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올림픽 뒷북...조준호와 마사시, 신아람과 하이데만

경쟁과 전쟁


한 여름 열다섯 밤, 온 세상 지구인들의 잔치였던 런던 올림픽이 끝난 지도 어느덧 열 밤 남짓을 넘었다. 주말 낚시터에서의 새벽, 한 눈은 찌를 쪼르고 한 눈은 기성용의 마지막 승부차기 발끝을 쪼르던 흥분이 아직도 생생하다. 어제일 같기도 하고 작년일 같기도 한 순간순간들이었다. 한국의 대표선수들이 금을, 은을, 동을 낚던 순간들의 감흥은 꾼이 월척을 낚는 순간 이상의 짜릿함을 주었다.

인류가 하나 되는 축제의 장이라는 듣기 좋은 수사의 행간에는 ‘같은 목적(目的)을 두고 서로 이기거나 앞서거나 더 큰 이익(利益)을 얻으려고 겨루는’ 순수한 경쟁을 넘어 선수들이건 응원하는 국민들이건 과열된 애국심의 경쟁, 마치 전쟁과도 같은 경쟁이 있었다.

눈이 파랗든지 머리털이 노랗든지 얼굴이 검든지 상관없이 사람이란 존재는 편을 먹고 떼를 지어 싸우고 다투면서 행복감을 느끼는가 보다. 홀로서는 사자를 이길 수 없는 유약한 존재이면서도 곁 사람들과 떼를 짓노라면 우주라도 정복할 듯한 괴력을 만들어내고 나아가 그 힘을 과시하고 싶어한다. 그런 사람들의 식지 않는 호전성을 유화시켜주는 게 스포츠가 지닌 또 하나의 순기능이 아닌가 싶다. 싸우고 싶은, 비축된 힘을 과시하고 싶은 욕구를 게임(스포츠)으로 해소해보라는 것일 게다.

개인이든 나라든 노력해서 힘을 기르고 힘의 상대적 우위를 확인하고 싶어하는 인간들의 경쟁 욕구는 때론 아름다와 보일 때도 있고 때론 추해 보일 때도 있다. 인류 화합을 모토로 내건 경쟁인 스포츠 경쟁이 전자에 해당한다면 인류의 패망을 자초할 뿐인 전쟁은 누가 뭐래도 추하다. 경쟁과 전쟁의 차이는 룰의 유무에 있다. 경쟁에 룰이 있다면 전쟁에는 룰이 없다. 경쟁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룰을 지키는 양심과 정의가 있기 때문이고 전쟁이 추악해 보이는 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 잔인한 폭력성 때문일 거다.

런던 올림픽이 비록 오심픽이란 별칭을 얻는 오점을 남기긴 했어도 각국을 대표하는 선수들의 투혼은 아름다웠다. 80억 인류는 선수들이 만들어내는 순간순간의 투혼에 전율하면서 아낌없이 행복해했다. 선수들은 선수들대로 응원하는 국민들은 국민들대로 직,간접으로 경쟁의 욕구를 해소하면서 몸은 더웠어도 맘만은 시원통쾌상쾌유쾌했던 여름이었다.

했어도 런던올림픽이 마냥 좋은 기억들만으로 갈무리되지 않는 건 몇몇 선수들에게서 순수 경쟁을 넘어선 전쟁 같은 경쟁을 보았기 때문이다. 선수들로선 제 탓이 아니라고 빠져 나갈 명분이 있다손 쳐도 그것도 일순간이고 보는 사람의 찜찜함만큼이나 당사자들의 찜찜함은 오랜 세월 자신들을 괴롭힐 건 빤한 일이다. 일말의 양심이라도 지니고 있다면 말이다.


                                          에비누마 마사시와 하이데만


한국의 유도선수 조진호와 결승 진출을 다퉜던 일본의 에비누마 마사시, 심판들이 백기 올리고 청기 내려, 청기 내리고 백기 올려 놀이를 하는 동안에 조준호와 마사시는 천당과 지옥을 오락가락하며 농락당하고 있었다. 해당 선수들 뿐만 아니라 경기를 관전한 80억 인류 모두가 심판진의 유치한 운영에 농락당한 듯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였다.

한국의 펜싱선수 신아람과 결승 진출을 다퉜던 독일의 하이데만, 심판들이 1초를 억겁의 시간으로 늘리면서 시공을 창조하신 하늘님을 모독하는 동안 그들 역시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고통을 맛보았다. 찰나간의 시간, 웃다가 울다가 그리고 다시 하염없이 울고 앉은 선수를 바라보면서 80억 인류는 난감함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천당의 문턱에서 좌절한 한 선수는 하염없이 울었고 지옥의 문턱에서 기사회생한 한 선수는 기쁨의 굉음을 내질렀다. 심판이 승리를 선언해줬대서 그게 과연 그토록 기뻐할 만한 승리였을까? 심판이 승리를 안겨준 선수가 내 나라 선수라서 일본민 전체가 독일민 전체가 마냥 기쁘고 좋은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난 아직도 승리가 확정되는 순간의 마사시와 하이데만의 표정을 잊지 못한다. 한 선수의 표정에선 경쟁을 보았고 한 선수의 표정에선 전쟁을 보았다.

