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볕슈퍼

작성자:햇볕
작성일:미상



근무하는 학교 후문 쪽에 조그마한 지하 구멍가게가 있습니다. 이름은 햇볕슈퍼입니다. 이름만 햇볕슈퍼지 햇볕이라곤 지면에 닿은 창틀에서 새들어오는 정보지 반 장 크기의 햇살이 전부입니다. 그러다보니 종종 빵들은 곰팡이가 풀풀 날 정도로 유통기간이 지나있고 알루미늄 음료수 캔들은 입댈 부분에 녹이 슬어있습니다. 담배만 사러 오는 이 슈퍼에 세 번째 날인가 용기를 내어 가게이름에 관해 묻기로 합니다.

-이름이 예쁘네요, 가게…….

주인은 그냥 웃기만 합니다.

-빨리 돈 버셔서 진짜 햇볕 잘 드는 곳으로 이사 가셔야겠어요.

그는 디스 한 갑을 건네며 계속 웃기만 합니다. 저는 ‘해가 따로 없구나. 밝게 웃는 그가 바로 해로구나’ 생각합니다.


담배은박지 끈을 당기며 밖으로 올라오는데, 눈을 뜰 수가 없습니다. 오, 찬란도 하여라. 대한민국 4월, 세 2시의 진정한 햇살! 아, 신이 있다면 부디 저 슈퍼, 이름값하게 하옵소서!


밀가루반죽에다 팥덩이와 햇볕 몇 조각을 집어넣던 모퉁이 붕어빵아줌마가 천원어치 빵이 익을 때까지 들려줍니다. 햇볕이는 교통사고로 죽은 그의 외동아들이며 작년엔 자궁암을 앓던 걔 엄마마저 세상을 떠났노라고……. 구워지는 붕어빵의 꼬리가 유난히 길어 보입니다. 지금도 목구멍에서 흔들리고 있습니다.



written by '햇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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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와 모델과 그

작성자:설린자
작성일:미상


화가는 모델을 앞에 두고 캔버스 앞에 앉지 않는다.
앉지 않고 닫혀 있는 창문을 다시 닫는다. 커튼의
주름을 꼼꼼하게 어루만졌다가 굴곡 그대로 늘어지도록
섬세하게 조정한다. 가끔 곁눈질로 모델을 쳐다보지만
바닥에서 발견되는 머리카락을 줍고 창밖에 사라지는
구름의 흔적을 쫒는다.

화가는 모델을 주목할 수 없다.
모델 옆에는 창문이 있고 커튼이 있고 화구들이
있고 벽이 있고 벽지가 있다. 벽지는 마름모꼴 무늬의
연속이고 그걸 바라보고 있으면 약간 어지럽다. 눈을
깜빡거리고 정신을 차리면 벽이 물렁물렁해지면서
마름모꼴의 한 지점 속으로 한없이 빨려 들어간다.

무서운 속도 때문에 방 전체가 발사된 총알 같다.
화실 한쪽에는 허리 높이만한 탁자가 놓여 있고
그 위에 사과 한 알이 놓여 있다.

세잔의 사과가 있는 정물화에는 사과가 돌처럼
그려져 있다. 세잔의 사과는 영락없는 덩어리다.
사과의 무게보다 훨씬 무거운 사과다.

자코메티가 그린 정물화는 큰 탁자 위에 조그만
사과 한 알 놓여 있다. 탁자를 그린건지 사과를
그린건지 알 수 없다. 화가는 화집을 덮으면서

모델을 쳐다본다. 눈앞에 꿈틀꿈틀거리는 허공 휘장
안으로 사라지는 모델의 희미한 윤곽이 잔상으로 남는다.
그리곤 아주 천천히 허공마저 사라진다. 화가는 헤어날
수 없는 까마득한 오후의 깊이로 빠져 들어간다.

*

전과 같은 거리, 표시해 놓은 지점에 전과 똑같은
포즈로 모델은 벽과 천정과 창과 커튼 사이에
그것들과 함께 자리해 있다.

그림을 시도한 후 처음으로 화가의 눈은 모델에
주목한다. 눈의 손가락이 모델에 닿는다. 머리카락의
결과 냄새를 고르고, 눈의 색깔과 깊이에 손가락을
담그고, 귀의 감촉을 느끼고, 입술을 문지르고,
목덜미를 어루만지고, 팔, 손가락, 몸을 어루만진다.

만지는 눈에서 열이 날 때마다 눈까풀을 내렸다
올린다. 화가의 손은 부지런히 캔버스 위에 있는
모델을 지워 나간다. 그가 나타날

때까지 화가의 눈은 부지런히 모델을 문지른다.
그는 열기의 베일 사이로,
모델의 윤곽 너머로, 캔버스의 표면 위로
어른거린다. 사라질 듯 위태롭게 그는 나타난다.

그는 모델도 아니고, 그림도 아니고, 그림자도
아니다. 그는 화가도 아니고, 눈의 손가락이 문지를 때
그 마찰의 구멍에서 나타난다. 언제나 만지는 평범한
눈의 애무에서 언제나 비로소 시작되는 그는

사과이기도 하고 그림이기도 하고 글자이기도 하다.
아무튼 그는 항상 그이고 동시에 다른 무엇,
무엇이다! 피부를 뚫고 범람하는 현실을 보라!



written by '설린자'
(이 글의 저작권은 '설린자'님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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