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전 대통령을 추도하며..금화 김대중, 은화 노무현


3달여 전 지난 5월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이하 존칭 생략)이 서거했을 때 김대중 전 대통령(이하 존칭 생략)은 충격 속에 “내 몸의 반이 무너진 것 같다”라고 했고, 5월 28일 서울역 분향소에서 “나라도 그런 결단을 했을 것”이라며 노무현의 자살 서거에 깊은 공감을 나타내었으며 <6 .15="">행사에서는 “노 전 대통령과 저는 여간한 연분이 아니다. 전생에 형제간이었던 같다”라고까지 했다.

김대중, 본관은 경남 김해, 출생지는 전남 신안, 빈농의 집안에서 1924년생, 목포상고 졸업..
노무현, 본관은 전남 광주, 출생지는 경남 김해, 빈농의 집안에서 1946년생, 부산상고 졸업..

본관과 출생지는 대각선으로 교차하고 출생 신분이나 학력, 정치 노선과 비전에선 쌍둥이 형제라 불러도 좋을 만큼 판박이었던 두 사람, 난 해는 달랐어도 같은 해 함께 가셨다. 가히 천생연분이다. 김대중 자신의 말처럼 과연 전생에서 두 사람은 형제간의 연분이었나 보다.

생전 김대중의 노무현에 대한 평가는 "노무현, 죽어서도 죽지 마십시오"라는 노무현에 대한 미공개 추도사에서 최상의 경의를 잘 나타내고 있다.

http://www.knowhow.or.kr/bongha_inform/view.php?start=0&pri_no=999720731&mode=&search_target=&search_word=

생전 노무현의 김대중에 대한 평가는 노무현의 저서 <여보, 나 좀 도와줘>란 책과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란 책자의 군데군데서 소개되고 있다.

내가 본 DJ는 끊임없이 성장하는 사람이었다. 끊임없이 배우고 노력하며 공부하는 사람, 그래서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는 사람이었다. DJ에게는 모든 문제들을 항상 미리 앞서서 깊이 생각해 두는 좋은 습관이 있었다. 정말로 열심히 사는 사람을 손꼽으라면 나는 DJ를 주저하지 않고 추천할 것이다.(여보, 나 좀 도와줘 95P-96P)

나는 YS를 '탁월한 정치인'으로 평가하면서도 그를 '지도자'로 인정한 일은 없다. 그러나 DJ에 대해서는 '지도자'로 이름 붙이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오래 전에 역사의 인물이 된 김구 선생을 제외하고는 역대 대통령이나 현존하는 정치인 중에서 내 마음 속으로 지도자로 생각해 본 사람이 없고 보면, 나로서는 그분을 특별히 존경하는 셈이다.(여보, 나 좀 도와줘 98P)

내가 그동안 부품소재 산업에 대해 많이 떠들었는데 알고 보니 지난 2001년에 DJ가 법까지 다 만들어놓았더군요. 손댈 만한 것은 대개 한 번씩 손질을 해두었더군요. DJ 시절 일어났던 시스템의 정리나 정책 시스템의 과정들을 한번 연구해보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또 다른 DJ의 면모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정치의 천재 DJ가 아니라 정책에 있어서도 천재성을 탐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양반은 총체적인 능력, 역량이 천재급 정치인입니다.(노무현 마지막 인터뷰 120P)

김대중 대통령은 아무도 흉내내지 못하는 독보적인 존재였습니다. 퇴임 5년이 지난 지금 이런저런 평가들이 있지만, 내가 청와대에 들어와서 보니 이 정부의 구석구석에 김대중 대통령의 발자취가 남아 있습니다. 내가 창조적인 것이라고, 내가 처음 시작한다고 생각하고 들어가 보면, 김대중 대통령의 발자취가 있더란 말입니다. 그런 것이 한두 개가 아니고 상당히 많습니다. 정부 혁신 부분에도 그런 것이 있고, 내가 가치 있게 생각하는 모든 것...(노무현 마지막 인터뷰 119P)




사람들은 그런 김대중을 ‘인동초’라 부르고 노무현을 ‘바보'라 불렀다. '인동초(忍冬草)'는 이름처럼 겨울을 이겨내는 꽃이다. 이 풀은 엄동설한에도 잎과 줄기가 얼어 죽지 않고 견뎌 이듬해 여름이 되면 화사한 꽃을 피운다. 김대중의 인생 역정을 보노라면 인동초라는 별칭 만큼 딱 제격인 것도 없지 싶다.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에서 혹독한 겨울이 닥칠 때마다 그는 마치 인동초처럼 견뎌내고 꽃을 피워왔기 때문이다.