유도나 펜싱 경기에 대해선 문외한일 뿐인 나로선 사실, 심판이 마사시에게 승리를 선언한대도 크게 불만스러울 것 같지 않았던 반면, 하이데만의 1초는 너무 길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들의 표정은 나의 기대와는 사뭇 달랐다. 정작에 마사시는 자신의 승리가 확정된 순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환호하는 일본 감독의 후안무치와는 몹시도 대비될 정도로 미안함과 부끄러움이 어우러진 얼떨떠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적어도 내 눈엔 그리 보였다. 하지만 하이데만은 달랐다. 마사시보다 훨씬 부끄러운 승리였음에도 기고만장했다. 마사시와 하이데만, 전자는 아름다워 보였고 후자는 추해 보였다. 그들의 대비된 표정은 향후 시상식장에서도, 언론과의 인터뷰 과정에서도 여전했다. 양심을 승리로 팔아버린 사람과 못내 양심을 거스리지 못한 사람의 차이다.














“시계의 1초는 1초일 수도 있고, 1초99초일 수도 있다. 1초99초라면 몇번을 공격할 수 있는 시간”이라고 주장했다는 하이데만의 변명은 여전히 추했다. 계측기에서 0.99초는 1초의 영역이고 1초99는 2초의 영역에서 표시된다는 걸 모르는 무지의 발로다.


그녀에 비해 마사시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사실은 준준결승에서 졌는데 관객들이 후원하고 밀어줘 (판정이 번복돼) 살았다. 응원해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를 드리고 싶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기사 내용의 번역이 정확했는지 논란도 있더라만 마사시가 경기 후 또는 시상식에서 일관되게 보여준 표정을 떠올리노라면 그의 인터뷰에선 적어도 하이데만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양심의 움직임을 엿볼 수는 있었다. 조준호에게 마사시는 좋은 경쟁자였지만 신아람에게 하이데만은 승자로 존중해기엔 턱없이 부족한 후안무치한 적일 뿐이었던 거다.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8908909&cloc=olink|article|default

                                        
                                            전쟁치 말고 경쟁하라


쿠베르탱은 일찌기 인간의 호전적인 경쟁적 속성을 잘 알고 인류의 화합과 평화를 위해 올림픽이라는 참 좋은 경쟁의 장을 인류에게 선사했다. 싸우고 싶으면 전쟁이 아닌 룰을 정한 스포츠를 통해 맘껏 경쟁 욕구를 발산해 보라는 평화의 메시지를 담아서.. 비유가 천박해 보일진 모르겠으나 현명한 아내가 임신 중에 남편에게 쌈지돈 쥐어주며 홍등가를 권하는 것과 같은 이치가 아닐까. 최선은 아니지만 욕구를 못 참아 겁탈을 도모하는 것보단 욕구를 발산할 선의의 장을 열어놓자는 거다(홍등가가 선의의 장이라는 어깃장 확대해석은 마시길 ㅎ~). 쿠베르탱의 염원은 바로 이것이 아녔을까. 전쟁치 말고 경쟁하라!

전쟁하지 말라고 마련한 경쟁의 장에서 룰을 파훼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겁탈이 난무한다면 관 속에 누운 쿠베르탱이 벌떡 일어나지 않겠는가. 하이데만 선수는 참 많이 부끄러워 할 일이다. 일각에 들리기는 올림픽의 흥분이 가라앉은 지금에 와서야 하이데만 선수 스스로도 무척 힘들어 하고 있다고도 하고 독일 국민들의 생각도 하이데만의 승리는 정당하지 못한 승리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라 한다. 사안이 오죽했으면 팔도 안으로 굽지 않을까마는 쩝! 한국과의 축구에서 지고 인종차별적 발언으로 한국민을 도발했던 한 스위스 축구 선수도 자국으로부터 올림픽 도중 대표선수 자격이 박탈되어 본국으로 소환되기도 했다. 경쟁에 내보냈더니 전쟁을 치르고 있는 선수였으니 마땅한 결정이었다는 생각이다. 세계만방에서 모였으니 튀는 놈도 있기 마련이고 돈의 전쟁이라고도 불리는 올림픽에서 어찌 불순물이 없을랴만 그래도 대놓고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불의는 추후로는 없었으면 한다. 내 뒷북소리가 지하에서 크게 실망하고 있을 쿠베르탱에게 위로가 되길 바라며 이만 땡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