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 이야기 1


블로그 이전 기념으로 오래 동안 소장하고 있던 지인의 글을 꺼내 펼쳐본다. 혼자 보기 넘 아까바스리... 소변기 하나에 대고 동시사격으로 꼬추까지 넘나본 사이에(ㅋ~) 허락없이 올렸다고 불알 떨까마는 혹여 머라카면 꼼장어로 입막음하면 될끼다. 필명은 임시변통으로 '허허'로 작명해둔다. 필명'예'도 집착하지 않는 自由人이니 이 또한 바꾼들...허허헣ㅎ~

군대 이야기 1
글쓴이:허허




'84년 12월 19일 오전 11시,
마산역에서 집결하여 의정부에 있는 보충대로 가는 길은 내 고향 진영을 거친다.
열차에 오르는 순간, 개인은 사라지고 국방부 소속임을 강조하려는 듯 타자마자 대가리 박길 시킨다.
징집병 수송용이라 정기차편과 별개로 운영되는 특별열차였지만, 그래도 진영을 지나갈 때는 나도 모르게 역사 쪽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엄마와 큰 누나가 개찰구 쪽에서 기웃거리며 나를 찾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손을 흔들었으나 못 알아보는 것 같았다.
몇 시간 전, 함께 입대하게 된 종근이 집에 갔을 때 그가 장남이었던 만큼 첫 자식을 군에 보내는 감회는 부모님에게 각별했을 터였다.
종근이 어머니는 눈물 콧물 범벅이었고 아버지는 벌건 눈자위로 요긴하게 쓰라며 오만 원을 쥐어주고선 얼른 가라며 손사래를 쳤다.
그러면서도 손등으로 눈을 훔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형들을 줄줄이 군에 보낸 경험 탓인지 내 엄마는 덤덤하셨다.
다녀오겠단 덤덤한 내 인사에 오천 원을 주시며 "이것만 하면 되겠제?" 하셨다.
그랬던 엄마가 기차가 진영을 거쳐 갈 것이란 짐작만으로 무작정 개찰구에 나와 계신 것이다.
창문 쪽으로 돌아간 신병들의 눈길을 보고 호송병이 군기가 빠졌다며 단봉으로 어깨죽지를 내리쳤지만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슬며시 웃음만 나왔다.

1400여명이 의정부에 있는 306보충대에서 2박 3일간 머물면서 신체 재검을 받았다.
몇 명이 성병 감염으로 귀가조치를 당했고 나는 창동에 있는 국군병원에서 정신감정을 받게 되었다.
인성검사에서 형체가 추상적인 그림을 보여주면서 무엇으로 보이는 지 기술하라는 항목이 있었는데 '아무것도 아니다'란 답은 적지 말라는 당부를 잊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적었기 때문이다.
정신감정이라지만 구구셈 2단계를 시켰고, 이름을 묻고 군 생활 잘 할 수 있냐는 질문에 답한 게 모두였다.
그중 말을 심하게 더듬던 한 명을 제외하곤 모두 합격 판정을 받았으나, 군번 배정 때 생일 순이면 앞자리를 받아야 함에도 그 덕에 뒷 번호를 받게 되었다.
306보충대는 징집한 장정을 분류해서 주특기를 부여하여 각 부대로 나눠주는 역할을 담당한 곳이었다.
자연스럽게 장정(훈련을 받기 전의 징집병)들의 관심사는 어느 부대에 배치될 것인가였다.
지정 흡연공간인 화장실 옆 울타리엔 붉은 페인트로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한다'는 문구가 적혀있었다.
"씨팔~ 금성사 광고 카피가 장정을 협박하네."라며 낄낄거릴 때 누군가가 톤이 굵은 저음으로 말한다.
"친구들~ 이제 겨울이 왔으니 봄이 멀지 않았어. 힘내자~!!"
바짝 긴장해있던 종근이가 감격 먹은 표정으로 한 마디 한다.
"허허야~ 절마 저거 아무래도 전도사를 꿈꾸는 예수쟁이 같제?"

