천 원짜리 감자탕이 천 원짜리 시락국밥으로 바뀔 무렵이었다.
처음엔 색안경을 쓰고 장님 흉내를 내었지만 나중엔 정말로 눈을 감게 되었다.
일종의 직업의식의 발현이었던가.
갑자기 종근이가 손을 뿌리치면서 좇됐네 하는 바람에 나는 넘어질 뻔 했다.
왜 그러냐고 묻기도 전에 출입문 옆에 앉아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정양을 발견했다.
눈물 나도록 창피스러웠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누군가 신문 가판대까지 훔쳐가 버렸다.
남은 몇 천원으로 감자탕 한 그릇과 소주 두 병을 사먹고 영등포발 마산행 22시 40분열차를 탔다.
올라 올 때와 마찬가지로 무임승차로 내려오면서 거지 생활은 보름을 채우지 못하고 막을 내렸다.
지금이야 전산 처리로 무작위 표 검사가 없지만 당시는 상행은 삼량진 지점, 하행은 수원역을 출발하면 하였다.
검사 지점에 이르면 열차 맨 앞칸으로 가서 지붕위로 올라가서 30분쯤 엎드려 있다가 내려오면 되었다.

보충대에서 마지막 날, 군복 두 벌과 군화 두 컬레, 내복 두 벌, 야전상의 등 개인 피복을 나눠주면서 사복을 벗어서 포장을 하여 집 주소를 적으라고 한다.
사복을 싸면서 건빵을 한 봉지 넣었다.
건빵 봉지에 매직으로 "별사탕은 창구 줘라" 고 썼다.
마음 같아서는 머리카락을 좀 뽑아 넣고 싶었는데 빡빡머리라서 고추털을 세 개 뽑아서 팬티에 똥이 조금 묻은 부분에 뒀다.
싹싹 문지를 때 발견할 것 같아서였다.
배치될 부대를 호명할 때, 나나 종근이나 손을 잡고 같은 부대에 배속되길 바랬다.
"김종근, 8사단" 종근은 나를 쳐다 보더니 울먹이면서 뛰어간다.
"허허, 17사단" 지푸덩하던 하늘에서 곧 눈이 올 것만 같았다.
버스 안에서 호송 관리병으로부터 306 보충대에서 배치되는 부대중에 제일 좋은 곳이라는 축하에 모두들 환호하고 있었지만 나는 다른 후회를 하고 있었다.
사복을 쌀 때 지급받은 군용 양말을 한 컬레 넣었던 게 마음에 걸렸다.
집에 양말이 없으랴만, 창구 선물이란 기분으로 넣었는데 갑자기 그 생각이 났다.

"할마시 또 양말 때문에 씰데없는 걱정하겠네..."
(to be continued)

written by===허허===
(이 글의 저작권은 '허허' 님에게 있습니다)

군대 이야기 2


군대 이야기 2
글쓴이:허허




`84년 12월 21일 오후.
눈은 버스가 훈련소에 도착할 무렵 폭설로 변해, 휘몰아치고 있었다.
어찌된 일인지, 군악대가 대기하고 있다가 우리가 버스에서 내리니 팡파르를 시작으로 행진곡을 연주했다.
소령 계급장을 단 영관이 과장된 몸짓으로 여러분의 입소를 진심으로 환영한다는 인사말로 우리를 맞더니, 특전사의 자랑을 늘어놓았다.
이왕 때우고 갈 30개월을 사나이 중의 사나이로 거듭나지 않겠냐는 호소와 함께 지원자의 특전에 대해서 장황하게 설명을 하였다.
박력 있고 세련된 약장수 같았다.
일곱 여덟 명이 그 자리에서 지원을 하였다.
(훗날 듣기로, 그 순간에 꼬여서 간 애들 제대할 때까지 고생 절라 했고 제대하는 날까지 후회했다더라.)

특전사 지원병 모집관이 돌아간 후
"이 새끼들 봐라. 눈동자 굴러가는 소리가 들려?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선임 조교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폭력과 얼차려로 전체를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다.
훈련소의 6주간의 교육은 교육훈련 일정에 대한 설명이나 이해를 돕는 게 아니라 이렇게 인격을 파괴하는 것에서 출발했다.
짧은 시간에 민간인 티를 벗기고 획일화, 규격화시키기 위해선 폭력을 통한 억압과 공포심 유발이 효과적이라는 걸 그들은 잘 알고 있는 듯했다.
6주간의 훈련기간에서 처음 4주는 신병교육대에서 받고 나머지 2주는 포병부대로 보내어져서 위탁교육을 시킨다고 했다.
신병교육대는 편제상 1개 대대였으나 부대 특성상 기간병의 수는 1개 중대 정도였다.
조교가 주축이고 기타 의무, 통신, 행정, 상황, 취사병 등으로 이루어졌다.
방위병과 현역병, 하사관후보생 교육이 파트별로 나눠져 있고 훈련병의 전체 규모는 600명 정도였다.
오전 6시에 깨워서 밤 10시에 재울 때까지 나름의 일정이 있지만 공포심 유발로 얼을 빼놓는 게 주요 일정이었다.
몇 명은 훈련에서 빼주는 대신에 사병식당에서 노역을 시켰다.
나는 4주 대부분을 노역으로 대신했지만 마지막 관문인 유격훈련은 예외가 없는 관계로 받아야 했다.
유격훈련이라지만 종일 얼차려로 체력을 고갈시키는 게 전부였다.

최루가스 흡입 체험 장은 창고처럼 밀폐된 열 평 남짓한 건물이었다.
스무 명을 단위로 밀어 넣은 후, CS캡슐을 불에 태워 발생하는 가스를 강제로 흡입하게 했다.
스무 명이 서로 허리를 잡게 하여 기차놀이를 시키며 '어머님 은혜'를 부르게 했다.
방독면을 쓴 조교 다섯 명이 단봉을 휘두르며 큰소리로 부르게 했다.
(산소 소모량을 늘여서 야무지게 마시게 하려는 속셈이었다.)
눈을 뜰 수가 없었고 눈물이 흘러내린 자리는 따끔거렸으며, 가슴은 따갑고 정신조차 혼미했다.
고통이 심해지니 분노가 일었다.
참다못해 조교를 덮쳐서 쓰러뜨린 후 방독면을 벗기자, 다른 조교들이 내게 달려들어서 단봉으로 무차별 난타를 가했다.
다른 훈련병들까지 합세하는 바람에 난투극이 벌어졌고, 그 결과로 조교나 훈련병이나 모두 가스에 질식되었다.
밖으로 나와서는 꼴통으로 찍혀서 조교들에게 개 맞듯이 두드려 맞았다.
내가 맞고 있는 시간에 나머지는 그 덕에 쉬고 있었냐고?
천만에, 대가리 박고 있었다.

