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영 양 사건을 대하는 아고라인들에 대한 단상

나영 양 사건에 대응하는 양태를 보면서 난 알밥이 왜 알밥이고 경방의 대표 둉신들이 왜 대표 둉신들인지 다시 한 번 확연하게 깨닫게 된다. 아래 글은 죶밥님의 글 중에서 인용한 부분이다.

"원래 연민과 동감의 능력을 지닌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그는 나영이가 당한 고통에 대해 비슷한 아픔을 동감하게 되고, 그래서 그 고통의 묘사를 보면 몸서리가 쳐지고 속이 거북해져서 다시는 입에 올리거나 고통의 과정을 떠올리기 싫어지게 된다. 하지만 아고라의 일부 개쓰레기들이 불필요하게 사건과정을 상세히 묘사하는 것을 반복해가며 고통에 대한 동감이 아니라 가해자의 입장에서 성적인 대리만족을 느끼거나 나영이의 고통을 아무런 감정 없이 자신의 더러운 목적에 이용하는 것을 나는 목격하였다. 이런 개쓰레기들은 잠재적인 사이코패스인 동시에 억눌린 충동과 비뚤어진 성욕의 소유자들이다."

죶밥님의 지적에 공감한다. 파란색 글의 묘사가 딱 그간의 내 맘이었고 알밥님들의 맘이었을 게다. 아고라나 뉴스 지면을 통해 소개되는 관련 내용들은 두 눈 똑바로 뜨고 볼 수도 없을 만큼 참으로 경악스런 사건이었다. 기껏 지인과 멜을 주고받으며 사건을 정리하는 게 다였고 아고라 게시판에 글 한 편 댓글 하나 올리기도 조심스러웠다. 다들 열심인 화제에 내 글 한 편 더해봤자 것도 호들갑이란 생각에 애써 다른 나영(김나영님?)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그러는 사이 일부 알밥님들이 나영양 사건에 대해 아고라가 이성적으로 대응할것을 주문하면서 경방 대표 둉신들과 새로운 전선을 형성하고 있다. 늘상 행해왔던 일이기에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공방이다. 사안의 심각성을 고려할 때 아고라의 호들갑이 한 편으론 이해 가면서도 아고라의 대표 둉신들에 의해 주도되는 광적인 호들갑은 사건 못지않은 메스꺼움을 불러일으킨다.

아고라의 물을 흐리는 대표 둉신들 몇몇의 광적인 설레발은 달이 가고 해가 가도 변함이 없다. 인터넷이 사라지기 전엔 사라지지 않을 존재들이다. 아니 인터넷이 사라져도 사라지지 않고 어디선가 기생하고 자신들의 존재감을 드러낼 위인들이다. 말린다고 말려질 위인들은 아니란 것이다. 위 죶밥님 글에서 인용된 초록 글자의 묘사는 다소 과해 보일런지도 몰겠으나 빨간색 글자의 묘사는 명확해 보인다.

이 사건을 두고 흥분치 않을 사람들이란 인면수심의 사람들뿐일 게다. 그런 사람 있을련가 몰것지만 내 보기엔 아고라 경방엔 없다. 나영 양 사건에 대한 광적 흥분을 자제하고 이성적 대응을 주문하는 사람들을 향해 저주를 퍼부으며 무차별 매도를 가하는 사람들을 보면 거의 정신 착란 증세를 보인다. 그토록 정의롭고 생각 깊은 사람들이 나영이가 겪었을 그 참담한 고통의 상황들을 그토록 태연자약하게 재탕 삼탕 묘사해대는 걸 보면 죶밥님의 초록색글 주장 역시 결코 과해 보이지도 않는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다.

제발 좀, 정신차리자. 한 건 터졌다하면 언제까지 물난리 만난 개미새끼들처럼 우왕좌왕할 건가. 거짓된 정보는 추려내고 정확한 정보들을 교신하면서 비판은 하되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두 번 세 번 곱씹어 보면서 차분히 대응해도 한가위 차례상이 엎어질 일은 없다. 그래야 ‘알고 보니 내 사진’이란 해프닝도 일어나지 않을 거 아이가. 이 대표 둉신들아, 니들이 나영이 사건 대하는 모습을 보면 꼭 울고픈 아이 뺨 때린 것 같은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들이 이제는 역겹다. 제발 좀 정도껏 해라.

