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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과학과 상식의 오류..


제목 : [펌] 비과학과 상식의 오류 -by cona
글쓴이 : 자유인
날짜 : 07-01-14 06:46
조회 : 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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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과학과 상식의 오류 상식(常識)이란, 누구나 흔히 알고 있는 지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해는 동쪽에서 뜬다.」, 「개미는 곤충이다.」(거미는 곤충이 아니다.), 「인간은 공기와 물이 있어야 살 수 있다」...와 같은 것들이 이른바 상식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은 그 상식이라는 것이 진리(眞理)라고 생각함으로서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이를테면, 오랜 옛날 사람들은 「무거운 물체가 빨리 떨어진다」거나, 「태양은 지구를 돌고 있다」와 같은 것을 상식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거의 모든 분들이 알고 계시듯이 그것이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지요. 그리하여 「물체는 무게에 관계없이 똑같은 속도로 떨어진다」거나, 「지구는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다」는 등의 상식이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상식이라는 것은 진리가 아니기 때문에, 언젠가는 오류가 밝혀지고 새로운 상식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상식들도 언젠가는 오류가 밝혀질 수 있으며, 새로운 상식으로 대체될 수 있겠지요.

하지만, 미래의 일이 아니라 해도 현재의 상식이 진리가 아닌 것은 얼마든지 많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그건 상식이지’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사실은 잘못되었고, 진리는 따로 있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실례로 우리는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다」는 상식을 갖고 있지만, 분명히 말하건데 이건 진리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류는 「지구와 태양은 서로의 중력 중심을 기준으로 돌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식의 오류는 흔히 무지에서 발생하기 쉽습니다. 무지라는 것은 두가지 형태가 있는데, 하나는 모르는 것이고, 또 하나는 잘못 알고 있는 것이지요.

우리들이 흔히 상식의 오류를 일으키는 것은 후자의 잘못 알고 있는 것에 해당하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은 그 잘못 알고 있는 것 역시 모르는 것이나 다를바가 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지식을 쌓아놓았다고 해도, 그것이 모두 잘못되었다면 진리를 모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러한 상식의 오류는, 의도적/혹은 비의도적으로 조장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종교에 의한 과학 탄압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갈릴레오의 종교 재판」을 의도적으로 부풀리는 사례(갈릴레이가 종교 재판을 받은 원인도, 그리고 과정이나 결과도 전혀 다르게 각색되었습니다.)이며, 「자유의 여신상이 뉴욕의 상징이라고 하는 것」(자유의 여신상은 뉴욕이 아니라 뉴저지주에 있습니다.) 등. 다채로운 각색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어찌되었든, 상식의 오류라는 것은 바로 무지(無智)에서 나옵니다. 바로 진리, 즉 올바른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점에서 나오는 것이지요. 이러한 상식의 오류는 흔한 사례이지만, 그 중에서도 문제가 되는 것은 역시 비과학(혹은 반과학)이라고 불리는 것을 추종하는 경우가 아닐까 합니다.

대개는 그 진영에 의해서 「의도적으로 조장된 상식(대표적으로 종교를 들수 있습니다)」을 따르는 이 비과학은, 비교적 진리에 가깝고 항상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서 스스로에 대한 비판을 마지 않는 과학에 대한 무지로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크게는 외계인의 UFO 방문(이 말엔 오류가 있습니다, UFO는 그 정체가 뭔지 모르는 비행물체인데, 외계인의 우주선이라면 UFO라고 부를 수 없겠지요.)이나 MIB(맨 인 블랙), 혹은 초차원의 여행자나 세기의 예언에서부터, 작게는 점성술이나 강령술, 혹은 염력에 이르기까지... 우리 주변에는 수많은 비과학이 존재하고 있으며 많은 이들이 이를 따르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물론 비과학의 사례 중에는 「감정을 가진 식물」이나, 「훈련받은 동료를 먹은 플라나리아가 똑똑해진다」는 등의 소문에 의해 만들어진 -그리고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상태에서 정설처럼 알려진- 사례도 있습니다만, 그 중 대부분은 어떤 이들에 의해서 의도적으로 조장되고 꾸며진 상식에 의해서 진리처럼 믿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이렇게 상식의 오류에서 생겨난 비과학입니다만, 그들은 상식의 오류를 인정하지 않는 것을 특징으로 많은 이들을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유령이나 초능력, 혹은 예언이나 외계인들을 믿고 있으며, 그것을 상식이라고 생각하고 의심하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비과학에 빠져들곤 합니다.

비과학에서는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이 갖고 있는 모든 상식을 버려라.」 라고... 하지만, 그들의 주장을 다시 들어보면 「여러분이 갖고 있는 상식을 잘못되었고,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은 진리이므로 이것은 의심하지 말고 받아들여야 한다」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상식을 의심하지 않는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들이 주장하는 상식을 의심하지 않는다」 이것이야 말로 비과학의 특징입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과학의 특징은 「모든 상식을 의심하고 재검증해 보라」는 것이기도 합니다.

오래전부터 많은 과학자들은 -그것이 어떤 위대한 학자에 의해 주장되었다고 해도- 이른바 상식이라고 불리는 것들을 의심하고 거기에 매달려서 재검증하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어느 조직에서나 마찬가지로 과학계에서도 권위는 존재하고 있지만, 그 어떤 권위조차도 의심의 눈길을 피할 수 없으며, 어떤 점에서 볼 때, 그 권위야 말로 재검증의 손길을 피할 수 없는 대상이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위대한 과학자로 알려진 거의 모든 이들은 말년에 이르러 불만을 호소하곤 합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되먹지 않았어. 매일 같이 내 잘못만 캐려고 애쓰니 말이야」라고... 하지만, 그들 역시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과학의 특징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자신이 명성을 얻게 된 것이 바로 그 ‘잘못을 캐려는 의심증’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을...

갈릴레오는 「무거운 것이 더 빨리 떨어진다」는 상식에 의문을 갖고 실험을 실시했습니다. 우리들이 상식으로 알고 있는 피사의 사탑 실험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일단 무시하고, 그는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 상식을 재검증하였으며, 결과적으로 그 상식이 틀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에게 있어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대학자의 권위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깃털과 쇠공을 떨어뜨려 「무거운 것이 빨리 떨어진다」고 생각했던 과거의 사람들과는 달리, 그는 무게 외에 요소들을 제외하고 실험을 실시함으로서 무게에 대한한 과거의 상식이 틀렸다는 것을 밝혀낸 것입니다.

과학사의 이야기들은 모두 이런 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케플러가, 뉴튼이, 아인슈타인이, 그리고 그 밖의 수많은 학자들이 과거의 상식을 의심하였고, 문제 요소를 배제하고 재검증함으로서 각각 과학사에 그 이름을 남기게 되었습니다.(그리도 지금도 세계 각지에서는 수많은 과학자들이 기존의 상식에 도전함으로서 인생을 보내고 있습니다.)

과학의 특징이 바로 이러하기에, 다시 말해 모든 조건, 모든 상황, 그리고 모든 시점에 있어 진리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어떤 점에서 「기존의 과학은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는 비과학은 많은 이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그들은 기존의 상식에 도전하라고 하고, 또한 기존의 지식을 의심하라고 하며, 기존의 권위를 무시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 자신의 무언가를 주장하며 이야기를 펼쳐나갑니다.(그리하여 뉴 에이지(신 세대)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기도 합니다.) 이 점에 있어 비과학과 과학은 일맥 상통하는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두가지에는 매우 심각한 차이점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비과학에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심」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외계인 신봉자들은 이야기합니다.

「외계인은 존재한다. 그들은 바로 우리 곁에 있으며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쳐 주려고 한다. 전세계의 수많은 이들이 외계인에게 납치되었고, 전세계의 수많은 이들이 외계인을 만났으며, 수많은 UFO 사진이 이를 입증한다.」 강령술사들은 이야기합니다.

「영혼은 유령으로서 존재한다. 그들은 우리의 몸을 빌려서 너희들에게 고대의 진실과 지식을 가르쳐 준다. 실제로 그렇지 않은가...」 점성술사들은 이야기합니다. 「별은 우리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 따라서 우리들의 운명은 별을 통해서 예측할 수 있고, 별의 변화에 따라서 세상의 흐름은 정해진다.」

초능력자들은 이야기합니다. 「초능력은 존재한다. 바로 이런 이런 일들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이 진리인지 아닌지를 입증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오직 「믿으라!」고 할 뿐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성격을 가진 다른 무언가를 알고 있습니다. 바로 종교라는 시스템을 말입니다.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는 글귀는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는 이들은 흔히 보는 말이기도 하지만, 카톨릭이건, 프로테스탄트건, 불교건, 이슬람교건, 힌두교건, 아니면 여기저기 널려있는 크고 작은 다른 종교들이건, 그들은 「진리의 증명」이라는 시스템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라는 이야기가 진실인지 아닌지 그것을 입증하는 것은 용인되지 않으며, 「부처님이 마귀와 대항하여 깨달음을 얻으셨다」는 얘기가 대체 진짜인지 그리고 언제 어디에서 그 사건이 있었는지 등을 밝힐 필요는 없습니다,

힌두교의 수드라는 원래부터 천한 존재이기 때문에 천한 것이고, 그들이 어떠한 이유에서 정말 천한지를 증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의심하지 말고 믿으라.」 또 한편으로는 「다른 종교는 무시하고 오직 우리만을 믿으라」는 것이 종교의 특징이기 때문입니다.(그리고 원리주의자를 비롯한 일부 광신도를 제외한 대다수 사람들은 그것이 종교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에야 어떻든 현재의 -대다수- 종교는 과학과 대립하려 하지 않는 반면, 이른바 신흥 종교라고 할 수 있는 비과학 진영은 종교라는 차원에서 벗어나 과학에 대해 도전을 하고 있습니다.

과학의 특성상 그러한 도전은 큰 문제가 없는 일이겠지만(과학은 매일같이 자기 자신의 도전을 받고 있으므로...) 비과학은 과학에서의 도전과는 달리, 종교와 마찬가지로 실증되지 않는 사실을 계속 주장하고 「무조건 믿고 의심하지 말라」고 주장하는데서 문제를 일으킵니다.

그들은 기존의 종교들이 했던 구습과 마찬가지로, 「진리를 탐구하는 과학」을 무시하고 이들의 주장을 모두 거짓이라고 일출합니다. 비과학주의자들에 있어서 「과학적인 검증 과정」은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렇게 「믿고 있는 상식」이 더욱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여타 종교와 마찬가지로 그들 자신이 그렇게 믿고 있는 것으로 그친다면 큰 상관은 없을지도 모릅니다.(세상에는 언제나 바보가 존재하는 법이니까요.)

하지만, 그들은 단순히 자신이 믿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이비 종교처럼 그 자신들이 주장하는 ‘상식’으로 다른 많은 이들에게 폐를 끼치고 있는 것입니다.

강령술사들은 이야기합니다. 「당신의 죽은 친지를 만나게 해주겠소. 그러니 내게 돈을 바치시오.」 초능력자들은 이야기합니다. 「지금까지 전혀 느끼지 못했던 체험을 하게 해 주겠소. 그러니 내게 돈을 바치시오.」 외계인 신봉자들은 이야기합니다. 「외계인의 능력과 지식으로 영적인 체험을 하게 해 주겠소. 그러니 내게 돈을 바치시오.」 점쟁이, 점성술사, 그리고 예언가들은 이야기합니다. 「당신의 미래를 알려주겠소. 그러니 내게 돈을 바치시오.」 각종신문 (주로 스포츠신문)이나 정화운세상담등,오늘의 운세를 점처준다는 사람 오늘의 운세를 알려주겠소. 그러니 내게 돈을 바치시오. 사이비 물리학자들은 이야기합니다. 「영구 동력 엔진을 만들어 주겠소. 그러니 내게 돈을 바치시오.」

..... 그들의 주장은 여러 가지가 있고, 또한 그것은 다채로운 분류로 나뉘어지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의 주장은 「무언가를 해 주겠소. 그러니 돈을 바치시오.」로 분류됩니다.

많은 비과학 신봉자들이 우러러 보는 조지 아담스키나 유리겔라, 혹은 에드가 케이시 등은 이제까지 수많은 주장을 해 왔고, 수많은 일을 해 왔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이 한 것은 돈을 버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각지를 돌아다니며 강연료를 벌고 책을 내어 인세를 받으며, 예언 등에 대해 보상을 받습니다. 그리고 어디서 났는지 모를 요상한 물체들을 「외계인의 선물」이나, 「초능력 도구」나, 「고대의 신비한 무언가」라고 말하면서 통신 판매를 하여 더욱 많은 돈을 벌어들입니다.

물론, 이러한 형태로 돈을 받는 것은 과학에서도 흔히 벌어지는 일이기도 합니다. 많은 과학자들은 세계를 돌아다니며 강연을 하고 있으며, 많은 이들은 기업의 후원으로 연구를 계속하고 있으며, 또 어떤 이들은 자신의 지식으로 상품을 만들어 판매하기도 합니다.

이점에서도 비과학과 과학이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게 사실이겠지만, 돈을 버는데 있어서의 비과학과는 달리 과학은 그 누구나 간단하게 「재연할 수 있고」, 또한 「효과를 볼 수 있는」 이점을 갖고 있습니다.

과학에서는 그것이 아스피린이건, 증기기관이건, 혹은 초전도체건, 실제로 우리들에게 결과를 제시할 수 있는 것으로 돈을 벌어들입니다. 독일의 모 학자가 만들어낸 아스피린은 -비록 부작용으로 많은 이의 목숨을 앗아가기도 하지만- 이제껏 전세계적으로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구했으며, 증기기관은 열차와 동력선의 개발을 낳고 그 후의 모든 동력 기관의 모체가 되었습니다. 초전도체는 그 어떤 것보다 빠른 슈퍼 컴퓨터를 원활하게 작동시키게 하고, 열차를 공중에 띄워 달리게 해 줍니다.

