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구 이야기

작성자:허허
작성일:2010.02.06



내가 환장할 만큼 좋아하는 어휘가 있다. 지독(至毒)과 기우(奇遇)이다.
지독至毒, 몰입의 정도가 내게 독으로 이르도록 미칠 수 있다는 이 어휘에 나는 흠뻑 반했다. 불가에서 재를 지낼 때, 재를 지내주는 이를 일컷는 어휘로 복위(伏慰)와 기우(奇遇)로 나뉜다. 죽어서 재를 받는 이를 영가(靈歌)라고 하고, 그 영가를 위로하는 사람중에서 영가보다 아랫사람은 이름 뒤에 복위(伏慰)를 붙인다. 말 그대로 엎드려 위로 한다는 소리다.
하지만 영가가 자식이거나 아랫사람일 경우는 비록 두 번 절을 하지만 기우(奇遇-기이한 만남)라고 한다.
상상해보라. 자식의 영가에 절을 하는 부모(혹은 영가의 윗사람)의 표현으로 백 마디의 가슴이 째진다는 소리 보다는 '뭔 이런 좇같은 만남이 다 있노?...' 라는 의미를 함축한 표현으로 애절하다 못해 아름답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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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쯤 전 일이다.
감나무 아래에 군집을 이룬 머위 잎 사이에 삐죽삐죽 고개를 내밀고 있는 것이 아무리 보아도 코스모스 같았다. 형에게 물은 즉 "파종 시기는 아니지만 씨앗이 있기에 뿌리긴 했는데, 서리 내리기 전까지 꽃을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괜한 짓을 한 게 아닌지 모르겠다." 한다. 지금이야 개량된 품종으로 한여름에도 꽃을 피우긴 하지만 코스모스는 단일성 식물이라, 해가 짧아지기만 하면 꽃잎 분화를 기대해 봄직도 했다. 보통 코스모스는 봄에 싹을 틔워서 여름 내내 자라 9월에 들어서야 꽃을 피우는 식물인데, 5개월이나 늦은 파종이라서 뭐라고 장담을 할 수가 없었다.

'백구'는 십오 년 전에 부산의 어느 절에서 가져온 귀주견이다.
외관이 진돗개와 흡사하지만 눈초리가 찢어져서 못된 느낌을 주는 진돗개와는 달리 순하고 예쁜 눈을 하고 있다. 원산지는 일본이라고 한다. 언젠가 전자상가의 CF 광고에 "한번 주인은 영원한 주인" 이라는 문구와 등장했던 그 개가 귀주견이다. 소재는 진돗개에 얽힌 일화를 썼으나 모델로 쓰기엔 진돗개의 찢어진 눈매가 충직한 느낌을 주기 보다는 독한 인상을 준다는 이유로 진돗개와 흡사하나 눈매가 더 예쁜 귀주견을 썼다고 한다. 백구가 바로 그 종이다.
밖에 나갔다 올 때면 사람 먹는 찬보다 개먹일 것에 더 신경을 쓰는 형에게 된장 발라 버리자는 농담에, 정색을 하며 엄마가 생전에 밥 챙겨준 개라서 명대로 살게 뒀다가 죽으면 묻어줘야 한다 말에 무안하기도 했다.
그런 백구가 이제 노환으로 기력이 쇠하여 눈곱이 덕지덕지 끼고 털에 윤기도 없으며, 낯선 이가 와도 짖는 건 고사하고 내다보지도 않는다. 예전에는 아침으로 백구 밥그릇 주변에 까치가 몇 마리씩 죽어 있곤 했다.
사냥개답게 밥을 훔쳐 먹으려는 까치를 덮친 결과다.
지금은 까치가 밥그릇을 덮고 있어도 본둥만둥한다.

