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수가 100분 토론까지 점령했다. 나가수가 과연 물건이긴 한 모양이다. 대중들의 관심이 그만큼 높다는 반증이겠다. 대중들은 왜. 도대체 왜, 나가수에 그토록 열광하는 걸까? ‘첫 탈락자의 재도전과 소동’ 이라는 의도하지 않은 노이즈 마케팅의 효과가 상승 작용을 일으킨 건 분명해 보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뭔가가 분명 있었다.(이 글은 이 뭔가를 심층적으로 분석하는 글은 아니다. 그럴 능력도 엄꼬^^)
재도전을 둘러싼 한바탕 소동은 그저 개울 건너 열광의 도가니로 안내하는 징검다리에 지나지 않았다. 나가수가 있는지조차 모르던 나 역시 그 징검다리를 보고 왔다. 짧은 시간 동안 실망과 감동이 뒤범벅된 나가수는 그런 시끌벅적한 소동이 없었어도 충분히 그 자신만의 아우라를 지닌 또 하나의 세상이었다. 신선했다.
무한 경쟁! 자본주의 사회를 지탱하는 최대 강점인 동시에 인성을 파훼하는 최대 결점이라는 두 얼굴을 가진 이 신물 나는 단어를 보조타이틀로 내건 프로그램을 일러 신선하다니? 혹자의 귀엔 망발로 비칠 수도 있겠다. 시발, 서바이벌! 어쩌랴, 삶 자체가 서바이벌인 것을.
http://kr.news.yahoo.com/service/news/shellview.htm?articleid=20110401082557597c4&linkid=63&newssetid=487&from=rank
100분 토론에 나섰던 신해철의 귀엔 그리 들렸던 듯하다. 그는 나가수를 ‘프로 가수들이 검투사처럼 자기들끼리 치고받고 싸우는 결국은 쇼’일 뿐이라고 혹평했다. 신해철의 말은 생각 좀 한다는 사람들의 정서를 대변한 것일 수도 있겠다. 소위 지각이 좀 있노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의 나가수를 향한 비판의 뼈대는 무한경쟁에 대한 경계였고 음악의 예능화에 대한 우려였다.
초행길에 헛발 디딘 등신 같은 실수는 범했지만 참여한 가수들이 신해철류의 비판을 이해치도 못하는 지각없는 가수들은 아녔다고 믿는다. 구경하는 시청자들에겐 감동이겠지만 경쟁하는 자신들은 죽을 맛이라던 김범수의 말은 사력을 다해야만 하는 검투사의 심정을 잘 나타낸 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투사로 나서야만 했던 절박한 이유들은 무엇이었을까? 그 무슨 절박한 이유가 있었기에 그들은 당대를 호령하던 최고가수로서의 자존심을 판돈으로 내걸고 출사표를 던져야만 했던 걸까?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박정현은 ‘우리가 어떻게 음악을 하는지를 보아 달라’는 말 속에 담아냈다. 그것은 나가수에 참여한 가수들 모두의 염원이었을 것이다.
무한경쟁에서 패배가 현실로 다가온 위기의 순간에 국민가수로서의 여유와 위풍당당함을 보여주던 김건모의 그 당혹스러워하던 표정이 생생하다. 많은 이들이 우려했듯 무한경쟁이 빚어내는 인성 파훼를 증명하는 장면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아찔했으나 그들은 훌륭하게 극복해냈고 그 위기를 넘은 감동은 비단 대중들 뿐만 아니라 참여 가수들도 함께 누렸다. 다른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무슨 일이든 열과 성을 다하는 사람들은 아름답다. 최선을 다한 후에 혼과 진이 다 빠진 사람들은 아름답다 못해 숭고해 보이기까지 한다.' 바로 이 점이 나가수 감동의 핵이었다. 잘 하는 사람들을 더욱 잘 하도록 다그친 선의의 경쟁이 안받침되어 발산된 최고의 노래들!
나가수는 비쥬얼만 좋으면 건성으로 해도 먹어주는 요즘 가요계에서 진성에 목말라 있던 대중들의 갈증을 시원하게 해소시켜준 가뭄 끝의 단비와도 같았다.