나 역시 딸 키우는 부모 입장에서 조씨인가 하는 인면수심의 개색휘를 능지처참하고 육시라도 해버리고 싶은 맘이다. 그런 맘을 표현하는 것과 사실을 왜곡하고 과장하는 것과는 엄중히 구분되어야 할 것 아닌가. 니들이 지금은 나영이 사건에 목숨을 건 부나방처럼 호들갑이지만 며칠 뒤에 니들 눈을 홀리는 또 다른 사건이라도 터지면 나영이가 뉘집 딸인지 새까맣게 잊어버릴 늠들 아닌가. 박대성 내치고 리드미와 흘레붙듯 말이다. 제발 좀, 매번 사건 때마다 광끼를 드러내며 설레발 까는 아구라 대표 둉신들의 흘레질에 부화뇌동하지 말 일이다.

제발 좀 추석 연휴 지내는 동안에 대갈휘들 좀 식히고 호들갑 떨지 않고 사안 사안을 신중히 파악하고 맥을 제대로 짚고 대응하는 능력들을 조상님들로부터 하사 받고서 다시 만나자, 응!

===東山高臥===

김나영씨, 알밥이라서 무시하는 겁니까?

지난 번 글에 이어 ‘퇴마록’의 작가 이우혁님의 <인터넷에서 흔히 보는 논리의 오류>들을 추가로 각색해서 정리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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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너도 해봐라 오류


내가 한 짓이 못마땅하면 너도 해봐라. 능력도 없는 것들이

사람을 죽인 살인자가 저런 식으로 큰소리친다면? 리드미나 담담당당이 알밥들을 향해서 저런 항변을 해댄다면? 이것만큼 배 째라 식의 오류도 없을 게다. 실제 우리 주변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대표적 오류 중의 하나다. ‘꼬우면 출세하라’는 말이 있다. 기득권자들이 자신들의 부정불의한 기득권 행사에 도전하고 비판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비꼬듯 내뱉는 말이다. 그 ‘한 짓’에 대한 도덕성의 문제를 능력의 문제로 치환시키는 전형적인 물타기 수법이다. 사기질이나 권한을 남용하거나 악용하는 일이 나쁜 것이기에 비판하고 멀리하는 것이지 비판하는 것과 능력의 유무와는 하등의 관련이 없다. 이러한 오류를 ‘너도 해봐라 오류’라 명명한다.


4. 물귀신 오류


너희 중에 죄짓지 않은 놈이 '나'에게 돌을 던져라.

이 말은 방귀 뀐 늠이 되려 큰소리치는 어이없는 경우다. 죄지은 늠이 자신의 죄를 변명하는 데 써먹으라고 예수가 이런 말을 한 게 아니다. 저 말은 죄를 지은 당사자가 자신의 죄를 변호키 위해 스스로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라 객관적 시각을 지닌 제3자가 죄인을 변호하여 죄는 벌하되 동정의 여지는 남겨두라는 뜻으로 사용할 수 있는 말이다. 예수가 사랑의 가르침을 설파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한 말을 모든 죄인을 용서하자는 말로 오해하여서는 곤란하다.

만약 예수의 저 말이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진다면 사회는 유지될 수 없다. 죄인을 단죄할 수 있는 흠결 없는 판사가 뉘라서 있을 것이며 흠결 없는 공권력이란 게 과연 존재키나 하겠는가. 황구라가 젓가락 복제신공을 완성하여 예수나 붓다 같은 완전형의 인간들을 수천 수만 복제하여 판, 검사로 내세우지 않는 한 그 누구에게도 비판과 단죄의 자격은 주어지진 못할 것이다. 인간 사회의 존속을 위해 용인된 사회적 계약 관계에 따라 다소간의 흠결이 있더라도 임무를 부여하고 그 권위를 존중하여 죄진 자를 벌하는 게 현대사회다. 이러한 공적 계약에 따른 단죄와 비판을 무시하고 죄를 짓고서도 ‘죄 짓지 않은 놈만 내게 돌을 던져라’라고 너나없이 뻔뻔스럽게 큰소리친다면 인간사회는 존속치 못할 것이다. 이런 오류를 편의상 ‘물귀신 오류’라고 해두자. 또는, 내가 죽을 것 같으니 우물에 독을 타서 다 함께 죽자라는 의미의 '우물에 독을 타는 오류(poison to well)'라고 명명한다.