더욱이 과학의 산물을 사용하는데 있어 그것을 이해하거나, 혹은 믿을 필요는 없습니다. 아스피린을 먹는데 아스피린이 어떤 성분으로 되어서 어떻게 작용하는지 배울 필요도 없고 하물며 「이건 아스피린이므로 내 병을 낳게 해 줄거야」라고 믿을 필요는 없습니다. 물론 믿음을 가진다면 효과는 더 올라갈지도 모르지만(이건 인간의 몸이 마음의 영향을 받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아스피린이라고 믿고 먹은 사탕(즉, 위약)」과는 달리, 아스피린은 분명하게 우리 몸에 작용해서 아픔을 덜어주고 통증을 약화시켜 줄 것입니다.(마찬가지로 혼수 상태에 빠진 환자에게 약을 주사하면, 그것은 「그 환자가 알건 모르건」 반드시 환자를 회복시켜 줄 것입니다.) 그러한 것은 증기기관이나 초전도체, 혹은 컴퓨터나 TV, 자동차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은 그 원리를 모르면서 매일 같이 사용하고 있으며, 이를 사용하는데 별도의 믿음은 필요하지 않습니다.(흔히 비과학에선 물리학 중 가장 이해하기 어렵다는 양자 역할을 자주 들고 나오지만, 양자 역학은 설사 이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실제로 그걸 입증할 수 있으며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양자 역학이 과학인 이유입니다.)

그러나 비과학은 다릅니다. 마치 원수를 갚기위해서 무술을 배우러온 제자에게 「스스로 깨달음을 얻을때까지는 무술을 배울 수 없다」고 허드렛일만 시키는 스승처럼, 비과학은 전혀 뜬구름을 잡는 이야기를 떠들며 이해를 시키려고 하고, 그것에 대해 믿음을 갖고 이해하지 못하면 소용이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하여, 유리겔라의 초능력 도구는 우리들이 초능력을 쓸 수 있게 해 주지 못하고, 에드거 케이시의 예언은 이제껏 맞은 일이 거의 없으며, 조지 아담스키가 말한 금성인은 우리를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감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은 그나마 가능성이 제로는 아니지만, 이들의 상식에 돈을 뿌리는 것은 그야말로 사기에 속은 바보 이상의 어느 것도 아닌 것. 바로 이것이 비과학의 특징인 것입니다. 아니, 그들은 어떤 점에서 살인자와 동격이기도 합니다.

언젠가 보았던 동남아의 사기 전기 치료사의 일을 생각해 봅시다. 별 것도 아닌 전기 슬리퍼를 이용한 사기로 의료 행위를 하고 돈을 버는 그 자... 그리고 그 밖에서 치료를 기다리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 그들은 먼 곳에서 어렵게 와서 시간과 돈을 버려가며 가능성 없는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물론, 종교를 통해서 병을 치료하듯이 기적을 바랄 가능성은 있습니다.(암조차도 수만명 중의 한 명 정도는 자연 치유가 된다고 하니 말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보다 제대로 된 치료를 받는데 사용할 수 있을 시간과 돈을 허비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결과 환자가 죽는다면 결국 살인자 이상의 어떤 것이 되겠습니까?(재미있는 점은 비과학론자들은 영역을 가리지 않습니다. 유리겔라나 에드거 케이시도, 심지어 조지 아담스키까지 심령 치료를 하기도 했으니까요. 실제로 수많은 비과학론자들이 심령 치료를 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서 수많은 이들을 「죽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상식은 진정한 진리에 접근하는 것을 가로막기도 합니다.

많은 이들은 이야기합니다. 「과학적으로 증명될 수 없는 일도 있지 않은가?」라고... 왜냐하면 「과학은 반드시 진리라곤 할 수 없다」라는 것 역시 상식이기 때문입니다. 과학은 어떤 사실도 진리라고 확정하지 않습니다. 상황이나 조건에 따라서는 바뀔 수 있는 「법칙」이라고 말하지요.

뉴튼의 물리학 법칙은 분명 '상식’의 하나이지만, 아인슈타인이 제시한 특정 상황 속에서 제대로 적용되지 않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분명히 ‘상식’이지만, 역시 양자 역학의 세계에 적용할 수 있는 법칙은 아니지요.

또한, 사람들은 이야기합니다. 「모든 것을 조사한 것도 아닌 이상 그게 사실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라고... 확실히 통계 조사를 비롯한 어떤 과학적 조사 방법으로도 모든 상황, 모든 조건에서 모든 경우를 시험한 사례는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생각한다면, 어쩌면 어딘가에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으로 증명되지 않는 신비한 현상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수 있지요.(사실, 이 점에서는 심각한 오류가 있지만 이는 일단 무시합시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이들은 한가지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무엇인가 하면, 「거짓이라고 증명할 수 없다고 그것이 진실은 아니다」라는 것을 잊고 있는 것이지요. 과학 진영의 비판에 대해서 비과학론자들이 흔히 하는 말은, 「그렇다면 과학적으로 거짓임을 입증해 보여라」입니다.

그러나, 이는 과학적인 방법과는 전혀 다른 태도를 갖고 있습니다. 「나는 우리나라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이 「나는 우리나라를 증오한다」는 말은 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그것이 거짓이라는 걸 밝힐 수 없다.」가 「그것이 진리다」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지요.

비과학이 기존의 과학이나 지식, 혹은 상식에 대해 도전하고자 한다면, 그들의 주장이 타당하다는 것을, 다시 말해서 그것이 「진리」라는 것을 밝혀야 합니다. 그들 자신이 그렇게 해야 할 입장이지 과학이 「비과학은 거짓이다」라고 밝혀야 할 입장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과학은 현 시점에서 진리 혹은 상식으로 「입증」된 반면, 비과학은 그렇게 입증된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그러나, 많은 이들이 이 간단한 사실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과학에서는 무리하게 나서서 비과학의 모든 분야에 대해서 거짓임을 입증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기가 존재한다」라고 말하고자 한다면, 「기가 없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으므로 기는 존재한다」라고 하지 말고, 「기는 이러이러해서 존재를 입증할 수 있다」라고 주장해야 합니다.(단순히 기가 있어서 이런 현상이 나온다고 하는 것은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모든 내용이 기라는 존재를 제외하고도 설명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유령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려면 「유령은 이러이러해서 존재한다」라고 주장해야 합니다.(과학적으로 밝혀지지 않은, 영혼의 무게 따위는 얘기하지 맙시다. 인간이 죽을때 무게가 줄어든다는 것은 그 어떤 과학적 실험에서도 밝혀진 바가 없습니다.) 더욱이 그러한 것은 「그것을 믿고 있는 사람들」 앞에서만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의심하는 사람들 앞에서도 행해져야 합니다. 내 친구가 「우리집에 금송아지가 있다」라고 백날을 떠들어 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바로 그 금송아지를 가져다 그 사람에게 보여주면 되니까요. 바로 「증거」를 제시하면 되는 것입니다. 또한 그 증거라는 것은 그것을 의심하는 사람도 인정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금송아지는 높이가 1m 쯤 되고 소와 똑같은 모양을 하고 있으며 두 눈에는 다이아몬드가 박혀서 형용하게 빛을 낸다」라고 설명해 주는 것은 농담에 지나지 않으며, 자기가 찍어온 금송아지의 사진 따위 진짜인지 가짜인지 누구도 입증할 수 없는 단지 장난 사진에 불과할 뿐입니다.

「의심하는 사람 앞에서는 제대로 안 된다」는 초능력은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습니다. 그것은 「벌거벗은 임금님」이나 다를 바가 없으니까요. 초능력이 안 되면 「의심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면 끝... 부적 태운 물을 병자에게 먹여서 낳으면 부적 덕분이고, 죽으면 믿음이 부족한 탓이라고 하는 고대의 사이비 종교들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비과학을 추종하는 이들 중에는 또 다른 착각을 하고 있는 사례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런 얘기가 많으므로 진실이다」라고 믿는 것이지요.

UFO의 사진이 수없이 많은데 그 중 99.99999%가 가짜라도, 그 정도로 많으면 진짜도 하나쯤은 있지 않겠냐고 얘기합니다. 물론, UFO의 사진은 진짜일 수도 있습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UFO란 그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비행물체의 총칭이니까요. 그것이 평범한 과학 기구 건, 패러글라이딩을 하는 사람이건, 혹은 극비리에 추진 중이라는 오로라기를 찍은 것이건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에게 있어서 그것은 UFO의 사진입니다.

하지만, 그 어떤 사진이나 영상도 그것이 UFO가 외계인의 우주선이라고 입증해 준 바는 없습니다. 외계인을 만났다는 사람이 그린 그림이나, 그들이 가져온 뭔지 모를 물건(대개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물건이지만), 그들의 몸에 생긴 흉터 같은 건 당연히 증거가 되지 않습니다.

어떤 통계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 10명 중 1명은 외계인에게 납치되었다고 하는데(그야 그런 결과가 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그들이 통계 조사를 실시한 것은 바로 그런 집단을 대상으로 한 것이니까요.), 이정도로 많은 사람이 납치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 진실이기 때문이 아니겠냐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우리 인간이 지극히 속기 쉬운 존재라는 것을 잊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상식의 오류가 바로 그런 식으로 나오기 때문입니다.) 여러 가지 장난 도형에서, 우리는 우리들의 시각이 얼마나 쉽게 속아넘어갈 수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조용하고 어두운 곳에 가만히 있으면 환청이나 환각을 보지 않는 이들이 없다고 할 정도로, 인간은 감각에 굶주려 있으며, 가위 눌림 현상을 통해 귀신이나 유령, 혹은 외계인이 나타났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별로 없습니다.(설사 그 시간에 바로 옆에서 파티를 열고 있었다고 해도 말입니다.) 게다가 사람의 기억은 언제나 바뀔 수 있습니다.

외계인에 대해서 골똘히 생각하면 꿈에서 외계인을 보는 것은 당연하고, 다른 사람들이 「너는 외계인을 보았어」라고 계속 얘기하면 「어? 정말 보았나?」라고 생각하는게 인간이지요. 이렇게 속기 쉬운 인간들의 주장을 과학적으로 진실로 받아들일수는 없습니다.

그들의 말이 아무리 사실적이라고 해도 그것은 소설이나 영화 이상의 가능성을 갖지 않습니다. 더욱이 그들이 주장하는 흔적(상처 등)이나 물증이라는 것이, 황금 송아지의 사진보다도 가치가 없는 상황에서는 말입니다. 과거라면 모르겠지만, 언론이 발달하고 많은 이들이 생각을 공유하게 된 지금, UFO나 외계인의 가짜 증거들, 혹은 심령 사진이나 초능력의 이야기가 퍼지지 않는 것은 도리어 이상한 일입니다.

그들 중 전부가 가짜가 아니라는 법도 없습니다.(일단 지금까지는 과학적 견지에서 진짜라고 증명된 바는 없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건수가 많기 때문에」 그 중에 진짜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리한 발상이라고 밖에는 할 수 없겠지요.

심지어 「가짜가 있다는 건 진짜가 있다는 증거」라고 하지만, 그 역시 지나친 생각의 비약에 지나지 않습니다.(판타지 작품이 있다고 해서, 그 안의 요정이나 용들이 실존하는 것도 아니니까요.) 모든 것이 인간의 상상 속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므로, 아예 없는 것에서 가짜가 나오는 것도 당연히 가능합니다. 이렇게 다양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사실 비과학론에 빠져 있는 이들에게는 이 역시 마이동풍이요, 우이독경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비과학론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또 한가지 오류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비과학에 대해서 비판을 하는 것은 모두 조작이다.」 혹은, 「우리는 정부(혹은 조직)에 의해서 속고 있다.」는 생각의 오류입니다. CIA나 FBI 같은 정부 조직의 힘을 과대평가하는 것이나, 프리메이슨같은 구시대의 친목 조직을 신성시하는 것은 일단 제쳐두고, 「비과학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는 이들이, 어째서 「비과학 자체에 대한 의문」을 갖지 않는지 그것을 일단 지적하고 싶습니다.

과학 진영이 비과학에 대해서 비판을 가하는 이유는 상당히 다양하지만(그 중에는 질투라는 이유를 드는 이들도 있지만, 저는 그보다는 분노라고 생각합니다.) 그 중 공통된 이유는, 그것이 과학의 특성이기 때문입니다. 과학은 여러 가지 상식에 대한 의심을 갖고 그것을 검증하려는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 검증되지 않은 비과학에 대해서 의심을 갖고 그것을 검증하려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비과학은 그 자신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말라」고 하면서, 비과학에 대한 과학 진영의 비판은 「의심하라」고 합니다.

확실히 말해서 모순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믿지 못할 것을 믿어라」고 하는 이들이, 「자신에 대해 비판을 가하는 이들은 모두 의심해라」라니... 과거 이단 논리로 수많은 참상을 일으켰던 광신도를 연상케 하는 대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이나 각종 신화에 의문을 갖고 이 사실을 제기했던 이들을, 수많은 종교에서는 이단이나 악마의 수족이라는 식으로 밀어붙이곤 했습니다. 보다 ‘민주화’된 지금의 대형 종교들에선 그런 일이 거의 없지만, 이제는 새로운 종교, -자칭 뉴에이지라고 하는- 비과학 진영이 중세시대 종교 진영에서 하던 짓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그에 넘어가고 있습니다. 그 자신이 갖고 있던 각종 상식들을 버리고 새로운 상식을 받아들여서, 그리고 그 상식의 오류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의심조차 하지 못하면서 말입니다.(「믿어라」와 「의심하라」는 반대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 정도 ‘상식’은 이해하고 있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더욱이, 비과학은 과거의 3류 언론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터넷이라는 「다량의 쓰레기가 혼재되어 있는 정보의 바다」에서 더욱 더 증식되고 있습니다.

「오직 믿고 싶은 것만 보는 많은 이들」은 인터넷에서 그런 정보를 뒤져서 다른 이들에게 알립니다. 그것이 이미 가짜라고 증명되었다는 것도 모르면서 말이지요.

심지어 불과 며칠 전에도 팔로마산 천문대 근처의 식당 종업원이었던 조지 아담스키를 「위대한 천문학자이자 UFO 학자」라고 실어둔 홈페이지를 보았을 정도입니다.(이 사실은 UFO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이미 잘 알려진 일로서, 상당 수의 UFO 전문가들은 그를 무시하고 있습니다.) 금성의 표면 온도가 400도에 달하고, 수백 기압에 이르는 환경이라는 것이 알려져 있음에도, 아직도 금성인이 존재한다는 그의 주장을 진실이라고 믿고, 이를 인터넷에 올리는 이들이 있습니다.(그 인터넷의 내용을 보고 그것이 진실이라고 믿는 이들 역시 증식되어 갑니다.)

과학 진영의 글들은 대개 무시되곤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이 바라는 것」이 아니며, 그런 모든 것이 정부와 과학자들의 음모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저 같은 사람은 새끼 음모론자라고 불리겠지요.^^) 그럼에도 과학 진영으로서는 비과학의 글을 보고 일일이 비판을 가합니다.

