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혜의 교육 방식...최고가 최선인가, 최선이 최고인가





김인혜씨와 관련된 글들을 검색하다가 눈길을 끄는 글 한 편을 보았다. <김인혜, 논란 사실이라면 서울 음대는 똥통>이란 제하의 글이다(아래 링크).

http://tsori.net/3897

글을 읽고 나서 잠시 생각 중에 이 글과 퍼뜩 교감이 되는 외침이 하나 뇌리에 뜬다.

“내가 조선의 국모니라~!”

십여 년 전 KBS에서 방영했던 드라마 <명성황후>에서 명성황후역을 맡았던 배우 이미연씨의 극중 대사다.

드라마의 대사처럼, 시망하는 자부심이든 돋는 자부심이든 김인혜와 같은(?) 성악인으로서의 자부심만큼은 조선의 국모를 능가하고도 남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 번 해병이 영원한 해병인 것은 지옥과도 같은 병영 생활을 공유한 끈끈한 연대감이 그 밑바탕이고 공포의 외인구단이 카리스마를 내뿜는 것도 남들은 쉽게 공유할 수 없는 저들만의 ‘특별한 무엇’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는 저마다 대단히 자부심 돋는 특별한 집단들이 무수하다. 검판사, 연예인, 의사, 해병대, 명문고, 명문대, 요리사, 전문기능인, 학자, 프로스포츠선수 등등 하다못해 길거리의 노숙자들까지 저마다 제 잘난 맛에 산다. 죽지 못해 산다지만 콩알만큼이라도 제 잘난 맛이 있기에 살 의욕이 죽을 의욕을 앞서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우습게 보는 길거리 세계에서조차 힘 있는 노숙자가 힘없는 노숙자들 위에 군림하는 그들만의 질서가 있다.

암 것도 모르는 것들은 까불지들 마라! 내가 조선의 국모고, 대한의 해병이요, 경기고-서울법대 라인 검판사고, 족보 있는 스승을 둔 성악인이다 뭐 이런 건가? 국모가 아닌 것들은 명성황후를 비난할 자격도 없고 해병이 아닌 것들은 군대 얘기도 하지 말며 경기고-서울법대 아닌 것들은 남을 단죄하지도 말며 성악을 모르는 것들은 애국가도 부르지 말라는 건가?

우리는 늬들이 상상하는 그 이상의 특별한 무언가를 체험한 ‘특별한 존재들’이고 그 특별한 울타리는 신성불가침이라고 선언하고 싶은 건가? 시발, 우리집 똥개도 그러더라. “내가 조선의 변견이니라~!”고. 워~어웡, 웡, 웡, 멍!!!

조선의 국모도 사람이고 해병도 사람이고 성악가도 사람이고 노숙자도 사람이다. 김인혜와 그녀의 학생들, 성악하는 사람들은 무씬 안드로메다에서 건너온 신인류급이라도 된단 말인가? 정녕 그런 대접을 받고 싶은가? 참으로 아서라 말어라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다’는 선언은 공산당들이나 하는 소리가 아니라 태초에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하나님의 말씀이기도 하고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우리를 보우해주신다는 하늘님의 말씀이기도 하다.

특별난 존재가 되고 싶고 그런 존재로 대우받고 싶은 맘이야 개인의 자유지만 그 자유에는 다른 사람의 인권을 짓밟을 권리는 없다. 이런 인식이야말로 현대 민주주의 사회를 ‘잘’ 살아가기 위한 모든 배움의 알파이자 오메가다. 인권은 모든 교육의 알파이고 인간생활의 오메가란 말이다. 정치든, 경제든, 철학이든, 성악이든, 이 모든 인간 활동들은 인권의 신장을 그 궁극의 목표로 할 때 그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고 70억 인류의 존중을 받는 것이다.

대통령의 인권이 10그램이라면 노숙자의 인권도 10그램이고, 김인혜의 인권이 10그램이라면 학생들의 인권도 10그램이다. 이 말은 동산고와의 말이 아니고 하늘님과 하나님이 동시에 하신 말씀이니 부디 토 달지 않기를....

