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슬픈 한국>의 글이 나를 슬프게 한다.

작성자:HUE
작성일:2009.11.03


교육 :

문명된 삶을 살고 있는 우리의 삶은 지식이라는 형식을 사용하고 전수하는 것이다. 교육은 이러한 지식의 형식 또는 문명된 삶의 형식에 사람들을 입문시킴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문명사회의 성숙한 구성원으로서 살아갈 수 있게 해준다.(브리태니커)

철학 혹은 철학자 :

지혜를 사랑하고 그것의 가르침에 따라 독립적이며 너그럽고 신뢰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 (헨리 데이빗 소로우 ‘월든’ 중에서)


<교단에 교사가 없는 한국>이라는 제목으로 쓴 ‘슬픈 한국’님의 글을 읽다가 눈과 마음이 어지러워 대충 건너뛰고 결말을 힐끗 본 뒤 책상을 정리한다.

“그는 슬플 수밖에 없는 슬픈 운명의 소유자이구나!”하고 탄식이 흘러 나왔고 오전에 나의 시간을 허비시키게 되는 슬픈 조우를 기록한다.

오늘 아침에도 아이들이 추위에 동동거리며 너나없이 마스크를 하고 등교하는 모습을 보았다. 보았다는 말 속에는 학교와 교사, 학생이라는 실재적 모습에서부터 교과 수업의 진행과 학생들이 형성하는 관계 등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는 뜻이다.

그런데 교단에 교사가 없다니?

지금 이 시간 한국에는 수많은 교사들이 교과과정에 따라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을 것이다. 교사들이 주어진 교재를 활용하여 교단에서 학생들에게 지식을 전수하고 있는 엄연한 현실을 앞에 두고 없.다.니. 뭐가 없는 걸까....

아마도 글쓴이가 혼자 정의하고 있는 <어떤 교육>혹은 <슬픈 교육>이 있어야 교단에 교사가 있다고 말해 줄 수가 있는 모양이다. 그게 도대체 뭘까???

‘촌지’를 이야기 한다. 촌지가 교단에 교사가 없다는 교육 부재 증명으로 비약한다. 교사가 촌지를 받느라고 교단을 비웠다는 뜻일까. 촌지가 뇌물이고 뇌물은 건강한 구조를 허무는 요소이므로 교단이 허물어졌다고 말하는 듯하다.

여기서 글쓴이가 간과하는 여러 문제는 젖혀 놓더라도 촌지 때문에 교단 없는 슬픈 한국의 현주소라고 말하기 전에 자신이 판단하는 교육이란 무엇인가를 제시해야 한다. 그래야 그것에 비추어 합당한가 어거지인가를 독자들이 판단할 것이다. 사회 경제를 슬프게 해석하기위해 들고 나온 교육 부재 증명치곤 남루하다.

당신이 생각하는 교육은 무엇인가? 나는 위에 브리태니커에 나오는 교육에 대한 사전적 의미를 제시했다. 내가 생각해 온 교육이 이와 다를 바 없기에 인용했다. 이로 미루어 교사는 지식을 전수하고 사회에 입문시키는 조력자이기도 하다. 조력자로서 교사에게 요구되는 일차적인 자질은 보편성과 중립성일 것이다. 나는 교사도 아니고 교육학자도 아니니 일일이 설명하기 번거롭다. 바라건대 당신이 아무리 슬프고 교단 없는 교실에 다녔더라도 한국의 평균적 교육 수준을 획득했으리라 짐작하며 쓰니 보편성이니 중립성에 대한 설명은 생략한다. 이러한 문제와 연관해서 교육의 부재를 탓한다면 일리가 있을 것이다.

당신이 말하는 촌지의 문제는 교육 현장에서 파생된 지엽적인 사회 문제이다. 이걸 곧바로 교육의 부재로 이끌어내는 사고력은 사실에 접근하기보다 어떤 작의를 정당화하기위한 아전인수에 가깝다.

글쓴이의 글을 처음 접했는데 과거에 어떤 주제를 가지고 썼는지 모르지만 위와 같은 글쓰기의 연장선상에 있었다면 본말이 전도된 시각이며 억지 주장이거나 침소붕대를 일상화한 성향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면서 결론으로 “자기반성”이 없는 사회를 꾸짖는다. 이 문제는 그야말로 곤혹스럽다. 시부럴 늪과 같은 문제 제기다. 시야를 한정하고 범위를 제시하면 그나마 단편적인 논의가 가능하겠고 그것으로 전체를 조망해 볼 여지는 있겠지만.