하지만, 비과학 진영은 「정부의 음모」니, 「과학자들의 속임수」 같은 식으로 치부할 따름입니다.(그 다음은 위에서 제시한 여러 가지 주장들이 이어지지요. 「거짓이라고 증명되지 않은 이상 참이라고 할 수 있다」던가... 「이렇게 많은 주장들은 그것이 진실이라는 걸 입증한다」거나...) 물론 과학 진영의 승리는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 세계의 모든 문명은 과학에 의해서 만들어져 있으며, 과학에 의해서 발전되며 과학에 의해서 향유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비과학(반과학)이 존재하고 많은 이들이 따른다는 사실 만으로도 과학 진영은 패배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세계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비과학 진영은 우리 인류의 한정된 재원과 자원과 노력과 에너지를 낭비하는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경찰이나 정보 기관에서 사이코메틀러(물체의 과거를 읽는 능력자)나 텔레파시스트(먼 곳의 사람에게 생각을 전달하거나 마음을 읽는 능력자)들에게 투자할 돈이면, 과학 수사대를 창설하고 여기에 충분한 시설을 준비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다우징(금속 막대로 물이나 자원을 찾는 일) 전문가나 풍수학자들에게 줄 돈이라면 더 좋은 장비로 더 많은 지역을 조사할 수 있겠지요. 점장이나 예언가에게 줄 돈이면, 보다 많은 자료를 준비하고 보다 많은 분석가들을 고용해서 예측의 정확도를 높일 수 있을 것입니다. 영구 동력 연구가나 상온 핵융합 연구자들에게 줄 돈이라면, 보다 효율적인 동력과 보다 우수한 원자력 발전 시스템에 투자할 수 있겠지요.

이러한 비과학들이 사기를 통해서(그나마 사기라고 비난받지도 않으면서) 돈을 벌고 있는 사이, 과학 진영을 위해서, 그리고 현실을 위해서 투자되어야 할 인류의 자산은 낭비되고 있습니다.

비과학 진영의 세력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과학의 발전은 늦어지고 경제는 나빠지고 인류는 손실을 보게 되겠지요. 과학 진영은 1에서 10을 낳기 위해 노력하지만, 비과학 진영은 0에서 100만을 낳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그것은 아무런 효과를 보이지 않기 때문에 결국 낭비 이상의 어느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나마 아무 것도 갖지 않고 뭘 한다면 모르겠지만, 유리겔러만 해도 사이버 쇼핑몰을 운영하면서 어디서 나왔는지 알 수도 없는 싸구려 펜던트나 뭔지 모를 부적, 그리고 -마술사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스푼 벤딩(스푼 구부리기 등의 기술)의 비밀(?)을 담은 책을 판매하고 있습니다. 그나마 그가 사기꾼이라는 사실이 전세계에 폭로된 지금에도 말입니다.(아쉽게도 초능력이나 심령수술 같은 비 과학을 이용해서 돈을 버는 것을 사기꾼으로 처벌할 수 있는 법률은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습니다. 어쩌면 골프치느라 바쁜 의원들이 그들의 저주를 걱정하거나, 혹은 그들의 예언을 진실로 믿고 있는지도 모르지요.)

이러한 현실은 바로 인류에 대한 엄청난 죄악에 다름없습니다.(과학 진영이 비과학에 대해 비판을 가하는 것 역시 과학 진영에 있어 큰 손실일 수 있습니다. 칼 세이건 같은 석학이 비과학에 대해 비판을 가할 필요가 없었다면 그 시간에 다른 연구에 몰두할 수 있었겠지요.) 단순히 ‘상식의 오류’라고 쉽게 생각해 버릴만한 문제는 아닌 것이지요.

자, 여기서 여기까지의 모든 말을 잊어버리고 한번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 앞에 두 사람의 장사꾼이 있습니다.(여러분은 물 장수라고 해 봅시다.) 한 사람은 「이 단지는 엄청난 힘을 보유하고 있다. 이 단지의 힘은 너무도 강력해서, 당신이 진정한 믿음을 갖고 있다면 이 엄청난 힘을 느끼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이 단지를 집에 모셔두고 매일 같이 신념을 다해 기도를 올리면 반드시 상상도 못할 이익을 보게 된다. 게다가 이 단지는 고작 1000원 밖에 하지 않는다.」라고 말합니다.

한 사람은 「이 단지는 예전의 단지에 비해서 훨씬 튼튼하고 가벼운 재질로 만들어졌다. 자, 이 단지를 들어 보라. 게다가 이렇게 (실연해 보인다) 높이 들었다 떨어뜨려도 깨지지 않는다. 이 단지의 가격은 1000원이지만 그만한 가치는 할 것이다.」 자, 여러분은 어떤 단지를 구입하시겠습니까? 솔직히, 이 글을 보고 「믿으라」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인터넷이건 어디건 비과학을 접하는 일이 생긴다면, 한번쯤 「상식에는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자신의 시점에서 자신의 눈에서 보다 비판적으로 대상을 보고 판단해 보십시요. 그것이 바로 「과학적인 태도」이니까요.(만일, 지식이 부족하고 판단력이 떨어진다고 생각되면, 다른 비판적인 사람들의 말을 들어봐도 좋습니다.

그 사람이 과학 진영에 속한 사람이라면, 비과학 진영의 사람들과는 달리 여러분도 충분히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설명으로 「상식의 오류」를 지적해 줄 것입니다. 과학은 이해하지 어려운 학문일지는 모르지만, 그것을 누가 해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는 「상식」이기 때문입니다. (* 사실, 과학이 극도로 발달한 요즘 같은 시대에 비과학이 더욱 번성하는 것은, TV나 언론 등의 영향이 큽니다.

여기에 워낙 많은 작품들이 나옴으로서 아이디어 고갈 사태에 빠져버린 영화나 만화, 소설과 같은 작품의 문제들도 있지요.

식물이 감정을 갖고 있다거나, 훈련된 동료를 먹은 플라나리아의 이야기, 혹은 심장 이식에 의해서 기억이 전달되었다는 이야기 등은 모두 과학적으로 입증된 바가 없습니다만, 우리는 영화나 만화, 소설 등을 통해서 이것이 사실인 것처럼 훈련을 받고 있습니다.

기실 그 출처가 얘기 거리를 만들어내는 것으로 돈을 벌고 있는 3류 잡지라는 것은 모른 채 말입니다.) (* 고 칼 세이건 박사나 마술사 제임스 랜디씨처럼 비과학의 비판에 앞장서고 있는 이들 역시 이를 통해서 강연료나 수입을 얻고 있는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비과학 진영과 이들의 차이는 그들은 비과학을 비판하지 않고 자신의 일만 할 경우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니, 만일 그들이 비과학 분야에 뛰어들어 일을 한다면 그보다도 훨씬 많은 돈과 명성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칼 세이건 교수는 20세기 최고의 점성술사로 국가 수준의 예언으로 명성을 떨칠 것이며, 랜디씨는 유리겔라 같은 이는 차마 따라올 수 없는 최강의 초능력자로서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을 것입니다. UFO관련 책이나 강연, 혹은 심령수술이나 상품 판매 같은 게 아니면 돈을 벌 수 없는 그런 비과학론자들과는 다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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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인 07-01-14 06:48 기독교비평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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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서) 흔히 보는 논리 오류



(인터넷에서) 흔히 보는 논리 오류

copyright 이우혁

모르는 게 죄는 아니지만, 모른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간판으로 내거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며, 모르는 것 때문에 잘못이 무조건 용서된다고 믿는 것은 죄악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논리학 개론 반권만 읽었어도, 연구나 공부가 아니라 그냥 한 번 읽어보기만 했어도 범하지 않을 짓거리를 해대면서 자신이 가장 잘난 사람인척 하는 예가 너무도 자주 보이기에, 범 네티즌 계몽 및 홍보운동 차 몇 자 끄적거려본다.

이런 것은 지식인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것이기에 이런 것을 쓴다고 잘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며,똑같이 못난 사람이 될 뿐이다. 이런 것도 모를 정도의 세상이 한스러울 뿐이다. 다만 이 글은 대상이 정해져 있다.

예를 들면 '스크롤의 압박' 이 있으면 무조건 안보고 배를 째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므로 최대한의 배려를 하여 전문용어나 기타 등등은 하나도 섞지 않으며, 이론을 먼저 제기하고 그 다음에 예를 드는 것보다 알기 쉽게 예를 먼저 들고 해당되는 논리적 오류를 (좀 알기쉽게 풀어 써서) 적어 보겠다.

하나 전제가 있다면, 여기 나온 오류론 자체를 의심하는 짓은 하지 말기 바란다. 1+1이 왜 2가 되어야 하나요? 라고 묻는 것이 낫겠다. 논리학의 오류라는 것은 이미 수없는 논증과 심판을 거쳐 나온 것이기 때문에 이미 1+1 = 2 라는 것 만큼이나 확실하게 정해진 것이니까.

몇몇가지는 아주 유명한 오류이고, 나머지 몇 개는 좀 복합적인 것도 있는데 내가 알기 쉽게 바꾸어 표현한 것도 많다. 그것에 대해 논박하려면 최소한 논리학 책을 읽고 공부해야 할 터이니, 그런 수단을 써서라도 공부를 하게 만들겠다.

1) 누구도 다른 사람을 비판할 자격은 없다.

-> 그 말은 애당초에 증거불충분이다.

논리의 근거가 되는 자격조건의 예시가 없다. 아울러 그 논리를 주장할 경우, 역작용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 말이 맞다고 치면, '누구도 다른 사람을 옹호할 자격은 없다.'는 말이 되는가 생각해 보자.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만약 '법관 자격이 아니고서는 누구도 벌 줄 수 없다.' 고 한다면 현행범은 누구도 체포할 수 없을 것이다. 법관 자격이 없으니 말이다. 그 역을 생각해보자. 누구도 벌을 줄 수 없다면 누구도 옹호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변호사 자격을 따기 전에는 누구도 죄 지은 사람에 대해 변론을 할 수 없다. 실제로는 법관이 아니고서도 현장에서 범인을 체포하기도 하고, 변호사가 아니더라도 법정에서 자기 변론을 할 수 있다. 단죄하는 데에는 법관의 자격이 필요할지 모르나 비판이나 옹호는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왜 이게 말이 안되는지 대봐라!'고 대드는 것도 오류이다. 욕먹고 싶지 않으면, '왜 욕하냐'라고 따지기 전에 '나는 왜 정당하다'라고 밝힐 수 있어야 한다.
'왜 이게 말이 안되느냐'라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이렇게 말해주자. '왜 말이 되는지부터 설명해라. 그 다음 말해 주겠다.' 논리 오류적으로도 스스로 증거를 댈 수조차 없는 강변을 논리적인양 위장하는 오류이다.

편의상 이것을 '자격 오류'라 해두자.

2) 옹호는 좋은 것이고, 비판은 나쁜 것이다.

-> 두 가지 경우 전부, 좋은 것도 나쁜 것도 될 수 있다.

좋은 것, 나쁜 것이라는 전제 자체가 대상에 따라 다르다. (주관적이라는 말은 아니다.) 연쇄살인범을 동정에 의해 감춰 주어 경찰을 피하게 해주어서 수없는 살인을 더 저지르게(어쩌면 그 자신도 살해될지도 모른다.) 하는 것은 옹호라 해도 옳은 것이 아니다. 물론 죄없는 자에 대한 무조건 적인 비판은 당연히 나쁜 것이다. 그러나 정당한 과정과 합당한 이유를 지닌 비판은 결코 악이 아니며, 그것을 일컬어 '정의'라고 부를 수 있다. 정의의 탈을 쓴 악덕도 많으며, 동정심이나 옹호의 탈을 쓴 죄가리기나 뭉개기도 많이 눈에 띈다. 이 자체는 좀 더 세밀히, 눈을 크게 뜨고 구분할 일이다. 물론 사람이라면 동정심도 가져야 하고, 옹호도 할 수 있으나 무분별한 동정이나 옹호 때문에 정의가 악덕으로 규탄되는 경우도 많다. 그런 행동은 무분별한 비난과 똑같은 책임을 져야 한다. 무분별한 옹호나 무분별한 비난은 똑같다 볼 수 있다. 옹호나 비판이나 같은 선상에 있다. 만약 비판의 자격을 묻는다면, 옹호의 자격도 물어야 한다.

별도의 항으로 분류하려다 말았는데, 여기서 파생되는 가장 웃기는 경우가 '타당한 근거도 없이 무조건 옹호하는' 형태이다. 이는 싸구려 무협 혹은 폭력만화나 영화의 영향이 크다고 본다. 이런 대사, 장면 많지 않은가? '아니! 비겁하게 한 사람에게 세 명이 동시에 달려들다니! 나는 그런 불의를 보고 참아 넘길 수 없다! 내게 덤벼라!' 식이다.

뭐 그게 멋있다고는 해두자. 그러나 그런 논리를 무작정 인터넷이나 통신의 논리에 적용한다면, 참으로 미안한 말이지만, 그런 생각을 한다면 당신은 눈뜬 장님이며, 범죄자이다. 보통 통신상의 비판을 보자. 그 중 일대일이 아닌 것이 있는가? 잘 생각해보라. 한 사람의 글에 대해 100개의 비판 리플이 붙었다고 보자. 당신같은 눈뜬 소경은 그것을 '100명이 한 명에게 덤비다니!'라고 생각하여 싸구려 모조품 정의감을 불태우며 뛰어들지도 모르겠다. 가끔, 아주 가끔 그것이 장님소 뒷걸음에 쥐 밟는 식으로 맞을 때도 없다고는 못하겠다. 그러나 바보짓이라 할 수 밖에 없다.

리플을 붙이거나 비난 글을 올리는 것은 엄연히 1대 1의 작용이다. 글을 올리는 상황에서는 글을 올리는 사람과, 그 글을 보는 당사자 밖에 없다. (물론 리플 내에서 붙은 격전은 당사자에게 행해진 것이 아닐지도 모르나, 그것 역시 1대 1이다.) 한 명의 글에 100개의 비판글이 붙었다는 이유는 한 명을 백명이 동시에 달려들어 때려눕히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사람이 백 명을 하나씩 상대해야 한다는 뜻이다. 채팅방에서 백명이 한 명을 몰아붙여 말도 못하게 만든다면 당연히 뛰어들어 마땅할지도 모르지만(사실 뒤에 설명하겠지만 그것도 잘못이다), 글에 시간 순으로 리플이 줄줄이 달렸다고 분노하는 사람의 머리구조는 어떻게 되어 먹었는지 궁금하다. 설령 그것에 부당성을 느끼더라도, 일단은 다시 한 번 이렇게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이 정상 아닌가?