돰돵이나 리쥐미가 알밥들을 향하여 ‘너희들은 세상 살면서 거짓말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느냐, 정말 깨끗하다고 생각하는 알밥들만 나를 쳐라’고 대든다면 ‘임마, 너 지금 하는 짓이 물귀신 오류라고 하는 거야, 씨밸류마~’라고 외쳐주자.


5. 당신만을 오류


내가 당신을 좋아하니 당신은 항상 정당해요.

세상을 기준으로 자신을 보지 않고 자신을 기준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들이 아구라엔 유독 많아 보인다. 양심과 정의감이 나름 투철하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어 그런지 자신의 판단과 신념에 대한 주장이 꽤나 드센 편이다. 근데 그 정도가 너무 심하다 보니 객관성을 잃고 주관적 감정에 이끌리거나 아집에 가까운 처신과 발언들을 해대는 걸 자주 목도할 수 있다. “리드미님, 세상에서 가장 양심적이고 정의감이 투철하다고 자부하는 제가 님을 선택하고, 믿고, 좋아하니 당신 또한 항상 정당하고 의로운 존재임에 분명합니다.”라는 식이다. 자신을 우주의 전체인 양, 자신의 판단과 신념만이 언제나 모범 정답인 양 총체적 착각에 사로잡히지 않고서는 결코 내뱉을 수 없는 말이나 처신을 태연스럽게 한다. 이런 인간들은 변덕도 심해서 언제 어느 순간에 “내 맘이 바뀌었어요. 당신은 이제 아웃이에요” 할지도 모른다. 미네르바 박대성을 내치듯 변덕의 계기만 주어진다면 언제 그랬냐는 듯 리드미를 내치는 것도 손바닥 뒤집듯 손쉽게 할 사람들이다.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이 범하는 이런 오류를 ‘당신만을 오류’라고 이름 짓는다.


6. 열심히 오류


나는 나름대로 열심히 했으니 비판하지 말아주세요.

무엇인가에 집중해서 열심히 한다는 것과 비판하는 것과는 별개의 영역이다. 무엇을 했는가가 중요하고 비판의 영역은 이 ‘무엇’에 한정되는 것이다. 아구라에서 리쥐미나 돰돰돵돵도 굉장히 진지하고 열심히 했다. 특히 돰돵은 지난해 늦가을 이후 지금까지 원고지 수만 장 이상 분량의 글을 포스팅할 정도로 열심히 했다. 글을 써본 사람은 알겠지만 꾸준히 글질 한다는 게 마냥 쉬운 일만은 아니다. 시간과 열정과 노력이 솔찬이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열심히 했다는 것이 비판받지 않을 이유가 되거나 행동의 정당성을 뒷받침해주는 이유는 되지 못한다. 사기질도 열심히만 하면 비판받지 않고 사람을 죽여도 열심히(?)만 죽이면 면피될 수 있다면 누구보다 열심히 사람을 죽인 강호순이나 유영철이가 징역살이할 이유도 없다. 또한 누구보다 열심히 글질한 돰돰돵돰을 욕할 순 없다. 그렇듯 ‘열심히 했다’는 식의 동정심을 유발하여 면피해보려는 이런 오류를 ‘열심히 오류’라고 이름 지어 둔다.


7. 무시의 오류


그래. 나는 못 배워서 무식하다! 나이 어려서 모른다. 그렇다고 나를 무시해도 되는 거냐?

논쟁 중에 가끔 이런 식의 선언을 하면서 말문을 막아버리는 사람들을 자주 볼 수 있다. 논쟁 중에 말빨이 막힌 쪽에서 흔히들 써먹는 수법이다. ‘나는 여자라서’, ‘나는 남자라서’, ‘나는 늙어서’, ‘나는 어려서’, ‘나는 촌놈이라서’, ‘나는 군바리라서’, ‘나는 해외에 있어서’, 등등 자신의 나이나 성별, 직업, 거주지 등 논지와 상관도 없는 이야기를 난데없이 들먹거리면서 상대의 말문을 막고 논쟁을 파토시키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못 배워서 자신 없으면 깝치지 말고 자신 있게 배운 다음에 깝칠 일이다. 나이가 어려 세상일을 깊이 헤아리지 못하면 함부로 나대지 말고 좀 더 경험이 쌓인 후에 나대면 될 일이다. 못 배운 게 자랑도 아니고 나 어린 게 자랑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나이 많은 것도 자랑 아니고 남자이거나 여자인 것도 자랑 아니고 군바리인 것도 자랑 아니고 해외에 있는 것도 자랑 아니다. 말이 막혔을 때 이런 것을 방패삼는 오류를 ‘무시의 오류’라고 명명해 둔다.