서두에 소개한 글의 필자는 조중동의 선정적 기사들에 현혹되어 부화뇌동하지 말라는 경고를 하고 싶은 모양이다. 현대 사회의 ‘뉴스’는 말 그대로 ‘새것처럼 반짝반짝한’ 사람들 소식을 전달하는 것을 본연의 목표로 한다. 단, ‘새것’은 가공된 것이 아닌 정확한 사실에 근거해야만 한다는 것은 그 업계의 존재의 이유인 만치 두 말 하면 잔소리다. 일간지나 인터넷 언론에서 기사화 되는 부류에는 딱 두 부류가 있다. 띄우는 부류와 까이는 부류. 난 전자의 부류가 언론의 기사 왜곡을 탓하는 걸 보지 못했다. 띄우는 기사에서는 선정적 왜곡도 마다지 않던 자들이 까이는 기사의 타깃이 되었을 땐 입에 게거품을 물고 왜곡보도입네 선정적 마녀사냥입네 목청 높이는 꼴은 참 지랄 맞고 보기에도 역겹다.

학창시절 교실에서나 ‘잘못했습니다’라는 말을 들었지 사회에 나와선 그런 말을 들어본 기억이 별로 없다. 세간을 들썩이는 구린 사건 당사자치고 스스로 먼저 나서서 ‘잘못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 보기가 로또 1등 당첨만큼 어렵지 싶다. 사회적 지위나 신분이 고강할수록 더욱 그렇더라. 너무 잘 나서 체면이 높아 주변을 크게 의식하고 항상 우월한 의식으로 좋은 세상만 살다보니 자신의 잘못을 자인하고 망신당하는 일이 죽기보다 더 어려운 특별한(?) 사람들이다. 증거를 코앞에 들이밀어도 일단 부정하고 보는 건 그들만의 메이저리거들이 세상사는 방식이고 룰인가 보다. 그리 보면 수치심을 견디지 못하고 부엉이 바위에 올라선 노통은 똥밭에 구르는 진주 같은 존재였다.

보기엔 위 소개된 글의 필자는 아마 그 판에 몸 좀 굴렸던 모양이다. 아니면 몸 좀 굴리고 있는 누군가의 부모나 형제, 일가친척일 수도 있겠다. 좀 더 심하게 몰아가면 김인혜식의 ‘공포 교육’의 수혜를 입었거나 아류의 철학을 가진 사람일 수도 있겠다. 암튼 그런 성악도로서 또는 그 일가족으로서의 자부심도 대단한 것 같다. 그래, 별의별 인간들이 이런저런 뎐차로 어우러지는 세상이다. 정명석도 황우석도 김길태까지도 추종자는 있기 마련이더라. 70억 인구 중에 자신과 뜻 맞을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다면 그거야말로 어디 세상 살 맛이 나겠는가. 제 잘난 맛으로 또는 끼리끼리 추켜주며 어울렁더울렁 살아가는 거야 뭐랄 바 아니지만 민폐는 끼치지 말어야지. 남의 집 귀한 자식들 데려다 놓고 대체 그기 뭐하는 짓거리냐고요, 성악,악,악? 조선의 똥개가 웃는다. 워흫흫~~

조중동의 보도가 선정적인 마녀사냥(암만 보아도 김인혜가 조중동의 마녀사냥감이 될 허접은 아닌데...글고 김인혜의 성깔로 봤을 때 기사를 날조했다면 언론을 상대로 벌써 고소고발을 남발하고도 남았을 낀데...)인지 사실에 근거한 ‘새것’(News)인지는 서울대 징계위의 추후 결정과 법원의 판단을 보면 밝혀질 일이다. 행여 결과가 나쁘더라도 비겁자들의 최후 보루인 '음모나 음해 세력'을 운운하진 말라. 음모하거나 음해할 힘은 김인혜가 가졌지 풋내기 학생들에게 그럴 힘은 없다. 김인혜는 언론과 학생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스승마저 팔며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기에 바빴다. 남탓하는 사람치고 제대로 된 사람을 보지 못했다. 신뢰하기 힘든 사람의 전형이다.

사안에 대한 의견이 제법 분분한 터라 먼저 소개한 글과는 다른 논조를 가진 글 두어 편 더 소개해 놓는다.

http://nparam.com/cafebbs/view.html?bid=cat_05&gid=main&pid=192908
http://moveon21.com/?document_srl=523972

두 상반된 논조의 글들은 결국 ‘최고가 최선인가’ 아니면 ‘최선이 최고인가’라는 물음을 던지고 있다. 과연 내 아이에게는 어떤 관점에 무게중심을 두고 가르치는 것이 최선이고 최고일까??? 평소엔 늘 정리해둔 생각으로 자부했음에도 막상 화두로 잡으니 다시 한 번 생각이 골똘해지는 토요일 아침나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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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28 관련 기사 추가 :
http://kr.news.yahoo.com/service/news/shellview.htm?linkid=33&articleid=201102281815 3830098&newssetid=16 서울대 징계위가 조중동의 선정적(?) 보도를 사실로 확인하고 김씨의 파면을 결정했다는 소식이다. 그러면 이제는 누구 말대로 서울 음대는 똥통이 되는 건가???