일단 글쓴이는 지식인 사회의 부조리와 교육 외적인 것들로 인해 교육이 훼손되고 나아 가 사회 경제의 구조적 모순을 중층화하는 현실을 개탄하고 있다. 누구나 공유하는 인식에 기대고 있을 뿐 해법이라곤 “자기반성”이다. 그래 내 탓이다. 이걸로 된겨?


글 쓰는 도화선이 되었거나 쓰다 생긴 잡념들.

1. 촌지

뇌물이라는 지탄을 뒤집어 쓴 말이지만 나는 여기에 기쁜 추억이 있다. 내 아이가 아파서 며칠 쉬었을 때 담임으로부터 고마운 배려를 경험했다. 아이는 자신의 결석으로 생긴 학교생활에 대한 불안이 있었는데 이를 담임선생님은 나와 충분한 사전 조율을 해주었고 야기될 문제들을 살펴 주었다. 그런 후 방학을 하는 날 아내가 선생님에게 고마움을 표하도록 주문하였다. 돈은 서로 낯붉힐 일이니 합당한 선물을 드리라고. 방학 후 선생님으로부터 편지가 왔는데 감사히 잘 받았다는 편지와 함께 작은 봉투가 동봉되어 있었다. 거기엔 방학 중 아이에게 읽히라며 도서 상품권이 들어 있었다. 아내가 드린 선물과 동일한 액면으로.

촌지로 교사를 비난하기 전에 학부모가 교육의 건정성 확보에 참여하는 게 좋다. 이는 마치 민주주의에서 유권자가 정치의 질을 형성한다는 주문과 같다.

2. 교육

교육의 문제점을 지적함으로서 정치 사회 경제에 대한 반면교사로 활용하는 경우를 자주 본다. 그런데 나는 이게 무척 조심스럽고 자신이 없다. 왜냐하면 교육은 생명의 진화와 동시에 시작되었고 그만큼 인류의 고민이 점철된 축적물이다. 그런 만큼 시대마다 문제점들이 발생했을 때 다듬어 온 역사적 연마물이어서 완성도가 대단히 높다. 한 개인의 일생에서나 감정적 시선으로 재단하기에는 아무리 조심해도 기껏 부스러기 한 점을 고깝게 보는 수준에 이르는 거여서 그렇다. 뭐 세상이 하루살이 앵앵거리며 사는 풍경이라면 할 말 없지만.

3. 선입견

타인과의 소통에서 선입견은 유불리가 작용하고 사람들은 이를 적절히 활용하기 위해 애쓴다. <슬픈한국>이라는 닉에서 '슬픈'이라는 형용은 비관적 시선을 지녔을 거라는 선입견을 준다. 이건 개인의 취향이긴 하나 교육에 있어서 이런 선입견을 줄 수 있는 행위는 촌지보다 해악이 크다고 말 할 수 있다. 교단은 지식의 매개지이며 교단에 선 자의 품성은 수혜자의 인생에 빛과 그늘이 된다 .


written by 'HUE'
(이 글의 저작권은 'HUE'님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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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글 날로 먹는 한 마디 : 어쩜, 내 맘이 딱 HUE맘야!!

(추임새)
내가 겪은 세 분의 우리집 을라 쌤들 모두 HUE님이 소개한 쌤 못잖았어요. 간혹 세상을 들쑤셔놓는 일부 말썽꾼 쌤들보다 아이들이 '문명사회의 성숙한 구성원으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사표로서의 역할을 묵묵히 수행하시는 쌤들이 훨 많다는 걸 증거하신 참존 쌤들이었어요. 세상의 모든 쌤들, 앗싸~지화자아 하세요!!! ===東山高臥===

춤과 율동이 포교당에 필요합니까?

불가에서 가무를 교분의 방편으로 삼는 행위들은 보기에 거북합니다.
사이비 종가들에서나 행하는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가벼운 처신입니다.

세속에서 바라보는 불가의 강점은 상대적 경건함입니다.
기독교 광신도란 말은 있어도 불교 광신도란 말이 인구에 회자되지 않는 까닭도 불가의 경건함을 존중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 전에서 수행하는 도반들의 모임에서 가무는 어떤 용도입니까?

가무로 한 바탕 놀고 나면 개운하던가요?
도반들 모두 혼연일체가 된 듯 진득한 연대감이 느껴지던가요?
위선과 가식과 점잔과 체면의 칠갑을 벗고 한층 진실한 나눔의 장으로 여겨지던가요?
그 상태로 가부좌를 틀면 부처님 말씀이 한결 귓가에 선명하던가요?
욕심을 버리고 깨달음을 얻으려 수행하는 자들이 어찌하여 욕심의 근원인 오감을 자극하며 흥을 도모하시는지요?
집단적 흥을 유발하여 목적을 극대화하는 사이비 종교 부흥회장의 가무와 무엇이 다른지요?
다단계 판매 교육장에서 또는 집회나 시위 현장에서 행해지는 집단의 가무와는 또 어떻게 다른지요?