추석을 앞두고 모인 가족 앞으로 두 가지 희소식이 생겼다.
불과 일주일 전만해도 어린 싹에 지나지 않던 코스모스가 꽃을 피웠다.
파종 후 삼 주일 만에 꽃을 피워서인지 포기당 꽃 봉우리 수는 적지만 꽃의 자태가 아름다움을 넘어서서 신비감마저 준다.
또 하나는 아랫마을서 흑염소를 방목하는 이가 강아지를 한 마리 가지고 왔다.
형이 없는 사이에 흑염소를 방목하는 이가 백구의 혈통을 탐내어서인지, 그가 기르는 암캐가 발정을 할 때 데리고 와서 씨를 받았다고 한다. 백구가 사람으로 치면 팔순 노인인데 그런 무지몽매한 짓을 하였다고 흥분하는 형더러, 스님에게 개 사돈이 생겼으니 그게 부끄러워서 그러는 게 아니냐며 놀렸다.
그렇지 않단다. 교미를 붙인 그 즈음에 백구가 며칠간 운신을 제대로 못했고 음식을 보고도 못 먹기에 닭을 삶아 먹이고 통조림, 우유 등을 며칠 먹이니 그때서야 깨어났다고 한다. 사전에 양해를 구했더라면 거절했을 거란다.

코스모스의 개화와 강아지의 출현으로 다들 감동을 하는 반면 나는 왠지 아팠다.
/2005년 9월 18일(추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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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 21일, 엄마는 가덕도에 있는 집 인근에 모셔둔 아버지 산소 근처에서 벌에 쏘여 쇼크사 하셨다. 등산객이 엄마를 발견했을 때는 이미 숨이 멎은 상태였고, 엄마 옆에는 백구가 낑낑거리며 앉아있더라고 했다. 엄마에게 달려드는 벌떼를 쫓으려 했던지 백구도 벌떼에 쏘여 성한 곳이 없었다고 했다.
엄마 장례 후, 남매들과 백구를 어떻게 할지 의논하였다.
모두 아파트에 사는 관계로 애완견이 아닌 백구를 데려갈 수 없다는 딜레마가 있었다.
더우기 그때 백구 나이는 이미 일반적인 개의 자연수명을 훌쩍 지낸 늙은이였다.
결론은 백구의 자연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평생을 엄마와 함께 살았던 가덕도에서 생을 마감할 수 있게 가덕도에 그대로 두고 남매들이 순번제로 들어와서 보살피기로 했다.
그 당시 백구는 뇌졸중이 와서 뒷다리를 옳게 운신못했고, 치매끼도 보였다.
1년을 못 넘길 줄 알고 시작한 남매들의 백구 식모 역활은 3년 가까이 지속되었다.

2007년 3월 말경에 나와 교대하는 형으로 부터 아무래도 백구가 얼마 남지 않은 거 같으니 묻어 줄 구덩이를 파두라기에 백구 딸이 살던 집 옆에 깊게 파뒀으나, 그 구덩이에서 풀이 한 뼘 넘게 자라도록 백구는 잘 버텼다.


2007년 5월 4일 오후 2시경 백구는 노환으로 죽었고, 나는 남매들에게 애고애고(哀告)라는 문자를 날렸다.


백구가 죽기 10분쯤 전, 숨을 몰아쉬던 백구에게 어디서 어찌 알고 왔는지 알을 쐬려는 쇠파리떼가 새카맣게 덮고 있었고, 그게 괴로운지 귀찮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눈만 꿈벅일 뿐 꼼짝을 못하는 백구에게 직사는 해로울낀데 하면서도 에프킬러를 뿌려주었다. 백구를 구덩이로 안고 가서 묻을 땐 아무 생각이 없었다. 아니 생각이 없었던게 아니라 말로 표현할 수 없었을 뿐 있었다. 그 생각을 지금 표현하라면 기우(奇遇)다.



감나무 아래 머위잎 사이로 코스모스가 폈던 위치(올해는 코스모스를 안 심었다)




백구가 살던 집. 지금은 대나무가 솟고 잡초만 무성하다.