'이 사람이 정말 100명에게 집단 따돌림이라도 당하는 것인가? 아니면 정말 잘못이 많아서 100명에게 욕을 먹을 만한 사람인가?'

우선 이 과정을 스스로 판별하고 뛰어들려고 해도 뛰어 들어야 한다. 보통 무협영화에서는 주인공이 위와 같은 멋진 말을 하고 보통은 선량한, 위기에 빠진 사람을 구해준다. 그래서 그렇게 하면 의당 옳다는 꼭두각시적 세뇌를 은연중 당했는지는 모르겠는데, 반대의 경우를 무협지적으로 생각해보자. 주인공이 구파일방의 장문인들을 모아 도저히 당할 수 없는 악의 원흉 마교 교주를 전 무림을 희생시켜가며 간신히 포위했는데, 뜬금없는 미친놈들이 '아니, 열한명(구파일방 장문인 10명, 주인공 1명)이 한 사람을 동시에 공격하다니! 나는 그런 불의를 보고 참아 넘길 수 없다! 내게 덤벼라!' 하고 우스스 달려들어서 끼리끼리 싸움이 붙느라 그 사람들과 주인공, 구파일방 장문인만 죽도록 싸우다가 다 죽고 마교 교주는 웃으며 달아났다. 이게 옳은 일인가? 웃기는 해프닝이다. 뛰어든 사람들이 정의의 사도였나? 미친 놈들 아닌가?

무협지를 모른다면 일반 형사드라마를 생각해보자. 평생을 목표로 한 범인을 찾기위해 세 형사가 10년을 헤매지만 범인은 잘도 피해다닌다. 어느날 10년동안 매일매일 사복차림으로 잠복한 끝에 범인을 잡아 격투가 벌어졌다. 그때 어디선가 나타난 사람들이 아주 정의롭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거 왜 이래? 멀쩡한 세 사람이 한 사람에게 덤비다니! 죽어라 퍽퍽!' 결국 세 형사는 떡이 되게 혼나고, 범인은 다시 자취를 감추어서 영원히 찾을 수 없었다. 멀쩡한 상황이 코미디가 되어 버렸다.

뭐 그냥 대강 든 예이고 비유이니 그 예의 논리구성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말기 바란다. 이런 예를 든 것은, 위기에 빠진 사람을 구해 정의의 주인공이 된다고 무조건 착각하지 말고 정황과 사정을 잘 살피면서 행동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런데도 버젓이 나타나는 인간군상이 있다. '나는 비록 아무것도 모르지만, 이렇게 한 사람을 공격하는 꼴은 도저히 못봐주겠네요!' 라면서 스스로의 부자격성, 비논리성, 쌍무식성을 있는대로 드러내면서도 스스로 정의의 화신이라도 되는 양 끼어든다. 차라리 혀를 물고 죽어버려라. 차라리 친인척이나 이해당사자라면 그래도 봐주겠다. 친분이나 하다못해 작은 인간관계라도 있었다면 그래도 이해는 간다. 허나 아무 것도 모르는데 무엇을 평가하려고 하는가?

일단 그 대상이 옳고 그르고는 알아야 할 것 아닌가? 자기가 무슨 전투의 화신, 혼돈의 화신이라고 나대면서도 끝끝내 잘난 척하는 미친 족속이 많고, 그런 족속을 이용하여 항상 빠져 나가는 악당들이 더 많다는 사실에 명심하자. 이 글을 한 번이라도 보았다면, 앞으로 그런 '자칭 무림고수의 오류'는 범하지 말자. 물론 무분별한 옹호와 마찬가지로 무분별한 비판도 똑같은 악덕이나 한가지, 일단 무분별하더라도 옹호부터 해놓고 볼 때가 있는데, 그것은 한 사람의 생명(진짜 생명)이 달렸을 때 뿐이다. 그 외의 통신 논의에서 사람이 죽는 일이 없고, 대부분 잘잘못을 가리는 일인 이상, 그런 무분별은 범하지 않는것이 좋다.

혹자는 이의를 제기할지도 모른다. 비판이나 옹호의 자격은 없다고 해놓고 왜 끼어드는 것에 자제를 가하려 그러느냐? 그에 미리 답해본다. 비판이나 옹호의 대상 자격논의가 아니라 제대로 된 논의에 참가하는 자세인가 묻는 것이다. 뭐 자기가 알아서 자기 망신 당하겠다는데 누가 뭐라겠는가? 한 번 양자의 의견이나 입장을 찾아 보지도 않으면서 잘났다는 듯 끼어드는 지식인들이 있다면 그들이야말로 가짜 지식인이며, 자기가 자기 무덤을 판 것이다.

끼어 들어라. 자격은 있으니까. 허나 처절히 매도되고 비웃음 사는 것도 자기 일이니 알아서 하라고 할 일이다. '모르면 나서지 말라'는 말은 모른다고 나설 자격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모르면 나서도 망신을 당한다는 뜻이다. 옛적부터 '말조심하라'고 가르치지 않았는가? 물론 이것은 무분별한 비판을 가하는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말이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정말 못된 놈이네...' 이것 역시 헛소리다. 아무것도 모르는데 정말 못된 놈이란건 어떻게 아는가? 모두가 조금더 말조심 할 일이다.

2) 내가 한 짓이 못마땅하면 너도 해봐라. 능력도 없는 것들이

-> 역시 쌍무식한 티를 그대로 드러내는, 선도해야만 하는 오류적 발언이다.

가령 그 대상이 문제성이 있는 일이라 치자. 그렇다면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안하는 것이다'로 대응할 수 있다. 상점에 진열된 물건을 공연히 때려부수지 않는 것은, 그럴 힘이 없어서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나쁜 짓이므로 안하는 것이다. 만약 도덕성의 차이를 능력의 유무로 끌고 들어가거나 같은 짐을 짊어지게 하는 이러한 오류를 일단 '너도 해봐라 오류'라 명명짓자.

3) 너희 중에 죄짓지 않은 놈이 '나'에게 돌을 던져라. 너희는 잘못 한 적도 없느냐?

-> 죄 지은 자들이 가장 많이 부르짖는 형식이다.

예수님이 다 좋은 말씀을 남기셨는데, 무분별한 쌍무식장이들이 예수님 말씀까지 곡해하여 이용해 먹으니, 이것은 논리단계를 넘어서서 종교모독에 이르른다. 그 이야기는 제 3자의 입장에서 해야만 가치가 있는 것이며 죄를 벌하되 '인간적 모독을 가하거나 동정을 베풀 여지를 남겨라' 즉 사랑의 가르침을 설파하신 것이지 죄인도 다 용서하자는 뉘앙스를 가진 것이 아니다.

사회 계약론에 의하면 죄가 있는 자도 다른 죄를 단죄할 수 있다. 아울러 다른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잘못을 저지른다고 그 잘못이 정당화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모조리 잡아다가 잘못에 대한 댓가를 치르게 만들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잘못이 있다고 잘못에 대한 논의를 못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인간사회가 존재하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이나 석가모니께서 재림하셔서 몸을 60억으로 나누어 하나씩 맡아 카운셀링을 해주지 않는 한에 있어서는 말이다. 결국 기본적으로 뻔뻔스러운 무식의 소치이다. 이것을 편의상 '돌던져라 오류'라 명명하자. 혹은 '우물에 독을 타는 오류(poison to well)' 이라는 멋진 시적 뉘앙스를 지닌 비유에 해당한다.

내가 죽을 것 같으니 우물에 독을 타서 다 죽자, 즉 모두 끌고 들어가자는 악의서린 흉계의 주장이며, 일고의 가치가 없는 말이다. 또 다른 말로 '물귀신 오류'라고 해두자.

조금 더 구체적으로 넘어가자. 이제까지는 드러난 잘못에 대한 평가를 했는데, 교묘히 숨어 있는 잘못에 대한 몇가지 평가를 해보자.

4) 내가 당신을 좋아하니 당신은 항상 정당해요.

-> 그것은 아무리 잘 보아주어도 그 당사자에게나 해당되는 말이다.

자신을 우주 전체인양, 혹은 인간 사회를 대표한다는 총체적 착각에 사로잡히지 않고서는 내뱉을 수 없는 말이다. 그런 찬사를 듣는 다면, 얼른 그 사람에게서 멀어지라고 권하고 싶다. 그 '우주의 신'이 언제 마음이 변하여, '내가 당신을 싫어하니 당신은 모든 것에 있어서 다 나빠요! 소멸되어라! 죽어!' 할지도 모르니까. 이것을 반장난삼아 '당신만을 오류'라 칭해본다.

5) 나는 나름대로 열심히 했으니 비판하지 말아주세요.

-> 열심히 한 것은 아무리 나름대로 했건, 알아줄만큼 열심히 했건 비판할 일이 아니다.

그러나 열심히 했다는 것이 비판받지 않을 이유나 행동의 정당성을 뒷받침해주는 이유는 되지 못한다. 일종의 동정심 유도의 작전일 뿐이다. 열심히 했다는 것은 '열심히 했느냐'는 비판에 대해서만 해답이 된다. 도둑질도 열심히 하면 비판 받을 수 없는 것이고, 살인도 연쇄살인을 하면 비판받지 못하는 것인가? 하긴 중국에는 '한 사람을 죽이면 살인자지만 백만명을 죽이면 영웅이 된다'는 속담도 있긴 하다. 그러나 그것은 비유일 뿐이다. 정말 백만명을 때려 죽여봐라. 영웅으로 변하나.

열심히 한 것이 모든 근거의 척도가 된다면 고시도 가장 오래 시험본 사람을 무조건 붙여줘야 하고, 미술 국전도 제일 나이 많은 사람에게 무조건 대상 줘야 하고, 가장 긴 영화가 가장 명작이 되어야 하고, 수능도 굳이 시험 칠 것이 아니라 학생 하나하나마다 씨씨티비라도 설치하여 '누가 더 덜자고 열심히 했나' 로 뽑는게 맞겠다. 앞에 든 예를 한 번 정정해보자면 '열심히 했으니...' 가 아니라 '나름대로의 뜻을 가지고 열심히 했으니...' 라고 하는 편이 맞겠다. 그런데 이러려면, 굳이 열심히... 라기 보다는 그 나름대로의 뜻이 뭐였는지 밝히는 편이 맞을 것이다. 즉 '나름대로 이러이러한 근거 하에서 이러이러한 목적으로 이러이러하게 한 행동이니...' 정도가 설득력있게 전개된다면 된다면 합격점이다. 그리고 '비판하지 말아주세요...' 가 아니라 '타당성 있게 비판해주세요...'로 바꾸어야 설득력이 생긴다. 무조건 비판만 하지 말아달라니? '열심히'는 우주적 면죄부를 지닌 단어였단 말인가? 이것을 일단 '열심히 오류'라 지어두자.

6) 그래. 나는 못배워서 무식하다! 나이 어려서 모른다. 그렇다고 나를 무시해도 되는 거냐?

-> 물론 못배워서 무식하다고 말하거나 나이 어리다고 무시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런데 그 잘못의 범위는 그냥 도의적이고 윤리적인 선의 잘못이지, 원칙적으로는 잘못이 아니다. 그 잘못도 어리기 때문에 건드리지 못하거나 무식하기 때문에 건드리지 못하는 것이 아니고, '무시했기 때문에' 잘못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경우 이 '무시'라는 말이 대단히 우습게 쓰인다. 무조건 자기 말을 안들어 주면 무시한다고 한다. 이 문제에 있어서의 정당성은 '무시'가 정말 무시인가? 아니면 무조건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무시'로 받아 들이느냐에 있다. 일단 두 경우를 함께 생각할 때, 여기서는 두 가지의 오류를 검출 할 수 있다.

첫번째는 못배워서 무식한 것을 면죄부라도 되는 양 들고 일어난 오류이다.

못배운 것은 죄가 아니지만, 떳떳하거나 자랑할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모두 많이 배우고 유식해지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면 스스로 그 대열에서 뒤쳐진 낙오자라는 뜻이오, 그러지 못할 여건이 있었다면 하고 싶은 바를 하지 못했다는 울분이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못배우고 무식한 것은 바람직 하지 못한 일이다. 그래서 그 부분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겸손을 가지고 잘 언급하거나 약점 삼지 않으려고 한다. 그런 남의 쓰라린 부분을 건드리는 것은 도의적으로 좋지 않다 여기기 때문에, 혹은 그 사람에게 너무 충격을 줄 지 모르므로 좋은 의도에서 그런 행동을 삼가는 것 뿐이다. 그런데 그런 약점을 둘러 잡아 그것을 가면처럼 둘러 쓰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그것을 방패 삼으려 한다면, 더 이상 인의도덕을 따질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그 사람에게는 앞장서서 스스로 둘러썼으니 만큼 그것이 치부도 아니고, 그런 치부를 공격한다고 도의적이지 못한 것이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좀 못할 짓이지만 처절하게 못배운 것을 놀려주고, 못 알아먹을 말만 해주고, 배운 다음에 다시 오라고 끊어버려도 논리적으로는 결코 죄가 되거나 무시한 것이 되지 않는다. 일단 이렇게 자신의 약점을 방패삼아 둘러써서 상대의 윤리관을 이용해먹는 것은 행동패턴이고 오류 자체는 아니지만 일단 대별하여 대강 '무식의 오류'라 해두자.

물론 정말 상대가 못배운 것을 조롱거리로 삼아 선공을 한 경우에 응답으로 이 말을 쓴다면 그것은 한맺힌 정당한 항의의 표현이 될 것이다. 허나 뻔히 논거를 들어 정연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갑자기 이런 말이 튀어나오는 경우가 많다. 이 경우는 일고의 가치도 없다. 스스로가 쓰레기임을 공인한 처사이니 고민하거나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지 말고 그냥 청소기로 쓸어서 밖으로 치워버리면 그만이다. 나이도 마찬가지다.

나이가 어리다는 건 많은 가능성을 지녔다는 의미이므로 많은 잘못이 있어도 넘어가주며, 봐주는 경우가 많다. 가령 미성년자는 어른보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훨씬 가벼운 처벌을 받는다. 이것은 미성년자가 잘나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못배우고 아직 생각이 짧기 때문에, 아울러 앞으로의 가능성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정한 것이다. 즉 좀 심한 말로 표현하면 '아직 모자라고 덜 되었기 때문에 스스로의 행동에 책임 질 수 없을 수 있으며' 그때문에 그만큼 많은 여유를 주는 것이다. 그러한 많은 특권을 주는 것을 권한으로 인정하는 되바라진 미성년자라면, 혼부터 내는 것이 맞다.