세존께서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하실 때 천사색의 채화를 내리사 가섭이 그 뜻을 헤아리고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춤을 추었다고 전해지는 말 말고 승가나 불가에서 가무가 수행이나 수행자들 간 교분의 방편으로 행해진다는 소리는 못 들었습니다.

어제, 미디어법과 관련한 헌재의 판결이 관심을 끌었지요.

'권한침해는 인정되지만 법은 무효가 아니다'

많은 국민들이 법 해석에서 최고의 권위를 지닌 헌재의 판결에 의아해 합니다.
과정이 잘못된 결과를 옳다하기에 그렇습니다.

뽕을 빌어 무아지경에 이른 것을 득도라 하오리까?
술기운을 빌어 범하고서 사랑이라 하오리까?

편법으로 수행해서 얻은 도를 도라 일컬으면 대중들이 의아해 하지 않겠습니까?

노래는 노래방에서 부르고 춤은 춤방에서 추고 법당에선 쿵푸(工夫)를 하셔야지요.
몸이 뻐근하면 기체조나 요가 등 경건한 몸놀림으로 정신을 가다듬는 여타의 방법들도 많습니다.
포교당에서 말초신경을 자극하며 흥을 돋고 가무하는 모습은 어떤 연유로든 예뻐 보이진 않습니다.
포교과 조직 관리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여타 신흥 종교 집단들의 가벼움이 오버랩되어서 눈살이 찌푸려집니다.

불가에서 수행하는 목적은 부처님의 말씀을 깨닫고 행하는 것이지 조직의 확대가 아닙니다.
조직이 비대해지면 관료화되고 타성에 젖기 마련입니다.
비대해진 조직을 손쉽게 관리하기 위해 말초적 흥미를 자극하는 세속적 조직 관리 방식의 유혹에 빠져들면 곤란합니다.
조직 관리의 책무를 맡은 자나 구성원들이나 제보다 젯밥에 관심을 두는 꼴입니다.
깨달음이 목적인가요? 조직이 목적인가요?

조직 관리에 함몰되어 포교당을 놀이마당으로 착각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겠습니다.

===東山高臥===

햇볕슈퍼

작성자:햇볕 작성일:미상 근무하는 학교 후문 쪽에 조그마한 지하 구멍가게가 있습니다. 이름은 햇볕슈퍼입니다. 이름만 햇볕슈퍼지 햇볕이라곤 지면에 닿은 창틀에서 새들어오는 정보지 반 장 크기의 햇살이 전부입니다. 그러다보니 종종 빵들은 곰팡이가 풀풀 날 정도로 유통기간이 지나있고 알루미늄 음료수 캔들은 입댈 부분에 녹이 슬어있습니다. 담배만 사러 오는 이 슈퍼에 세 번째 날인가 용기를 내어 가게이름에 관해 묻기로 합니다. -이름이 예쁘네요, 가게……. 주인은 그냥 웃기만 합니다. -빨리 돈 버셔서 진짜 햇볕 잘 드는 곳으로 이사 가셔야겠어요. 그는 디스 한 갑을 건네며 계속 웃기만 합니다. 저는 ‘해가 따로 없구나. 밝게 웃는 그가 바로 해로구나’ 생각합니다. 담배은박지 끈을 당기며 밖으로 올라오는데, 눈을 뜰 수가 없습니다. 오, 찬란도 하여라. 대한민국 4월, 세 2시의 진정한 햇살! 아, 신이 있다면 부디 저 슈퍼, 이름값하게 하옵소서! 밀가루반죽에다 팥덩이와 햇볕 몇 조각을 집어넣던 모퉁이 붕어빵아줌마가 천원어치 빵이 익을 때까지 들려줍니다. 햇볕이는 교통사고로 죽은 그의 외동아들이며 작년엔 자궁암을 앓던 걔 엄마마저 세상을 떠났노라고……. 구워지는 붕어빵의 꼬리가 유난히 길어 보입니다. 지금도 목구멍에서 흔들리고 있습니다. written by '햇볕' (이 글의 저작권은 '햇볕'님에게 있습니다) 이 글은 무단 전재이므로 작자에게 양해를 구합니다. 삭제 권고하시면 언제든 삭제하겠습니다^^.===東山高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