8. 일반화의 오류


저런 색휘가 있는 저기는 쓰레기통이야...

초딩들도 이 오류를 알고 입에 올릴 정도로 일반화의 오류만큼 잘 알려진 오류도 없다. 우리들이 무의식적으로 가장 흔히 범하고 있는 대표적인 오류다. 아고라 경방에서 수행되는 거의 모든 비판들에 이 오류가 포함되어 있다고 봐도 과언은 아닐 게다. 단적인 예로 최근 논란 중인 나영양 사건에 대하여 기독교 전체를 싸잡아 비판하는 것도 이에 해당한다. 예끼가 담당이나 그 일당 등 몇몇이 700리 출신이라 해서 700리 전체를 싸잡아서 사기꾼 집단으로 매도하는 것도 이 일반화의 오류를 범한 것에 다름 아니고 아고라의 구백구십구 둉신이 둉신짓을 한다고 해서 아고라 전체를 ‘아구라’로 매도해온 것도 이 일반화의 오류을 범하고 있는 것이라 보면 된다. 기왕 이런 글을 썼으니만치 나 스스로도 자성하는 의미에서 아고라를 ‘아구라’라고 표현하거나 700리나 아정포 전체를 싸잡아서 사기꾼 집단으로 매도하는 일은 가급적 지양토록 하련다.


이상으로 우리가 인터넷 글질 중에 쉽게 범하고 있는 몇 가지의 대표적 오류들을 살펴보았다. 아래 파란색 글은 이우혁님의 글이며 각색 없이 원문 그대로를 옮기는 것으로 글을 정리코자 한다.

"논리학은 아주 중요한 학문이다. 서양 중세에서도 일단 언어만 습득하고 나면, 다른 무엇보다도 이 논리학부터 먼저 가르치고, 다음에 형이상학을 가르쳤으며, 그 다음에야 실제 전문 과목을 가르쳤다. 서양이 수천 년간 앞서가던 동양을 이기고 수백 년 만에 급속하게 번성하게 된 근본적 힘이 바로 이 논리학에 있다고 본인은 생각한다. 아울러 우리나라 교육에서 가장 부족한 부분이 이 논리학이며, 특히 인터넷이라는 가상공간에서 이 논리학은 가장 중요한 기본 소양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논리에 대해 흥미를 가지는 사람이 많아져서 보다 원활하고 발전적인 인터넷 생활이 이루어지는 꿈을 꾸며 대강 잡글을 마친다."



<악울아 궁민학교 제3학년 2학기 중간고사 문제>

제가 어제 글에서 댓글 사인 좀 부탁했음에도 퇴짜를 놓은 김나영씨를 향해 오늘 글의 제목처럼 “김나영씨, 알밥이라서 무시하는 겁니까!”라고 따지고 들면 그것은 무슨 오류일까요?

===東山高臥===

죶도 모르는데 죶밥을 어찌 알랴!

지금으로부터 6~7여년 전 발랑 까진 초딩에서부터 경로당의 노땅들까지 인터넷 글질에 가세할 무렵, 퇴마록의 작가 이우혁은 <인터넷에서 흔히 보는 논리 오류>라는 글을 썼다.