===東山高臥===

반주자 나가! 커튼 쳐!...김인혜의 '공포' 교육


사람이든 짐승이든 기억과 감정을 가진 생명체들을 제압하고 다스리는 최고의 무기는 공포다. 이러한 공포를 가장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대표적 집단을 꼽으라면 독재정치권력, 깡패조직, 군대, 수사기관 등을 들 수 있다. 여기서 ‘효율적’이라는 말은 단지 관리의 경제적 편의성을 말하는 것일 뿐 행위의 도덕적 정당성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공포는 반인간적일 뿐만 아니라 반생명적이기까지 하다. 매저키스트적 사이코가 아니라면 공포감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공포를 겪는 일 뿐만 아니라 공포를 가하는 일조차 꺼려하기 마련이다. 공포를 가하는 순간 대상이 겪을 고통을 동시에 교감치 못하고 외려 그 고통을 아무렇지도 않게 즐기는 사람이라면 그는 이미 새디스트의 영역에 든 사람이다.

"다음에도 혹시 아새끼들 팰 일이 있으믄 확실하게 조지야된다이.
그 정도로 그치문 다음에 니 보믄 또 해보자꼬 달라 든다.
아예 누구를 조질 때는 다음에 눈만 마주치도 오줌을 찔끔 싸게끔 만들어놔야 되는 기라.
아예 용서해주고 같은 편으로 만들든가 아니믄 차라리 빙신쯤으로 만들어삐라.
그래야 뒤탈이 없다."

영화 <친구>에 나오는 위 대사는 폭력조직 뿐 아니라 힘 좀 쓰는 중고딩 학생들에게도 싸움의 정석처럼 통용되는 말로 공포의 쓰임새가 어떤 것인지 잘 웅변해주고 있다.

범 무서운 줄 모르는 하룻강아지가 차라리 부럽다. 사람은 살면서 크든 적든 공포를 경험하고 체득해간다. 단 한 톨의 공포도 겪지 않고 하룻강아지 같은 천진난만함으로 생을 살고 마감할 수 있다면 그 얼마나 큰 행복이랴만 그런 경우조차 마지막 죽음의 공포만은 피해갈 순 없으리라. 암튼 공포는 인간이 느끼는 다양한 감정들 중 가장 질 나쁜 감정임엔 틀림없다. 동일한 감도의 슬픔과 공포 중에 양자택일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난 주저 없이 슬픔을 택하겠다. 특정한 공포를 경험한 사람이나 동물들에게선 그 공포감이 여생을 좌우하는 트라우마로 작용하기도 한다.

공포는 슬픔과는 달리 존재에 대한 회의나 자괴감마저 들게 하는 비열한 감정의 영역이다. 강자의 힘 앞에서 한없이 나약해지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회의, 자괴감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살면서 한 번 쯤은 아니 매일 겪는 일상의 고통일지도 모르겠다. 사자 앞에 맨몸으로 선 인간, 길거리 폭력배들에게 둘러싸인 연인, 상사가 내던진 서류뭉치를 뒤집어쓴 사무원, 상급자에게 얼차려 당하는 군인, 권력자에게 조인트 까이는 공무원, 보스의 명령으로 단지하는 조직원, 수사관의 물고문에 노출된 피의자,.............

며칠 전부터 세간을 떠들썩하게 하는 공포의 한 장르가 있다. 바로 ‘공포 교육’이다. ‘공포 정치’는 익숙한데 ‘공포 교육’이라니? 표현이 생소하고 어색하다만 ‘교단폭력’의 다른 말로 보면 되겠다. 교단 폭력이란 말은 우리 귀에 익숙하고 그 유형과 폐단이 어떤 모습인지 우리는 꽤 잘 알고 있는 편이다. 근데 최근에 서울대에서 벌어진 김인혜 사태를 보면 ‘공포 교육’이란 말을 새삼 떠올리게 된다. ‘공포’와 ‘교육’, 참으로 어울리지 두 단어가 국내 최고의 교육기관이란 곳에서 암암리에 일상적으로 어울렸다니 그래서 이번 사건은 더욱 충격적인 사건으로 인구에 회자되는 모양이다. 서울대 성악과 교수 김인혜, 그녀는 성악을 가르치기는 커녕 남의 집 귀한 자식들을 짐승처럼 부렸고 짐승에게도 행사해선 안 될 '공포'를 실감나게 교육했다.