미성년자에게도 성인과 동등한 권리가 있다. 다만 그것이 달라서, 어린사람의 잘못은 처벌보다는 훈계나 가르침으로 넘어가며, 대신 어린 사람은 나이 많은 사람들의 지도를 따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물론 정당하지 못하거나 나쁜 어른의 말을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른의 말이라고 하여 무조건 이렇게 앞장세우며 거부하는 것은 같은 미성년자 입장에서 보아도 옳지 않을 것이다. 이것 역시 오류라고 부르기에는 좀 어패가 있지만 관성의 법칙에 따라 '미성년의 오류'라 해두자.

아울러 이 두 오류의 전제가 되는, 타당한 논거도 자기가 패배할만하면 '무시'라고 이름붙이는 못된 습관을 일단 '무시의 오류'라고 해두자

7) 저런 *가 있는 저기는 쓰레기통이야...

-> 완벽한 일반화의 오류 형태이다.

만약 *라는 인간말종이 어딘가의 단체에 들어간다 치자. 그렇다고 그 단체를 모조리 *와 똑같은 쓰레기통으로 생각하고 일반화, 정형화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쓰레기나 다를 바 없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그렇게 따진다면 최소한 그 *가 있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에 모두 같이 있으므로 모두가 다 쓰레기이며, 자신도 쓰레기가 될 것이다. 단체라고 했지만, 집단, 가족, 기타 등등 모두 포함된다. *가 속한 집단을 욕하려면 그 집단의 행동양태를 볼 것이지, * 자체의 존재가 집단의 성격을 대별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오류를 저질러서는 안된다. 이것을 '일반화의 오류'라고 해두자.

이 외에도 수백가지의 오류들이 있으나 가만히 살펴보면 그 거의 모두가 논리학에서 나오는 대여섯가지의 기본적 오류체계로 이루어져 그것들이 중복, 혼합되어 이루어져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대여섯가지의 기본오류는 여러분들에게 숙제로 남겨 두겠다. 그래야 책을 보고 나름대로 공부를 할 것 아닌가?

좌우간 이 글을 읽고, 논리를 생각한 사람은 우선은 그 스스로가 쌍무식한 사람이자 아무리 잘 보아주어도 궤변론자 뿐인, 입하고 밥통만 달린 기형적 인간이 되지 말고, 혹 그러한 인간을 만났을 적에도 잘 대처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논리학은 아주 중요한 학문이다. 서양 중세에서도 일단 언어만 습득하고 나면, 다른 무엇보다도 이 논리학부터 먼저 가르치고, 다음에 형이상학을 가르쳤으며, 그 다음에야 실제 전문과목을 가르쳤다.

(괴테의 '파우스트'참조)
서양이 수천년간 앞서가던 동양을 이기고 수백년만에 급속하게 번성하게 된 근본적 힘이 바로 이 논리학에 있다고 본인은 생각한다. 아울러 우리나라 교육에서 가장 부족한 부분이 이 논리학이며, 특히 인터넷이라는 가상공간에서 이 논리학은 가장 중요한 기본 소양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논리에 대해 흥미를 가지는 사람이 많아져서 보다 원활하고 발전적인 인터넷 생활이 이루어지는 꿈을 꾸며 대강 잡글을 마친다.

copyright 이우혁(이우혁은 퇴마록의 작가다.)

출처 : [기타] 누리집

별 할 말도 없을 때

작성자:HUE
작성일:2010.02.04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헌법 11조 1항]

헌법에 저렇게 규정되어 있는데 왜 우리 주변은 불평등이 가득하고 계급화 되어 우리를 세상의 가장자리에서 아우성으로 날을 지새우게 하는가?

이것이 내가 본 아고라 풍경이다.


<헌법에 규정?>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이곳은 글을 ‘핥아 먹는다‘라는 표현을 처음 사용한 사람으로서 유행어가 되어 버린 작금에 일말의 책임을 가진다.
헌법 11조 1항의 읽기는 <법 앞에>라는 문구다.
무조건 평등한 게 아니라 법 앞에서 평등하다는 사실을 간과해서 빚어지는 온갖 푸념을 보며 표현한 말이다.

푸념이 타당하려면 사법 정의에 대해 논해야 한다.


<불평등과 계급화>

평등 규정 앞의 헌법 제 10조에는 “모든 국민은....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라는 조항인데 누구나 자유로운 영리추구와 재산의 소유가 가능하다는 자본주의 경제 원칙과 관련된다. 이것은 법적. 정치적 평등은 인정하되 경제적 평등까지는 인정하지 않는 체재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는 거다. 전 근대 사회의 신분이 법적. 정치적 구분인데 비해 근대 사회의 계급은 경제적 구분이다.
우리가 정부를 선택할 때 소위 우파나 좌파적 성향을 눈여겨보는 이유는 자본주의가 필연으로 노출시키는 경제적 계급을 강화하느냐 아니면 기회균등을 확대하느냐의 선택인 것이다.

여기에서 경제 정의에 대한 제대로 된 논의를 보고 싶었지만 미네르바 굿판으로 미망에 빠진 형국을 지켜본 것 말고는....


<세상의 가장자리>

한 때 스포트라이트가 비추어 진 기억 때문인지 회상을 떨쳐버리지 못한다. 조명은 관심사를 따라 때로는 필요에 의해 시공을 옮겨 다닌다. 떨쳐버리지 못하는 불의 기억은 조그만 쥐불놀이조차에도 환호하는 무리들로 더욱 을씨년스럽다.
한 번 곡식을 거둔 땅은 황무지가 되어야 한다. 황야는 버려진 땅이 아니라 미래의 땅이다. 황야는 안으로는 힘을 비축한다.
봄이 온다. 씨를 뿌리기 전에 전복해야 한다. 깊게 갈아엎어야 한다. 이곳에서 <알밥>의 역할은 쟁기가 되어 황무지의 속살을 드러내 준 다음에는 창고로 돌아가는 것이다.

알밥을 삯꾼으로 보는... 인생을 터무니없는 의심 말고는 별로 한 것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 사계절 내내 키보드를 헤매는 것도 팔자이긴 하다.


<아우성으로 지새우는 날들>

데이비드 리즈먼이 1950년대 [고독한 군중]에서 이미 현대 사회는 ‘타인 지향성’이라는 특성을 가질 것이라고 이야기 한 바 있다.
모든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데, 정작 그 해결을 위한 ‘참고자료’는 자신을 바라보는 타인들의 시선밖에 없다. 어떻게든 개성과 정체성을 확보해야 하지만 내게 개성과 정체성을 부여하는 것은 타인들이다.


아고라에서 조회수와 찬반에 연연하는 모습들을 보며 다시 떠오른 상념이다.
연대는 개인이 조직에 대항하는 대단히 적극적이고 유효한 방식이다. 그런데 연대하는 것이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보이는 행태가 자주 목격된다.

***

이 글은 <개념어 사전/남경태 지음>일부분을 토대로 하여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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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가 돋다

작성자:HUE
작성일:2010.02.02



나는 황야에 산다.

먹이를 노리는 포식자들이 그림자와 냄새를 들키지 않으려 해와 바람을 마주하며 접근하는 곳, 하룻밤 사이에 우두머리가 바뀌고 또 바뀌며, 힘들게 구한 먹이를 쪽수로 뺏고 빼앗기는 모습이 일상인 곳에서 흔들의자에 앉아 있다가 문득 나는 등 굽은 나무가 되었다. 그러자 발바닥에 있던 티눈이 자라 뿌리가 되었고 키보드 위에 걸쳐져 있던 손은 가시로 변하고 있었다. 가시라도 없으면 나는 충분히 자라기 전에 고목이 되어 노을을 배경으로 다하지 못한 생의 이야기나 전하는... 캘린더 속 풍경이 되었을 거다. 그래서 오늘은 가시의 노래를 부른다.

왜 그랬을까.

포식자는 나의 취향이 아니었고 풀을 찾아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초식동물도 내가 바라던 일이 아니었다. 가끔 무리를 짓지 않는 매력적인 포식자가 나타나면 닮고 싶었다. 하지만 날렵하게 발달된 근육을 지니지 못했으므로 그저 바라보거나 힘들게 구한 먹이를 약탈자에게 내주지 않도록 그늘을 만들어 주는 게 고작이었다. 황야에서 친구라곤 해와 대기 정도였다. 대기는 가끔 바람을 만들어 내가 나무임을 잊지 않도록 해주었다.

황야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내 피부에 소름을 돋게 하였고 지속적인 생존의 공포는 소름을 가시로 변하게 하였다.

물론 나의 실재는 밀림에 산다. 황야의 나무는 더불어 숲에 사는 나의 아바타인 것이다. 더불어 숲에 있는 동료들은 아무도 황야로 아바타를 보내지 않았다. 황야는 밀림에서 터부시되는 금기의 땅이었고 황무지였다. 황야를 아바타의 서식지로 삼게 된 것이 내게는 불운한 선택의 사례이다. 불운한 선택이라고 했지만 실은 호기심을 안락과 바꾼 피폐한 체험인데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불모의 땅에 드문드문 찾아오는 수행자들 때문이다. 그들이 전하는 고행을 엿듣는 즐거움으로 내 몸에 뿌리가 내리고 가시가 돋는 것을 방치하였다.

수행자들의 이야기는 크게는 같고 작게는 달랐다. 걸어 온 길은 같지만 지나 온 시간이 다른 것처럼. 포식자들은 먹이를 포획하기 전에 먼저 먹잇감이 눈치 채지 못하게 하거나 본능적 방어를 해제시키는 능력을 가졌다고 한다. 낌새를 숨기는 방법은 흡사한 무늬와 포식자들의 상호 교감에 있었다. 호구들의 긴장해제를 위해서는 같은 종족인 양 행세하며 낙원을 예시하고 골짜기로 유인한다. 그래서 먹잇감은 자신들이 죽는 순간에도 오히려 뒤에 남겨진 무리를 걱정해준다나.

호구의 특징은 두 가지였다.

자신들을 규정하는 <천하고 천한 종족>이라는 계급이 마치 집단으로 구원받을 징표라는 착각이 하나요. 다른 하나는 하늘이나 먼 바다에서 자신들을 구원 할 강한 놈이 올 거라는 믿음이 그것이다.



영화 <마하트마 간디> 를 다시보다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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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같은 풍경2 - <서우님>

작성자:HUE
작성일:2010.01.29



일전에 '그림같은 풍경'에 비유하여 서우님과 누리꾼이 부딪히는 역사관에 대해 쓴 적이 있었지요.
요즈음 또 재연되는 부분을 보며 갈등의 내용보다 서우님이 참고하시라고 몇 자 쓰며,
책의 한 부분을 패러디했음을 미리 밝혀 둡니다.

현실과 허구를 분리하는 인지 체계인 분리기제decoupling mechanism대한 이야기.

세상을 성공적으로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정확한 정보가 필요합니다. 이 정보에
따라 생사가 결정되죠. 그렇다면 당연히 사람들은 소설보다 비소설을 선호해야
하지만 다큐멘타리와 허구적인 영화 가운데 무엇을 볼 것인지 물으면 허구적인
영화를 선택하는 경향이 높지요.
즉 사람들은 역사책보다 역사소설을 더 좋아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정말로 정확한
정보를 원하거나 취직이나 승진시험이라면 리담메의 소설보다 백과사전을 찾을 겁니다.

서우님,
인간이 현실을 왜곡하는 것이 단순히 선악이나 진위를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생존 적응구조와 허구적 경험에 어떤 이점이 있기 때문
이라고 이해하시기를 바람미다.^^

/////////////////////////////////

*인용자료:
[왜 인간인가?-인류가 밝혀 낸 인간에 대한 모든 착각과 진실/마이클 가짜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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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고라는 안녕할까 2

작성자:HUE
작성일:2010.01.28



유구한 세계 속에 개인의 앎과 이해는 파편에 불과하다.
이렇게 쓰면 지구인 대다수는 동의할 수밖에 없다. 미완성이니 불완전성이니 하며 인간을 표현해도 마찬가지다.

새해 첫 달이 끝나는 현재까지 일 년 전 경방에 글을 썼던 미네르바를 둘러 싼 왈가왈부는 줄다리기마냥 그치지 않는다. 놀이라면 규칙을 정해서 즐기면 되는데 놀이를 실제 상황이라고 주장하는 경우 실정법의 판단을 구하면 된다.

그런데 문제는 심판도 못 믿겠고 자기들 편이 아닌 사람은 모두 한 패라며 판 자체를 뒤집어 자신들이 주관하는 판만이 오로지 정의라며 사상의 자유 시장 따위는 엿 먹어라한다.

그러면서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을 알밥으로 묶어 사이버 공간에서 비난받아왔던 <알바>와 동일시하여 제거해야 할 독소로 지목한다. 이렇게 지목된 알밥들의 글과 댓글을 억압하거나 짓밟는 수단으로서 소위 구라파들이 내뱉는 무기는 한결같다.

바로 첫 글에서 언급했듯이 <너희들이 아는 것은 부분에 불과하니 까불지 말라>이다. 인간의 지식이 유한하다는 사실은 누구나 인정하면서 인식의 지평을 넓히려고 노심초사하는 게 인생이다.

인류의 문명은 부족한 인간의 끊임없는 도전의 산물임을 부정하는 행태로서 개인의 지식이나 이해는 유한하니까 입 다물고 제시하는 주장이나 설을 추인하라는 요구. 이런 요구를 종교집단. 사이비 단체. 폭력적 정치권력 이외에서 하는 걸 본 적이 없다. 있으면 말해 달라.

비근한 예를 하나 들어보자, 서점에 가서 많은 독자들이 인정하는 책을 골라서 저자의 변을 읽어보면 된다. 장르에 관계없이 하나 같이 겸손에 부족함의 염려를 자기 성찰로 버무려 낸다. 즉 파편으로서 개인의 한계를 숨기지 않는다. 그렇지만 잡서들의 권두언에는 찾아보기 힘들다. 있다 해도 의례적인 자기 과시로서 낮춤이다.

나는 글 쓰는 일이 항상 두렵다. 이유는 아무리 사이버 공간이라 해도 현실과 곧바로 이어질 때 동일하게 책임져야 한다는 자각 때문이고, 내가 쓰는 내용이 결국은 내가 세상을 인식하는 모습에 다름 아니여서 초라함이 앞서고, 아무리 객관성을 노력해도 갖게 되는 태생적 한계로서 <나>라는 개별성 때문이다.