인동초(금은화)

인동초는 이름도 참 많습니다.
꽃의 수술이 할아버지 수염과 같다고 하여 '노옹수'
꽃잎이 펼쳐진 모양이 해오라기 같다고 하여 '노사등'
꽃속에 꿀이 있으니 '밀보등'
귀신을 다스리는 효험있는 약용식물이라 하여 '통령초'
그리고아래 전설속의 '금은화'
정말 많은 이름을 갖고 있지요...??


---두자매 이야기----

옛날 어느 부부가 쌍둥이를 낳았는데
두 딸이 너무 예뻐서 언니는 금화(金花) 동생은 은화(銀花)라고 이름을 지었다합니다.
금화와 은화는 우애 있고 착하게 잘 자라서 어느덧 시집갈 나이가 되었지만
서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고집을 피웠습니다.

부부가 몹시 걱정을 하고 있던 중 어느 날 갑자기
언니 금화가 열이 심하게 나면서 얼굴과 몸이 온통 붉게 되었답니다.
의원을 불렀지만 의원은 “이것은 열병으로 약이 없다”라는 말만 할 뿐 치료를 포기하였답니다.
결국 언니 금화는
동생 은화의 간호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떠나게 되었답니다.
며칠 뒤 동생 은화도 역시 언니와 같은 병을 앓다가
자신의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부모에게
“저희들은 비록 죽지만 죽어서라도 열병을 치료할 수 있는 약초가 되겠다”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답니다.

다음 해 두 자매의 무덤에서 이름 모를 싹이 자라고 있었는데
여름에 노란색 꽃과 흰 꽃이 피었는데
처음 필 때는 흰색이었다가 점점 노란색으로 변하는 것이었습니다.
얼마 후 마을에 열병이 돌았는데 그때 마을 사람들은 그 꽃을 달여 먹고 낫게 되었답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그 꽃을 언니와 동생의 이름을 합해서
금은화(金銀花)라고 불렀다고 하는 전설입니다.


(*인동초 이야기 출처 : http://tong.nate.com/suksan90k90/49551568)

대한민국 사람들은 누구나 저마다 ‘김대중’ 하면 뇌리 속에 떠올리는 영상이 하나쯤은 있을 게다. 납치 되었다 극적으로 풀려난 뒤 초췌한 모습으로 기자 회견을 하던 유신탄압의 대명사 김대중, 수의를 입고 사형 선고를 받던 법정에 선 민주투사 김대중, 수십만의 청중 앞에서 연설하는 대통령 후보 김대중, 북한 김정일 위원장과 정상 회담하던 대통령 김대중,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는 대통령 김대중, 등등.




나 역시 마찬가지로 그의 이름 석 자 뒤로 여러 영상들을 떠올리게 되지만 그 모든 영상을 압도하는 한 장면을 잊을 수가 없다. 노무현의 경복궁 영결식장에서 비통해하는 권양숙 여사의 손을 움켜쥐고 오열하던 모습이 그것이다. 병든 노구에서 뿜어져 나오던 그 슬픔, 노회한 정치인이 아닌 인간 김대중의 노무현에 대한 주체할 수 없는 그 애도를 보며 전율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앞으로도 그 모습, 그 장면은 내가 김대중을 회억하는 모든 장면들의 첫 장면이 되지 싶다.

그 모습을 보았기에 나는 감히 ‘인동초 김대중’을 전설 속의 ‘금화’라 부르고 ‘바보 노무현'을 ‘은화’라 부르기를 마다지 않는다. 자기 몸의 반이 무너진 것 같은 아픔을 노구는 종내 견뎌내지 못하고 자신의 표현처럼, 전설속의 금화, 은화처럼, 형제의 뒤를 이었다. 협력과 견제라는 긴장 관계 속에서도 민주주의와 한반도의 통일이라는 큰 틀에서는 동반자적 관계를 유지해 왔던 두 사람은 전설 속의 금은화로 다시금 태어나고 있다.

