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의 입에서 다시 '부러진 화살'


감성이 없었다면 인류 역사에서 모든 혁명은 없었을 것이다. 차가운 머리가 사회변혁의 방향을 구상한다면 뜨거운 가슴은 그 구상을 밀고 가는 힘이다. 인류사의 혁명은 이 둘 간의 조화로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었다. 혁명적 사회변화에 대한 거대담론이 사라진 세상에선 차가운 머리들이 할 일을 잃었다. 세상은 넓은 데 할 일이 없으니 주뎅이질이 낙인가 보다.

진중권을 일러 혹자들이 붙인 별명이 ‘모두까기 인형’이라더라. 푸훕, 딱이다. 심형래의 영화 ‘디워’ 논쟁을 유발햇던 진중권이 이번엔 신년의 화제로 떠오른 영화 ‘부러진 화살’을 도발하며 호사가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그 와중에 진중권은 “대화 상대의 판단 기준이 ‘진영(陣營)’이면 대화가 불가능하고 ‘공익’이면 가능하다”며 일침을 놓았다. 이슈논쟁때마다 네티즌들의 무한도전에 이골이 났을 법도 한 그로서는 예방주사격의 선빵이다. 언젠가 그가 누군가와 논쟁 중에 ‘말귀를 못 알아먹으니 이길 재간이 없다’ 라고 했던 어록만큼이나 찰지다. 크, 조뎅이 하나는 쯩말 찹쌀 조뎅이다.

http://joongang.joinsmsn.com/article/aid/2012/01/25/6840880.html?cloc=nnc

사실, 그의 말마따나 대화상대의 사고가 진영에 예속되어 있다면 객관적 대화가 불가능한 건 맞다. 오직 한 늠만 패는 진영적 시각은 객관적 대화를 가능케 하는 이성을 마비시키고 종내는 감정에 휘둘려서 진흙탕 개싸움을 유발하기 일쑤다. 해묵은 이념적, 정치사회적 대결과 갈등이 세상에서 가장 극심한 나라들 중의 선두격인 대한민국 사회에선 꽤나 심화된 문화적 특징들 중의 하나이리라.

그래서 진중권은 객관적 대화를 가능케 하는 전제조건으로서 ‘공익’을 지향하는 불편부당한 마음가짐을 요구하지만 것도 애매모호하긴 마찬가지다. 보편적이고 절대화된 공익의 기준이 없는 한 공익적 가치나 범주 또한 진영에 따라 천차만별이고 진영논리에 귀속될 수밖에 없기에 그렇다. 사회적 이슈들에 대해 진영적 시각을 거두고서 가능한 대화는 거의 없지 싶다. 그런 점에서 진중권의 공익 타령은 내 눈엔 누구와도 대화하기 싫고 그저 제 눈에 거슬리는 모두를 까고 싶은 삐딱선이거나, 관심을 유발하려는 의도적 까기이거나, 자신의 사유는 언제나 객관적이고 공정하다는 지식인의 자기과시일 뿐이다.

하긴 진영에 속해 있질 않으면 세상은 넓고 깔 대상은 무한정이다. 컨디션만 좋다면 하루 24시간도 모자랄 지경이다. 적당한 지식과 상식, 혜안과 통찰을 갖추고 찰진 조뎅이까지 받쳐주는데다 생계 걱정마저 없다면 인터넷 세상은 길을 잃은 지식인들이 말장난 하고 놀기에는 최상의 공간이다. 돈까지 된다면야 세상에 평론가보다 더 좋은 직업이 잇을까도 싶다.^^

설 연휴 마지막날에 ‘부러진 화살’을 보앗다. 주제가 단순하고 워낙에 익숙한 장면들이어서 내겐 그닥 신선치도 않고 커다란 감흥을 불러일으킬만한 영화는 아녓기에 진영적 시각으로 보면서 가슴을 뜨겁게 달군 것도 아녓고 진중권이 요구하듯 공익적 시각으로 보면서 머리를 차갑게 식힌 것도 아녓다. 십수년이 넘도록 뜨거운 가슴은 식히고 차가운 머리만이라도 지키려 애썻지만 가슴만 식고 머리는 차갑기는 커녕 흐리멍텅해져 버린 나로선 '보지도 않은 영화를 공익적 시각으로 통찰하는' 진중권의 차가운 머리가 부럽기만 하다.^^

