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에서) 흔히 보는 논리 오류



(인터넷에서) 흔히 보는 논리 오류

copyright 이우혁

모르는 게 죄는 아니지만, 모른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간판으로 내거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며, 모르는 것 때문에 잘못이 무조건 용서된다고 믿는 것은 죄악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논리학 개론 반권만 읽었어도, 연구나 공부가 아니라 그냥 한 번 읽어보기만 했어도 범하지 않을 짓거리를 해대면서 자신이 가장 잘난 사람인척 하는 예가 너무도 자주 보이기에, 범 네티즌 계몽 및 홍보운동 차 몇 자 끄적거려본다.

이런 것은 지식인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것이기에 이런 것을 쓴다고 잘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며,똑같이 못난 사람이 될 뿐이다. 이런 것도 모를 정도의 세상이 한스러울 뿐이다. 다만 이 글은 대상이 정해져 있다.

예를 들면 '스크롤의 압박' 이 있으면 무조건 안보고 배를 째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므로 최대한의 배려를 하여 전문용어나 기타 등등은 하나도 섞지 않으며, 이론을 먼저 제기하고 그 다음에 예를 드는 것보다 알기 쉽게 예를 먼저 들고 해당되는 논리적 오류를 (좀 알기쉽게 풀어 써서) 적어 보겠다.

하나 전제가 있다면, 여기 나온 오류론 자체를 의심하는 짓은 하지 말기 바란다. 1+1이 왜 2가 되어야 하나요? 라고 묻는 것이 낫겠다. 논리학의 오류라는 것은 이미 수없는 논증과 심판을 거쳐 나온 것이기 때문에 이미 1+1 = 2 라는 것 만큼이나 확실하게 정해진 것이니까.

몇몇가지는 아주 유명한 오류이고, 나머지 몇 개는 좀 복합적인 것도 있는데 내가 알기 쉽게 바꾸어 표현한 것도 많다. 그것에 대해 논박하려면 최소한 논리학 책을 읽고 공부해야 할 터이니, 그런 수단을 써서라도 공부를 하게 만들겠다.

1) 누구도 다른 사람을 비판할 자격은 없다.

-> 그 말은 애당초에 증거불충분이다.

논리의 근거가 되는 자격조건의 예시가 없다. 아울러 그 논리를 주장할 경우, 역작용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 말이 맞다고 치면, '누구도 다른 사람을 옹호할 자격은 없다.'는 말이 되는가 생각해 보자.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만약 '법관 자격이 아니고서는 누구도 벌 줄 수 없다.' 고 한다면 현행범은 누구도 체포할 수 없을 것이다. 법관 자격이 없으니 말이다. 그 역을 생각해보자. 누구도 벌을 줄 수 없다면 누구도 옹호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변호사 자격을 따기 전에는 누구도 죄 지은 사람에 대해 변론을 할 수 없다. 실제로는 법관이 아니고서도 현장에서 범인을 체포하기도 하고, 변호사가 아니더라도 법정에서 자기 변론을 할 수 있다. 단죄하는 데에는 법관의 자격이 필요할지 모르나 비판이나 옹호는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왜 이게 말이 안되는지 대봐라!'고 대드는 것도 오류이다. 욕먹고 싶지 않으면, '왜 욕하냐'라고 따지기 전에 '나는 왜 정당하다'라고 밝힐 수 있어야 한다.
'왜 이게 말이 안되느냐'라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이렇게 말해주자. '왜 말이 되는지부터 설명해라. 그 다음 말해 주겠다.' 논리 오류적으로도 스스로 증거를 댈 수조차 없는 강변을 논리적인양 위장하는 오류이다.

편의상 이것을 '자격 오류'라 해두자.

2) 옹호는 좋은 것이고, 비판은 나쁜 것이다.

-> 두 가지 경우 전부, 좋은 것도 나쁜 것도 될 수 있다.

