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가 돋다

작성자:HUE
작성일:2010.02.02



나는 황야에 산다.

먹이를 노리는 포식자들이 그림자와 냄새를 들키지 않으려 해와 바람을 마주하며 접근하는 곳, 하룻밤 사이에 우두머리가 바뀌고 또 바뀌며, 힘들게 구한 먹이를 쪽수로 뺏고 빼앗기는 모습이 일상인 곳에서 흔들의자에 앉아 있다가 문득 나는 등 굽은 나무가 되었다. 그러자 발바닥에 있던 티눈이 자라 뿌리가 되었고 키보드 위에 걸쳐져 있던 손은 가시로 변하고 있었다. 가시라도 없으면 나는 충분히 자라기 전에 고목이 되어 노을을 배경으로 다하지 못한 생의 이야기나 전하는... 캘린더 속 풍경이 되었을 거다. 그래서 오늘은 가시의 노래를 부른다.

왜 그랬을까.

포식자는 나의 취향이 아니었고 풀을 찾아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초식동물도 내가 바라던 일이 아니었다. 가끔 무리를 짓지 않는 매력적인 포식자가 나타나면 닮고 싶었다. 하지만 날렵하게 발달된 근육을 지니지 못했으므로 그저 바라보거나 힘들게 구한 먹이를 약탈자에게 내주지 않도록 그늘을 만들어 주는 게 고작이었다. 황야에서 친구라곤 해와 대기 정도였다. 대기는 가끔 바람을 만들어 내가 나무임을 잊지 않도록 해주었다.

황야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내 피부에 소름을 돋게 하였고 지속적인 생존의 공포는 소름을 가시로 변하게 하였다.

물론 나의 실재는 밀림에 산다. 황야의 나무는 더불어 숲에 사는 나의 아바타인 것이다. 더불어 숲에 있는 동료들은 아무도 황야로 아바타를 보내지 않았다. 황야는 밀림에서 터부시되는 금기의 땅이었고 황무지였다. 황야를 아바타의 서식지로 삼게 된 것이 내게는 불운한 선택의 사례이다. 불운한 선택이라고 했지만 실은 호기심을 안락과 바꾼 피폐한 체험인데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불모의 땅에 드문드문 찾아오는 수행자들 때문이다. 그들이 전하는 고행을 엿듣는 즐거움으로 내 몸에 뿌리가 내리고 가시가 돋는 것을 방치하였다.

수행자들의 이야기는 크게는 같고 작게는 달랐다. 걸어 온 길은 같지만 지나 온 시간이 다른 것처럼. 포식자들은 먹이를 포획하기 전에 먼저 먹잇감이 눈치 채지 못하게 하거나 본능적 방어를 해제시키는 능력을 가졌다고 한다. 낌새를 숨기는 방법은 흡사한 무늬와 포식자들의 상호 교감에 있었다. 호구들의 긴장해제를 위해서는 같은 종족인 양 행세하며 낙원을 예시하고 골짜기로 유인한다. 그래서 먹잇감은 자신들이 죽는 순간에도 오히려 뒤에 남겨진 무리를 걱정해준다나.

호구의 특징은 두 가지였다.

자신들을 규정하는 <천하고 천한 종족>이라는 계급이 마치 집단으로 구원받을 징표라는 착각이 하나요. 다른 하나는 하늘이나 먼 바다에서 자신들을 구원 할 강한 놈이 올 거라는 믿음이 그것이다.



영화 <마하트마 간디> 를 다시보다가 ...




written by 'H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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