근데 역설적이게도 영화속 김경호의 모습이 진영을 혐오하고 공익을 옹호하는 진중권의 바로 그 모습엿다. 진영의 권익을 수호하기 위해 판사 집단이 저지른 왜곡과 부조리에 대항하며 공익을 수호하려는 영화속 김경호는 영락없이 현실의 진중권이 대중들에게 요구하는 ‘진영보다는 공익우선’ 논리에 충실한 모습이었다. 때론 무모해 보이는 그는 혁명이 사라진 시대의 동키호테가 되어 우리에게 사법부의 혁명을 선동(?)한다. 젊은 날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영화와 현실의 싱크로율에 단 0.1%의 간극이 있어도 픽션은 픽션이라는 진중권의 지적은 백 번 옳다. 함에도 그 0.1%의 간극 때문에 영화가 전하려는 메시지조차 “사법부에 비판을 가한다는 과도한 의욕 때문에 더 중요한 정의의 문제를 혼동스럽게 만들어 버렸다”고 주장하는 건 과한 염려다.

영화 속 김경호의 행위를 전적으로 옹호하는 사람은 없다. 기초적 정의조차 혼동할 만큼 대중들은 그리 어리석지 않다. 대중들을 훈계하려 드는 진중권의 훈장질은 해가 바뀌어도 여전한 걸 보니 올 한해도 그의 트위터는 몹시도 뜨겁겠다.

http://dealinside.ca/100946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688307

대중들이 김경호가 ‘모범시민’처럼 법의 부당한 집행에 항거하여 직접 응징에 나선 그 동기와 목적에 그토록 쉬 공감하고 열광하는 건 사법시스템의 개혁에 대한 누적된 현실적 열망의 반영이다. 설령 김경호가 사익을 위한 개인의 투쟁을 공익을 위한 정의로운 투쟁으로 위장하였다 한들 다수 대중이 영화속 김경호든 현실의 김명호, 또는 영화감독의 선동에 휘둘릴 일은 없다. 영화가 없었어도 영화가 전하고자 한 메시지는 이미 오래도록 이 사회의 화두엿던 문제엿다. 외려 영화는 대중들의 그토록 오래 묵은 여망을 뒤늦게 반영한 것에 지나지 않는데 뭘 그리 새삼시럽게 ‘선동형 영화’로 폄훼할 것까지야. 참으로 오지랖 넓은 간섭이고 훼방이다. ‘훌라당 낚이는’ 대중들을 어엿비 여겨서엿는지 아니면 등신들 같은 대중들을 조롱하고 싶어서엿는지 몰겟지만 말이다. 하긴 머 그게 직업인 사람한테 이런 말 하는 나 역시 오지랖 넓은 건 마찬가지일 테고. ㅎ~

한반도에서 혁명이란 단어가 사라지니 좌파 지식인들의 주뎅이를 놀릴 자리가 마땅찮다. 적당히 몸 둘만한 진영도 없고 너나없이 모두가 명리를 쫒아 사는 모습이 식상키도 해서 세상을 조롱하는 것까진 좋은데 스스로 중심이 되고픈 관성을 고치지 못하면 간섭쟁이, 모두까기 인형으로 전락할 수밖에.

세상이 학시리 변햇다. 좌파지식인이 기득권을 옹호키도 하고 우파 지식인이 기득권을 모욕하기도 한다. 좋게 보면 좌우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소모적 대립을 지양하는 사회통합의 징후인데 나쁘게 보면 좌우 기회주의적 지식인들의 생존을 위한 얄팍한 잔꾀는 아닐까. 강용석이 그러더라. 악명도 떨치면 인기가 된다고. 인터넷이 주도하는 신세상에선 관심이 곧 돈이고 권력인 건 분명해 보인다.

혁명이 사라진 세상, 생존을 위해 관심이 필요한 좌파 지식인들의 몸부림이 씁쓸한 오후다.



===東山高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