백구집 10미터 위 백구딸 흰순이가 살던 집(그 옆에 백구를 평장으로 묻다)




백구 무덤위에서 내려다 본 가덕도 풍경



written by ===허허===
(이 글의 저작권은 '허허'님에게 있습니다)

대한민국 온갖 사기꾼들 아구라에 집결

작성일:2010.02.04


이거뜨리 미네 사태를 통해서 넷 사기질의 가능성을 냄새 맡았음인지
아구라로 속속 모여들어 좌판을 깐다.
그만큼 사기질 하기에 아구라만큼 물 좋은 곳 없다.
아~골빈도들이야 이런 말 하면 발끈해서는 '우릴 멀로 보고!' 하겠지만 멀로 보긴?
기꾼이들 눈엔 온통 둉신호구들로 뵈는 거지.


사기 잘 당하는 사람들의 일반적 유형이

1.귀가 얇은 사람---인생 헛산 노인네들
2.감성이 지나치게 풍부한 사람---세상 물정 모르는 아짐들
3.지적 자아도취가 심한 사람---씰데없이 정치의식만 높은 헛똑똑이들
4.소아적 심리상태의 사람---관심과 보살핌이 필요한 을라 가튼 어른들인데

아구라엔 이런 인간들이 벅실벅실하다.
똥밭에 똥파리 날고 호구둉신들 모인 곳에 기꾼이가 스며든다.

짹너더리가 삼성 글빨로 끗발을 세워 방주를 띄워 구도를 잡더니
밑그림으로 교육연대를 야그한다.
자고로, 기꾼이들이란 절때 첨부터 제 물건 꺼내 놓지 않는 법이다.

우주평화를 위협하고 지구침략을 기도하는
안드로메다의 외계인이 가장 좋아하는 간식거리가
한국인의 밥상에 오르는 메루치조림인데
안드로메다 외계인의 건강에 심대한 타격을 가하고
지구평화와 우주평화에 기여하기 위해
'밥상머리 메루치조림 없애기 운동'을 제안하면서
슬며시 뒷춤에 차고 있던 알약 하나 꺼내든다.
밥상에 메루치가 없어지면 먼 맛으로 밥 먹겠냐며
지구평화를 위협하는 안드로메다 외계인을 격퇴하기 위해 부득이하게 없앤
메루치조림을 대신할 건강 식품 알파 Z를 드시라고 권한다.

우리 모두 알파Z를 먹고 힘내서 알파Z으로 연대하여
안드로메다 외계인을 처단하고 지구평화와 우주평화를 지켜내자!


잭너더리의 교육연대 장사하는 폼새가 딱 이 모양이다.

그간 잭너더리의 선동에 큰 은혜라도 받을 듯 방주를 기다리면서
'저도 꼭 태워주세요~~'라면서 감동의 눈물을 쥐어짜며 성스러운(?) 추태를 보이던
호구 둉신들은 부디 새겨 듣거래이.

절마 저거 조만간 교육연대 사이트(카페든 머든) 하나 들고 나온다.
그 다음엔?
교육 상담하고 책 팔고 사이비 인터넷 대안학교 하나 세워 무안단물 쪽쪽 뽑는 거지.
아정뽀에서 무안단물 쪽쪽 뽑다 들켜서는 꼴갑들 떨 듯.

사기치는 늠들이 쌍팔년도 시절처럼 생긴 걸로 밀고 가는 시대가 아니다.
넷이 없던 그 시절에야 전혀 '사기칠 것 같쟎은 곱상한 얼굴'이 사기술의 최대
밑천이었지만 현대 사기의 중심 무기는 스펙과 글빨이다.
어디 직장없는 국졸 중졸자들이 할 게 없어 사기치는 줄 아는 모양인데
기꾼이들 무시허지 마라.
너그보다 가방끈 길고 이빨 좋고 글빨 난 늠들 수두룩하다.
기꾼이도 세월따라 진화를 거듭했고 농축된 생존 요령들 다 있다.
스스로들 얼마나 못 배우고 아는 게 없으면 만날 그리 0.1% 영웅 타령인가.
정체도 모를 언 늠이 쫌만 삼박하다 싶음 그저 배때쥐 쫘악 깔고 오체투지 공손한 자세로
헐렐루야~~흘레흘레 해대는 느그 호구둉신들만 늘상 빨리는 거다.

