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oleta Parra, Mercedes Sosa

한겨레 신문 / 곽병찬칼럼
2008.06.04

불가사의했다. 도시는 체포와 학살, 사찰과 고문으로 신음하는데 어떻게 이런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 “도시와 웅덩이, 해변과 사막, 산과 들/ 그리고 너의 집과 나의 길/ 피곤하지만, 행진을 할 수 해준 나의 다리/ 이 많은 것을 나에게 준 삶이여, 감사합니다.” 게다가 ‘기타는 총, 노래는 총알’이라던 누에바 칸시온(새로운 노래) 운동의 대모, 비올레타 파라(칠레)가 작곡하고, 고통받는 이들의 어머니라는 메르세데스 소사(아르헨티나)가 부른 노래라니!

당시 칠레는 3천여 명의 시민을 학살했고, 체포와 구금 고문 등을 피해 100만여 명이 고국을 등지게 한 피노체트의 철권통치 아래 있었고, 아르헨티나에선 군부정권의 더러운 전쟁 속에서 3만여 명이 피살 혹은 실종된 상황이었다. 산다는 건, 그 자체로 ‘고통이고 투쟁이고 저항’이었다. 그럼에도, 삶에 감사하는 이 노래는 독재의 심장을 향해 날아가는 총알이었다!

이 오래된 의문과 경탄이 요즘 다시 살아난다. 진압 경찰의 방패에 찍히고, 몽둥이에 뒤통수를 맞고, 군홧발에 짓밟히고, 물대포에 고막이 찢겨도 그들은 물러서지 않았고, 치켜든 촛불은 꺼지지 않았다. 오히려 타고난 생기발랄은 시청에서 광화문 네거리에 이르는 너른 광장을 한 달째 춤과 노래와 해학과 풍자가 넘치는 ‘민주주의 놀이터’로 만들었다. 그들은 비장하지 않았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돌을 들지 않았고, 쇠파이프로 무장하지도 않았다. 비무장의 그들은 흔들리는 촛불이었고, 막히면 비켜가는 물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이 아니라 공권력의 강철대오가 흔들린다. 엄포와 협박을 일삼던 검찰 경찰 정권은 실색했다.

하긴 간난 아기를 태운 엄마들의 유모차 부대가 앞장서고 아이들을 목말 태운 아빠들이 뒤를 따르는데, 막아서면 ‘텔미 춤’을 추고 협박하면 노래나 하라는데, 길이 막히면 주저앉아 장기자랑 노래자랑으로 초여름 밤을 즐기는데, 때리면 그저 얻어터지는 게 제 역할이라는 예비군들이 대열을 보호하는데, 거기에 대고 무슨 짓을 할 수 있을까.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고 노래하는 이들을, 반국가단체 찬양 고무죄로 처벌할까 내란죄로 주리를 틀까. 이렇게 신나고 흥겨운 민주주의가 세상 어디에 있었던가.

한때 민주주의는 치명적인 것이었다. 입밖에 내려면, 이를 악물고 신발끈을 단단히 동여매야 했다. 무차별 구타와 투옥도 각오해야 했다. 그래서 대개는 그저 “타는 가슴속 목마름의 기억”으로,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치 떨리는 노여움”으로 신새벽 뒷골목에서, 남몰래 ‘민주주의여 만세’(김지하 ‘타는 목마름으로’)라고 끼적이는 게 고작이었다. 그만큼 민주주의는 비장한 것이었다.

그러면 무엇이 이 비장한 민주주의를 행복한 것으로 전복시켰을까. 남미 민중이 그 혹독한 억압과 저항 속에서 ‘삶이여 감사’하다고 노래했던 것은 단지 낙천성 탓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억압을 해학과 풍자로 풀어내는 능력, 이웃과 공동체의 고통에 대한 공감의 능력, 삶을 사랑하고 즐기는 생기발랄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거기에 우리의 젊은 벗들은 정의의 감수성과 연대의 힘까지 갖추었다. 그러니 더 행복한 민주주의로 향한 그들의 행진을 어찌 물대포로 막을 수 있을까.

젊은 벗들이여, 감사합니다. 그대는 일쑤 비장하고, 그래서 일쑤 주저앉는 우리에게 희망하는 법을 알게 하고, 서로 연대하고 의지하는 법을 알게 했습니다. 그대의 노래는 나의 노래이며, 그대의 춤은 우리의 춤입니다. 그대들을 우리 곁에 두신 삶이여 감사합니다.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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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cias a la vida (삶에 감사합니다)


내게 그토록 많은 것을 준 삶에 감사합니다.
삶은 눈을 뜨면 흑과 백을 완벽하게 구별할 수 있는
빛나는 두 눈을 내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높은 하늘에는 빛나는 별을,
많은 사람들 중에는 내 사랑하는 이를 주었습니다.