인터넷 게시판에선 누구나 글을 쓸 자유도 있고 비판할 자유가 있는 만큼이나 자신이 저지레한 글질에 대해선 욕먹을 각오도 해야 한다. 저마다의 개성이 분명한 온갖 군상들이 자유롭게 모인 곳에서 모두가 공감하는 룰을 만들고 지킨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기성의 토론 경험을 통해 우리가 범하기 쉬운 인터넷 글질에서의 논리적 오류들을 짚어보고 숙지함으로써 글질에 임한다면 ‘욕먹을’ 일을 현격히 줄일 수는 있다. 논리적 오류가 덜한 글은 내용상의 공감이 없을지라도 최소한 무시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학문적으로 정의하고 있는 기 수십 수백 가지의 논리의 오류들을 살펴보노라면 오류 없는 완벽한 글쓰기를 하는 사람이 지구상에 단 한 사람이라도 있을까 싶다. 관건은 오류 없는 글쓰기를 위해 얼마나 노력하느냐는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을 내쏟았다가 욕먹어 기분 좋을 사람은 없다. 때에 따라선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을 갚기도 하고 천 년 업을 쌓기도 한다. 말이란 그만큼 중요하고 때와 장소와 상황에 따라 분별력 있고 조리 있게 하고 싶은 말을 쏟아낸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이우혁이 제시한 기준과 원칙은 인터넷 토론에서 지켜야할 철칙(철칙이란 없다)은 아니지만 인터넷에서 글질의 결과로서 누구나 겪게 되는 욕의 량을 조금이나마 줄여 보려는 의지를 가진 사람이라면 한번 쯤 읽어볼 만한 글이다.

이미 읽어본 사람도 있겠지만 원문에 최대한 충실하면서 아구라의 사례들에 빗대어 각색하여 두세 편으로 나눠 소개코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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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격의 오류


누구도 다른 사람을 비판할 자격은 없다?

아구라에선 가끔 듣던 말이다. ‘니 글을 써라, 유명인들 까지 말고! 정 까려면 원글 100개 정도는 쓰고서 남을 까라!’ 과연 그런가? 비판의 자유가 없으면 옹호의 자유도 없다. ‘비판하지 않을 테니 옹호치도 말라!’고 하면 할 말이 있겠는가. 원글을 100개를 쓴 사람이든 댓글 하나 달랑 쓴 사람이든 비판과 옹호의 자유는 토론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있다. 참여하는 자격 요건이 따로 정해져 있는 게시판이 아니라면 ‘니 글이나 써라, 유명인 까지 말고’란 소리는 텃세이거나 으름장일 뿐이다. 편의상 이것을 ‘자격의 오류'라고 해두자.


옹호는 좋은 것이고, 비판은 나쁜 것이다?

판사가 법정에서 이건희가 지은 죄 대신 공로를 인정하여 옹호하는 게 좋은 것인가? 자신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미네르바 K를 거론하여 한 젊은이를 정신파탄자로 몰아세우는 리드미를 비판하는 일이 나쁜 것인가? 옹호가 항상 좋은 것도 아니고 비판이 항상 나쁜 것도 아니다. 비판과 옹호가 나름의 합당한 이유와 근거가 있다면 그 행위들을 비난할 수는 없다. 단 명백히 밝혀진 ‘부정을 옹호’하거나 ‘정의를 비판’하는 일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문제는 정의의 탈을 쓴 악덕을 감성적이고 무분별하게 옹호함으로써 정의를 악덕으로 비판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경찰에 쫒기는 연쇄살인범을 동정하여 그를 숨겨줌으로써 그가 또다시 연쇄살인을 이어간다면 그런 감상적이고 무분별한 옹호는 범죄가 되듯 행여 아고라의 누군가를 무분별하고 감상적으로 옹호하였는데 그가 그런 지지를 사기질에 동원한다면 옹호한 사람들은 범죄에 간접 가담한 것과 다를 바 없다. ‘나도 피해자요’란 소리는 사후 핑계일 뿐이다. 비판의 자격을 묻는다면 옹호의 자격도 물어야 한다.


2. 자칭 무림고수의 오류


나는 그런 불의를 보고 참아 넘길 수 없다! 내게 덤벼라!

이런 태도는 일견 멋있어 보인다. 좋아 보이지 않는 걸 ‘옳지 않아!’라고 말하는 것이니까. 그러나 상황에 따라선 이런 값싼 정의감은 바보짓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달을 보랬더니 달은 보지 않고 달을 가리키는 손톱 밑에 때 낀 걸 나무라는 사람이기도 하거니와 골인 지점을 앞둔 마라토너의 신발을 가리키며 ‘똥이 묻었으니 1등 해봤자 더러운 승리’라고 주장하고 있는 꼬락서니이기도 하다.