이리로 우루루 몰려갔다가 어, 이 산이 아닌가벼?
저리로 우루루 몰려갔다가 어, 이 산도 아닌가벼?

아구라 일천삼십오 둉신 느그들 하는 짓 보고 잇음 이젠 욱끼지도 않는다.

미네도 갔고 리담메도 갈 지경이고 짹너더리도 숭악해 뵈는데
차라리 예끼를 방주로 모셔라.
내가 느희 모두를 구원할 순 없겠지만 최소한 기꾼이들한테
빨려나가는 니들 돈지갑과 영혼을 지켜주는 파수꾼 노릇은 해줄 수 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대한민국 기꾼이들 물로 보지 마라.
그들은 아구라를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으며
아구라를 홀리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 지도 잘 알고 있으며
아구라에서 짱 먹기 위해 팀 단위로 뛰어야한다는 잔재주도 부릴 줄 아는
아주 아주 굉장히 몹시도 대단히 숭시러분 늠들이다.

많은 알밥들이 그간 숱하게 경고해왔지만
느그들이 이곳에서 뭔가 정보를 찾으려거든 차라리 넷질할 시간에
서점엘 가서 공인된 저자의 책을 사서 그 속에서 지식을 구하라.
그게 너들 자신과 가족들과 대한민국과 지구와 우주의 평화를 지키는 길이다.
알간?

내가 요즘 못된 알밥질 하느라 천벌을 받은 건지
좀처럼 안 걸리는 감기까지 걸렸다. 기분들 쥑이지?
내가 늬들한테 마땅히 놓아줄 보시라곤 요런 입보시밖에 없어 미안허다.^^

아구라가 자꾸자꾸 잼없어지네여 기꾼이들만의 독무대라서
나 이만 감미다 안녕히 계세여 잘 가라고 댓글 부탁^^


===東山高臥===

별 할 말도 없을 때

작성자:HUE
작성일:2010.02.04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헌법 11조 1항]

헌법에 저렇게 규정되어 있는데 왜 우리 주변은 불평등이 가득하고 계급화 되어 우리를 세상의 가장자리에서 아우성으로 날을 지새우게 하는가?

이것이 내가 본 아고라 풍경이다.


<헌법에 규정?>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이곳은 글을 ‘핥아 먹는다‘라는 표현을 처음 사용한 사람으로서 유행어가 되어 버린 작금에 일말의 책임을 가진다.
헌법 11조 1항의 읽기는 <법 앞에>라는 문구다.
무조건 평등한 게 아니라 법 앞에서 평등하다는 사실을 간과해서 빚어지는 온갖 푸념을 보며 표현한 말이다.

푸념이 타당하려면 사법 정의에 대해 논해야 한다.


<불평등과 계급화>

평등 규정 앞의 헌법 제 10조에는 “모든 국민은....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라는 조항인데 누구나 자유로운 영리추구와 재산의 소유가 가능하다는 자본주의 경제 원칙과 관련된다. 이것은 법적. 정치적 평등은 인정하되 경제적 평등까지는 인정하지 않는 체재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는 거다. 전 근대 사회의 신분이 법적. 정치적 구분인데 비해 근대 사회의 계급은 경제적 구분이다.
우리가 정부를 선택할 때 소위 우파나 좌파적 성향을 눈여겨보는 이유는 자본주의가 필연으로 노출시키는 경제적 계급을 강화하느냐 아니면 기회균등을 확대하느냐의 선택인 것이다.