나는 구라파들에게서 주장에 대한 자기반성을 본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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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구라계열은 더 이상 밝힐 사실이나 논리가 없을 것이므로 자기들끼리 허접한 글질하며 추천하고 조회수 높이며 개기다가 선거철이 다가오면 세력 과시로 분탕치는 수순이 고작이다. 어차피 이익과 이해관계 외에는 판세를 해석하는 능력이 없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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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고라는 안녕할까 1

작성자:HUE
작성일:2010.01.25



죶밥님이 사용하는 닉과 욕을 좋게 보면
위선과 허위에 대한 적개심이 표출된 직격탄이었다.
물론 적대감은 지극히 개인적인 판단에 근거하고 있다.
누군들 그렇지 않으랴.

일부는 그의 손이 가리키는 달만을 보았고
다수는 그의 손가락만을 보았을까.
아니다.
모두가 손과 달을 함께 보았다.
필요에 따라 맹시인 양 한다.

죶밥의 글은 욕투성이여서 일고의 가치도 없단다.
누리꾼 중에 죶밥때문에 명예가 훼손되거나 모욕감을 느꼈고
이를 응징하려면 징징거리지 말고 실정법의 보호를 받으면 된다.
이럴 때 법은 하위개념이라는 흰소린 비루하다.

그를 비난의 표적으로 삼는 일군의 사람들은
손가락의 불결함에 초점을 맞춘다.
급기야는 용모 검사로 돌변한다.
이런 희한한 사태를 보다가 고개가 갸웃해진다.
그가 달을 가리키기 위해 뻗은 손이
더럽다는 이유로 퇴출되어야 한다면...
아고라에서 이명박을 욕하는 모든 사람을
잡아 족쳐도 좋다는 구실을 주게된다.

아고라가 정권과 정부 기관을 향해
쏟아내는 비판이라는 이름의 저주와 증오,
욕설과 비난은 다 무어란 말인가?
이것이 통용되는 까닭은 퍼붓는 지독함보다
여론이라는 민의를 굳이 용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죶밥을 비난하는 프레임이 타당해서
그가 밝히고자 했던 것보다
욕이 훨씬 나빠서 족쇄를 채워야 한다면
정부가 아고라를 비롯해서
모든 여론 공간을 장악해도 할 말이 없게 된다.

***

인간은 서로 비슷한 사람들이 한패가 되는 것이 아니다.
한패가 되고 나서 서로 비슷해진다.

/우리<와>그들, 무리짓기에 대한 착각 중 표4에서

**

잭 런더느 병.신.육.갑 판떼기
꼭두각시 : 쩍 놀던
바람잽이 : 대륙종단(나이파이)
추임새 : light
분장 : leadme
들병이 : 서현맘마. 덩굴레.
호리꾼 : 비서됴


꼭두각시가 허영심(侈)은 많고
귀가 얇아 잔망스러운데 바꿀 수도 엄꼬
기획자들 대갈휘 스팀이 보인다.
수준은 이패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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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하는 인생들의 이정표

작성자:HUE
작성일:2010.01.19



부담스러울 아래의 글은 경제 행위에서 실패를 반복하는 사례를 은유한 것이다.
개인의 취향이 빚는 여러가지 양상 중에서 참극의 경우를 즉흥하였다.
읽기를 바라며 썼다기보다 스스로 잡념을 털어내는 한 낮의 푸닥거리다.

맥은 부모님의 자상한 보살핌을 받으며 훌륭하다고 알려진 교육기관을 거쳐 씩씩한 젊은이가 되었다.

맥은 자신의 버팀목이 되어 주었던 가족과 사회를 위해 보람이 있는 일을 하는 것이 꿈이었고, 그것은 나라의 동량지재로서 소임을 다하는 일임을 잊지 않았다.

절차탁마하며 준비된 인생을 살던 그는 출중한 기량과 의협심이 쓰일 곳을 찾아 열린 자세로 사이버 세상을 주유하였다. 그러던 중 군중이 모여 웅성거리는 곳을 지나게 되었다. 군중이 빙 둘러 서있는 한 복판에는 살짝 뚱뚱해 보이는 젊은 사내가 실룩거리며 앉아 있었고, 모인 사람들은 저마다 젊은 사내를 삿대질하며 고함을 질렀다.

“너, 넌 누구냐.”
“누구의 심부름꾼이냐.”
“진짜는 어디에 숨었으며 가짜인 네가 진짜로 행세토록 사주한 배후를 밝혀라.“

사내의 웅얼거림은 군중의 아우성에 묻혀 울먹이는 소리로 들릴 뿐이었다.

맥은 지갑에서 현금을 꺼내듯 즉시 의협심을 다발로 끄집어내며 궁금증을 풀어 줄 사람이 없을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시선은 특이한 대상을 탐색하는 오랜 버릇으로 군중 가운데에서 이마가 환한 인물을 찾아냈다. 그는 낡은 전투복 차림이었는데 용병이었음을 표시하는 견장과 가슴에는 ‘일거조’라는 명찰을 달고 있었다. 그에게 다가 가 정중한 예를 차린 후 묻자...

“저 짜식은 우리의 선지자였던 민애가 자신이었다고 우기고 있소. 하지만 저렇게 형편없는 자가 선지자일 리가 없소. 군중의 분노를 보시오. 여럿을 속인 경우는 그 배후가 국가가 아니고는 성공한 사례가 없다는 걸 고금의 역사가 증명하는 바요.“

맥은 사태를 판단함에 있어 어느 일방의 주장에 의지하는 것의 위험성을 훌륭한 교육을 통해 습득하고 있었으므로 시선을 돌려 군중을 살폈다. 마침 세계의 비참을 예견하여 웃으며 종말을 맞이하자는 단체에서 나온 가면 쓴 인물이 보여 다가가 물었다. 목소리조차 남성인지 여성인지 알 수 없었다.

“회원이 많습니다. 주목받지 못하지만 심판의 날이 오면 우리가 그 심판을 주재하게 된답니다. 가입하면 당신이 원하는 걸 링크전사들이 도와드립니다.“

맥은 후일을 도모하는데 필요할 것 같아 그들이 내민 서류에 사인을 하고 마지막으로 사실 확인을 해 줄 인물이 군중 속에 있을까 발꿈치를 세웠다.

장날마다 쫒아 다니며 무술시연으로 끼니를 이어가던 차력사가 공중부양은 담담한 마음이 기본이라며 시선을 끌고 있었다. 맥은 잠시 망설였다. 물었다가 대답을 얻기 전에 차력사들의 길고 긴 내력을 의무적으로 들어 주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뒷통수를 핥고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맥은 의협심을 발휘할 기회를 찾고 있었고 당장은 하는 일도 없었기에 걸음을 옮겨 목례를 한 뒤 턱짓으로 궁금증을 표시했다.

“바람은 대기의 흐름을 보여주며 국가 사이에도 미묘한 균형을 형성하고 하고하며한뒤할수밖에없고해서는안될일과해야할일을살피면매국노가보이고구국의결단은우리의의무이며하며저며되며너희가도를아느냐를이제시작해도되겠느뇨솰솰바람바람바람..“

듣다가 맥은 잠이 들었다. 풀밭 위로 불어오는 산들바람은 반도의 봉우리와 계곡을 지나 온 향기로운 냄새였고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태어나기 전 낙원이었던 곳, 어머니로부터 떠밀림이 있은 뒤 이제는 실낙원이 된 지상의 고단한 여정은 짧았지만 구원받고 싶었다.

잠 속에서는 자신이 다져왔던 역량으로 세상에 대한 책무나 의협심은 신기루처럼 사라졌고 본능만이 지배했다. 꿈결에 어흥하는 호랑이의 포효가 들려왔고 크르릉하는 소리가 귓전에 울렸다. 공중부양을 하고 싶었지만 되지 않았다. 그때 스르르 밧줄이 하늘에서 내려왔다. 자신이 살아오며 지녔던 꿈에 감응하여 하늘이 소명을 내리려 부르는 메시지 같았다.

맥은 밧줄을 잡고 잭이 콩나무를 오르듯 힘껏 올랐다. 오르는 동안 박수소리가 환송연처럼 지상에서 울려 퍼졌다. 그 순간 쭉 뻗은 손바닥에 잡힌 동아줄이 가늘어지고 헤진 보풀이 잡혔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너무 높이 올라왔고 군중들은 수백 마리 호랑이 아가리처럼 보였다.

견장 용병, 웃는 가면, 공중부양 차력사로 보이는 사람들은 포기하지 말고 어서 올라 가라고 손짓한다. 건너 뛸만한 다른 밧줄이 없는 지 둘러보니 모조리 회초리로 변해 있었다. 돌아가기도 건너뛰기도 늦었다. 이젠 주술사가 되어 주문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결과야 어찌되는 당장의 공포를 잊어야 했다.

맥은 자신이 길잡이를 선택하는 취향에 대한 후회가 아팠고, 훌륭한 학교에서 배웠던 <속지 않고 살아가기>라는 강좌가 동아줄을 타고 떠올랐지만 재빨리 머릿속에서 지워야 했다.

“모든 미망은 우연의 일치가 반복해서 일어 난 것을 음모나 계시로 보는 결과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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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밥의 노래 - 사이비

작성자:HUE
작성일:2010.01.18



넓은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사이비다.

오류의 가능성을 열어두느냐
아니면
무오류라며 들이대느냐에 따라
사이비로서 차이가 있다.

특히
자신의 주장이나 견해를 뒷받침하기위해 동원하는 증빙 자료와
수사들이 엄밀한 경우 신빙성이 높다.
신빙성을 높이기 위한 흔한 방법이 이왕에 알려진 보편적 지식이나
실제적 사실을 총합하여 자신의 의견이 동일한 가치로 받아들여지길
기대한다.

이와 관련하여 오늘날은 <반증가능성>이라는 과학적 태도가 널리 인정받고 있다.
반증가능성을 열어두기 위해서는 주장하는 당사자가 기울인 객관적 노력들을
제시하여 판단을 구해야 하는데 정작 본인들은 자기주장에 대한 불신은 심판을
받으리라는 종교적 자세로 눈을 부라린다.

아고라에서는 개인의 확신 또는 의지일 뿐인 주장들이
아무런 검증도 없이 일반화되고 오류가 횡행하는데 그치지 않고
지상명제인 양 검증을 허락하지 않거나 묵살하는 행태가 공공연하다.

이러한 양상은 편가르기로 일상화되고 불신을 해소하기보다는
상대를 공멸시키기 위한 적의가 정교해져 마치 무기의 발달사를 보는 것처럼
폭력의 비열함을 매일매일 목도하게 된다.
세상이 다 그런 것 아니냐는 비겁한 의식이 발현되는 현장임에도 겉으로는
아고라가 집단지성이니 민주주의의 성지니 자위하는 웃지 못 할 광경이
펼쳐진다.

나는 사이비에 대한 보통 사람들의 인식이 어떤지 살펴보았다.
보통사람들의 인식이라고 하기는 좀 그렇다. 신뢰성을 얻기위한 구체적
연구조사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주위 몇몇 사람에게 사이비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가볍게 물어 본 정도였지만 참고할만해서
정리해보니.

“사이비는 99%를 사실이나 진실에 기초한다. 그렇지 못하면 어느 누구도
속거나 추종하지 않는다. 마지막 1%조차 거짓이 아니다. 그렇게 하면
들킨다. 그 1%는 형이상학의 형태를 취한다. 단지 자신의 주장이 먹혀
들도록 교묘하게 기획된 의도이다.“

그래서 넓은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사이비라며 서두를 시작했다.
우리는 이기(자신의 이익을 위한)와 이타(타인을 이롭게 하는 것이
궁극에는 자신의 이익으로 보상되리라는)라는 사이비로 생존해왔다.
다만 사이비라는 인식을 표명함으로서 공존하느냐 나는 절대 그렇지
않다며 타인을 도구로 삼느냐의 차이가 있다.

그래서 도구로 전락한 호구들에게 이런 말을 하고 싶다.
너희들이 감사해야 될 대상은 맨날 너희들이 감사합니다하며 넋을 바치는
그 놈들이 아니라 그런 놈들과 너희 호구들이 주축을 이뤘음에도
망하지 않고 돌아가는 세상에나 감사해라.

***

사이비 [似而非] [명사] 겉으로는 비슷하나 속은 완전히 다름. 또는 그런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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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화하는 군상들의 초상

작성자:HUE
작성일:2010.01.03


아고라 최신 문체를 흉내 내며.

더 나은 사람들이
보다 더 좋은 결과에 이르기를 바라며
알밥 2년차는 바통을 넘기고
뒷방 개작두로 있다가 일요 외출을 합니다.

거짓을 확대 재생산하는 구라 제사장들은
알밥을 고용된 자들로
어떤 지시를 받는 일꾼으로 애써 모욕하려는
이유가 두 가지겠지요.

첫째, 진짜 그렇게 믿고 있다는 거고
둘째, 자신들은 믿지 않지만
광신도들이 쾌감을 느끼도록 키보드서비스를 하는 것.

그게 어느 것이든 알밥들은 좋겠습니다.
오답지로 인생을 사는 인생에게
싱긋 미소만 던져도
그들은 반짝인 것은 금니이고 그 금니 속에는
도청장치가 있다며 천방지축 헛 지랄 해주니 말입니다.
아고라를 지켜보는 소심남녀 눈팅족이나 시정잡배들과
말 섞는 것조차 인품에 기스나는 고매한 인간들은
이쯤에서 퇴장하시고.

.-----------------------여기부터는
일천 아골 듕신들을 믹싱하여 아스타일로 만들기 전
ISO인증을 받기위한 소양교육 과정이다.

븅신들 소양교육 시키는 이유는 간단하다.
아스타일을 위해 퐁퐁으로 븅신들을 씻긴다는
선량한 상상은 사절.
이것들을 한 곳에 몰아놓고 <참 인간되기 뿅뿅 안내서>를
나눠주기만 해도 채전에 목초액 뿌린 듯 싸그리 말라 디진다.

닭대갈하림은 뭐 하러 일일이 모가지 비틀어 잡나 몰라.


혹여 아골질하면서 도무지 발전이 없는 분,
태껸 기본 품새라도 익혀 미운 놈 붕알이라도
터자뿔라믄 아래 제시어를 읽고 내용은 재주껏
찾아서 수련하길 바란다.