좋은 것, 나쁜 것이라는 전제 자체가 대상에 따라 다르다. (주관적이라는 말은 아니다.) 연쇄살인범을 동정에 의해 감춰 주어 경찰을 피하게 해주어서 수없는 살인을 더 저지르게(어쩌면 그 자신도 살해될지도 모른다.) 하는 것은 옹호라 해도 옳은 것이 아니다. 물론 죄없는 자에 대한 무조건 적인 비판은 당연히 나쁜 것이다. 그러나 정당한 과정과 합당한 이유를 지닌 비판은 결코 악이 아니며, 그것을 일컬어 '정의'라고 부를 수 있다. 정의의 탈을 쓴 악덕도 많으며, 동정심이나 옹호의 탈을 쓴 죄가리기나 뭉개기도 많이 눈에 띈다. 이 자체는 좀 더 세밀히, 눈을 크게 뜨고 구분할 일이다. 물론 사람이라면 동정심도 가져야 하고, 옹호도 할 수 있으나 무분별한 동정이나 옹호 때문에 정의가 악덕으로 규탄되는 경우도 많다. 그런 행동은 무분별한 비난과 똑같은 책임을 져야 한다. 무분별한 옹호나 무분별한 비난은 똑같다 볼 수 있다. 옹호나 비판이나 같은 선상에 있다. 만약 비판의 자격을 묻는다면, 옹호의 자격도 물어야 한다.

별도의 항으로 분류하려다 말았는데, 여기서 파생되는 가장 웃기는 경우가 '타당한 근거도 없이 무조건 옹호하는' 형태이다. 이는 싸구려 무협 혹은 폭력만화나 영화의 영향이 크다고 본다. 이런 대사, 장면 많지 않은가? '아니! 비겁하게 한 사람에게 세 명이 동시에 달려들다니! 나는 그런 불의를 보고 참아 넘길 수 없다! 내게 덤벼라!' 식이다.

뭐 그게 멋있다고는 해두자. 그러나 그런 논리를 무작정 인터넷이나 통신의 논리에 적용한다면, 참으로 미안한 말이지만, 그런 생각을 한다면 당신은 눈뜬 장님이며, 범죄자이다. 보통 통신상의 비판을 보자. 그 중 일대일이 아닌 것이 있는가? 잘 생각해보라. 한 사람의 글에 대해 100개의 비판 리플이 붙었다고 보자. 당신같은 눈뜬 소경은 그것을 '100명이 한 명에게 덤비다니!'라고 생각하여 싸구려 모조품 정의감을 불태우며 뛰어들지도 모르겠다. 가끔, 아주 가끔 그것이 장님소 뒷걸음에 쥐 밟는 식으로 맞을 때도 없다고는 못하겠다. 그러나 바보짓이라 할 수 밖에 없다.

리플을 붙이거나 비난 글을 올리는 것은 엄연히 1대 1의 작용이다. 글을 올리는 상황에서는 글을 올리는 사람과, 그 글을 보는 당사자 밖에 없다. (물론 리플 내에서 붙은 격전은 당사자에게 행해진 것이 아닐지도 모르나, 그것 역시 1대 1이다.) 한 명의 글에 100개의 비판글이 붙었다는 이유는 한 명을 백명이 동시에 달려들어 때려눕히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사람이 백 명을 하나씩 상대해야 한다는 뜻이다. 채팅방에서 백명이 한 명을 몰아붙여 말도 못하게 만든다면 당연히 뛰어들어 마땅할지도 모르지만(사실 뒤에 설명하겠지만 그것도 잘못이다), 글에 시간 순으로 리플이 줄줄이 달렸다고 분노하는 사람의 머리구조는 어떻게 되어 먹었는지 궁금하다. 설령 그것에 부당성을 느끼더라도, 일단은 다시 한 번 이렇게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이 정상 아닌가?

'이 사람이 정말 100명에게 집단 따돌림이라도 당하는 것인가? 아니면 정말 잘못이 많아서 100명에게 욕을 먹을 만한 사람인가?'