두 사람은 죽어서 세상의 귀감이 될 만한 김대중, 노무현이란 이름을 남겼고 민주주의적 가치와 통일의 정신을 남겼다. 한반도의 민주주의는 여전히 불안하고 정치, 경제, 사회, 남북관계 각 분야에서 불안요소들이 독버섯처럼 잠복하고 있다. 한반도는 언제 또다시 질병으로 신음하며 갈팡질팡하게 될지 모른다. 그 때 우리는 건국 후 40여 년을 달여서 끓인 금은화라는 명약만이 치료약임을 깨닫게 될런지도 모른다. 만병통치 불로장생의 약은 못될지언정 마을에 도는 열병 정도는 거뜬히 치료할 정도는 되리라.

금화와 은화가 죽어서 꽃으로 다시 피어 마을을 구제하는 명약으로 되살아오듯 대중과 무현도 죽어서 민주주의와 통일의 꽃으로 다시 피어 한반도를 구제하는 참정신으로 되살아오길 기대해본다.

두 분 형제여, 잘 가시라. 대한민국이 항로를 읽고 갈팡질팡할 때 금은화 같은 명약이 되어 길 잃은 사람들을 구하러 다시 오시라. 삼가 김대중 전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명복을 빈다.


===東山高臥===

화양연화(花樣年華)

화양연화(花樣年華)
글쓴이:허허



오래 전 인터넷 서핑 중 발견한 글인데 한 번 올려볼까 합니다. 지금은 없어진 사이트이고, 이 글을 올린 분이 지금도 그때의 닉으로 활동하는지, 그 사이트가 없어지면서 인터넷을 떠났는지도 알 수 없기 때문에 닉은 밝히지 않고 그냥 올립니다. 비록 아마추어가 올린 글이지만 그 글을 읽을 때의 감동이 아직까지도 잊히지 않아서 고이 간직하고 있는 글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는 뜻을 가진 “화양연화” (花樣年華),

저는 화양연화라는 단어가 떠오를 때마다 인디언 썸머라는 말이 동시에 떠오르곤 합니다. 여름이 다 지난 후, 추워지기 전에 사막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한여름보다 더 기온이 높아지는 시기를 지칭하기도 하지만 인생의 가장 화려한 한 때를 뜻하기도 한다지요. 열풍이 부는 사막의 삭막한 이미지와 인생에서 가장 화려한 한 때의 이미지가 모양새 있게 연결되는 건 아니지만 화려함 속에서의 삭막함은 연결이 되기도 합니다.

작가는 화양연화라는 영화를 몇 번이나 보고나서 이 글을 썼던 모양입니다. 장만옥과 양조위의 끝내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을 보면서 작가는 그 사랑이 이루어진 이후의 상상을 했고, 그래서 첫 연이 아이를 지우러 간다고 시작하는 듯합니다. 지우러 가는 아이를 두고 습지에 부양된 창백한 식물이라는 표현도 멋들어지고, 장만옥이 매일 국수를 사러가던 묘할 정도의 외로움이 배어나던 장면이 오버랩 되기도 합니다.

차를 타고 가면서 뱃속의 아이와의 대화, 죄책감 그런 부분이 아주 간결하면서 담백하게 표현되어 있는 면면이 저는 다 좋기만 합니다. 어쩌면 작가는 아이를 지우러 간다는 표현 속에 아이가 아닌 타오르는 열정을 지우러 간다는 이미지를 남겨놓은 지도 모릅니다. 한동안 시끄러웠던 게시판에서 지친 분들, 오늘은 열정에 몸을 태우는 시를 감상하시면서 조금 심신을 이완시켜보는 것도 괜찮으리라 생각합니다.