종근이는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을 한 반에서 지낸 옆집의 내 또래다.
군에 가기 전에 거지생활 3개월만 같이 해보기로 의기투합했던 친구다.
영등포역의 시계탑 근처 2층에 음악다방이 있었다.
심야에는 오백 원 더 주면 차를 마시고 의자에서 하룻밤을 잘 수 있었다.
가져간 삼만 원에서 합판으로 만든 신문 가판대를 만 팔천 원에 샀다.
무인 판매였던 관계로 일부는 그냥 가져가기도 했지만 하루에 삼사천 원 정도의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나는 색안경을 끼고 하모니카만 불면되었지만 종근이는 한 손은 내 손을 끌고 다른 한 손엔 소쿠리를 내밀고 다녀야 했다.
처음엔 창피하다며 불평을 했지만 하루가 지나고 나니 아무렇지도 않단다.
처음 며칠은 애초의 각오대로 세수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숙소로 사용하던 다방에 정양이라는 가슴이 크고 입술이 육감적인 여급이 오고부터는 사정이 달라졌다.
종근이는 낮에도 틈만 나면 다방에 가자고 졸랐다.
핀잔을 주면서도 은근히 좋았다.
오히려 먼저 말을 꺼내는 종근이가 고맙기조차 했다.
언제부턴가 하루 수입의 대부분은 정양에게 커피 사주는 비용으로 탕진됐다.
3천 원짜리 감자탕이 천 원짜리 시락국밥으로 바뀔 무렵이었다.
처음엔 색안경을 쓰고 장님 흉내를 내었지만 나중엔 정말로 눈을 감게 되었다.
일종의 직업의식의 발현이었던가.
갑자기 종근이가 손을 뿌리치면서 좇됐네 하는 바람에 나는 넘어질 뻔 했다.
왜 그러냐고 묻기도 전에 출입문 옆에 앉아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정양을 발견했다.
눈물 나도록 창피스러웠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누군가 신문 가판대까지 훔쳐가 버렸다.
남은 몇 천원으로 감자탕 한 그릇과 소주 두 병을 사먹고 영등포발 마산행 22시 40분열차를 탔다.
올라 올 때와 마찬가지로 무임승차로 내려오면서 거지 생활은 보름을 채우지 못하고 막을 내렸다.
지금이야 전산 처리로 무작위 표 검사가 없지만 당시는 상행은 삼량진 지점, 하행은 수원역을 출발하면 하였다.
검사 지점에 이르면 열차 맨 앞칸으로 가서 지붕위로 올라가서 30분쯤 엎드려 있다가 내려오면 되었다.

보충대에서 마지막 날, 군복 두 벌과 군화 두 컬레, 내복 두 벌, 야전상의 등 개인 피복을 나눠주면서 사복을 벗어서 포장을 하여 집 주소를 적으라고 한다.
사복을 싸면서 건빵을 한 봉지 넣었다.
건빵 봉지에 매직으로 "별사탕은 창구 줘라" 고 썼다.
마음 같아서는 머리카락을 좀 뽑아 넣고 싶었는데 빡빡머리라서 고추털을 세 개 뽑아서 팬티에 똥이 조금 묻은 부분에 뒀다.
싹싹 문지를 때 발견할 것 같아서였다.
배치될 부대를 호명할 때, 나나 종근이나 손을 잡고 같은 부대에 배속되길 바랬다.
"김종근, 8사단" 종근은 나를 쳐다 보더니 울먹이면서 뛰어간다.
"허허, 17사단" 지푸덩하던 하늘에서 곧 눈이 올 것만 같았다.
버스 안에서 호송 관리병으로부터 306 보충대에서 배치되는 부대중에 제일 좋은 곳이라는 축하에 모두들 환호하고 있었지만 나는 다른 후회를 하고 있었다.
사복을 쌀 때 지급받은 군용 양말을 한 컬레 넣었던 게 마음에 걸렸다.
집에 양말이 없으랴만, 창구 선물이란 기분으로 넣었는데 갑자기 그 생각이 났다.

"할마시 또 양말 때문에 씰데없는 걱정하겠네..."
(to be continued)

written by===허허===
(이 글의 저작권은 '허허' 님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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