http://kr.news.yahoo.com/service/news/shellview.htm?linkid=33&articleid=2011022410073592294&newssetid=16

"반주자 나가, 커튼 쳐!"
서울대 음대 관계자 A씨는 23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김 교수 입에서 `반주자 나가, 커튼 쳐`란 말이 나오면 학생들은 공포에 떨었다고 한다. 짧은 두 마디는 폭행을 알리는 신호였기 때문이다"라고 전했다.

A씨는 "김 교수의 폭행은 지금까지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심했다"며 "발성을 가르치려고 때린 정도가 아니라 여학생들의 머리채를 잡아 질질 끌고 다니고 꿇어앉은 학생의 무릎을 발로 찍어 누르기도 했다는 학생들의 증언이 이어졌다"고 이 매체와의 인터뷰서 주장했다.

또한 A씨는 김 교수가 졸업 후 학교 행사를 찾아온 졸업생에게 `졸업 뒤 인사가 없었다`는 이유로 뺨을 수십 차례 때렸다고 주장했다.

이 밖에도 A씨는 한 여학생이 고액의 참가비가 필요한 성악캠프에 불참 의사를 밝힌 여학생이 김 교수에게 얼굴이 부을 정도로 맞았다고 밝혔다.

김인혜는 짐승들도 하지 않는 짐승보다 못한 짓을 했다. 짐승들도 번식과 생존의 목적이 아니고서는 저런 짓을 행하지 않는다. 몹쓸 아짐이다. 참으로 몹쓸 뇬이다. '도제식 교육'일 뿐이었다는 변명이 가소롭고 김씨 아들의 읍소 또한 가당찮다. 학생들의 명줄을 담보로 행사한 횡포가 도를 넘어도 한참은 넘었고 이미 범죄의 수준이다. 변명이나 읍소가 통할 일이 따로 있지 ‘공포체험’에 관계된 학생들이 한 둘도 아니고 동료 교수들까지 외면할 정도건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가, 뻔뻔하기는.

http://news.nate.com/view/20110222n17179

앞서 언급했듯, 공포를 가하는 순간 대상이 겪을 고통을 동시에 교감치 못하고 외려 그 고통을 아무렇지도 않게 즐기는 사람이라면 김씨는 이미 새디스트의 영역에 든 사람이다. 광우병에 걸린 미친 돼지는 생매장 당하는 세상이다. 에혀라, 아서라 말어라, 지천명을 앞둔 나이에 저 지경이면 내 보기엔 사람 되긴 이미 글렀다.



===東山高臥===

이승과 저승간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요?



아래 영상을 보면 이승과 저승간의 거리는 '찰나'인 것 같습니다.

뒷줄에서 성급하게 발사된 오발탄이 앞줄 군인의 모자를 날렸군요.
이승에서 저승으로 갈 뻔했던 찰나의 순간,
영문도 모른 채 구령에 집중하는 군인들의 경직되고 비장한 모습에서
왠지 모를 우울함을 느끼게 됩니다.

'For Whom the Gun Fires'




“오전, 12시 26분입니다”








간만에 포근했던 지난 주말, 혹한으로 발길 뜸했던 낚시터엘 갔습니다.
낚시터는 산중턱에 위치한 관리형 저수지로 자주 찾는 곳입니다.
해질 무렵에 도착했는데 이미 네댓의 꾼들이 노니는 중이더군요.

축구 운동장 두 배만한 저수지 건너 절반은 여전히 얼음 껍데기가 두텁습니다.
밝은 달빛에 하얀 얼음판이 눈부시고 바람도 잠든 고요한 겨울밤이 깊어 갑니다.

늦은 밤 귀가를 서두르는 마지막 꾼의 자동차 시동 소리를 끝으로
이제 산중 겨울 저수지엔 동무와 나, 단 둘만 남았습니다.

찬 수온에 붕어가 쉬 놀 리 없을 터
입질조차 없는 꽝의 무료함을 종내 참아내질 못하고서
같이 간 동무는 자정을 몇 분 앞둔 시각, 관리실로 잠을 청하러 갑니다.