내게 그토록 많은 것을 준 삶에 감사합니다.
삶은 밤과 낮에 귀뚜라미와 카나리아 소리를 들려주고,
망치 소리, 터빈 소리, 개짖는 소리, 빗소리,
그리고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이의 그토록 부드러운 목소리를
녹음해 넣을 수 있는 넓은 귀도 주었답니다.

내게 그토록 많은 것을 준 삶에 감사합니다.
삶은 생각하고 그 생각을 주장할 수 있는 언어와
소리와 알파벳을 선사하고,
어머니와 친구와 형제들, 그리고 내가 사랑하고 있는 이의
영혼의 길을 밝혀주는 빛도 주었고요.

내게 그토록 많은 것을 준 삶에 감사합니다.
삶은 피곤한 발로 진군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나는 그 피곤한 발을 이끌고 도시와 늪지,
해변과 사막, 산과 평야,
당신의 집과 거리, 그리고 당신의 정원을 거닐었습니다.

내게 그토록 많은 것을 준 삶에 감사합니다.
인간의 정신이 열매를 거두는 것을 볼 때
악에서 멀리 떠난 선을 볼 때
그리고 당신의 맑은 눈의 깊은 곳을 응시할 때
삶은 내게 그 틀을 뒤흔드는 마음을 선사했습니다.

내게 그토록 많은 것을 준 삶에 감사합니다.
삶은 내게 웃음과 눈물을 주어
슬픔과 행복을 구별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그 슬픔과 행복은 내 노래와 당신들의 노래를 이루었습니다.
이 노래는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들 모두의 노래입니다, 모든 노래가 그러하듯
내게 그토록 많은 것을 준 삶에 감사합니다.


*Mercedes Sosa - Gracias a La Vida


*VIOLETA PARRA - Gracias a la vida ( Thanks the life) ORIGINAL version

오늘 <슬픈 한국>의 글이 나를 슬프게 한다.

작성자:HUE
작성일:2009.11.03


교육 :

문명된 삶을 살고 있는 우리의 삶은 지식이라는 형식을 사용하고 전수하는 것이다. 교육은 이러한 지식의 형식 또는 문명된 삶의 형식에 사람들을 입문시킴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문명사회의 성숙한 구성원으로서 살아갈 수 있게 해준다.(브리태니커)

철학 혹은 철학자 :

지혜를 사랑하고 그것의 가르침에 따라 독립적이며 너그럽고 신뢰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 (헨리 데이빗 소로우 ‘월든’ 중에서)


<교단에 교사가 없는 한국>이라는 제목으로 쓴 ‘슬픈 한국’님의 글을 읽다가 눈과 마음이 어지러워 대충 건너뛰고 결말을 힐끗 본 뒤 책상을 정리한다.

“그는 슬플 수밖에 없는 슬픈 운명의 소유자이구나!”하고 탄식이 흘러 나왔고 오전에 나의 시간을 허비시키게 되는 슬픈 조우를 기록한다.

오늘 아침에도 아이들이 추위에 동동거리며 너나없이 마스크를 하고 등교하는 모습을 보았다. 보았다는 말 속에는 학교와 교사, 학생이라는 실재적 모습에서부터 교과 수업의 진행과 학생들이 형성하는 관계 등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는 뜻이다.

그런데 교단에 교사가 없다니?

지금 이 시간 한국에는 수많은 교사들이 교과과정에 따라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을 것이다. 교사들이 주어진 교재를 활용하여 교단에서 학생들에게 지식을 전수하고 있는 엄연한 현실을 앞에 두고 없.다.니. 뭐가 없는 걸까....

아마도 글쓴이가 혼자 정의하고 있는 <어떤 교육>혹은 <슬픈 교육>이 있어야 교단에 교사가 있다고 말해 줄 수가 있는 모양이다. 그게 도대체 뭘까???

‘촌지’를 이야기 한다. 촌지가 교단에 교사가 없다는 교육 부재 증명으로 비약한다. 교사가 촌지를 받느라고 교단을 비웠다는 뜻일까. 촌지가 뇌물이고 뇌물은 건강한 구조를 허무는 요소이므로 교단이 허물어졌다고 말하는 듯하다.

여기서 글쓴이가 간과하는 여러 문제는 젖혀 놓더라도 촌지 때문에 교단 없는 슬픈 한국의 현주소라고 말하기 전에 자신이 판단하는 교육이란 무엇인가를 제시해야 한다. 그래야 그것에 비추어 합당한가 어거지인가를 독자들이 판단할 것이다. 사회 경제를 슬프게 해석하기위해 들고 나온 교육 부재 증명치곤 남루하다.

당신이 생각하는 교육은 무엇인가? 나는 위에 브리태니커에 나오는 교육에 대한 사전적 의미를 제시했다. 내가 생각해 온 교육이 이와 다를 바 없기에 인용했다. 이로 미루어 교사는 지식을 전수하고 사회에 입문시키는 조력자이기도 하다. 조력자로서 교사에게 요구되는 일차적인 자질은 보편성과 중립성일 것이다. 나는 교사도 아니고 교육학자도 아니니 일일이 설명하기 번거롭다. 바라건대 당신이 아무리 슬프고 교단 없는 교실에 다녔더라도 한국의 평균적 교육 수준을 획득했으리라 짐작하며 쓰니 보편성이니 중립성에 대한 설명은 생략한다. 이러한 문제와 연관해서 교육의 부재를 탓한다면 일리가 있을 것이다.