여기에서 경제 정의에 대한 제대로 된 논의를 보고 싶었지만 미네르바 굿판으로 미망에 빠진 형국을 지켜본 것 말고는....


<세상의 가장자리>

한 때 스포트라이트가 비추어 진 기억 때문인지 회상을 떨쳐버리지 못한다. 조명은 관심사를 따라 때로는 필요에 의해 시공을 옮겨 다닌다. 떨쳐버리지 못하는 불의 기억은 조그만 쥐불놀이조차에도 환호하는 무리들로 더욱 을씨년스럽다.
한 번 곡식을 거둔 땅은 황무지가 되어야 한다. 황야는 버려진 땅이 아니라 미래의 땅이다. 황야는 안으로는 힘을 비축한다.
봄이 온다. 씨를 뿌리기 전에 전복해야 한다. 깊게 갈아엎어야 한다. 이곳에서 <알밥>의 역할은 쟁기가 되어 황무지의 속살을 드러내 준 다음에는 창고로 돌아가는 것이다.

알밥을 삯꾼으로 보는... 인생을 터무니없는 의심 말고는 별로 한 것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 사계절 내내 키보드를 헤매는 것도 팔자이긴 하다.


<아우성으로 지새우는 날들>

데이비드 리즈먼이 1950년대 [고독한 군중]에서 이미 현대 사회는 ‘타인 지향성’이라는 특성을 가질 것이라고 이야기 한 바 있다.
모든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데, 정작 그 해결을 위한 ‘참고자료’는 자신을 바라보는 타인들의 시선밖에 없다. 어떻게든 개성과 정체성을 확보해야 하지만 내게 개성과 정체성을 부여하는 것은 타인들이다.


아고라에서 조회수와 찬반에 연연하는 모습들을 보며 다시 떠오른 상념이다.
연대는 개인이 조직에 대항하는 대단히 적극적이고 유효한 방식이다. 그런데 연대하는 것이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보이는 행태가 자주 목격된다.

***

이 글은 <개념어 사전/남경태 지음>일부분을 토대로 하여 썼다.


written by 'HUE'
(이 글의 저작권은 'HUE'님에게 있습니다)

이 아침 불현듯 생각나는 사람

작성일:2010.02.02


"나는 글 쓰는 일이 항상 두렵다. 이유는 아무리 사이버 공간이라 해도 현실과 곧바로 이어질 때 동일하게 책임져야 한다는 자각 때문이고, 내가 쓰는 내용이 결국은 내가 세상을 인식하는 모습에 다름 아니여서 초라함이 앞서고, 아무리 객관성을 노력해도 갖게 되는 태생적 한계로서 <나>라는 개별성 때문이다."

윗글은 얼마 전 'HUE'님이 쓴 글 중 말미의 한 부분이다. 나도 그렇다. 진지모드로 글 쓸 때는 더욱 그렇다. 내 지난 글들이야 그저 농조의 가소롭고 가벼운 글들이기에 큰 부담은 없었다지만 정색을 하고 게시판에 글을 토하는 일은 두려움부터 앞서는 건 사실이다.

공개게시판을 지켜보는 눈은 단지 게시판 상용자 몇 사람의 눈이 아니라 네이버 지식in이나 위키피디아의 눈과 다름없다. 게시판에 제공되는 지식과 정보에 대한 검색은 제공하는 자뿐만 아니라 제공받는 자들도 실시간으로 공유 가능한 세상이다.

어설프게 공부한 지식 몇 쪼가리를 나열해놓고 우물 안 개구리처럼 우쭐해하는 일이란 참으로 낯간지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글쓰기에 무슨 모법답안이 있는 건 아니지만 세간에서 지자들 간에 통용되는 좋은 글쓰기의 사례에 비추어볼 때 경방에서 사단을 일으키는 자들의 글쓰기는 결코 바람직한 모범은 아니었다. 좋은 글을 가늠하는 저마다의 기준들이 있을 테지만 내 기준에서의 좋은 글이란 '단순히 지식 전달의 글이 아닌 자신의 사유의 결과물들을 자신이 조탁한 언어로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잘 명증해낸 글'이 아닐까 싶다.

