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바람에게 전하는 말



세상엔 아픔들이 참 많습니다.

붓다는 세상 아픔들을 가시우고자
왕좌를 마다하고 누더기를 걸친 채
보리수나무 아래 가부좌를 틀었고
예수는 가시관을 두르고 십자가를 메고서
골고다의 언덕을 걸었습니다.

붓다나 예수만큼은 아녀도
사람이란 무릇 세상의 아픔에 천착하면
도가 트나 봅니다.

기쁨을 나누면 배가 되고
아픔을 나누면 반이 된다는데
내 앞가림이 바빠
주변의 아픔을 돌아보는 일에
많이도 무뎌졌습니다.

젊어 한 때는
세상의 아픔에 천착하여 답을 구하매
큰 것을 뒤집어 세상의 아픔을
한 방에 걷어 내리라는 만용도 부렸으나
그게 헛방임을 알았습니다.

아픔은
큰 거 한 방으로 뒤집는 것이 아니라
형제 간에 이웃 간에 토닥토닥 나누는
작은 情으로 쪼개는 것이라는
그 범상한 진리를 깨닫기까지
꽤 먼 길을 공전했습니다.

생면부지의 사람들에게 아픔을 느끼며
남몰래 작은 희망을 갈무리합니다.

아픔을 쪼개는 작은 情으로만 화답할 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난' 다만
내 갈무리해둔 희망이
쑥쑥 잘 자라기만을 기도합니다.


===東山高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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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강수-꽃이 바람에게 전하는 말

30대 여교사를 위한 변명


잘못이다. 아주 큰 잘못이다. 그 어떤 변명으로도 감당치 못할 정말 큰 잘못이다. 몇 달 전 초등학생 제자를 무자비한 발길질로 구타하여 악명을 드높였던 ‘오장풍’ 교사의 교단 파행이 채 기억에서 가시기도 전에 교단에서 또 한 번 별스런 일이 터졌다. 얼마 전 외신에서 보았던 또 남의 나라 일인가 했다. 30대 여교사와 제자 간의 불륜(사랑?), 소설이나 영화와도 같은 일이 학교 담장을 넘어 온 나라를 들쑤시는 중이다.

대한민국에선 ‘별스런 일’(?)인 만큼 세간의 관심은 몹시도 뜨겁고 네티즌들은 사냥개 같은 후각으로 언론에서 제공된 단서들을 뒤쫒아 가십거리를 재생산하고 있다. 이름 하여 ‘신상 털기’다. 당사자들은 물론이거니와 피해자격인 가족들의 신상까지 털고 있다 하니 그 도를 넘는 추적 행위가 가혹하다 싶다.

http://kr.news.yahoo.com/service/news/shellview.htm?linkid=459&articleid=20101020041425224h2&newssetid=1270

“네티즌 수사대가 부도덕한 사람들의 치부를 드러내 가려진 진실을 파헤치는 긍정적 기능도 한다.”면서 “도가 지나쳐 가족들의 신상까지 들추는 행위는 관음증적 요소가 다분해 바람직하지 않다.”라는 표창원 경찰대 교수의 지적은 여교사 추적에 공들이는 네티즌들이 귀에 담을 만하다.

생각을 말끔히 정리하기가 꽤 혼란스러운 사건이다. 처음 뉴스를 접했을 때 여교사가 사춘기 아이 만큼이나 참 철없는 짓을 했구나 싶었고 혀를 찰 일로 와닿았다. 그런데 넷상에서 여교사의 신상은 물론 그녀 가족의 신상마저 탈탈 털릴 지경에 이르자 여교사에 대한 비난보다는 그녀와 그 가족들에 대한 염려와 동정이 앞선다. 오지랖이 넓은 걸까?

인터넷이 세상을 참 많이도 바꾸어 놓았다. 어느 시골마을 이장님 방귀 소리까지 온 국민이 공유 가능한 세상이다. 세상이 인터넷의 그물에 갇히기 전 이장님의 방귀 소리는 동구 밖을 넘지는 않았다. 이장님의 방귀 소리는 그저 동네 우물가에 모인 아낙들의 수다속에서만 은밀히 떠돌 뿐이었다.

지금은 기억에서 가물거리는 우리네 학창 시절에도 여교사와의 염문은 참인지 거짓인지 모른 채 봄바람에 살랑살랑 실려 오거나 가을 낙엽에 낙서처럼 쓰여 있곤 했었다. 며칠 사이 난도질당하고 있는 여교사와 학생 간의 염문이 난생 첨 접할 만큼 ’해괴하고 별스런’ 엽기적 영역에 속하는 일이 아니라 동서고금을 망라하여 동네 어귀를 벗어나지 않았을 뿐 공공연한 비밀의 영역에 있었다는 거다. 학창 시절을 거치면서 교사와 학생 간의 염문을 단 한 번이라도 듣지 않고 학창 시절을 보낸 이가 과연 있을까 싶다.

