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과 율동이 포교당에 필요합니까?

불가에서 가무를 교분의 방편으로 삼는 행위들은 보기에 거북합니다.
사이비 종가들에서나 행하는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가벼운 처신입니다.

세속에서 바라보는 불가의 강점은 상대적 경건함입니다.
기독교 광신도란 말은 있어도 불교 광신도란 말이 인구에 회자되지 않는 까닭도 불가의 경건함을 존중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 전에서 수행하는 도반들의 모임에서 가무는 어떤 용도입니까?

가무로 한 바탕 놀고 나면 개운하던가요?
도반들 모두 혼연일체가 된 듯 진득한 연대감이 느껴지던가요?
위선과 가식과 점잔과 체면의 칠갑을 벗고 한층 진실한 나눔의 장으로 여겨지던가요?
그 상태로 가부좌를 틀면 부처님 말씀이 한결 귓가에 선명하던가요?
욕심을 버리고 깨달음을 얻으려 수행하는 자들이 어찌하여 욕심의 근원인 오감을 자극하며 흥을 도모하시는지요?
집단적 흥을 유발하여 목적을 극대화하는 사이비 종교 부흥회장의 가무와 무엇이 다른지요?
다단계 판매 교육장에서 또는 집회나 시위 현장에서 행해지는 집단의 가무와는 또 어떻게 다른지요?

세존께서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하실 때 천사색의 채화를 내리사 가섭이 그 뜻을 헤아리고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춤을 추었다고 전해지는 말 말고 승가나 불가에서 가무가 수행이나 수행자들 간 교분의 방편으로 행해진다는 소리는 못 들었습니다.

어제, 미디어법과 관련한 헌재의 판결이 관심을 끌었지요.

'권한침해는 인정되지만 법은 무효가 아니다'

많은 국민들이 법 해석에서 최고의 권위를 지닌 헌재의 판결에 의아해 합니다.
과정이 잘못된 결과를 옳다하기에 그렇습니다.

뽕을 빌어 무아지경에 이른 것을 득도라 하오리까?
술기운을 빌어 범하고서 사랑이라 하오리까?

편법으로 수행해서 얻은 도를 도라 일컬으면 대중들이 의아해 하지 않겠습니까?

노래는 노래방에서 부르고 춤은 춤방에서 추고 법당에선 쿵푸(工夫)를 하셔야지요.
몸이 뻐근하면 기체조나 요가 등 경건한 몸놀림으로 정신을 가다듬는 여타의 방법들도 많습니다.
포교당에서 말초신경을 자극하며 흥을 돋고 가무하는 모습은 어떤 연유로든 예뻐 보이진 않습니다.
포교과 조직 관리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여타 신흥 종교 집단들의 가벼움이 오버랩되어서 눈살이 찌푸려집니다.

불가에서 수행하는 목적은 부처님의 말씀을 깨닫고 행하는 것이지 조직의 확대가 아닙니다.
조직이 비대해지면 관료화되고 타성에 젖기 마련입니다.
비대해진 조직을 손쉽게 관리하기 위해 말초적 흥미를 자극하는 세속적 조직 관리 방식의 유혹에 빠져들면 곤란합니다.
조직 관리의 책무를 맡은 자나 구성원들이나 제보다 젯밥에 관심을 두는 꼴입니다.
깨달음이 목적인가요? 조직이 목적인가요?

조직 관리에 함몰되어 포교당을 놀이마당으로 착각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겠습니다.

===東山高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