유격체험을 끝으로 사실상 기초군사 훈련은 끝이었다.
훈련병을 모아 놓고선 대위 계급장을 단 중대장이 연설을 하였다.
그동안 대단히 수고 많았고, 제군들을 혹독하게 다룬 것은 사적인 감정이 아니라 강한 군인으로 키우기 위한 충심이었으니 이해를 하시고 오 분의 여유를 줄 테니 그동안 맺혔던 감정을 욕설로 풀어내라고 했다.
덧붙이길 어떤 욕이라도 상관없으니 자신을 포함한 조교들에게 하라고 했다.
중대장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약속이나 한 듯이 "없습니다!!" 는 소리가 터져나왔다.
중대장이 흐뭇한 얼굴로 웃는다.
이건 아니다 싶어서 잽싸게 손을 들었다.

"훈련병 허허, 욕 좀 해야겠습니다."

여유로운 미소를 보이며 기탄없이 하란다.
더불어 조교들을 도열시키고 자신도 옆에 선 후 내 말을 경청하라고 했다.

"야이~ 호.로 개.십.새.끼들아, 이 씹.불할 놈들아!!
니네들이 유능한 조교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택도 없다.
내가 보기엔 걸뱅이 안주 같은 놈들이다.
걸뱅이 중에서도 샌프란시스코 걸뱅이와 미.친.년 사이의 교배종이닷!!
니놈들 하는 행사머리 보니 클 때 무지 맞고 큰 놈들 같다.
왜 맞고 컸는지 니들은 모지만, 니들 에미는 알 거다.
니놈들이 맞고 나면 아까징끼는 옆집 아저씨가 발라줏제?
그기 혈육의 정이란 걸 니들이 알기나 하냐?
어이 안 하사, 니놈은 닭벼슬보다 못한 완장으로 군림했지,
여기 148명 중에서 일대 일로 붙었을 때 니한테 질 놈이 어데 있노?
최 하사~!! 너야말로 군대 혜택으로 사람위에 군림해보는 놈 같다.
넌 제대해봐야 밑바닥이다.
우짜던지 말뚝 박아라. 내가 간절히 권한다.
이 하사……. 김 하사……. 시불락 시불락 …….
중대장 야이 개.새.끼야, 이 죤만아!!
보자보자하니 보.지를 쑥 내민다더니, 니놈이 여기서 희희낙락하고 있는 순간 니 계집은 다른 껀수로 희희낙락중인 걸 모르제?
내 보기에 니는 좇.질은 젬병이다.
꼴값한다고 좇.질도 부실한 놈이 누구한테 총질 가르친다꼬? 씨불락 씨불락……."

통상 유격체험이 끝나면 그동안 혹독하게 다룬 것에 대한 보상으로 교관과 조교에게 욕할 수 있는 시간을 부여하면, 훈련병들은 천부당만부당이라며 거절하고 그 답례로 풀어주는 게 관례였다.
그날 나는 보장받은 오 분을 다 채우지 못했다.
얼굴이 벌게진 중대장의 지시로 주둥이가 틀어막힌 채로 끌려나와서 두드려 맞았다.
동료들은 유격장서 막사까지 오리걸음으로 왔고 나는 기어서 오게 되었다.
(to be continued)

written by ==='허허'===
(이 글의 저작권은 '허허' 님에게 있습니다)



군대 이야기 3


군대 이야기 3
글쓴이;허허




퇴소식은 사단의 공식행사다.
사단장의 참관은 소속부대의 최상급자와 말단 사병이 최초로 대면하는 날이며 가족면회가 이루어지는 날이기도 했다.
사단 연병장에서 행사를 하는 것이 통상관례였으나 눈이 많이 쌓인 데다 추운 날이었으니 면회객을 배려하여 실내체육관에서 퇴소식을 하게 되었다.
단상엔 수뇌부들이 앉고 광장에서는 훈련병들이 도열하고, 이층 관람석엔 가족들의 자리가 마련되었다.
훈련소 입장에선 6주간의 훈련성과를 수뇌부와 부모들에게 가시적으로 보이는 날이기도 했다.
시범은 제식동작과 총검술, 태권도 품세와 적 벽돌 격파 시범 순으로 진행이 되었다.
(가마에 굽기 전의 벽돌이라서 강도는 약했다.)
다른 시범은 훈련기간 내내 반복 연습을 했으나 벽돌 격파 시범은 예산부족으로 자세와 격파요령만 교육받았다.
격파에서 실패하면 유급되어 퇴소가 불가능하단다.
앞 기수에서 한 명이 주먹으로 격파를 실패하였으나 불굴의 깡다구를 발휘하여 이마로 기어코 깨고는 이마에 피를 철철 흘리는 모습을 보고, 사단장이 감격을 하여 "이놈 즉시 포상휴가를 보내라"는 사례가 있었다는 얘기에 다들 감격한 표정이었으나, 나는 속으로 ‘미친 놈’ 싶었다.
퇴소식 마지막 행사로 벽돌을 격파하는 시간이 왔다.
귀에 딱지가 앉게 듣고 자세를 연습했던 격파요령을 떠올렸다.
"왼 무릎을 굽히고 오른 다리를 뒤로 쭉 뻗고 허리를 세운 자세에서 시선은 벽돌을 향하고 머릿속엔 격파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자기최면을 걸어서, 지휘자의 구령에 맞춰 모든 힘을 주먹에 모아서 내려쳐라"
하지만 나는 지휘자의 구령과 동시에 벌떡 일어나서 주먹 대신 오른발로 사정없이 벽돌을 밟아버렸다.
옆 동료의 벽돌은 두 동강이 난 반면에 내 벽돌은 가루가 나버렸다.
스무 명 정도는 일 차에서 실패하여 다시 내려치고, 그래도 실패한 이는 이마로 들이받느라 난리를 치고 있었지만 나는 당당하게 시침을 떼고 있었다.