중원에서 마교의 무리가 기수십년을 활개치고 있다. 그들과 기수십년을 다투어온 구파일방의 정파 장문인들은 마침내 마교 교주와 사파의 무리들을 포획할 천재일우의 기회를 맞았다. 전 무림을 희생시켜가며 마교 교주와 그 일당들을 간신히 포위했는데 느닷없이 쌩판 첨보는 미친 늠이 빗자루 타고 날아오더니 “아니, 이거뜨리 연약해 보이는 사람들을 포위하고 잔인하게 칼을 휘두르다니 신사적이고 숙녀적으로 고운 말로 해도 될 것을! 나는 이런 불의를 절대 그냥 보아 넘길 수 없다. 어디 내게 덤벼라!”라고 외치더니 온 하늘에 고추가루를 뿌려버렸다. 모두가 재채기하는 사이 마교 교주와 그 일당들은 웃으면서 유유히 달아나 버렸다. 마교가 휘두른 칼에 지난 기수십년 간 피바다를 이루었던 중원의 평화는 사악한 마교교주와 일당들을 잡기 전까진 또다시 깊은 안개 속으로 빠져들어야만 했다. 뛰어든 늠은 도대체 먼가? 정의의 사도인가? 스스로 소개하기를 자신은 절대 칼은 손에 들지 않는 수행중인 도사라고도 하고 고추가루만이 상생의 평화를 부르는 무기라고도 했다. 고추가루를 뿌리고서 중원에 평화가 왔는가? 바람에 날린 고추가루가 채 사라지기도 전에 그 시각 달아난 마교 교주와 일당들은 숭산 소림을 불바다로 만들고 있었다. 미친 늠!

이런 예를 든 것은 누구든 끼어들 자격은 있으나 때와 장소와 상황을 잘 살펴가며 행동을 하란 소리다. 어딜 가나 버젓이 관심을 끌고자 하는 인간 군상은 있다. 꼭 있다. 아서라, 말어라! 한 번 정도면 애교로 봐주겠지만 두 번 세 번이면 애처롭다. 무슨 정의의 화신이라도 되는 양 나대면서 끝끝내 잘난 척 해대는 미친 족속이 많고 또 그런 족속들을 적절히 이용하여 빠져나가는 악당들이 있음을 명심하자. 이런 걸 일명 ‘자칭 무림 고수의 오류’라고 이름 붙여둔다.

옹호와 비판은 누구나 자유롭게 하되 무분별하진 말라. 무분별해도 좋을 옹호와 비판이 허용되는 단 하나의 경우는 사람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을 때 뿐이다. 인터넷 게시판에서 토론 중에 사람의 목숨이 경각을 다투는 경우는 거의 없고 대부분 시시비비를 가리는 정도인 이상, 무분별은 가능한 범하지 않는 게 욕을 덜 먹는 길이다.

누구든 끼어 들어라. 모두에게 자격은 있다. 허나 처절히 매도되고 비웃음 사는 것도 자기 일이니 자신이 알아서 할 일이다. '주제 없이 나서지 말라'는 말은 주제가 없으면 나설 자격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주제가 없으면 망신 당하기 십상이기에 함부로 나서지 말라는 뜻이다. 죶도 모르는데 죶밥인들 어찌 알겠냐마는. 다음에......

===東山高臥===

낚시터에서 리드미와 담담당당을 보았습니다.

한 달여 만에 낚시터를 찾았습니다.

돌풍과 호우 주의보가 예고된 터라 멀리는 가덜 몬하고 도심 근교 관리낚시터엘 갔습니다.
다들 호우 주의보에 몸들 사렸는지 500여 평이 넘는 낚시터에 오전 내내 홀로 앉았습니다.
따가운 햇살 대신 가랑비 시원하고 바람도 인적도 없는 호젓함!
무릉이 예이련가 싶었습니다.

근데 웬걸요.
무릉이 따로 없을 그 호젓한 풍경에 취해 예닐곱 마리 정도 낚았을 즈음에 그만 낚도의 무아지경을 깨는 잡념에 치이며 헛웃음이 나고 말았습니다.
낚시대는 묵직한데 어째 용틀임이 느껴지질 않는 겁니다.
낚시대를 잡은 팔을 높이 들어 수면 위로 고기를 띄워보니 시커머죽죽한 등빛에 한 자 세 치는 되어보임직한 빨갱이(낚시계에선 한 자 이쪽 저쪽 크기의 어린 잉어를 ‘발갱이’라 하는데 농 삼아 ‘빨갱이’라고도 합니다. 족히 두세 자 정도는 되어야 ‘잉어’라 불러줍니다)가 지느러미를 내리 깔고 다소곳이 끌려오는 겁니다.
헛웃음이 난 건 그 늠을 보면서 생긴 것도 그렇고 불현듯 돰돰돵돵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잡념을 떨치고 쉬러 갔던 낚시터에서 생각만 해도 참 피곤한 스딸의 돰돵을 떠올릴 줄이야 이게 멉니까.
병도 큰 병입니다.