당신이 말하는 촌지의 문제는 교육 현장에서 파생된 지엽적인 사회 문제이다. 이걸 곧바로 교육의 부재로 이끌어내는 사고력은 사실에 접근하기보다 어떤 작의를 정당화하기위한 아전인수에 가깝다.

글쓴이의 글을 처음 접했는데 과거에 어떤 주제를 가지고 썼는지 모르지만 위와 같은 글쓰기의 연장선상에 있었다면 본말이 전도된 시각이며 억지 주장이거나 침소붕대를 일상화한 성향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면서 결론으로 “자기반성”이 없는 사회를 꾸짖는다. 이 문제는 그야말로 곤혹스럽다. 시부럴 늪과 같은 문제 제기다. 시야를 한정하고 범위를 제시하면 그나마 단편적인 논의가 가능하겠고 그것으로 전체를 조망해 볼 여지는 있겠지만.

일단 글쓴이는 지식인 사회의 부조리와 교육 외적인 것들로 인해 교육이 훼손되고 나아 가 사회 경제의 구조적 모순을 중층화하는 현실을 개탄하고 있다. 누구나 공유하는 인식에 기대고 있을 뿐 해법이라곤 “자기반성”이다. 그래 내 탓이다. 이걸로 된겨?


글 쓰는 도화선이 되었거나 쓰다 생긴 잡념들.

1. 촌지

뇌물이라는 지탄을 뒤집어 쓴 말이지만 나는 여기에 기쁜 추억이 있다. 내 아이가 아파서 며칠 쉬었을 때 담임으로부터 고마운 배려를 경험했다. 아이는 자신의 결석으로 생긴 학교생활에 대한 불안이 있었는데 이를 담임선생님은 나와 충분한 사전 조율을 해주었고 야기될 문제들을 살펴 주었다. 그런 후 방학을 하는 날 아내가 선생님에게 고마움을 표하도록 주문하였다. 돈은 서로 낯붉힐 일이니 합당한 선물을 드리라고. 방학 후 선생님으로부터 편지가 왔는데 감사히 잘 받았다는 편지와 함께 작은 봉투가 동봉되어 있었다. 거기엔 방학 중 아이에게 읽히라며 도서 상품권이 들어 있었다. 아내가 드린 선물과 동일한 액면으로.

촌지로 교사를 비난하기 전에 학부모가 교육의 건정성 확보에 참여하는 게 좋다. 이는 마치 민주주의에서 유권자가 정치의 질을 형성한다는 주문과 같다.

2. 교육

교육의 문제점을 지적함으로서 정치 사회 경제에 대한 반면교사로 활용하는 경우를 자주 본다. 그런데 나는 이게 무척 조심스럽고 자신이 없다. 왜냐하면 교육은 생명의 진화와 동시에 시작되었고 그만큼 인류의 고민이 점철된 축적물이다. 그런 만큼 시대마다 문제점들이 발생했을 때 다듬어 온 역사적 연마물이어서 완성도가 대단히 높다. 한 개인의 일생에서나 감정적 시선으로 재단하기에는 아무리 조심해도 기껏 부스러기 한 점을 고깝게 보는 수준에 이르는 거여서 그렇다. 뭐 세상이 하루살이 앵앵거리며 사는 풍경이라면 할 말 없지만.

3. 선입견

타인과의 소통에서 선입견은 유불리가 작용하고 사람들은 이를 적절히 활용하기 위해 애쓴다. <슬픈한국>이라는 닉에서 '슬픈'이라는 형용은 비관적 시선을 지녔을 거라는 선입견을 준다. 이건 개인의 취향이긴 하나 교육에 있어서 이런 선입견을 줄 수 있는 행위는 촌지보다 해악이 크다고 말 할 수 있다. 교단은 지식의 매개지이며 교단에 선 자의 품성은 수혜자의 인생에 빛과 그늘이 된다 .


written by 'HUE'
(이 글의 저작권은 'HUE'님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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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글 날로 먹는 한 마디 : 어쩜, 내 맘이 딱 HUE맘야!!

(추임새)
내가 겪은 세 분의 우리집 을라 쌤들 모두 HUE님이 소개한 쌤 못잖았어요. 간혹 세상을 들쑤셔놓는 일부 말썽꾼 쌤들보다 아이들이 '문명사회의 성숙한 구성원으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사표로서의 역할을 묵묵히 수행하시는 쌤들이 훨 많다는 걸 증거하신 참존 쌤들이었어요. 세상의 모든 쌤들, 앗싸~지화자아 하세요!!! ===東山高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