훈련 동기들이 모두 경남 출신인 반면, 훈련소는 인천이었고 혹한인 관계로 면회객 비율은 훈련병의 절반 정도였다.
훈련소의 배려로 가족들이 면회를 오지 않은 훈련병은 면회를 온 가족에 끼워서 따뜻한 음식을 얻어먹게 하였다.
형들 군 생활 중에 면회를 간 적이 없는 엄마와 울산 형이 생각지도 않게 면회를 왔다.
면회소는 북새통을 이뤘다.
옆 동료가 면회 온 엄마를 앞에 두고 "추웅썽!! 이병 누구누구 어쩌고저쩌고……." 하니 그 어미는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다.

‘저 바보 같은 놈…….’

제 딴에는 씩씩하게 변한 모습을 보이고 싶은지 몰라도, 어미로선 평소 철없던 놈을 군에서 얼마나 다그쳤기에 6주 만에 이리 변하게 만들었나 싶었을 테고, 앞으로 남은 기간을 생각하며 가슴에 못 박히는 줄도 모르지 싶었다.
"허허야, 모두 같은 옷을 입고 있어서 그놈이 그놈 같아서 우째 찾겠노 했는데, 모두 똑 바로 서있는 데 하나가 삐딱하게 서있는 폼이 영판 니 아버지 뒷모습이라서 그 놈만 집중해서 보니 니가 맞더라. 니 형한테 말하고 짜달시리 웃었다."
형이 옆에서 한 마디 덧붙인다.
"어떤 애들은 벽돌을 못 깨서 머리로 찧고 난리를 피워서 겨우 두 동강 내는데, 니는 아예 가루로 만들어 버리데? 학시리 내 동생답더라."
다른 가족들은 지지고 볶고, 떡도 해오고 통닭도 준비하고 한입 가득 넣어서 호흡곤란증을 보이는데도 부모는 계속 밀어 넣고 있는데, 엄마는 빈손이다.
어찌된 영문이냐는 눈빛으로 쳐다보니,
"니 형이 이 추운 날 뭐 하러 천릿길을 가서 식은 음식을 먹일 거요? 외출 될 건데 밖에 나가서 따신 음식 먹이지 하기에 빈손으로 왔더니만, 면회만 가능하고 외출은 안 된다네…….”
엄마의 말을 받아서 형이 또 거든다.
“여기 매점은 바나나우유 뿐인네 차서 우야노?”
억수로 미안해하는 형을 위해서 한 마디 해줬다.
"몇 달 만에 만난 형이 반갑지 않고 지기 삐고 싶은 생각이 드는 걸로 봐선 군대가 문제 있는 동네임이 확실하네요."
내게 배당된 동료와 나는, 두 시간 정도의 면회 시간이 풍요속의 빈곤이었다.
우리가 먹은 것은 PX에서 파는 바나나우유와 다이제스티브라는 비스킷이 모두였다.
내게 주려고 준비한 돈과 음식을 사주려고 했던 예산을 내놓으라 해서 기어코 사양하는 동료와 반씩 나눴다.

면회가 끝나고 각각의 부대로 분산배치를 위하여 호명을 한다.
"허허, 306포병대대"
"음마얏~ 모야모야 이게 뭐야? 내가 왜 포병으로? 달고 있는 좇만해도 천근인데, 소총도 무겁구만……. 대포가 다 뭐얌!! 죠또, 시롯~!!"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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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저작권은 '허허'님에게 있습니다)




군대 이야기 4


군대 이야기 4
글쓴이:허허




`85년 2월 2일 오후.

군종병으로 배치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난데없는 포병이라니 기가 막혔다.
훈련소 동기 8명이 같은 부대에 떨어졌으나 동기들과 달리, 나는 포병 교육을 받지 않았기에 포병에 대한 기초 상식조차 없는 상태였다.
포대 배치를 기다리는 동안 화장실에서 고향이 부산이라는 어느 기간병과 마주쳤다.
그의 말인즉 이 부대는 105밀리 포라서 포를 인력으로 들어서 돌리는 방식인데 디스크 발병률이 아주 높다고 했다.
또한 포구를 겨냥할 때는(방열) 여러 명이 동시에 힘을 써야 하는 방식이라 군기가 강하고 구타가 상습적이란다.
고생길이 열렸다며 안쓰러워하는 그의 말에 좇됐단 생각뿐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단 군법사가 찾아와서 전하길, 군종으로 받아 들여야 하나 결원이 없어 1년 이상을 기다려야 한단다.

월요일, 대대장 신고를 위하여 간단한 교육을 받고 대기실에 있는 동안 대대장의 꼬봉역인 주임상사가, 여기서 이발을 한 경력이 있는 놈 있냐고 물었다.
꼭 이발사를 직업으로 하지 않았더라도 상관없다고 했다.
잽싸게 손을 들었다.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다. 이발경력이라고 해봐야 깎이는 역할이었지 이발사와는 거리가 멀었다. 포병으로 끌려가면 좇된다는 강박관념의 결과였다.)
갑자기 주임상사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바로 대대장 신고 들어갈 예정이었는데 혼자 대대장실로 들어가더니, 조금 후 모두 들어오라고 했다.
신고를 위해서 도열하는데 대대장이 손사래를 친다.
"신고는 치우고 밖에서 이발했다는 병사가 누구지?"
씩씩하게 답했다. "넵!! 이병 허허!!"
"내 머리를 자를 수 있겠나?"
"넵, 자를 수 있습니다!"
두 손으로 내 손을 덥석 잡는다.
"반갑다. 정말 잘 왔다. 어이 주임상사, 얘 어디로 보내려 했지?"
"브라보 포대(보병으로 치면 2중대)로 배치했습니다."
"일마를 본부대로 보내고 간부 이발소를 일마한테 맡겨라"