“그래, 먼저 자. 난, 1시간만 더”
지난 세월 1시간만 더, 더 하다가 하얗게 밤을 지새던 날도 부지기수였습니다.
광활한 저수지에 또 홀로 남았습니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긴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라던 장군의 노래는 어느덧 꾼의 노래로 되살아옵니다.

깊은 산 달 밝은 밤에 물가에 홀로 앉아
긴 대 드리우고 붕어와 씨름을 하는 차에
눈앞서 말뚝 찌탑은 남의 애를 끊나니

크흐, 참으로 별난 취미입니다.
미쳤다 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그게 또 꾼의 길이니까요.^^

일단 이 얘긴 예서 끊고 두 가지만 귀띔하고 다시 잇겠습니다.

먼저, 나는 폰맹입니다.
아래 글에 나오는 수준의 폰맹입니다.

http://anemos0120.blogspot.com/2009/08/gee.html

다음은, 낚시터의 화장실에 관해서입니다.
낚시가 자연동화 놀이여서인지 낚시터엔 화장실이란 게 따로 없습니다.
수로나 강가, 저수지 등 자연 그대로의 노지형 낚시터에선
궁뎅이 까는 곳이 곧 화장실입니다.
1박2일 정도의 낚시에서 반드시 한 번쯤은
풀숲이나 나무에 거름 줄 일이 생긴다는 걸 꾼들은 압니다.

이런 노지 낚시터와는 달리
영업과 시설 허가를 받은 관리형 낚시터라면
질 좋은 수세식 화장실을 두기도 합니다.
허나, 내가 가는 낚시터는 관리형 낚시터임에도 그곳의 ‘화장실’만큼은
차라리 ‘변소’나 ‘뒷간’이란 말이 어울릴 듯합니다.
그 수려한 낚시터 전경을 생각하면 옥에 티입니다.

흡, 얘기가 얘긴지라 글에서 구린내가 나더라도
좀만 더 진도를 나가 보겠습니다.

연식이 좀 된 사람들은 ‘변소’ 또는 ‘변소간’이란 말을 압니다.
우리 어릴 때는 화장실을 ‘변소’라 일컬었습니다.
요즘에야 화장실을 방 한 켠에 붙여두기도 하지만
그때의 변소는 앞마당 또는 뒷마당 가장 후미지고 구석진 곳에 위치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네 조상들은 전통적으로 변소를 ‘뒷간’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어렸을 적 뒷간에 갈 때면 반드시 누군가를 대동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뒷간 가는 게 참 무서웠던 시절이었습니다.
뒷간 갈 때만큼은 형제간의 품앗이는 갈등 없이 원만하게 작동했습니다.
누가 되었든 한밤중에 깨우는 형제의 뒷간 동행 요구는
졸린 눈을 부비면서도 반드시 응해야만 하는 절대 거절불가의 요구였습니다.
일종의 보험성 동행인 겁니다.

그 땐 유달리 뒷간에서 많은 소리가 들렸던 것 같습니다.
바람소리, 귀뚜라미 소리, 발자국 소리, 텀버덩~ 철퍽하는 소리까지......
그 모든 잡소리 중에서도 가장 많이 들렸던 소리는
‘하얀종이 주까 빨간 종이 주까’였습니다.
어린 상상이 빚어내는 뒷간 귀신소리 말입니다.
귀신소리가 환청으로 들리는 듯 할 때마다
“**아 거기 있지?”
뒷간 밖 동행인의 호위를 확인하곤 했습니다.
한 번 뒷일 볼 때마다 열 번도 더 확인했을 겁니다. 풉, 아련하네요.

부시맨에겐 콜라병이 귀신이고, 강아지에겐 피아노소리가 귀신 소리입니다.
귀신은 경험과 인식의 무지 또는
인간의 어린 상상이 빚어내는 창조물일 뿐이라고
정의를 내리는 나이가 되어서도 뒷간에서 일어나는 어린 상상은
예기치 않는 순간에 맞닥뜨리곤 합니다.

입질 한 번 없는 대 드리운지 어언 여섯 시간 째,
동무도 자러가고, 자정은 넘은 듯 남는 건 잠이려니,
잠자리에 들기 전 속이나 비우자며
낚시터 후미진 자리 그곳엘 들렀습니다.
인적 없는 산중의 겨울밤 저수지 외진 뒷간,
달처럼 하얗고 둥근 궁뎅일 까고
자연과 합일하는 것도 낭만이다 싶었습니다.
크 사실은, 원초적 욕구에 밀려 무심하게 들렀습니다.