‘남녀칠세부동석’이란 옛말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니다. 사람이 제 아무리 고매한 인격을 가졌고 특별한 사회적 지위를 지녔다 하더라도 동물적 본능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새벽 1시 세상이 모두 잠든 시각, 하느님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지붕을 일시에 싹 걷어 내었을 때 사람들의 형상은 어떠할까? 자위하는 늠, 공부하는 늠, 바람 피는 늠, 술 먹는 늠, 넷질하는 늠, 마약하는 늠, 도둑질하는 늠, 잠자는 늠, 그짓 하는 늠, 이짓 하는 늠,...등등등. 세상 도덕의 기준으로 봤을 때 언제 어느 순간에도 어떤 장소에서도 한결같이 당당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그 날 말고 담날엔 또 담날엔, 1년 뒤엔, 또 십년 뒤에는???

여교사 사건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아줌마가 어린 시절 ‘남학생’에 대한 동경이 몹시도 강했었나 보다. 오빠나 남동생도 없었고 학창 시절 남학생과 사겨본 적도 없고 결혼해서도 아들을 키워본 적도 없나 보다. 막상 교사가 되어 어릴 적 동경했던 풋풋한 남학생들이 눈앞에서 우글대니 그 중 참 괜찮은 이쁜 녀석한테 불시에 맘을 뺏겼었나 보다. 아님 아직도 낭만적 소설이나 영화를 너무도 좋아하는 문학소녀의 감수성을 성인이 되어서도 떨쳐버리지 못했거나, 또 아니면 아주 불순하고 특이한 연애 개념을 지닌 아짐인가 보다'라고...이 글이 변명해줄 수 있는 영역의 밖에 있는 후자 쪽은 아니기를 바랄 뿐.

‘원조교제’란 말은 사전을 뒤적이지 않아도 익숙해진 일상어가 된 지 오래고 유부남 유부녀가 변변한 이성 친구 하나 없으면 쪼다 소리 들을 만큼 도덕의 굴레 밖에서 이루어지는 은밀한 남녀상렬지사는 연령과 학식, 사회적 지위나 신분을 초월하여 횡행하는 공공연한 비밀이다. 아이들이 모르는 어른들의 세계가 그렇고 그렇지 아니한가?

애써 이런 얘길 꺼내는 것은, 깨끗한 자만이 여교사에게 돌을 던지라거나 이번 사건을 시시콜콜하고 대수롭지 않은 일로 슬쩍 넘기고자 하는 물타기의 의도는 아니다. ‘교육’의 방향에서 엄밀하게 접근하면 여교사의 행위는 비록 형법상의 처벌은 불가능하다 해도 도덕적으로 충분히 지탄 받아 마땅하고 변호의 여지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내가 여교사를 위해 토를 다는 건, 부족했던 절제력과 왜곡된 개인적 성향으로 인해 ‘발생할 수도 있는 일을 저지른 것에 대한 죗값치고는 너무 가혹하다’는 우려 때문이다.

인터넷 세상이기에 법적 처벌보다 도덕적 처벌이 훨씬 가혹할 수도 있다. 나 또한 서핑 중에 우연히 여교사의 신상과 사진을 보게 되었고 아이맘에게 보라 했더니 싫다고 한다. 살다보면 어디선가 마주칠지도 모를 일인데 구태여 선입견을 갖고 그 사람을 대하는 일이 부담스럽다고 한다. 미처 내가 생각지 못한 좋은 배려고 좋은 생각이다.

여교사의 행위가 형법상의 단죄를 받지 않는 것에 대해 여전히 분기탱천한 사람들이 있다면 이제는 그 분심을 누그러뜨리라고 권하고 싶다. 여교사에게 내려진 벌이란 게 벌써 이렇다. 신상이 털림으로써 그녀는 완전한 고립무원의 지경에 처했다. 남편과 아이들, 친정과 시댁, 직장, 초중고대 동창생들, 동네 사람들, 그의 사회적 관계 지인들,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 아니 온 대한민국 국민들의 기억 속에 그녀가 어찌 각인되었을지 생각해 보라. 얼굴과 이름 석 자와 신상들이 모두 털린 마당에 그녀가 어디에선들 얼굴이나 들 수나 있을까? 과연 어디에서 자신의 실수를 털어내고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을까? 가족들로부터도 버림 받은 채 홀홀 단신 이민이라도 가야 하나? 감성이 여린 사람이라면 지금쯤 자신이 저지른 실수에 대한 혹독한 대가가 어떤 것인지 자각하고서 아마도 죽고 싶은 심정일 게다. 솔까말 저 여교사가 차라리 뻔뻔했으면 좋겠다. 여린 성격의 소유자라면 향후 그녀의 안위가 염려스럽고 그와 별도로 그 남편과 아이들, 친정과 시댁의 가족형제들이 받고 있을 정신적 고통까지 생각하면 참으로 안쓰럽기까지 하다. 형법상으로는 죄를 물을 수도 없는 죽을 죄도 아닌데 한때의 불장난질에 대한 후과가 죽기보다 더한 고통이라면?

이 정도 생각에 이르자 네티즌들의 남편 신상털기는 나가도 너무 나간다는 생각이 든다. 여교사는 지금 정도로도 충분히 끔찍스러울 정도의 도덕적 지탄과 형벌을 받고 있다. 과유불급이라 했다. 여교사에 대한 네티즌들의 과도한 관심에 자중을 권하고 싶다.


===東山高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