뒤에 안 얘기였지만 거기는 독립부대이다 보니 대대장 천국이었다.
대대장은 돈 욕심이 많아 돈이 되면 무엇에든 손을 대었고, 대표적인 게 차량 기름 도둑질과 50여명 되는 직업군인들을 상대로 한 간부식당과 세탁소와 이발소를 운영하여 이익금을 챙겼고, 인력은 각 사업장에 적합한 방위병을 충당 받아서 운영해왔는데 85년 부로 방위병 인가가 PX(군대 매점)에만 두 명을 두고 나머진 없어졌단다.
간부 식당이야 취사병 중에서 차출하고, 세탁소야 고참이면 옷 못 다리는 놈 없으니 맡기면 되는데 이발병은 전문 기술이 없이는 불가능한 분야라 폐업 중이었는데 내가 이발을 할 수 있다니 돈벌레였던 그로선 얼마나 반가웠겠는가.
"일마는 모든 훈련, 보초에서 열외시키고 이발소에만 있게 해라!"

내가 배치받은 2내무반은 본부행정반, 인사, 작전, 군수, 병기 과와 측지반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각 과마다 적게는 4명에서 많은 부서는 스무 명 가까운 팀원을 이루고 있었으나 나만 이발병이란 신분이었다.
신병 보충은 무작정 이뤄지는 게 아니라 인사과에서 각 파트별로 제대 예정인원을 감안하여 신청을 하고 배정을 받는다.
그러다 보니 신병이 들어올 때는 반드시 신병이 인수받을 고참이 있다.
그 고참과 신병은 임무로는 인수, 인계인의 관계지만 신병의 빠른 적응을 위해서 사수와 조수(일명, 아비 자식관계다)로 묶어준다.
하지만 나는 아비가 없었다. 굳이 위에 열거한 족보에 근거해서 정체성을 찾는다면 인가가 없어지면서 사라진 역대 방위들이 내 아비가 된다.
방위를 아비로 둔 사생아, 그게 내 정체성이라면서 사람들은 놀렸다.

의무대 선임하사가 나를 찾았다.
고향이 김해 진영이냐고 확인을 하더니 중학교 어디 나왔냐고 묻고는 나보다 10회 선배라고 했다.
알고 보니 형과 친구였다.
고향 후배에 친구 동생이니 어려움이 있으면 가능한 도와주겠다고 했다.
괴롭히는 놈이 없냐고 묻기에, 사실 나는 이발을 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주임상사에게 말해서 휴가를 보내 줄 테니 일주일 안에 최대한 이발 기술을 익혀오라고 했다.
덤으로 본부대 고참 중에서 제일 악질인 백운제 병장을 내 아비로 묶어줬다.
백운제, 서울 동대문구 북아현동 사람이란 것만 알고 그가 제대한 이후로 본 적은 없지만 잊을 수 없는 사람이다.
부대에 있는 이발 기구는 쓸 수가 없으니, 허허가 사용하던 장비를 가지러 보내야 한다는 명목으로 휴가를 청원하여 주었다.

휴가를 떠나기 전날 2.12총선용 부재자 투표를 하게 되었다.
한 명 한 명씩 본부대장실로 들어갔다.
내 차례에 들어갔더니 본부대장이 손으로 기호1번을 가리키며 "그냥 찍어." 했다.
"예" 하면서 2번을 찍었다. 다른 어떤 이유도 없었다. 그냥 찍었다.
"이 새끼가 미쳤나"면서 펄쩍 뛰기에 마치 실수인양 시침을 뗐더니 조인트 몇 대 채이고 말았다.
보직 배치부터 복 받은 놈이 휴가 복이 터졌다며 아비 백운제 병장이 휴가복을 다려주면서 놀렸다.
대대장이 출근하면 신고하고 휴가를 떠나기로 예정되다 보니 전날부터 잠을 설쳤다.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데 행정반에서 연락이 왔다.
지금 당장 영창 갈 준비(세면도구 챙김)해서 대대장께 신고하러 가잔다.
부재자 투표에서 야당에 투표한 사병은 모두 근무태만으로 영창 보내라는 지시가 사단으로 부터 내려와서 할 수 없단다.
27명이 같은 죄명으로 영창을 살았다.
영창 보름 살면서 부지런히 맞았다.
철창타기 1번에서 18번까지 마스터했다.
영창을 살고 나와서는 어찌된 일인지 허리를 펼 수가 없었다.
사단 의무대로 외진을 갔다가 수도 통합병원에서 한 달을 입원해 있다가 퇴원을 하였는데 퇴원 사유는 꾀병이란다.
사실 꾀병이 맞았다.
처음엔 허리를 펼 수가 없었지만 일주일 즘 지나고부터는 아픈 데는 없었다.
그냥 버티면서 능청을 떨었던 거다.
간 기능이 많이 떨어졌다는 진단은 받았지만 입원을 요하는 정도는 아니었다.
부대로 돌아오니, 그 사이 부산 사는 고참이 휴가를 가서 아버지께 알리는 바람에 아버지가 올라 오셔서 난리를 피웠다.
그 덕에 보름간 위로휴가를 받았다.
보름간을 동네 이발소에서 다 보냈다.
부재자 투표에 얽힌 일화가 많지만 생략한다.

밤 9시가 넘으면 일석점호라는 걸 한다.
야간 당직 사관이 인원 점검 및 내무반 위생상태 점검과 개인장비 점검을 겸하는 행사다.
21시 20분 쯤 되면 침상 앞에서 모두 도열해서 점검을 기다린다.
통상 그 시간에 내무반 오락을 겸한다.
신청자에 한해서 노래를 한 곡 부르게도 하고 때론 고참이 지명을 하여 한 곡 부르라고 한다.
그때도 절차라는 게 있었다.
가령 인사과 부원이면서 군사우편 발송과 수령을 담당하는 사병이면 노래를 부르기 전에
"일병 아무개 노래 일 발 발송!" 식으로 구호를 외치면 더 고참 되는 놈이 "접수!" 하고 허락이 떨어져야 불렀다.
통신병은 끝 구호를 "발신"이라고 하면 "수신"으로 화답을 해야 부르는 식이었다.
나는 음치에 가깝다.
그럼에도 고참들은 나를 자주 지명했다.
내 보직이 깎사(이발병)였던 관계로 "이병 허허, 노래 일 발 깎!"
모두들 뒤로 넘어가면서 "짤럿!" 한다.
그 재미로 내게 노래를 시켰다.