근데, 낭만도 좋고 원초적 욕구 해소도 좋고 다 좋은데
이거 향이 장난이 아닙니다.
문을 열어두어도 활화산처럼 솟아나는 생*의 향을......
아무 생각 없이 뒷간에 들렀다가
이젠 오로지 한 가지 생각만이 사무칩니다.
‘어휴, 빨리 끝내자 끝내, 빨리 끝내자구, 빨리, 끄응’

어디, 세상사가 맘대로 되던가요.
외적 조건이 변하니 몸의 반응이 영 신통칠 않습니다.
고도의 집중을 요하는 성스런 작업인데 이게 뭡니까.
냄새 탓에 잡념(일념?)이 들면서 심신합일이 되질 않는 겁니다.
자고로 정신일도 해야 하사불성 한다는데 말입니다.
가장 편안한 상태로 무게중심을 서서히 내리다가 순간적으로 집중할 때
가장 좋은 성과를 내는 일이건만 마음이 조급하니 될 일도 안 되는 겁니다.
양팔을 앞가슴에 모으고 웅크리는 최상의 똥폼을 잡았습니다.

바로 그 때입니다.
고지가 바로 저긴데 막장의 7부 능선 정도에 도달할 즈음이었을까요.

“오전, 열두, 시, 이십, 육, 분, 입니다~!”
음허낫 찌발, 이기 대췌 머꼿! 이 무씬 소리고!
난 분명 뒷간 귀신의 소릴 들었습니다.
어릴 적 뒷간에서 듣던 바로 그 목소리였습니다.
뒷간 똥두덩 밑에서 정말 사람이 곡할 귀신소리가 들렸던 겁니다.
그건 마치 심장을 울리는 천둥소리와도 같았습니다.
식겁, 혼비백산, 아니 기절초풍할 뻔했습니다.
챠리릿 후다닥~~~~
너무 놀라서 손에 든 화장지를 행주로 식탁 훔치듯 비비고서 뛰쳐나왔습니다.

요샌 뒷일 할 때 시간 알려주는 게 뒷간 귀신들의 새로운 트렌드인가???

뒷간에서 멀찍이 물러서서 놀란 가슴 쓰다듬으며
집 나간 정신을 되돌리고 사태를 파악하는데 얼추 1분은 걸렸던 것 같습니다.
아시죠? 이렇게 놀랐을 때의 1분은 60초가 아니고 여삼추라는 걸.

‘귀신은 없다’라는 나의 신념을 확인키 위해
콜라병 들다보는 부시맨처럼 휴대폰의 여기저기를 뒤적였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단서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내 짧은 휴대폰 지식으론 감당키가 벅찬 문제였습니다.
모든 사태를 내려다보고 있었을 달님도 그 답을 알려 줄 수는 없을 것만 같았습니다.
가끔 내 휴대폰에 장난을 쳐놓는 딸내미의 농간으로 중간 결론을 내리고서야
산중 달밤에 체조(손가락 운동?)를 멈췄습니다.
그리고는 놀란 가슴과 7부 능선에서 멈춰버린 불편한 속을 토닥이면서
그렇게 또 한 겨울밤을 꿈속에 묻었습니다.

담날 집에 돌아와서 딸내미를 추궁하니 깔깔대며 한 수 알려줍니다.
음향조절 상 버튼을 길게 누르면 현재 시각이 음성멘트로 서비스된다는 걸
딸내미로부터 첨 듣고 이제서야 알았습니다.

이 사태를 정리해 봅니다.
보통 땐 휴대폰을 아래 주머니에 두는데
낚시를 할 땐 가부좌 자세로 휴대폰을 꺼내기가 불편해서
상의 주머니에 넣어두곤 합니다.
그곳에서 한껏 상반신을 웅크리며 기를 모으다가
옹다문 팔뚝에 음향조절 상 버튼이 꾹 눌렸었나 봅니다. 아하~

이 글 쓰며 한 번 더 들어 보았습니다.

“오후, 아홉, 시, 삼십, 육, 분, 입니다~!”
역시나 섬뜩하긴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제 뇌 속엔 산중 저수지 뒷간 귀신의 음성으로 메모리 되었기 때문일 겁니다.
이후로도 야간에는 그곳 화장실엔 다시는 들르고 싶지 않습니다.
오,전,열,두,시,이,십,육,분,....흐미 무서붜라. 클클^^

배경음악은 Radiohead 의 Climbing Up the Walls 입니다.ㅎ~



===東山高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