화양연화 (花樣年華)


오늘은
맘먹고
매지게 맘먹고
아이 하나 지우러 간다

내 안에 습지
어둠에 부양된
너는 창백한 식물

뿌리 없는 이름인들
지난 밤 어찌 아무 예감 없었을까
쭐레쭐레 공범의 반역에 동행하는
생가슴 도리는 천연덕스런 행보야
이젠 온전히 내 몫이다

눈치만 파리하게 자란 더벅머리
데려 온 천더기처럼 나 혼자일 때만
내안에서 가만가만 말 걸어오는 아이
우리는 오늘 처음이 마지막인 세상 나들이를 한다
다정한 오누이처럼 우린 함께 창밖을 본다
초록은 언제부터 저리도 다채로워
명랑한 음표들 수 천 수 만
빛의 낱낱으로
뎅-뎅- 청량감 넘치는 종소리 보내온다
끔찍이도 환한 세상의 뒷골목에서
숨죽인 어둠의 밑바닥에서 우리는 얼마나 가엽게 퇴색되었나
보란 듯 만화(滿花)의 들판
어느 명망 높은 이의 화판이기에
원색물감 방탕하게 후려쳐도
신의 재능이라 이름 할 뿐인
봄은 누구를 보내기엔 한없이 부적절한 계절인가
궂은 날
비에 불어터진 국수처럼은 차마 너를 묻을 수 없다

(세상은 사랑하기에 알맞은 곳:
이 세상보다 더 나은 곳이 어디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가벼운 너의 어깨 흔들려
유행가 가사처럼 흔들흔들
산모롱이 돌아서면
또 산모롱
돌아 돌아
하늘 아래 첫 동네
이만하면 너도 날 찾지 못할 것이다
너는 헨델처럼 영악하지도 못하여
레일위로 흔적 두지 않았으리라
어서 네게도 아픔의 이완이 서운해지는 시간이 와야지
할미꽃 양지 마른 인연 하나 피워야지

묘비명도 없이
모든 건 순간이었다
잠시 손바닥 펴고 뒤집어 본 사이
지평에 걸린 빈집들 노을에 불살리고
나는 허깨비처럼 한식(寒食)의 냉방에
쫓기듯 돌아와 입은 채 꼬꾸라져
달뜬 신열에 몇 날을 가물거리면
꿈길에도 너
지운 문장(文章)처럼 백지 같을까
서늘한 새벽 한낮까지 길어져도
내 안에 누구 아무도 말 걸어오지 않을까

이별
그 지독한
리허설......

==작자 미상===
(이 시의 저작권은 '작자 미상'님에게 있습니다)


written by ===허허===
(이 글의 저작권은 '허허'님에게 있습니다)

엄마의 유산


엄마의 유산
글쓴이:허허


생강은 지상부(地上部)가 비비추처럼 생겨서 관상용으로도 그만인 식물이다.

화초도 아닌 생강을 칠천 원이나 들여 심었다고 형은 핀잔을 주었지만 엄마였다면 좋아하셨으리라.
엄마는 생전에 사람은 죽으면 그걸로 끝이지 영혼은 없다하셨고, 나 또한 같은 생각이다.
지금도 영혼의 존재여부에 대한 내 인식은 변화가 없지만, 엄마를 생각하면 영혼이라는 것이 실재하여 볼 수 없다 하더라도 느낄 수라도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십 수 년 전, 아버지는 뇌졸중으로 부산에 있는 동의의료원에 5년 가까이 계셨다.
이젠 재발 위험도 없고 물리치료도 한계가 있으니, 환경 좋은 곳에서 여생을 마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는 담당의의 권유를 받아들여, 수소문 끝에 가덕도에 있는 집을 구했다.
그곳을 생각하면, 집 앞으로 펼쳐진 일흔 평 남짓한 마당부터 떠오른다.
남쪽 끝은 언덕이라 담벼락이 없는 까닭에, 고개를 들지 않아도 가덕도와 거제도 사이의 하늘과 바다가 한 눈에 들어왔다.
젊을 때 결핵을 앓았던 아버지를 위해서는 더없이 좋은 곳이었다.