미리 당부 하나 하자. 내가 제시하는 건
븅쉰들 저렴하게 믹싱하는 방법이고 아고라
근성가이가 되고 싶다면 따로 소개해주마.

아고라 근성가이 양성소로는 첫째가 욕방이요,
둘째가 구라방이며, 셋째가 혼수상태이다.

욕방만이 무료강습인 듯하고 구라방은 전재산을
담보해야 되고 혼수상태는 사나마나 폐인이어야
한다. 그래서 추촌할 만한 곳은 욕방인데 세곳이
성업중이다.

현존남바링, 가부냐너. 푸스방이다. 레드 썬~

--------------------------------------------
-----------이쯤이면 남허지는 알밥만 남아 있겠제?
알밥님들이 각각 시전하며 구라를 격파해 온 초식들을
모아 둡니다. 해가 바뀌었으니 세대교체도 해야 하고.
아래 각문파의 초식 모음집은 틈나는 대로
레벨업하시길.


#-1

이상한 것들을 믿게 만드는 스물다섯 가지의 오류

과학적 사고의 문제점(알밥이 유의해야 할)

1. 이론은 관찰에 영향을 미친다.
2. 관찰자가 관찰된 것을 변화시킨다.
3. 장비가 결과를 구성한다.

사이비 과학적 사고의 문제점(구라파의 초식들)
4. 일화를 든다고 해서 과학이 되진 않는다.
5. 과학의 언어를 사용했다고 과학이 되는 것은 아니다.
6. 대담하게 진술한다고 주장이 참이 되지 않는다.
7. 異說이설이라고 다 같이 올바르다고 판명되는 것은 아니다.
8. 증명의 부담.
9. 소문과 실상은 같지 않다.
10. 설명되지 않는다고 해서 설명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11. 실패를 합리화하다.
12. 사후 추론
13. 우연의 일치
14. 대표성

사고의 논리적 문제점(혼수상태에 빠진 넘들)

15. 감정적인 말과 잘못된 유비
16. 무지에의 호소
17. 대인 논증과 피장파장논증의 오류
18.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
19. 권위에 지나치게 의존하기
20. 이것 아니면 저것, 양자택일의 오류
21. 순환논증
22. 귀류법과 미끄러운 비탈길

사고의 심리적 문제점 (광신도들)

23. 부실한 노력과 확실성, 통제, 단순성에 대한 욕구
24. 부실한 문제 풀이
25. 이념적 면역, 또는 플랑크 문제

<왜 사람들은 이상한 것을 믿는가>/ Michael Shermer/ 중에서


#-2

여기서 겸손한 척 하며 지 잘앙 졸라리 처하는 새쿠ㅣ들에게
이곳 아고라에서 정부나 각종 기관, 개인이 서로서로를 비난하는 가운데 흔한 오류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을 보여주는 실험을 옮겨 봅니다.

“우리는 인종, 민족, 문화에 관해 말하면서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안다고 확신하는지도 모른다. 낯선 사람을 분류하고 그 분류에 따라 그를 이해하면서,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안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과학적으로 볼 때 우리는 우리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늘 안다고 할 수 없다.

예컨대 성직자가 되기 위해 공부하는 젊은이가 자비롭고 친절하리란 생각은 단지 상식일 뿐이다. X라는 특징을 가진 사람(성직자 공부를 하는 사람)은 Y라는 부류의 인간(종교적 인간)이며 따라서 Z라는 행동(자비로운 행동)을 할 것이란 가정 말이다.

심리학자인 존 달리와 댄 베이트슨이 이런 가정을 실험한 바 있다. 실험 참가자자들은 모두 프린스턴 신학교의 학생들이었다. 학생들은 캠퍼스의 다른 건물로 건너가 발표를 해야 했는데, 첫 번째 그룹에는 다른 건물에 도착하기까지 시간이 적당하다고, 두 번째 그룹에는 시간이 넉넉하다고, 세 번째 그룹에는 이미 늦었다고 각각 알려주었다.

각 학생들은 다른 건물로 가는 도중 곤경에 빠진 것이 분명해 보이는, 땅바닥에 쓰러진 낯선 사람과 마주치게 되었다. 그를 도울 것이냐 그냥 지나칠 것이냐, 실험의 핵심은 바로 이 선택의 순간에 있었다.

시간이 촉박한 그룹에서는 겨우 열 명 중 한 명이 ‘피해자’를 돕기위해 가던 길을 멈추었지만, 시간이 적당한 그룹에서는 40% 이상의 학생이 멈추었고, 시간이 넉넉한 학생들 중에서는 열 명 중 여섯 명이 멈추었다. 실험 결과는 학생들 모두 미래의 사제들이라는 점과 무관했다. 그들의 서로 다른 철학과 종교적 신념(설문지에 적어 낸 바에 따른)과도 상관관계가 없었다. 심지어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발표하게 되어 있던 절반의 학생들도 다를 바 없었다. 실험 결과에 영향을 미친 오직 한 가지 요인은 시간적 압박이 어느 정도냐 하는 것이었다.

더 최근에는 뉴욕 대학교 심리학자들이 사람들의 이타적 충동은 미묘한 경험적 차이에서 좌우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귀차니즘이 발동했다. 궁금하믄 찾아서 봐라. 전문서적은 아니지만 사이버든 세상에서 허방에 들지 않으려면 미리 익혀야 할 초식들이다.)

/<우리와 그들, 무리짓기에 대한 착각>/David Berreby/ 중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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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저작권은 'HUE'님에게 있습니다)

경방에 뛰어 든 사당패를 반기며

작성자:HUE
작성일:2009.12.29


경방은 궐자들의 골패 투전판이면서 백성의 푸념 해우소로 관아가 묵인하는 뒷골목이다.

뒷골목은 시대의 내외풍속을 보여준다. 후세 실록에 왕이 아닌 폭군으로 기록하겠다는 반정의 격문이 공공연히 나붙는 곳. 때는 맹박치세 3년이다.

경방은 투전판이 대세를 이루지만 나라 안의 파락호 왈짜들이 너나없이 기웃거려 온갖 소식들이 시궁창을 따라 흐른다. . 맹박 2년부터 불거 진 민애보 사건이 바깥세상에는 잊혀 졌으나 이곳에는 야사가 되어 개평처럼 돌고 돈다.


민애보 사건이란, 민애라는 익호를 쓰던 경방의 행자로서 투전 골패 쌍륙 등 노름판의 판세부터 자금줄이던 사대부의 뒷담화까지 줄줄 꿰며 궐자들의 소식통 구실을 하던 사내였다. 모든 화의 근원이 세치 혀에서 나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민애의 좔좔은 관아의 개입을 불러 치죄를 받았으나 경방의 허물을 단죄함은 부당하다는 약자보호법에 따라 치도곤으로 다스려졌다. 그 후 사내는 경방을 떠났다.

그렇게 떠난 민애는 허수아비이며 민애를 통해 소식을 전하는 의인은 따로 있으니 맹박치세를 뒤엎을 때를 기다리자는 격문이 지금까지 사발통문으로 날아 다닌다.

맹박 3년이 끝나도록 민애보 사건은 아궁이의 생솔가지마냥 매캐하게 경방을 떠돌며 자욱한 가운데 투전판에 벌어진 결자헷지의 시시비비는 구경꾼들마저 패가 갈리어 삿대질이 오가는 풍경으로 일상다반사다.

오지랖은 팔자라며 뒷골목을 떠돌던 궐녀 중에 한 명이 결자헷지는 결자해지가 맞다고 껴들어 투전판을 뒤집었다. 그때 동짓달 눈바람이 불었고 꾼들의 뇌리에 뻐꾸기가 울었다.

궐자들은 아낙이 낭패한 노름꾼이 팔아넘긴 여편네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네네어미 사당패가 경방을 찾아들었다. 투전판에서 결자헷지 분란을 생속으로 뒤집어 궐자들을 사당패 마당으로 유인하려는 작패였는지, 투전판 낌새도 모르고 끼어 든 쪽팔림을 감추려 사당패를 들였는지는 두고 볼 일. 뒷골목에 피어오르던 연기로 봉홧불 수작인지도 모를 일.

어쨌든 구경꺼리다. 사당패 면면을 보아하니 남사당과 여사당이 뒤섞였는데 이패 삼패 날라리가 아닌 일패이길 기대한다. 경방이야 무엇인 들 마다하랴. 투전판의 살벌함을 녹일 분가루에 형형색색의 쪼가리가 흩날리는 광경도 연말연시 세시 풍속으로 보면 그만인 걸. 껄껄 반길 일이다.

사당패가 경방의 궐자들을 위한 사위로 무르익길 바란다. 도래를 알리고 놀이마당을 채우는 거야 구라필방의 리노인이 나서서 붓질해주면 인산인해는 따 놓은 굿판. 붓값은 알아서 해어화고. 궐자들만 즐거운 놀이로 끝내지 말고 서생에서 사대부, 이무기인 양 하던 타짜들까지 불러내는 재주를 걸판지게 보여다오. 지금까지는 오픈 세레머니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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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oleta Parra, Mercedes Sosa

한겨레 신문 / 곽병찬칼럼
2008.06.04

불가사의했다. 도시는 체포와 학살, 사찰과 고문으로 신음하는데 어떻게 이런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 “도시와 웅덩이, 해변과 사막, 산과 들/ 그리고 너의 집과 나의 길/ 피곤하지만, 행진을 할 수 해준 나의 다리/ 이 많은 것을 나에게 준 삶이여, 감사합니다.” 게다가 ‘기타는 총, 노래는 총알’이라던 누에바 칸시온(새로운 노래) 운동의 대모, 비올레타 파라(칠레)가 작곡하고, 고통받는 이들의 어머니라는 메르세데스 소사(아르헨티나)가 부른 노래라니!

당시 칠레는 3천여 명의 시민을 학살했고, 체포와 구금 고문 등을 피해 100만여 명이 고국을 등지게 한 피노체트의 철권통치 아래 있었고, 아르헨티나에선 군부정권의 더러운 전쟁 속에서 3만여 명이 피살 혹은 실종된 상황이었다. 산다는 건, 그 자체로 ‘고통이고 투쟁이고 저항’이었다. 그럼에도, 삶에 감사하는 이 노래는 독재의 심장을 향해 날아가는 총알이었다!

이 오래된 의문과 경탄이 요즘 다시 살아난다. 진압 경찰의 방패에 찍히고, 몽둥이에 뒤통수를 맞고, 군홧발에 짓밟히고, 물대포에 고막이 찢겨도 그들은 물러서지 않았고, 치켜든 촛불은 꺼지지 않았다. 오히려 타고난 생기발랄은 시청에서 광화문 네거리에 이르는 너른 광장을 한 달째 춤과 노래와 해학과 풍자가 넘치는 ‘민주주의 놀이터’로 만들었다. 그들은 비장하지 않았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돌을 들지 않았고, 쇠파이프로 무장하지도 않았다. 비무장의 그들은 흔들리는 촛불이었고, 막히면 비켜가는 물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이 아니라 공권력의 강철대오가 흔들린다. 엄포와 협박을 일삼던 검찰 경찰 정권은 실색했다.

하긴 간난 아기를 태운 엄마들의 유모차 부대가 앞장서고 아이들을 목말 태운 아빠들이 뒤를 따르는데, 막아서면 ‘텔미 춤’을 추고 협박하면 노래나 하라는데, 길이 막히면 주저앉아 장기자랑 노래자랑으로 초여름 밤을 즐기는데, 때리면 그저 얻어터지는 게 제 역할이라는 예비군들이 대열을 보호하는데, 거기에 대고 무슨 짓을 할 수 있을까.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고 노래하는 이들을, 반국가단체 찬양 고무죄로 처벌할까 내란죄로 주리를 틀까. 이렇게 신나고 흥겨운 민주주의가 세상 어디에 있었던가.

한때 민주주의는 치명적인 것이었다. 입밖에 내려면, 이를 악물고 신발끈을 단단히 동여매야 했다. 무차별 구타와 투옥도 각오해야 했다. 그래서 대개는 그저 “타는 가슴속 목마름의 기억”으로,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치 떨리는 노여움”으로 신새벽 뒷골목에서, 남몰래 ‘민주주의여 만세’(김지하 ‘타는 목마름으로’)라고 끼적이는 게 고작이었다. 그만큼 민주주의는 비장한 것이었다.

그러면 무엇이 이 비장한 민주주의를 행복한 것으로 전복시켰을까. 남미 민중이 그 혹독한 억압과 저항 속에서 ‘삶이여 감사’하다고 노래했던 것은 단지 낙천성 탓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억압을 해학과 풍자로 풀어내는 능력, 이웃과 공동체의 고통에 대한 공감의 능력, 삶을 사랑하고 즐기는 생기발랄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거기에 우리의 젊은 벗들은 정의의 감수성과 연대의 힘까지 갖추었다. 그러니 더 행복한 민주주의로 향한 그들의 행진을 어찌 물대포로 막을 수 있을까.

젊은 벗들이여, 감사합니다. 그대는 일쑤 비장하고, 그래서 일쑤 주저앉는 우리에게 희망하는 법을 알게 하고, 서로 연대하고 의지하는 법을 알게 했습니다. 그대의 노래는 나의 노래이며, 그대의 춤은 우리의 춤입니다. 그대들을 우리 곁에 두신 삶이여 감사합니다.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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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cias a la vida (삶에 감사합니다)


내게 그토록 많은 것을 준 삶에 감사합니다.
삶은 눈을 뜨면 흑과 백을 완벽하게 구별할 수 있는
빛나는 두 눈을 내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높은 하늘에는 빛나는 별을,
많은 사람들 중에는 내 사랑하는 이를 주었습니다.

내게 그토록 많은 것을 준 삶에 감사합니다.
삶은 밤과 낮에 귀뚜라미와 카나리아 소리를 들려주고,
망치 소리, 터빈 소리, 개짖는 소리, 빗소리,
그리고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이의 그토록 부드러운 목소리를
녹음해 넣을 수 있는 넓은 귀도 주었답니다.

내게 그토록 많은 것을 준 삶에 감사합니다.
삶은 생각하고 그 생각을 주장할 수 있는 언어와
소리와 알파벳을 선사하고,
어머니와 친구와 형제들, 그리고 내가 사랑하고 있는 이의
영혼의 길을 밝혀주는 빛도 주었고요.

내게 그토록 많은 것을 준 삶에 감사합니다.
삶은 피곤한 발로 진군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나는 그 피곤한 발을 이끌고 도시와 늪지,
해변과 사막, 산과 평야,
당신의 집과 거리, 그리고 당신의 정원을 거닐었습니다.