보름간 휴가를 겸해서 이발 기술을 익혔다고는 하지만 간부 이발소는 개업과 동시에 간부들 입에선 불평이 드셌다.
머리 깎고 가는 놈들 마다 한 소리씩 했다.
"어이구, 저 개놈의 새끼, 내 머리 다 조졌다." 정도는 약과였다.
귀를 가위에 씹혀서 피 칠갑 하는 놈, 면도가 아니라 회를 쳤다면서 투덜거리는 놈, 이발소에만 오면 피 칠갑을 당하기가 예사였다.
간부들 복지를 위한 이발소가 아니라 부대장 사익을 위한 이발소다 보니, 귀를 씹히고도 이발 요금은 월급에서 원천징수를 당했다.
아무 소리도 못하는 그들은 나에게만 분풀이를 했다.
"아이고 저 후루꾸 새끼" 라며 다들 치를 떨었다.
그러든 말든 나는 겉으로만 송구스런 표정을 지으면서 속으로 "시퐁!! 나는 어쩌라고? 이발소 말고는 있을 데가 없는데……."
의붓아비지만 그래도 아비인 백운제 병장이 보다 못해서인지 대안을 내놨다.
"달리 방법이 없다, 많이 조져야 는다." 면서 자기 밑에 병장들 중에서 1-5호봉까지 집합시켜서 이발소 앞에 줄 세웠다.
한 명씩 들어오게 하고는 날더러 무조건 조지라고 했다.
원체 악질로 소문났던 백운제라서 피 칠갑을 당하면서도 찍소리 못하고 그들은 모르모트가 되어주었다.
나 또한 이발소에서 쫓겨나면 좇된다는 위기의식이 얼마나 강했던지, 첨에는 사람 잡더니 한 달이 지나지 않아서 사제 이발소보다 더 잘 깎는다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 무렵 백운제는 제대 기념이라면서 나의 새 야전 상의와 군화를 가지고 제대했다.
(to be continued)

written by ===허허===
(이 글의 저작권은 '허허'님에게 있습니다)

군대 이야기 5


군대 이야기 5
글쓴이:허허




내가 소속된 본부대는 행정반과 인사, 정보, 작전, 군수, 통신, 수송, 의무, 탄약, 취사파트로 이뤄졌다.
겨울에는 체력단련이라는 명목으로 전 대원을 모아서 상체를 벗긴 후, 태권도를 시키므로 오전 일과는 9시부터 시작이었다.
말이 좋아서 체력 단련이지 실제는 체력 학대에 가까웠다.
누구나 회피하고 싶어하지만 부대장의 지시사항이기 때문에 직업군인이라도 예외가 없었다.
초병과 상황실 요원, 취사병과 나만이 열외일 뿐이었다.
내가 소속된 부대의 직업군인 수는 장교를 포함하여 예순 명 남짓이었다.
그들은 보편적으로 한 달에 두 번 정도 이발을 했다.
내가 조져야할 머릿수는 월 평균 120개 정도고 1일 평균 네댓 개 정도였다.
머리 하나 조지는데 소요되는 시간은 면도를 포함해서 10분이 안 걸렸다.
6평 남짓한 이발소는 나만의 독립공간이었다.
고참들이 땡땡이 칠 공간 확보 차원에서 이발소를 이용할 가능성은 없었다.
수직 사회인 군에서 사병이 간부들 전용 공간에서 게길 수가 없었다.
간부 1인당 2500원을 이용료로 월급에서 원천징수하지만 운영비는 600원짜리 면도날 두 통이면 족했다.
부대장 입장에서 볼 때 많은 수입은 아니지만 마진율이 아주 높은 수입원이다 보니 이발소에 무한(?) 특혜를 제공했다.
모든 경계근무 및 노역에서 열외, 사병들의 간부 이발소 출입 엄금시켜, 내게는 이발소가 해방구나 다름없었다.
군인 이발은 단순했다.
어떤 일이든 마찬가지겠지만 그 일의 특성을 파악하고 깊은 관심만 가지면 빠른 시간 내에 숙련공이 될 수 있었다.
군인 이발은 창조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숙련을 통해서 익히고 나름의 감을 잡으면 눈 감고도 할 수 있는 기능일 따름이었다.
한 달이 지났을 무렵 이발소에서의 내 위상은 이전과 천양지차였다.
'후루꾸 새끼' 또는 '이등병의 탈을 쓴 피 칠갑'에서
'당신은 대가리를 깎기 위해 태어난 사람'으로 바뀌어버렸다.
하루 8시간의 일과 중에서 내 업무의 양은 한 시간꺼리가 안 됐다.