그러나 엄마로서는 생의 대부분을 살았던 본가를 버리고, 외딴섬으로 유배 온 기분이 아니었을까.
가덕도에서의 적응을 위해서였을까.
엄마는 마당의 절반 너머를 화단으로 바꾼 후, 자식 키우듯 화초에 애정을 쏟았다.
화단을 조성할 때, 남쪽은 키가 작은 식물을, 북쪽은 키가 큰 나무를 심는 것이 원칙이다.
그래야 키가 작은 식물도 해가림으로부터 보호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면 화초들에겐 적절한 환경이 되지만, 화단과 집의 배치 때문에, 미관상 가치는 떨어진다.
화단의 입구 쪽에 키 큰 화초가 배치되어서 울타리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뇌졸중 후유증으로 언어장애가 있던 아버지는 몸짓과 표정으로 불만을 표했지만 엄마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동물이던 식물이던, 사람의 입장이 아닌 그 대상의 입장에서 최선이어야 한다는 것이 엄마의 생각이었으므로.
결국 엄마의 가치관을 아버지가 호의적으로 받아들였다.

부부간에는 욕을 하면서도 닮는다는 말이 있다.
오랜 기간을 함께 살다보면 서서히 동화되어서, 내 정서로 못 받아들일 배우자의 인격적인 결함조차도 닮아간다는 뜻일 게다.
지금이야 달라졌지만, 유달리 부권(父權)이 강했던 우리 풍조를 감안하면 자녀들의 식성도 아버지 쪽을 닮게 된다.
식성이 서로 일치하지 않으면 엄마 쪽에서 포기하기 때문이다.
음식 맛의 핵심은 간(염도)이다.
그 간의 기준은 동일하지 않다.
싱겁게 먹는 이 에게는 짠 것이 고역이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희한하게도 엄마와 아버지는 사십여 년을 함께 살면서도 간에 대한 식성에는 일치점을 찾지 못했다.
아버지의 신경질적인 목소리…….
"짭다. 이십 년째 같은 소리다" …….
"짭다. 삼십 년째 같은 소리다"…….
그러나 엄마의 대꾸도 한결 같았다.
"암만 그래도 나는 싱거우면 앵꼬바서 못 묵는다." 였다.

올 명절에 부모님의 차례음식을 장만하면서, 언제던가 아버지의 생신이던 날, 엄마가 간을 맞춘 미역국을 두고, 형수가 느끼기엔 짠 것 같아서 밥상을 들고 가면서도 내심 걱정을 하였는데, 엄마는 싱거울 것 같다면서 거기다 간장 종지를 더 얹더라는 추억담을 꺼내서 모두가 웃고 말았다.

사십 년을 넘게 살아오면서 나와 가장 격의 없이 가까웠고, 가장 고마웠던 엄마가 돌아가셨는데도 나는 엄마를 묻고, 49재가 끝날 때 까지도 울지 않았다.
나를 제외한 남매들은 엄마의 사진만 보면 오열하는데, 나는 "내 엄마가 참 곱구나."라는 생각만 들었다.
그렇다고 엄마에 대한 정이 없는 것도, 추억이 적은 것도 아니다.
내가 살아온 궤적에서 엄마를 빼고는 말할 게 아무것도 없을 정도다.
모르긴 해도 엄마가 당신 사후에 가장 슬퍼할 자식을 꼽는다면 나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슬프지 않은 내 감정이 싫었다.
나도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기간을 정하지 않고, 엄마가 살았던 집에서 머물렀다.
그러길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엄마가 보이기 시작했다.
환영이나 환청이 아니라 모든 일상에서였다.
마당을 쓸 때도, 청소를 할 때도, 설거지를 하거나 빨래를 할 때도, 풀을 벨 때도, 자잘한 일상에서도, 어느 하나 그려지지 않는 모습이 없고 들리지 않는 음성이 없었다.
감광지에 인화된 필름으로, 영화가 과거의 영상을 복원하듯이, 엄마는 땅으로 돌아갔지만 나의 추억이란 필름에 저장된 실체로, 엄마의 영상은 언제나 복원된다.
진득한 그리움을 담고서…….

나는 엄마에게서 몸을 받았고, 엄마의 영적 영향을 받고 자랐으며 심성, 성품, 가치관등 내가 바로 엄마의 유산이라고 생각하면서, 너무 고마웠던 인연…….