내게 그토록 많은 것을 준 삶에 감사합니다.
인간의 정신이 열매를 거두는 것을 볼 때
악에서 멀리 떠난 선을 볼 때
그리고 당신의 맑은 눈의 깊은 곳을 응시할 때
삶은 내게 그 틀을 뒤흔드는 마음을 선사했습니다.

내게 그토록 많은 것을 준 삶에 감사합니다.
삶은 내게 웃음과 눈물을 주어
슬픔과 행복을 구별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그 슬픔과 행복은 내 노래와 당신들의 노래를 이루었습니다.
이 노래는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들 모두의 노래입니다, 모든 노래가 그러하듯
내게 그토록 많은 것을 준 삶에 감사합니다.


*Mercedes Sosa - Gracias a La Vida


*VIOLETA PARRA - Gracias a la vida ( Thanks the life) ORIGINAL version

오늘 <슬픈 한국>의 글이 나를 슬프게 한다.

작성자:HUE
작성일:2009.11.03


교육 :

문명된 삶을 살고 있는 우리의 삶은 지식이라는 형식을 사용하고 전수하는 것이다. 교육은 이러한 지식의 형식 또는 문명된 삶의 형식에 사람들을 입문시킴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문명사회의 성숙한 구성원으로서 살아갈 수 있게 해준다.(브리태니커)

철학 혹은 철학자 :

지혜를 사랑하고 그것의 가르침에 따라 독립적이며 너그럽고 신뢰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 (헨리 데이빗 소로우 ‘월든’ 중에서)


<교단에 교사가 없는 한국>이라는 제목으로 쓴 ‘슬픈 한국’님의 글을 읽다가 눈과 마음이 어지러워 대충 건너뛰고 결말을 힐끗 본 뒤 책상을 정리한다.

“그는 슬플 수밖에 없는 슬픈 운명의 소유자이구나!”하고 탄식이 흘러 나왔고 오전에 나의 시간을 허비시키게 되는 슬픈 조우를 기록한다.

오늘 아침에도 아이들이 추위에 동동거리며 너나없이 마스크를 하고 등교하는 모습을 보았다. 보았다는 말 속에는 학교와 교사, 학생이라는 실재적 모습에서부터 교과 수업의 진행과 학생들이 형성하는 관계 등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는 뜻이다.

그런데 교단에 교사가 없다니?

지금 이 시간 한국에는 수많은 교사들이 교과과정에 따라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을 것이다. 교사들이 주어진 교재를 활용하여 교단에서 학생들에게 지식을 전수하고 있는 엄연한 현실을 앞에 두고 없.다.니. 뭐가 없는 걸까....

아마도 글쓴이가 혼자 정의하고 있는 <어떤 교육>혹은 <슬픈 교육>이 있어야 교단에 교사가 있다고 말해 줄 수가 있는 모양이다. 그게 도대체 뭘까???

‘촌지’를 이야기 한다. 촌지가 교단에 교사가 없다는 교육 부재 증명으로 비약한다. 교사가 촌지를 받느라고 교단을 비웠다는 뜻일까. 촌지가 뇌물이고 뇌물은 건강한 구조를 허무는 요소이므로 교단이 허물어졌다고 말하는 듯하다.

여기서 글쓴이가 간과하는 여러 문제는 젖혀 놓더라도 촌지 때문에 교단 없는 슬픈 한국의 현주소라고 말하기 전에 자신이 판단하는 교육이란 무엇인가를 제시해야 한다. 그래야 그것에 비추어 합당한가 어거지인가를 독자들이 판단할 것이다. 사회 경제를 슬프게 해석하기위해 들고 나온 교육 부재 증명치곤 남루하다.

당신이 생각하는 교육은 무엇인가? 나는 위에 브리태니커에 나오는 교육에 대한 사전적 의미를 제시했다. 내가 생각해 온 교육이 이와 다를 바 없기에 인용했다. 이로 미루어 교사는 지식을 전수하고 사회에 입문시키는 조력자이기도 하다. 조력자로서 교사에게 요구되는 일차적인 자질은 보편성과 중립성일 것이다. 나는 교사도 아니고 교육학자도 아니니 일일이 설명하기 번거롭다. 바라건대 당신이 아무리 슬프고 교단 없는 교실에 다녔더라도 한국의 평균적 교육 수준을 획득했으리라 짐작하며 쓰니 보편성이니 중립성에 대한 설명은 생략한다. 이러한 문제와 연관해서 교육의 부재를 탓한다면 일리가 있을 것이다.

당신이 말하는 촌지의 문제는 교육 현장에서 파생된 지엽적인 사회 문제이다. 이걸 곧바로 교육의 부재로 이끌어내는 사고력은 사실에 접근하기보다 어떤 작의를 정당화하기위한 아전인수에 가깝다.

글쓴이의 글을 처음 접했는데 과거에 어떤 주제를 가지고 썼는지 모르지만 위와 같은 글쓰기의 연장선상에 있었다면 본말이 전도된 시각이며 억지 주장이거나 침소붕대를 일상화한 성향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면서 결론으로 “자기반성”이 없는 사회를 꾸짖는다. 이 문제는 그야말로 곤혹스럽다. 시부럴 늪과 같은 문제 제기다. 시야를 한정하고 범위를 제시하면 그나마 단편적인 논의가 가능하겠고 그것으로 전체를 조망해 볼 여지는 있겠지만.

일단 글쓴이는 지식인 사회의 부조리와 교육 외적인 것들로 인해 교육이 훼손되고 나아 가 사회 경제의 구조적 모순을 중층화하는 현실을 개탄하고 있다. 누구나 공유하는 인식에 기대고 있을 뿐 해법이라곤 “자기반성”이다. 그래 내 탓이다. 이걸로 된겨?


글 쓰는 도화선이 되었거나 쓰다 생긴 잡념들.

1. 촌지

뇌물이라는 지탄을 뒤집어 쓴 말이지만 나는 여기에 기쁜 추억이 있다. 내 아이가 아파서 며칠 쉬었을 때 담임으로부터 고마운 배려를 경험했다. 아이는 자신의 결석으로 생긴 학교생활에 대한 불안이 있었는데 이를 담임선생님은 나와 충분한 사전 조율을 해주었고 야기될 문제들을 살펴 주었다. 그런 후 방학을 하는 날 아내가 선생님에게 고마움을 표하도록 주문하였다. 돈은 서로 낯붉힐 일이니 합당한 선물을 드리라고. 방학 후 선생님으로부터 편지가 왔는데 감사히 잘 받았다는 편지와 함께 작은 봉투가 동봉되어 있었다. 거기엔 방학 중 아이에게 읽히라며 도서 상품권이 들어 있었다. 아내가 드린 선물과 동일한 액면으로.

촌지로 교사를 비난하기 전에 학부모가 교육의 건정성 확보에 참여하는 게 좋다. 이는 마치 민주주의에서 유권자가 정치의 질을 형성한다는 주문과 같다.

2. 교육

교육의 문제점을 지적함으로서 정치 사회 경제에 대한 반면교사로 활용하는 경우를 자주 본다. 그런데 나는 이게 무척 조심스럽고 자신이 없다. 왜냐하면 교육은 생명의 진화와 동시에 시작되었고 그만큼 인류의 고민이 점철된 축적물이다. 그런 만큼 시대마다 문제점들이 발생했을 때 다듬어 온 역사적 연마물이어서 완성도가 대단히 높다. 한 개인의 일생에서나 감정적 시선으로 재단하기에는 아무리 조심해도 기껏 부스러기 한 점을 고깝게 보는 수준에 이르는 거여서 그렇다. 뭐 세상이 하루살이 앵앵거리며 사는 풍경이라면 할 말 없지만.

3. 선입견

타인과의 소통에서 선입견은 유불리가 작용하고 사람들은 이를 적절히 활용하기 위해 애쓴다. <슬픈한국>이라는 닉에서 '슬픈'이라는 형용은 비관적 시선을 지녔을 거라는 선입견을 준다. 이건 개인의 취향이긴 하나 교육에 있어서 이런 선입견을 줄 수 있는 행위는 촌지보다 해악이 크다고 말 할 수 있다. 교단은 지식의 매개지이며 교단에 선 자의 품성은 수혜자의 인생에 빛과 그늘이 된다 .


written by 'HUE'
(이 글의 저작권은 'HUE'님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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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글 날로 먹는 한 마디 : 어쩜, 내 맘이 딱 HUE맘야!!

(추임새)
내가 겪은 세 분의 우리집 을라 쌤들 모두 HUE님이 소개한 쌤 못잖았어요. 간혹 세상을 들쑤셔놓는 일부 말썽꾼 쌤들보다 아이들이 '문명사회의 성숙한 구성원으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사표로서의 역할을 묵묵히 수행하시는 쌤들이 훨 많다는 걸 증거하신 참존 쌤들이었어요. 세상의 모든 쌤들, 앗싸~지화자아 하세요!!! ===東山高臥===

햇볕슈퍼

작성자:햇볕 작성일:미상 근무하는 학교 후문 쪽에 조그마한 지하 구멍가게가 있습니다. 이름은 햇볕슈퍼입니다. 이름만 햇볕슈퍼지 햇볕이라곤 지면에 닿은 창틀에서 새들어오는 정보지 반 장 크기의 햇살이 전부입니다. 그러다보니 종종 빵들은 곰팡이가 풀풀 날 정도로 유통기간이 지나있고 알루미늄 음료수 캔들은 입댈 부분에 녹이 슬어있습니다. 담배만 사러 오는 이 슈퍼에 세 번째 날인가 용기를 내어 가게이름에 관해 묻기로 합니다. -이름이 예쁘네요, 가게……. 주인은 그냥 웃기만 합니다. -빨리 돈 버셔서 진짜 햇볕 잘 드는 곳으로 이사 가셔야겠어요. 그는 디스 한 갑을 건네며 계속 웃기만 합니다. 저는 ‘해가 따로 없구나. 밝게 웃는 그가 바로 해로구나’ 생각합니다. 담배은박지 끈을 당기며 밖으로 올라오는데, 눈을 뜰 수가 없습니다. 오, 찬란도 하여라. 대한민국 4월, 세 2시의 진정한 햇살! 아, 신이 있다면 부디 저 슈퍼, 이름값하게 하옵소서! 밀가루반죽에다 팥덩이와 햇볕 몇 조각을 집어넣던 모퉁이 붕어빵아줌마가 천원어치 빵이 익을 때까지 들려줍니다. 햇볕이는 교통사고로 죽은 그의 외동아들이며 작년엔 자궁암을 앓던 걔 엄마마저 세상을 떠났노라고……. 구워지는 붕어빵의 꼬리가 유난히 길어 보입니다. 지금도 목구멍에서 흔들리고 있습니다. written by '햇볕' (이 글의 저작권은 '햇볕'님에게 있습니다) 이 글은 무단 전재이므로 작자에게 양해를 구합니다. 삭제 권고하시면 언제든 삭제하겠습니다^^.===東山高臥===

화가와 모델과 그

작성자:설린자
작성일:미상


화가는 모델을 앞에 두고 캔버스 앞에 앉지 않는다.
앉지 않고 닫혀 있는 창문을 다시 닫는다. 커튼의
주름을 꼼꼼하게 어루만졌다가 굴곡 그대로 늘어지도록
섬세하게 조정한다. 가끔 곁눈질로 모델을 쳐다보지만
바닥에서 발견되는 머리카락을 줍고 창밖에 사라지는
구름의 흔적을 쫒는다.

화가는 모델을 주목할 수 없다.
모델 옆에는 창문이 있고 커튼이 있고 화구들이
있고 벽이 있고 벽지가 있다. 벽지는 마름모꼴 무늬의
연속이고 그걸 바라보고 있으면 약간 어지럽다. 눈을
깜빡거리고 정신을 차리면 벽이 물렁물렁해지면서
마름모꼴의 한 지점 속으로 한없이 빨려 들어간다.

무서운 속도 때문에 방 전체가 발사된 총알 같다.
화실 한쪽에는 허리 높이만한 탁자가 놓여 있고
그 위에 사과 한 알이 놓여 있다.

세잔의 사과가 있는 정물화에는 사과가 돌처럼
그려져 있다. 세잔의 사과는 영락없는 덩어리다.
사과의 무게보다 훨씬 무거운 사과다.

자코메티가 그린 정물화는 큰 탁자 위에 조그만
사과 한 알 놓여 있다. 탁자를 그린건지 사과를
그린건지 알 수 없다. 화가는 화집을 덮으면서

모델을 쳐다본다. 눈앞에 꿈틀꿈틀거리는 허공 휘장
안으로 사라지는 모델의 희미한 윤곽이 잔상으로 남는다.
그리곤 아주 천천히 허공마저 사라진다. 화가는 헤어날
수 없는 까마득한 오후의 깊이로 빠져 들어간다.

*

전과 같은 거리, 표시해 놓은 지점에 전과 똑같은
포즈로 모델은 벽과 천정과 창과 커튼 사이에
그것들과 함께 자리해 있다.

그림을 시도한 후 처음으로 화가의 눈은 모델에
주목한다. 눈의 손가락이 모델에 닿는다. 머리카락의
결과 냄새를 고르고, 눈의 색깔과 깊이에 손가락을
담그고, 귀의 감촉을 느끼고, 입술을 문지르고,
목덜미를 어루만지고, 팔, 손가락, 몸을 어루만진다.

만지는 눈에서 열이 날 때마다 눈까풀을 내렸다
올린다. 화가의 손은 부지런히 캔버스 위에 있는
모델을 지워 나간다. 그가 나타날

때까지 화가의 눈은 부지런히 모델을 문지른다.
그는 열기의 베일 사이로,
모델의 윤곽 너머로, 캔버스의 표면 위로
어른거린다. 사라질 듯 위태롭게 그는 나타난다.

그는 모델도 아니고, 그림도 아니고, 그림자도
아니다. 그는 화가도 아니고, 눈의 손가락이 문지를 때
그 마찰의 구멍에서 나타난다. 언제나 만지는 평범한
눈의 애무에서 언제나 비로소 시작되는 그는

사과이기도 하고 그림이기도 하고 글자이기도 하다.
아무튼 그는 항상 그이고 동시에 다른 무엇,
무엇이다! 피부를 뚫고 범람하는 현실을 보라!



written by '설린자'
(이 글의 저작권은 '설린자'님에게 있습니다)


이 글은 무단 전재이므로 작자에게 양해를 구합니다. 삭제 권고하시면 언제든 삭제하겠습니다^^.===東山高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