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12시 26분입니다”








간만에 포근했던 지난 주말, 혹한으로 발길 뜸했던 낚시터엘 갔습니다.
낚시터는 산중턱에 위치한 관리형 저수지로 자주 찾는 곳입니다.
해질 무렵에 도착했는데 이미 네댓의 꾼들이 노니는 중이더군요.

축구 운동장 두 배만한 저수지 건너 절반은 여전히 얼음 껍데기가 두텁습니다.
밝은 달빛에 하얀 얼음판이 눈부시고 바람도 잠든 고요한 겨울밤이 깊어 갑니다.

늦은 밤 귀가를 서두르는 마지막 꾼의 자동차 시동 소리를 끝으로
이제 산중 겨울 저수지엔 동무와 나, 단 둘만 남았습니다.

찬 수온에 붕어가 쉬 놀 리 없을 터
입질조차 없는 꽝의 무료함을 종내 참아내질 못하고서
같이 간 동무는 자정을 몇 분 앞둔 시각, 관리실로 잠을 청하러 갑니다.

“그래, 먼저 자. 난, 1시간만 더”
지난 세월 1시간만 더, 더 하다가 하얗게 밤을 지새던 날도 부지기수였습니다.
광활한 저수지에 또 홀로 남았습니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긴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라던 장군의 노래는 어느덧 꾼의 노래로 되살아옵니다.

깊은 산 달 밝은 밤에 물가에 홀로 앉아
긴 대 드리우고 붕어와 씨름을 하는 차에
눈앞서 말뚝 찌탑은 남의 애를 끊나니

크흐, 참으로 별난 취미입니다.
미쳤다 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그게 또 꾼의 길이니까요.^^

일단 이 얘긴 예서 끊고 두 가지만 귀띔하고 다시 잇겠습니다.

먼저, 나는 폰맹입니다.
아래 글에 나오는 수준의 폰맹입니다.

http://anemos0120.blogspot.com/2009/08/gee.html

다음은, 낚시터의 화장실에 관해서입니다.
낚시가 자연동화 놀이여서인지 낚시터엔 화장실이란 게 따로 없습니다.
수로나 강가, 저수지 등 자연 그대로의 노지형 낚시터에선
궁뎅이 까는 곳이 곧 화장실입니다.
1박2일 정도의 낚시에서 반드시 한 번쯤은
풀숲이나 나무에 거름 줄 일이 생긴다는 걸 꾼들은 압니다.

이런 노지 낚시터와는 달리
영업과 시설 허가를 받은 관리형 낚시터라면
질 좋은 수세식 화장실을 두기도 합니다.
허나, 내가 가는 낚시터는 관리형 낚시터임에도 그곳의 ‘화장실’만큼은
차라리 ‘변소’나 ‘뒷간’이란 말이 어울릴 듯합니다.
그 수려한 낚시터 전경을 생각하면 옥에 티입니다.

흡, 얘기가 얘긴지라 글에서 구린내가 나더라도
좀만 더 진도를 나가 보겠습니다.

연식이 좀 된 사람들은 ‘변소’ 또는 ‘변소간’이란 말을 압니다.
우리 어릴 때는 화장실을 ‘변소’라 일컬었습니다.
요즘에야 화장실을 방 한 켠에 붙여두기도 하지만
그때의 변소는 앞마당 또는 뒷마당 가장 후미지고 구석진 곳에 위치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네 조상들은 전통적으로 변소를 ‘뒷간’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어렸을 적 뒷간에 갈 때면 반드시 누군가를 대동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뒷간 가는 게 참 무서웠던 시절이었습니다.
뒷간 갈 때만큼은 형제간의 품앗이는 갈등 없이 원만하게 작동했습니다.
누가 되었든 한밤중에 깨우는 형제의 뒷간 동행 요구는
졸린 눈을 부비면서도 반드시 응해야만 하는 절대 거절불가의 요구였습니다.
일종의 보험성 동행인 겁니다.

그 땐 유달리 뒷간에서 많은 소리가 들렸던 것 같습니다.
바람소리, 귀뚜라미 소리, 발자국 소리, 텀버덩~ 철퍽하는 소리까지......
그 모든 잡소리 중에서도 가장 많이 들렸던 소리는
‘하얀종이 주까 빨간 종이 주까’였습니다.
어린 상상이 빚어내는 뒷간 귀신소리 말입니다.
귀신소리가 환청으로 들리는 듯 할 때마다
“**아 거기 있지?”
뒷간 밖 동행인의 호위를 확인하곤 했습니다.
한 번 뒷일 볼 때마다 열 번도 더 확인했을 겁니다. 풉, 아련하네요.

부시맨에겐 콜라병이 귀신이고, 강아지에겐 피아노소리가 귀신 소리입니다.
귀신은 경험과 인식의 무지 또는
인간의 어린 상상이 빚어내는 창조물일 뿐이라고
정의를 내리는 나이가 되어서도 뒷간에서 일어나는 어린 상상은
예기치 않는 순간에 맞닥뜨리곤 합니다.