원래 물고기란 늠들이 낚시바늘에 걸리면 ‘바늘털이’란 걸 합니다.
바늘털이란 바늘에 걸린 물고기의 자유를 향한 몸부림이죠.
낚시꾼들은 그 몸부림을 앙탈로 여기고 그 앙탈이 심할수록 ‘손맛이 좋다’라고 표현하는데 물고기의 떡대가 클수록 이 손맛은 극대화되고 몸맛으로 전이 되기까지 합니다.

제가 돰돵을 떠올린 물고기 정도의 크기면 사실 몸맛까지 느껴볼 정도의 크기입니다만 몸맛, 손맛은 커녕 니맛 내맛도 없는 겁니다.
끌려 오는 빨갱이를 가만 보니까 힘 좋게 생긴 덩치나 체색과는 달리 주둥이가 너덜너덜한 게 이건 머 산전수전 다 겪은 몰골입니다.
그 몰골과 눈빛을 보고 나서야 왜 그리 힘알대기없이 끌려나왔는지 이해가 갔습니다.
빨갱이의 눈빛은 ‘니 죶대로 해라, 어차피 풀어줄 거 아이가’라고 말하는 듯 했습니다.

요즘 낚시계에선 ‘catch & release'가 대세입니다.
낚시가 먹거리를 위한 사냥의 수단이 아니라 웰빙 오락의 일환으로 행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낚시터에서 고기를 잡아 망태기에 담아가는 사람은 원시인 취급을 받거나 때거리가 부족한 싼티맨, 또는 몸보신에 환장한 병자 취급받습니다.
그러다보니 관리낚시터도 ‘손맛터’라고 하여 잡이 목적이 아닌 순수 손맛용 낚시터로 운영하는 게 낚시터업계의 일반적 추세입니다.

원래 물고기는 아주 경계심 많고 재바른 생물인데 낚시터에서 길들여진 물고기는 어항 속 금붕어와 비슷한 행동 양태를 보입니다.
금붕어들이 사람 쳐다보고 몰려드는 건 아시죠.
관리낚시터 손맛터 물고기들이 그렇습니다.
원래 사람 손을 타지 않은 자연지의 물고기는 작은 인기척에도 근처에 얼씬도 않을 정도로 예민하지만 손맛터 물고기들은 인기척이 들리면 낚시꾼 자리 근처로 어슬렁거리며 몰려들어 수면위로 낚시꾼을 쳐다보면서 주뎅이를 벙싯거리기도 합니다.
양어장에서 사료 먹고 크면서 이미 사람 손에 길들여져 있기도 합니다만 낚시터에 팔려와서도 낚시꾼이 위험하지 않다는 것과 낚시꾼 발 아래 떡고물이 많다는 것도 경험적으로 알게 된 탓이죠.
그리고 몇 차례 낚시 바늘에 꿰여 물속과 물 밖을 왕래하다보면 학습효과에 의해 물고기가 능구렁이가 되는 겁니다.
바늘에 걸린 순간, ‘에레이 또 속았네. 바깥 세상 구경 함 하고 오는 거지 머. 힘 써봤자 기운 떨어진다. 다녀오께 친구들아’라는 표정으로 앙탈도 없이 느물느물 끌려나오는 물고기를 보노라면 손맛을 잔뜩 기대했던 낚시꾼으로선 여간 김새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가 잡은 빨갱이처럼 주둥이가 너덜너덜 열 너댓 번은 바깥 세상 경험을 지닌 듯한 물고기 정도 되면 능글맞고 거만스러워 보이기까지 합니다.

딱 쳐다보니 생김도 글코 능글맞고 느물거리는 폼새가 돰돵하고 어째 그리 똑 같아 뵈는지 한순간 헛웃음이 났던 겝니다.