엄마를 가슴에 담는다.

written by ===허허===
(이 글의 저작권은 '허허'님에게 있습니다)

군대 이야기 1


블로그 이전 기념으로 오래 동안 소장하고 있던 지인의 글을 꺼내 펼쳐본다. 혼자 보기 넘 아까바스리... 소변기 하나에 대고 동시사격으로 꼬추까지 넘나본 사이에(ㅋ~) 허락없이 올렸다고 불알 떨까마는 혹여 머라카면 꼼장어로 입막음하면 될끼다. 필명은 임시변통으로 '허허'로 작명해둔다. 필명'예'도 집착하지 않는 自由人이니 이 또한 바꾼들...허허헣ㅎ~

군대 이야기 1
글쓴이:허허




'84년 12월 19일 오전 11시,
마산역에서 집결하여 의정부에 있는 보충대로 가는 길은 내 고향 진영을 거친다.
열차에 오르는 순간, 개인은 사라지고 국방부 소속임을 강조하려는 듯 타자마자 대가리 박길 시킨다.
징집병 수송용이라 정기차편과 별개로 운영되는 특별열차였지만, 그래도 진영을 지나갈 때는 나도 모르게 역사 쪽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엄마와 큰 누나가 개찰구 쪽에서 기웃거리며 나를 찾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손을 흔들었으나 못 알아보는 것 같았다.
몇 시간 전, 함께 입대하게 된 종근이 집에 갔을 때 그가 장남이었던 만큼 첫 자식을 군에 보내는 감회는 부모님에게 각별했을 터였다.
종근이 어머니는 눈물 콧물 범벅이었고 아버지는 벌건 눈자위로 요긴하게 쓰라며 오만 원을 쥐어주고선 얼른 가라며 손사래를 쳤다.
그러면서도 손등으로 눈을 훔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형들을 줄줄이 군에 보낸 경험 탓인지 내 엄마는 덤덤하셨다.
다녀오겠단 덤덤한 내 인사에 오천 원을 주시며 "이것만 하면 되겠제?" 하셨다.
그랬던 엄마가 기차가 진영을 거쳐 갈 것이란 짐작만으로 무작정 개찰구에 나와 계신 것이다.
창문 쪽으로 돌아간 신병들의 눈길을 보고 호송병이 군기가 빠졌다며 단봉으로 어깨죽지를 내리쳤지만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슬며시 웃음만 나왔다.

1400여명이 의정부에 있는 306보충대에서 2박 3일간 머물면서 신체 재검을 받았다.
몇 명이 성병 감염으로 귀가조치를 당했고 나는 창동에 있는 국군병원에서 정신감정을 받게 되었다.
인성검사에서 형체가 추상적인 그림을 보여주면서 무엇으로 보이는 지 기술하라는 항목이 있었는데 '아무것도 아니다'란 답은 적지 말라는 당부를 잊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적었기 때문이다.
정신감정이라지만 구구셈 2단계를 시켰고, 이름을 묻고 군 생활 잘 할 수 있냐는 질문에 답한 게 모두였다.
그중 말을 심하게 더듬던 한 명을 제외하곤 모두 합격 판정을 받았으나, 군번 배정 때 생일 순이면 앞자리를 받아야 함에도 그 덕에 뒷 번호를 받게 되었다.
306보충대는 징집한 장정을 분류해서 주특기를 부여하여 각 부대로 나눠주는 역할을 담당한 곳이었다.
자연스럽게 장정(훈련을 받기 전의 징집병)들의 관심사는 어느 부대에 배치될 것인가였다.
지정 흡연공간인 화장실 옆 울타리엔 붉은 페인트로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한다'는 문구가 적혀있었다.
"씨팔~ 금성사 광고 카피가 장정을 협박하네."라며 낄낄거릴 때 누군가가 톤이 굵은 저음으로 말한다.
"친구들~ 이제 겨울이 왔으니 봄이 멀지 않았어. 힘내자~!!"
바짝 긴장해있던 종근이가 감격 먹은 표정으로 한 마디 한다.
"허허야~ 절마 저거 아무래도 전도사를 꿈꾸는 예수쟁이 같제?"