입질 한 번 없는 대 드리운지 어언 여섯 시간 째,
동무도 자러가고, 자정은 넘은 듯 남는 건 잠이려니,
잠자리에 들기 전 속이나 비우자며
낚시터 후미진 자리 그곳엘 들렀습니다.
인적 없는 산중의 겨울밤 저수지 외진 뒷간,
달처럼 하얗고 둥근 궁뎅일 까고
자연과 합일하는 것도 낭만이다 싶었습니다.
크 사실은, 원초적 욕구에 밀려 무심하게 들렀습니다.

근데, 낭만도 좋고 원초적 욕구 해소도 좋고 다 좋은데
이거 향이 장난이 아닙니다.
문을 열어두어도 활화산처럼 솟아나는 생*의 향을......
아무 생각 없이 뒷간에 들렀다가
이젠 오로지 한 가지 생각만이 사무칩니다.
‘어휴, 빨리 끝내자 끝내, 빨리 끝내자구, 빨리, 끄응’

어디, 세상사가 맘대로 되던가요.
외적 조건이 변하니 몸의 반응이 영 신통칠 않습니다.
고도의 집중을 요하는 성스런 작업인데 이게 뭡니까.
냄새 탓에 잡념(일념?)이 들면서 심신합일이 되질 않는 겁니다.
자고로 정신일도 해야 하사불성 한다는데 말입니다.
가장 편안한 상태로 무게중심을 서서히 내리다가 순간적으로 집중할 때
가장 좋은 성과를 내는 일이건만 마음이 조급하니 될 일도 안 되는 겁니다.
양팔을 앞가슴에 모으고 웅크리는 최상의 똥폼을 잡았습니다.

바로 그 때입니다.
고지가 바로 저긴데 막장의 7부 능선 정도에 도달할 즈음이었을까요.

“오전, 열두, 시, 이십, 육, 분, 입니다~!”
음허낫 찌발, 이기 대췌 머꼿! 이 무씬 소리고!
난 분명 뒷간 귀신의 소릴 들었습니다.
어릴 적 뒷간에서 듣던 바로 그 목소리였습니다.
뒷간 똥두덩 밑에서 정말 사람이 곡할 귀신소리가 들렸던 겁니다.
그건 마치 심장을 울리는 천둥소리와도 같았습니다.
식겁, 혼비백산, 아니 기절초풍할 뻔했습니다.
챠리릿 후다닥~~~~
너무 놀라서 손에 든 화장지를 행주로 식탁 훔치듯 비비고서 뛰쳐나왔습니다.

요샌 뒷일 할 때 시간 알려주는 게 뒷간 귀신들의 새로운 트렌드인가???

뒷간에서 멀찍이 물러서서 놀란 가슴 쓰다듬으며
집 나간 정신을 되돌리고 사태를 파악하는데 얼추 1분은 걸렸던 것 같습니다.
아시죠? 이렇게 놀랐을 때의 1분은 60초가 아니고 여삼추라는 걸.

‘귀신은 없다’라는 나의 신념을 확인키 위해
콜라병 들다보는 부시맨처럼 휴대폰의 여기저기를 뒤적였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단서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내 짧은 휴대폰 지식으론 감당키가 벅찬 문제였습니다.
모든 사태를 내려다보고 있었을 달님도 그 답을 알려 줄 수는 없을 것만 같았습니다.
가끔 내 휴대폰에 장난을 쳐놓는 딸내미의 농간으로 중간 결론을 내리고서야
산중 달밤에 체조(손가락 운동?)를 멈췄습니다.
그리고는 놀란 가슴과 7부 능선에서 멈춰버린 불편한 속을 토닥이면서
그렇게 또 한 겨울밤을 꿈속에 묻었습니다.

담날 집에 돌아와서 딸내미를 추궁하니 깔깔대며 한 수 알려줍니다.
음향조절 상 버튼을 길게 누르면 현재 시각이 음성멘트로 서비스된다는 걸
딸내미로부터 첨 듣고 이제서야 알았습니다.

이 사태를 정리해 봅니다.
보통 땐 휴대폰을 아래 주머니에 두는데
낚시를 할 땐 가부좌 자세로 휴대폰을 꺼내기가 불편해서
상의 주머니에 넣어두곤 합니다.
그곳에서 한껏 상반신을 웅크리며 기를 모으다가
옹다문 팔뚝에 음향조절 상 버튼이 꾹 눌렸었나 봅니다. 아하~

이 글 쓰며 한 번 더 들어 보았습니다.

“오후, 아홉, 시, 삼십, 육, 분, 입니다~!”
역시나 섬뜩하긴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제 뇌 속엔 산중 저수지 뒷간 귀신의 음성으로 메모리 되었기 때문일 겁니다.
이후로도 야간에는 그곳 화장실엔 다시는 들르고 싶지 않습니다.
오,전,열,두,시,이,십,육,분,....흐미 무서붜라. 클클^^

배경음악은 Radiohead 의 Climbing Up the Walls 입니다.ㅎ~



===東山高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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