물고기도 낚았을 때 앙탈부리는 정도와 주뎅이 상태를 보면 초짠지 베테랑인지 알듯 경방 사기꾼들도 건드리고 낚아보면 그 앙탈부리는 정도와 주뎅이질의 상태에 따라 아마인지 프로인지 얼추 구분이 갑니다.
리쥐미나 멕팔이, 크래머가 사회생활이나 인간관계의 경험들이 부족한 아마츄어라면 돰돵과 빚을링크는 프로입니다.

논증이나 처신에서 모순이 발각되었을 때 리쥐미나 멕팔이, 크래머에게선 우왕좌왕하는 순진함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건 그들이 아직은 아마츄어란 얘기고 개전의 정이 일말이라도 남아 있다는 얘기죠.
하지만 돰돵이나 빚을링크 류에게선 그런 순진함이란 모기 오줌 만큼도 보덜 못했습니다.
추정되고 확인된 그들의 이력들이 말해주듯 물 밖 세상에서 어지간히 굴러먹은 베테랑들이란 거죠.
이미 그들은 낚시꾼 정도를 겁내는 물고기들은 아닙니다.

특히 돰돵, 이 친구는 다음 아고라에서 만큼은 민족의 태양은 못되더라도 민족의 형광등급으로 우대받는 인물 아닙니까. 물론 일천 둉신들에 의해서지만.
개혁과 진보를 말하는 이곳에서 민족의 형광등급 정도 되려면 사실 바깥 세상에서도 공인받은 명함 하나 정도는 있어야 정상이거든요. 은둔자가 아니라면.
은둔자가 저리 씨부리고 있을 리도 만무하겠지만 말입니다.
저 정도 열혈 반이명박 애국자시라면 못 되도 개혁과 진보를 표방한 사회 단체 등에서 깃발잡이 정도의 명함 하나 정도 있어야 한다는 건 너무도 당연한 기대가 아닐까요.

근데 님아들은 범국가적 위기를 포효하며 십만 양병설을 주장하는, 아고라가 배출한 불세출의 애국자 돰돵이가 십진의 세계에서 멀 한다는 얘길 들었던 적 있었던가요.
십진 세계에서의 명함이나 행적이 없다는 건 바깥세상에선 빌붙어 먹을 데 하나 없는 신뢰 꽝의 인간이란 얘기입니다.
넷 세상은 저 자들에겐 자신의 패배한 인생을 위로받을 수 있는 대딸방과 다름 없습니다.

결론은 주뎅이로만 애국하고 개혁하고 진보하는 인간들이란 얘기죠.
손모가지 삐어가며 주뎅이 부르터가며 그 인간들 대딸 쳐주시는 게 유일한 하루 낙인 일천 둉신 님아들, 그러고 사시면 살림살이가 나아지십니까.
이명박 정부가 조기 퇴진이라도 한답디까.
저런 인간들을 무씬 슨상님, 형광등님이라 따르시는 여러분들도 주뎅이 애국질이란 점에선 도진개진입니다.

세상살이가 참 복잡한 것 같으면서도 단순하고 참 단순한 것 같으면서 복잡하죠.
아골란들에게 제가 터득한 세상이치 중 두 가지만 일러드리면요.

첫째, 자신을 기준으로 세상을 보지 말고 세상을 기준으로 자신을 보라는 것과

둘째, 내 주머니 헐렁하면 노무현 김대중도 타도의 대상이고 내 주머니 빵빵하면 전두환 노태우도 성군으로 보인다는 겁니다.

우짜든동 세상에 대한 불평불만은 절반 정도로만 줄이시고 그 남는 시간에 내 주머니 채울 방법을 연구하거나 능력을 계발하세요.
필요하면 학원 가서 자격증이라도 따시든가 박대성 얘기처럼 외국어라도 한 자 공부하시든가.
주머니가 짤랑짤랑해지면 아름다운 금수강산까지는 아니어도 이민가고 싶다라는 생각은 사그라들지도 모를 일입니다.

해도 해도 잘 안 되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그렇더라도 마지막까지 남탓은 하지 마세요.
남탓은 죽음에 이르는 참으로 몹쓸 병입니다.
아무것도 하지도 않고 세상 원망만 하는 놈들도 있을 겁니다.
그런 놈들은 이명박 정부 탓할 자격조차 없습니다.

낚시꾼들에게조차 환대받지 못하는 발갱이(빨갱이?)로 살아 가실래요?
주머니가 좀 허전해도 인간으로 살아 가실래요?



===東山高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