종근이는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을 한 반에서 지낸 옆집의 내 또래다.
군에 가기 전에 거지생활 3개월만 같이 해보기로 의기투합했던 친구다.
영등포역의 시계탑 근처 2층에 음악다방이 있었다.
심야에는 오백 원 더 주면 차를 마시고 의자에서 하룻밤을 잘 수 있었다.
가져간 삼만 원에서 합판으로 만든 신문 가판대를 만 팔천 원에 샀다.
무인 판매였던 관계로 일부는 그냥 가져가기도 했지만 하루에 삼사천 원 정도의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나는 색안경을 끼고 하모니카만 불면되었지만 종근이는 한 손은 내 손을 끌고 다른 한 손엔 소쿠리를 내밀고 다녀야 했다.
처음엔 창피하다며 불평을 했지만 하루가 지나고 나니 아무렇지도 않단다.
처음 며칠은 애초의 각오대로 세수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숙소로 사용하던 다방에 정양이라는 가슴이 크고 입술이 육감적인 여급이 오고부터는 사정이 달라졌다.
종근이는 낮에도 틈만 나면 다방에 가자고 졸랐다.
핀잔을 주면서도 은근히 좋았다.
오히려 먼저 말을 꺼내는 종근이가 고맙기조차 했다.
언제부턴가 하루 수입의 대부분은 정양에게 커피 사주는 비용으로 탕진됐다.
3천 원짜리 감자탕이 천 원짜리 시락국밥으로 바뀔 무렵이었다.
처음엔 색안경을 쓰고 장님 흉내를 내었지만 나중엔 정말로 눈을 감게 되었다.
일종의 직업의식의 발현이었던가.
갑자기 종근이가 손을 뿌리치면서 좇됐네 하는 바람에 나는 넘어질 뻔 했다.
왜 그러냐고 묻기도 전에 출입문 옆에 앉아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정양을 발견했다.
눈물 나도록 창피스러웠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누군가 신문 가판대까지 훔쳐가 버렸다.
남은 몇 천원으로 감자탕 한 그릇과 소주 두 병을 사먹고 영등포발 마산행 22시 40분열차를 탔다.
올라 올 때와 마찬가지로 무임승차로 내려오면서 거지 생활은 보름을 채우지 못하고 막을 내렸다.
지금이야 전산 처리로 무작위 표 검사가 없지만 당시는 상행은 삼량진 지점, 하행은 수원역을 출발하면 하였다.
검사 지점에 이르면 열차 맨 앞칸으로 가서 지붕위로 올라가서 30분쯤 엎드려 있다가 내려오면 되었다.

보충대에서 마지막 날, 군복 두 벌과 군화 두 컬레, 내복 두 벌, 야전상의 등 개인 피복을 나눠주면서 사복을 벗어서 포장을 하여 집 주소를 적으라고 한다.
사복을 싸면서 건빵을 한 봉지 넣었다.
건빵 봉지에 매직으로 "별사탕은 창구 줘라" 고 썼다.
마음 같아서는 머리카락을 좀 뽑아 넣고 싶었는데 빡빡머리라서 고추털을 세 개 뽑아서 팬티에 똥이 조금 묻은 부분에 뒀다.
싹싹 문지를 때 발견할 것 같아서였다.
배치될 부대를 호명할 때, 나나 종근이나 손을 잡고 같은 부대에 배속되길 바랬다.
"김종근, 8사단" 종근은 나를 쳐다 보더니 울먹이면서 뛰어간다.
"허허, 17사단" 지푸덩하던 하늘에서 곧 눈이 올 것만 같았다.
버스 안에서 호송 관리병으로부터 306 보충대에서 배치되는 부대중에 제일 좋은 곳이라는 축하에 모두들 환호하고 있었지만 나는 다른 후회를 하고 있었다.
사복을 쌀 때 지급받은 군용 양말을 한 컬레 넣었던 게 마음에 걸렸다.
집에 양말이 없으랴만, 창구 선물이란 기분으로 넣었는데 갑자기 그 생각이 났다.

"할마시 또 양말 때문에 씰데없는 걱정하겠네..."
(to be continued)

written by===허허===
(이 글의 저작권은 '허허' 님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