한 내무반에 마흔 명씩 생활을 하다 보니 실내 내무반 관리에서 부터 바깥청소, 식수관리 등 많은 손길을 필요로 한다.
다섯 식구를 둔 가정의 가사 노동량과 비교해 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내가 소속된 내무반에선 배식과 설거지는 상병급이 맡았고 바닥에 관련된 일은 그 아래 기수가, 외곽 청소는 일병, 침상은 이병 등으로 분담이 되어 있었다.
원래 군부대에서 가축을 못 기르지만 새는 예외였다.
연탄난로를 이용한 난방이어서 일산화탄소 중독 가능성이 있었다.
그런 까닭으로 사람보다 일산화탄소에 훨씬 민감한 문조라는 새를 길렀었다.
내무반 관리에서 내가 맡은 업무는 문조라는 새를 관리하는 일이었다.
내게 그 업무를 배당한 이는 의붓아비인 백운제 병장이었다.
"어이~ 새끼, 문조는 상병 2호봉인데 니는 계급이 어찌돼?"
그는 나를 새끼라고 불렀고, 내게 그를 엄마라고 부르라했다.
"넵. 엄마, 이병 4호봉인데~예."
사병 계급에서 호봉수는 그 계급을 단 달수를 말한다.(일병 3호봉 = 일병된지 3개월째)
아침 점호 후 각자 맡은 청소를 할 때 나는 고함치는 게 일이었다.
"충썽! 이병 허허, 문조 상병 님의 침상을 정리 하려합니다. 이에 신고합니다. 충썽~!!"
내가 문조라는 새를 담당한 지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서 죽어 버렸다.
그 새는 백운제 병장이 휴가를 다녀오면서 사온 새였다.
제대를 앞두고 각별한 애정을 보였던 그 새가 죽었으니, 또라이로 소문난 그의 횡포를 예감한 병사들의 공포는 상상 이상이었다.
더욱이 새를 담당한 나는 아무리 백운제의 의붓 새끼라지만 무사하지 못 할 거라 했다.
하지만 백운제의 반응은 의외였다.
등받이 없는 의자에 탈지면을 깔아서 새를 올리고서 나를 불렀다.
"어이 새끼, 문조 상병은 니한테 배다른 형이니 니가 상주해라"
아무리 군바리지만 상주는 상복을 입어야 한다면서 휴지를 풀어서 머리와 온 몸에 칭칭 감게 했으며, 상주는 지팡이도 있어야 한다면서 밀대 자루를 쥐어주면서 곡을 시켰다.
그리곤 백운제는 내 밑에 모조리 집합을 시켜서 저녁 점호 전까지 문상을 하라고 했다.
한 사병을 따로 불러 부의록을 만들어 기록을 하라고 시켰다.
악명 높은 백운제의 명인지라 빠짐없이 문상을 왔다.
오는 이 마다 새가 뉘어 있는 의자를 향해 절을 두 번씩 하였고
나는 옆에 서서 밀대자루를 잡고 곡을 했었다.
새에게 절이 끝나면 나와 맞절을 하면서 부의금조로 담배를 한두 개피씩을 내어 놓으면서 위로의 말을 전했다.
"얼마나 애통하십니까. 뭐라고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 할 지...."
"차마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에고 에고~~"
그 날 백운제가 챙긴 담배는 한 보루가 넘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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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 이야기 6


군대 이야기 6
글쓴이:허허




일과가 끝나고 내무반으로 오니 체격이 우람한 신병 하나가 잔뜩 긴장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인사과 요원이 우리 내무반원이라서 부대장 신고 전에는 우리 내무반에서 재웠었다.
"허허, 드디어 니 쫄따구 왔다. 그동안 막내로서 외로웠지, 축하한다."
그런 의미에서 내 맘껏 신고식을 시켜보라고 했다.
얼마나 기다렸던 쫄따구였던가.
"어이~ 신병, 위치로!"
“넵, 이병 정원식”
"내가 누구게?"
내 명찰을 보더니,
“허허 이병 님이십니다!”
"뭐시라꼬? 대가리 박으세염."
머리를 처박고 있는 신병에게 목소리를 깔면서 말했다.
"니도 이병이고 나도 이병인데, 내가 이병으로 보인다면 맞먹겠단 소리 아이가?"
“아닙니다.”
"허허 이병이 아니라 할배다 알겠나?"
“넵, 알겠습니다.”
"기상!, 할배 삼회 복창한다. 실시."
“할배!! 할배!! 하알배~!!”
"시끄럽다 이늠아, 고참들 놀래잖아."
나머지 대원들이 배꼽을 잡는다.
"훈련소에서 군인정신 암기했제?"
“넵, 했습니다.”
"외운다. 실시"
“군인 정신은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어허~ 대가리 심어주세요."
"군인 정신은 제 정신이 아니다 알겠나?"
“넵, 알겠습니닷!”
"군인의 길 외워 보세염."
“군인의 길 하나, 나의 길은 충성에…….”
"에혀~ 대가리 다시 심어 주세염."
"제대만이 살 길이다 알겠나?"
“넵 알겠습니다.”
"기상, 터레끼 하나 뺀다. 실시!"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는다.
"씨뱅아, 좆털도 모르나? 터레끼 하나 뺀다. 실시!!"
아픈지 인상을 찌푸리더니 하나를 뽑아서 두 손으로 내민다.
두 손으로 털 하나를 쥐고 있는 모습이 엉거주춤하다.
"그게 뭐로 보이노?"
“넵, 고추 털입니다!”
"에혀~ 야가 와 이라노. 다시 대가리 심어 주세염."
"총이다 알겠나?"
“ 넵, 알겠습니다.”
"기상, 그게 뭐시라꼬?"
“총입니닷!”
"그라모 총이고말고. 훈련소에서 총검술 배웠제?”
“넵, 배웠습니다.”
"자~ 지금부터 총검술 연마 정도를 심사하겠다. 찔러 총!”
“얍”
"길게 찔러"
“야압.”
"총검술 16개 동작, 구령과 함께 시작"
“하낫, 두울 세엣…….”
내무반원들이 뒤로 넘어간다.
그런데 아까부터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왠지 모를 음모의 냄새 같은 것…….
도무지 더는 못 참겠는지 인사과 임 병장이 우스워서 말을 잇지도 못하면서 얘기한다.
"허허, 넌 이제 좇됐다. 원식이는 차량 정비 주특기라서 후반기 교육을 6개월 받고 와서 신병이지, 너 보다 3개월 고참이다. 더욱이 본부대로 배속됐다. 우짤래? 절마는 태권도 공인 4단이고 니보다 고참인데……."
나만 몰랐고 다들 알고 있었던 듯했다.
나를 골탕 먹이기 위해서였다.
며칠 후 세면장에서 나는 얼굴이 벌게지도록 대가리 박고 있었고 정원식은 침을 튀기면서 연설을 하고 있었다.
“뭐? 씨발넘아, 제대만이 살길이라고?
말 잘했다. 앞으로 니는 내 제대만이 살 길이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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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 이야기 7