기존지식이나 지식인들에 '정통한' 것이 아니라면 함부로 인용하는 건 참으로 위험한 일이다. 그 지식 분야에 정통한 누군가의 눈이 두려운 대목이다. 분명한 건 흔히 현학적인 글쓰기에서 인용되는 선대의 유명인들은 정작 그들의 글에서는 비판의 근거로써 타자나 타자의 기존지식을 인용할 때를 제외하고는 인용이 흔치 않았으며 오직 자신의 사유의 결과물들을 논증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단순한 지식의 전달자가 아니라 창조자들이었다. 그처럼 자신들만의 사유의 결과물들이 있었기에 모두 지식 스승의 반열에 올랐나 보다.

이런 생각에 이르자 떠오르는 한 사람이 있다. '죶밥'이다. 이런 시각으로 보면 아구라 경방에서 이런 글쓰기에 가장 충실했던 사람으로 죶밥을 꼽는 데 주저하지 않겟다. 난 그가 자신의 글에서 유명인의 지식을 쓸데없이 인용하거나 남발하는 걸 보지 못했다. 그는 철저히 자신만의 사유의 결과물들만을 글속에 표현했다. 정확한 어법과 탄탄한 논리구조는 그의 사유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니편 내편 없이 그의 까칠한 어투에 민감한 반응을 보인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걸 안다. 난 그가 그런 까칠한 어투를 채택한 것이 경방 논쟁의 특수성에 맞춘 인위적 장치란 걸 알기에 애써 그를 나무랄 생각은 없다. 닭 잡는데 보도를 휘두를 필요까지야...

진중권의 까칠한 어투에는 환호하면서 죶밥의 까칠한 어투에는 지나치게 인색했던 경방의 사람들 중 그 누구도 죶밥과 진지모드에서의 토론에 응하거나 제안하는 것을 보지 못했기에 죶밥이 숨기고 있는 보도를 볼 기회가 없었다. 글타고 내가 죶밥을 건드려서 그의 보도를 굳이 꺼내 보일 이유도 자신도 없다. 언젠가 좋은 장소에서 그가 휘두르는 보도에서 그의 깊이있는 사유의 결과물들을 보길 기대해볼 뿐이다.

이 아침 불현듯 죶밥이 생각나서 써보는 잡글이다.


===東山高臥===

가시가 돋다

작성자:HUE
작성일:2010.02.02



나는 황야에 산다.

먹이를 노리는 포식자들이 그림자와 냄새를 들키지 않으려 해와 바람을 마주하며 접근하는 곳, 하룻밤 사이에 우두머리가 바뀌고 또 바뀌며, 힘들게 구한 먹이를 쪽수로 뺏고 빼앗기는 모습이 일상인 곳에서 흔들의자에 앉아 있다가 문득 나는 등 굽은 나무가 되었다. 그러자 발바닥에 있던 티눈이 자라 뿌리가 되었고 키보드 위에 걸쳐져 있던 손은 가시로 변하고 있었다. 가시라도 없으면 나는 충분히 자라기 전에 고목이 되어 노을을 배경으로 다하지 못한 생의 이야기나 전하는... 캘린더 속 풍경이 되었을 거다. 그래서 오늘은 가시의 노래를 부른다.

왜 그랬을까.