그거면 된 거다. 자본주의 사회를 대신할 혁명을 실패로 선언했으면 무한경쟁도 받아들일 일이다. 무한경쟁이 언제나 절대악인 것도 아니기에 그 폐단을 알고서 단맛은 빨되 쓴맛은 경계하면 된다. 나가수에서의 무한경쟁도 약간만 보완하면 쓴맛보다는 분명 단맛이 많은 장치다. 벌써 그 단맛에 홀린 대중들은 한 달 간의 결방을 못내 아쉬워하고 가수들은 혹시나 해서 전화기를 귀에 달고 산다. 성급한 어떤 가수는 먼저 나서서 추파를 던지기까지 할 정도다. 신드롬이라 해도 좋을 만큼 단기간에 이처럼 기성 가수들과 대중들의 폭발적인 관심을 집중시킨 가요 프로그램은 일찌기 없었다. 이토록 대중들을 열광시킨 나가수를 두고 가수들의 인성을 파훼하고 기성 가요계를 위협하고 마구 흔들어대는 악성 기획으로 비난하는 사람들의 생각은 어떤 것일까? 글 한 편 소개한다.
http://blog.daum.net/goorabrain/2229
위 링크 글을 보면 나가수에 대한 이런저런 성급한 비판들 속엔 나가수의 선택을 받지 못한 자들과 음원 수입이 줄어들 것을 우려하는 가요기획사들이 질투하는 심리가 엿보인다. 기성 질서를 향한 나가수의 도전에 따른 응전인 셈이다. 한 차례 홍역을 치루었듯 가지 않은 길을 걷는 첫발에 완벽함이란 없다. 너무 짧은 시간에 대중들의 질타와 사랑을 동시에 경험한 나가수가 어떤 모습으로 나갈 수 있을지 관심 있는 사람들이 좀 더 지켜보았으면 한다. 나가수가 일으킨 도발이 기성 가요계의 타성을 일깨운 것만으로도 나가수는 이미 제 역할을 했다. 아이돌에 환호하는 십대와 이십대만 대중이 아니고 김건모와 이소라에 환호하는 삼십대 사십대 오십대 이상도 대중임을 나가수는 청중평가단 구성을 통해 항변했다. 공연장을 찾을 정도는 아니지만 좋은 노래에는 감동할 줄 아는 다양한 연령층의 대중들을 다시 노래의 두리로 응집시킨 것은 나가수가 거둔 최대의 성과다. 내 보기엔 위 링크 글에서 언급하는 '대중'이란 단어는 '연령층이나 적극성'의 면에서 제한적인 '대중'을 보다 포괄적인 대중의 개념으로 일반화시킨 측면이 있다.
나가수에 대해 비판적인 가요기획사들이나 사람들이 부정하지는 말아야할 것은 꿀벅지와 식스팩에 환호하는 신식(?) 대중들 못지 않게 거기에서 소외된 구식(?) 대중들도 가장 편한 시간대에, 가장 편한 수단을 통해서, 듣고 싶은 노래를 듣고, 보고 싶은 가수를 볼 권리가 있다는 점이다. 나아가 잘 하는 사람들이 더 잘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은 욕망을 지닌 가수들 또한 더욱 좋은 장소, 좋은 환경에서 노래를 부를 권리가 있다는 것도 인정해야만 한다.
나가수에서의 '경쟁'이란 장치는 대중들의 감동을 증폭시키는 핵심적인 수단이다. 아이돌 가수들이 현란한 춤이나 성형과 같은 '노래 외적 장치'로 자신들의 노래에 호소력을 더하는 것과 같이 동일한 맥락으로 이해하면 안될까. 나가수에 장치된 경쟁이란 것도 사실 운영의 묘만 살린다면 인성을 파훼할 정도로 그리 비열하거나 잔인한 것도 아니다. 예술하는 사람들의 자부심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지만 노래하는 가수들이라고 신의 영역에 있는 것도 아닐진대 세상 사람들 모두가 하는 경쟁을 못할 이유도 없다. 예술적 자부심 탓에 경쟁하는 모습을 굳이 내보이기 싫다면 골방에 틀어박혀 홀로 벽 보고 노래하면 된다. 독야청청하면서.
대중들에게 최선을 다해 노래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미치겠어서 선의의 경쟁을 기꺼이 자청한 가수들의 진정성이 왜곡되지 않기를 바란다. 아울러, 심기일전해서 나가수가 다시, 꿀벅지와 식스팩에 대한 거부감으로 TV 앞에서 밀려나서 음침한 노래방에서나 좋은 노래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던 구식 대중들의 쉼터가 되고, 삶에 지친 대중들의 심신을 다독여주는 청량제가 되어 주길 기대한다.
===東山高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