군대 이야기 7
글쓴이:허허



육군으로 입대를 하면 복무기간 동안 세 번의 정기휴가가 주어진다.
처음과 두 번째는 보름씩을, 제대를 앞둔 말년 휴가는 열흘, 도합 40일의 정기휴가다.
그 외에 한두 번에 걸쳐서 3박 4일짜리 특박이나 1주일짜리 포상휴가 한 번 정도 받는 게 보편적이었다.
개인에 따라서는 정기휴가만 세 번으로 끝나는 경우도 많았다.
사병에게 있어서 제일의 소망은 밖으로 내보내주는 일이었고 두 번째가 잠을 많이 재워주는 일이었으며 세 번째는 집합(머릿수 확인, 종일 틈나는 대로 함)에서 제외되는 경우로서 한시적이나마 속박에서 벗어나는 일이었다.
자연히 사병에게 내거는 최고의 포상은 휴가였다.
나는 군복무기간 통틀어서 187일의 휴가를 찾아먹었다.
이 수치는 내가 소속됐던 사단에서 두 번째로 많이 간 사병과 배 차이가 나는 수치였다.

신임 사단장이 우리 부대를 시찰 나온다는 통보가 있자 전 부대원이 식수차를 동원하여 500미터에 이르는 부대 진입로인 시멘트 포장도로는 물벼락을 맞았었다.
진입로를 물청소 할 정도면 나머지는 더 말해서 무엇하랴.
카바이트 찌꺼기를 걸러서 건물이라는 건물엔 다 칠했고, 전 부대원을 동시에 이발시키며 난리법석을 떨었으나 정작 사단장은 달포가 지나서야 방문을 했었다.
신임 사단장의 지시사항으로 사병들 사물함 명찰 옆에 '10년 후의 나의 모습'이란 제목으로 장래 희망을 적게 했다.
희망을 하나쯤 구체적으로 정해서 적어두고 쳐다보면 군복무 기간에 나름의 활력이 되지 않겠냐는 군바리적인 발상이었다.
그 때문에 사단장의 방문은 부대만 둘러보는 것이 아니라 사병들의 내무반을 직접 순찰한다 했다.
사단장이 방문하던 날, 초병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내무반에서 도열한 상태에서 대기를 했다.
어차피 한두 개의 내무반만 보고 말건데 제발 다른 내무반을 가시라며 낄낄거리고 있는데 우리 내무반으로 들이닥쳤다.
사단장 한 사람이 아니라 인사, 작전참모 뿐 아니라 부관과 연대장 등 수행원 숫자가 장난이 아니었다.
평소 외야 부대서 제왕으로 군림했던 대대장은 주인 뒤꽁무니 따르는 강아지처럼 보잘것없이 왜소해 보였다.
지나치던 사단장이 내 사물함 앞에서 시선을 멈추더니 한참을 쳐다보다가 지휘봉으로 내 배를 쿡 찔렀다.
"옛썰, 일병, 허허~!!"
"임마야~ 퍼렇게 젊은 넘이 장래희망이 구멍가게 주인이 뭐냐, 젊은 넘 꿈이 그래갖고 되겠어?"
즉각 대답했다.
"그 구멍 말고 말입니다"
순간, 대대장 얼굴은 똥색이 되었고 주임상사는 입모양만으로 '넌 오늘 죽을 줄 알라’했다.
나는 속으로 ‘좇됐다’를 연발하고 있는데 갑자기 사단장이 허리를 뒤로 꺾으며 웃었다.
"어이~ 대대장."
" 넵, 중령, 김충웅!!"
"이 넘 내가 이 부대를 떠나기 전에 휴가 보내라."
"네?..."
"사단장을 웃게 만든 넘인데, 그만한 포상도 안해서야 되겠나?"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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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 이야기 8

군대 이야기 8
글쓴이:허허




'85년 12월 31일,
인천 부평동에 소재했던 우리 부대는 국방부차원의 결정으로 민간에게 아파트 부지로 매각되었고, 부대는 사령부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외곽에서 사령부로 들어가는 상황에 대해서 대체로 좋아하는 분위기였으나 대대장과 나만 똥색이 되었었다.
독립부대에서 제왕적 권한을 행사하던 부대장은 사령부로 들어감과 동시에 일개 중령으로서 그 위상이 형편없이 추락하였고, 나는 그야말로 좇됐단 소리 밖에 안 나왔다.
사령부에는 간부 이발소가 이미 있었다.
장성과 영관을 위한 전용 이발소뿐만 아니라 위관 전용 이발소와 하사관 전용 이발소까지 있었으니 당시 내 심정은 패닉상태였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했던가.
외야부대에서는 난방시설이 3구 3탄짜리 연탄 난로였으나 사령부에 있는 막사는 빼치카 난방이었는데, 빼치카 당번병을 맡으라고 했다.
빼치카는 3입방미터 크기의 숯가마처럼 생긴 화로다.
발열판은 내무반 안에 있으나 불을 때는 화구는 실외에 있다.
밖에서 불을 때는 역할이었다.
연료는 석탄 가루와 황토를 섞어서 반죽하여 사용했다.
상식적으로 죽처럼 반죽한 젖은 석탄이 탈 수 있을까 싶지만 밑불의 화력에 의해서 마르면서 불덩이가 되는 시스템이었다.
하지만 이 일은 경험에서 바탕한 노하우를 필요로 하다 보니 전담요원을 필요로 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던 나로서는 최선을 다해서 빼치카를 사랑했다.
진심은 어디서든 통하는 법, 얼마 지나지 않아 빼치카가 나에게 화답을 했다.
뿐만 아니다 자신의 온갖 성감대를 다 알려줬다.
빨리 달아오르게 하는 법도 익혔고 은근히 지속시키는 법도 알게 되었다.
빼치카엔 모두가 초보이다 보니 다른 내무반에서는 불을 꺼는 일이 잦았으나 내 빼치카는 항시 흥분 만땅으로 벌겋게 타오르고 있었다.
다른 내무반에서 당번병이 내게 연애 비법을 전수 받으러 올 정도였다.
빼치카 당번병은 그 업무의 특성상 모든 집합과 근무에서 열외였다.
심지어는 삼시 세 끼 밥조차 타주는 경우가 허다했다.
4~50분 간격으로 연료를 교체해야 하는데, 10분 정도 소요되며 탄재를 뒤집어 써야하다 보니 늘 숯검둥이었다.
내무반에는 항시 당번병이 누울 자리는 깔려있지만 한꺼번에 40분 이상은 잘 수가 없었다.
그런 이유로 다른 사람의 눈엔 빼치카 당번병은 항시 비몽사몽의 상태로 보였다.