우선 이 과정을 스스로 판별하고 뛰어들려고 해도 뛰어 들어야 한다. 보통 무협영화에서는 주인공이 위와 같은 멋진 말을 하고 보통은 선량한, 위기에 빠진 사람을 구해준다. 그래서 그렇게 하면 의당 옳다는 꼭두각시적 세뇌를 은연중 당했는지는 모르겠는데, 반대의 경우를 무협지적으로 생각해보자. 주인공이 구파일방의 장문인들을 모아 도저히 당할 수 없는 악의 원흉 마교 교주를 전 무림을 희생시켜가며 간신히 포위했는데, 뜬금없는 미친놈들이 '아니, 열한명(구파일방 장문인 10명, 주인공 1명)이 한 사람을 동시에 공격하다니! 나는 그런 불의를 보고 참아 넘길 수 없다! 내게 덤벼라!' 하고 우스스 달려들어서 끼리끼리 싸움이 붙느라 그 사람들과 주인공, 구파일방 장문인만 죽도록 싸우다가 다 죽고 마교 교주는 웃으며 달아났다. 이게 옳은 일인가? 웃기는 해프닝이다. 뛰어든 사람들이 정의의 사도였나? 미친 놈들 아닌가?

무협지를 모른다면 일반 형사드라마를 생각해보자. 평생을 목표로 한 범인을 찾기위해 세 형사가 10년을 헤매지만 범인은 잘도 피해다닌다. 어느날 10년동안 매일매일 사복차림으로 잠복한 끝에 범인을 잡아 격투가 벌어졌다. 그때 어디선가 나타난 사람들이 아주 정의롭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거 왜 이래? 멀쩡한 세 사람이 한 사람에게 덤비다니! 죽어라 퍽퍽!' 결국 세 형사는 떡이 되게 혼나고, 범인은 다시 자취를 감추어서 영원히 찾을 수 없었다. 멀쩡한 상황이 코미디가 되어 버렸다.

뭐 그냥 대강 든 예이고 비유이니 그 예의 논리구성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말기 바란다. 이런 예를 든 것은, 위기에 빠진 사람을 구해 정의의 주인공이 된다고 무조건 착각하지 말고 정황과 사정을 잘 살피면서 행동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런데도 버젓이 나타나는 인간군상이 있다. '나는 비록 아무것도 모르지만, 이렇게 한 사람을 공격하는 꼴은 도저히 못봐주겠네요!' 라면서 스스로의 부자격성, 비논리성, 쌍무식성을 있는대로 드러내면서도 스스로 정의의 화신이라도 되는 양 끼어든다. 차라리 혀를 물고 죽어버려라. 차라리 친인척이나 이해당사자라면 그래도 봐주겠다. 친분이나 하다못해 작은 인간관계라도 있었다면 그래도 이해는 간다. 허나 아무 것도 모르는데 무엇을 평가하려고 하는가?

일단 그 대상이 옳고 그르고는 알아야 할 것 아닌가? 자기가 무슨 전투의 화신, 혼돈의 화신이라고 나대면서도 끝끝내 잘난 척하는 미친 족속이 많고, 그런 족속을 이용하여 항상 빠져 나가는 악당들이 더 많다는 사실에 명심하자. 이 글을 한 번이라도 보았다면, 앞으로 그런 '자칭 무림고수의 오류'는 범하지 말자. 물론 무분별한 옹호와 마찬가지로 무분별한 비판도 똑같은 악덕이나 한가지, 일단 무분별하더라도 옹호부터 해놓고 볼 때가 있는데, 그것은 한 사람의 생명(진짜 생명)이 달렸을 때 뿐이다. 그 외의 통신 논의에서 사람이 죽는 일이 없고, 대부분 잘잘못을 가리는 일인 이상, 그런 무분별은 범하지 않는것이 좋다.