포식자는 나의 취향이 아니었고 풀을 찾아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초식동물도 내가 바라던 일이 아니었다. 가끔 무리를 짓지 않는 매력적인 포식자가 나타나면 닮고 싶었다. 하지만 날렵하게 발달된 근육을 지니지 못했으므로 그저 바라보거나 힘들게 구한 먹이를 약탈자에게 내주지 않도록 그늘을 만들어 주는 게 고작이었다. 황야에서 친구라곤 해와 대기 정도였다. 대기는 가끔 바람을 만들어 내가 나무임을 잊지 않도록 해주었다.

황야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내 피부에 소름을 돋게 하였고 지속적인 생존의 공포는 소름을 가시로 변하게 하였다.

물론 나의 실재는 밀림에 산다. 황야의 나무는 더불어 숲에 사는 나의 아바타인 것이다. 더불어 숲에 있는 동료들은 아무도 황야로 아바타를 보내지 않았다. 황야는 밀림에서 터부시되는 금기의 땅이었고 황무지였다. 황야를 아바타의 서식지로 삼게 된 것이 내게는 불운한 선택의 사례이다. 불운한 선택이라고 했지만 실은 호기심을 안락과 바꾼 피폐한 체험인데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불모의 땅에 드문드문 찾아오는 수행자들 때문이다. 그들이 전하는 고행을 엿듣는 즐거움으로 내 몸에 뿌리가 내리고 가시가 돋는 것을 방치하였다.

수행자들의 이야기는 크게는 같고 작게는 달랐다. 걸어 온 길은 같지만 지나 온 시간이 다른 것처럼. 포식자들은 먹이를 포획하기 전에 먼저 먹잇감이 눈치 채지 못하게 하거나 본능적 방어를 해제시키는 능력을 가졌다고 한다. 낌새를 숨기는 방법은 흡사한 무늬와 포식자들의 상호 교감에 있었다. 호구들의 긴장해제를 위해서는 같은 종족인 양 행세하며 낙원을 예시하고 골짜기로 유인한다. 그래서 먹잇감은 자신들이 죽는 순간에도 오히려 뒤에 남겨진 무리를 걱정해준다나.

호구의 특징은 두 가지였다.

자신들을 규정하는 <천하고 천한 종족>이라는 계급이 마치 집단으로 구원받을 징표라는 착각이 하나요. 다른 하나는 하늘이나 먼 바다에서 자신들을 구원 할 강한 놈이 올 거라는 믿음이 그것이다.



영화 <마하트마 간디> 를 다시보다가 ...




written by 'HUE'
(이 글의 저작권은 'HUE'님에게 있습니다)

그림같은 풍경2 - <서우님>

작성자:HUE
작성일:2010.01.29



일전에 '그림같은 풍경'에 비유하여 서우님과 누리꾼이 부딪히는 역사관에 대해 쓴 적이 있었지요.
요즈음 또 재연되는 부분을 보며 갈등의 내용보다 서우님이 참고하시라고 몇 자 쓰며,
책의 한 부분을 패러디했음을 미리 밝혀 둡니다.

현실과 허구를 분리하는 인지 체계인 분리기제decoupling mechanism대한 이야기.

세상을 성공적으로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정확한 정보가 필요합니다. 이 정보에
따라 생사가 결정되죠. 그렇다면 당연히 사람들은 소설보다 비소설을 선호해야
하지만 다큐멘타리와 허구적인 영화 가운데 무엇을 볼 것인지 물으면 허구적인
영화를 선택하는 경향이 높지요.
즉 사람들은 역사책보다 역사소설을 더 좋아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정말로 정확한
정보를 원하거나 취직이나 승진시험이라면 리담메의 소설보다 백과사전을 찾을 겁니다.

서우님,
인간이 현실을 왜곡하는 것이 단순히 선악이나 진위를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생존 적응구조와 허구적 경험에 어떤 이점이 있기 때문
이라고 이해하시기를 바람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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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자료:
[왜 인간인가?-인류가 밝혀 낸 인간에 대한 모든 착각과 진실/마이클 가짜나가(^^)]



written by 'HUE'
(이 글의 저작권은 'HUE'님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