그 시기에 육군에선 "예방헌병제도"가 시범적으로 운영되었다.
구타를 근절할 목적으로 1개 대대당 군경력 20개월 이내의 사병을 열 명씩 선발하여 소정의 교육을 시킨 후 다른 부대로 파견을 보내어서 구타행위를 감시하여 그 결과를 소속 부대장을 거치지 않고 헌병대장에게 바로 보고하는 시스템이었다.
졸병들로선 환영할 일이지만 고참들 눈에는 자신들의 감시자라는 인식 탓에 싫어했다.
우리 부대에서도 열 명이 선발되어 다른 부대로 파견 나갔고 우리 부대에 온 예방헌병은 다른 부대 출신이었다.
이들을 한꺼번에 수용할 막사가 없는 관계로 각 내무반에 분산 수용하였다.
사병들 사회에서 군 생활 20개월 경력이면 위로는 모셔야 하면서도 아래로는 군림하는 중간적 위치였다.
예방헌병 입장서 보면 상전이 없다는 점과 감시자로서의 특권을 맘껏 누리는 반면에 다른 부대에서 얹혀 지내는 처지다 보니 군림할 수 없다는 단점도 있다.
기존 부대의 고참들은 암암리에 졸병들에게 협박했다.
"내 밑으로 한 넘이라도 예방헌병에게 친절을 베풀거나 편리를 도모하면 지기삘기다."
그네들은 맘 붙이고 있을 곳이 없다 보니 낮으론 삼삼오오 모여서 양지쪽을 찾아 웅크리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뿐만 아니라 2주일에 한 번 정도는 이발을 해야 하는데, 아무도 깎아주질 않는 게 여간 고충이 아니었다.
우연한 기회에 한 예방헌병에게 머리를 깎아줬다.
여태 군에서 깎은 머리 중에서 제일 마음에 든다면서 아주 고마워하길래 언제라도 오면 깎아주겠다고 했더니 한두 명씩 찾아오더니 며칠 지나지 않아서 내 빼치카 움막은 그들의 아지트가 되어 버렸다.
예방헌병에게 편리를 제공하면 지기삐겠다고 공언했던 고참들도 열 명 모두가 내 빼치카 움막에서 죽쳤으나 정작 내게는 어떤 제재도 가하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나는 적이 없는 편이기도 했다.
그러길 삼 주 가량 지났을 무렵이었다.
허허는 만사 제쳐두고 대대장께 신고 준비를 하라고 연락이 왔다.
육군참모총장 전화 통지문으로 나를 용산역 옆에 있는 용사의 집으로 보내라는 지시가 내려왔다고 했다.
이유인 즉 시범운영중인 예방헌병제도 중에서 예방헌병이 추천하는 모범용사로 내가 선출되었다고 했다.
오갈 데 없던 예방헌병들에게 이발해주고 틈틈이 빼치카에서 라면 끓여준 게 그들로서는 고마웠던지 나를 우리부대를 대표하는 모범용사로 추천해 주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빼치카 당번병은 겨울이 끝나기 전에는 빠질 수 없다는 전통은 육참총장의 명령(?)으로 무너졌다.
빼치카 당번병 자리는 평소 내 밥을 자주 타줬던 박칠주를 추천하여 넘겨줬다.
(빼치카 당번병은 끝나면 일주일의 위로 휴가가 있었다)
용산에 있는 용사의 집을 숙소로 하여 일주일간 산업시찰과 유적지 관광을 시켜주더니, 마지막 날에는 육군참모총장 직인이 찍힌 상장과(부상은 없었지만 그 자리서 일계급 특진했다) 보름짜리 휴가증을 받았다.

휴가 마지막 날,
복귀를 위해서 마산서 고속버스에 올랐으나 복귀하기 싫다는 갈등이 생겼다.
차는 출발하여 동마산 인터체인지로 접어들 무렵 차를 세워라고 고함을 질렀다.
고속버스는 중간에 정차 할 수 없다는 차장과 기사를 협박하여 내렸다.
막상 미복귀를 실행하면서도 분명히 잡혀 들어갈 거라는 예감에 두려웠으나 애써 무시했다.
13일 후, 진영 장날이었다. 우시장을 배회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는 순간 옆구리를 채여서 엎어졌다.
DP조(탈영병 체포조)에 의해서 사단 헌병대에 도착하니 밤 11시가 넘었다.
유치장 출입문을 들어서니 간수병이 기존 수감자들에게 고함을 지른다.
"어이~ 예방 헌병들, 허허가 잡혀 들어왔다, 야식 먹어야쥐~" 순식간에 아수라장이었다.
통상 유치장은 군기가 세어서 수감자는 소리를 낼 수 없지만 그날은 예외였다.
사방에서 욕설이 들린다.
"으아악~!! 저 씹새끼 드뎌 들어왔네.
우리 나가기 전에 안 잡히면 분해서 죽을려 했는데, 근무자님,(헌병을 지칭) 저 새끼 제발 우리 방으로 넣어주십시오. 죽여 버리게"
헌병 넘들은 피의자 인권보호에 너무 무지했다.
그냥 집어 넣어줬다.
사방팔방에서 주먹과 발길질이 날라 온다.
2~3분 만에 떡 되어 버렸다.
뻗어있는 내게 온갖 욕설에서부터 저주로 이어지더니 나중에는 하소연으로 바뀌었다.
"씨팔넘아, 뭐라고 말 좀 해 봐라.
우리 호의를 이런 식으로 갚았으면 뭐라고 말을 해야 할 거 아냐~!"
억시기 할 말이 없는데 자꾸 뭔 소리라도 말을 해보란다.
뒷머리를 긁적이며 한소리 했다.

"머리들 많이 길었네예, 깎을 때가 지났네예...."
(END)

written by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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