혹자는 이의를 제기할지도 모른다. 비판이나 옹호의 자격은 없다고 해놓고 왜 끼어드는 것에 자제를 가하려 그러느냐? 그에 미리 답해본다. 비판이나 옹호의 대상 자격논의가 아니라 제대로 된 논의에 참가하는 자세인가 묻는 것이다. 뭐 자기가 알아서 자기 망신 당하겠다는데 누가 뭐라겠는가? 한 번 양자의 의견이나 입장을 찾아 보지도 않으면서 잘났다는 듯 끼어드는 지식인들이 있다면 그들이야말로 가짜 지식인이며, 자기가 자기 무덤을 판 것이다.

끼어 들어라. 자격은 있으니까. 허나 처절히 매도되고 비웃음 사는 것도 자기 일이니 알아서 하라고 할 일이다. '모르면 나서지 말라'는 말은 모른다고 나설 자격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모르면 나서도 망신을 당한다는 뜻이다. 옛적부터 '말조심하라'고 가르치지 않았는가? 물론 이것은 무분별한 비판을 가하는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말이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정말 못된 놈이네...' 이것 역시 헛소리다. 아무것도 모르는데 정말 못된 놈이란건 어떻게 아는가? 모두가 조금더 말조심 할 일이다.

2) 내가 한 짓이 못마땅하면 너도 해봐라. 능력도 없는 것들이

-> 역시 쌍무식한 티를 그대로 드러내는, 선도해야만 하는 오류적 발언이다.

가령 그 대상이 문제성이 있는 일이라 치자. 그렇다면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안하는 것이다'로 대응할 수 있다. 상점에 진열된 물건을 공연히 때려부수지 않는 것은, 그럴 힘이 없어서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나쁜 짓이므로 안하는 것이다. 만약 도덕성의 차이를 능력의 유무로 끌고 들어가거나 같은 짐을 짊어지게 하는 이러한 오류를 일단 '너도 해봐라 오류'라 명명짓자.

3) 너희 중에 죄짓지 않은 놈이 '나'에게 돌을 던져라. 너희는 잘못 한 적도 없느냐?

-> 죄 지은 자들이 가장 많이 부르짖는 형식이다.

예수님이 다 좋은 말씀을 남기셨는데, 무분별한 쌍무식장이들이 예수님 말씀까지 곡해하여 이용해 먹으니, 이것은 논리단계를 넘어서서 종교모독에 이르른다. 그 이야기는 제 3자의 입장에서 해야만 가치가 있는 것이며 죄를 벌하되 '인간적 모독을 가하거나 동정을 베풀 여지를 남겨라' 즉 사랑의 가르침을 설파하신 것이지 죄인도 다 용서하자는 뉘앙스를 가진 것이 아니다.

사회 계약론에 의하면 죄가 있는 자도 다른 죄를 단죄할 수 있다. 아울러 다른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잘못을 저지른다고 그 잘못이 정당화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모조리 잡아다가 잘못에 대한 댓가를 치르게 만들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잘못이 있다고 잘못에 대한 논의를 못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인간사회가 존재하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이나 석가모니께서 재림하셔서 몸을 60억으로 나누어 하나씩 맡아 카운셀링을 해주지 않는 한에 있어서는 말이다. 결국 기본적으로 뻔뻔스러운 무식의 소치이다. 이것을 편의상 '돌던져라 오류'라 명명하자. 혹은 '우물에 독을 타는 오류(poison to well)' 이라는 멋진 시적 뉘앙스를 지닌 비유에 해당한다.

내가 죽을 것 같으니 우물에 독을 타서 다 죽자, 즉 모두 끌고 들어가자는 악의서린 흉계의 주장이며, 일고의 가치가 없는 말이다. 또 다른 말로 '물귀신 오류'라고 해두자.

조금 더 구체적으로 넘어가자. 이제까지는 드러난 잘못에 대한 평가를 했는데, 교묘히 숨어 있는 잘못에 대한 몇가지 평가를 해보자.

4) 내가 당신을 좋아하니 당신은 항상 정당해요.

-> 그것은 아무리 잘 보아주어도 그 당사자에게나 해당되는 말이다.

자신을 우주 전체인양, 혹은 인간 사회를 대표한다는 총체적 착각에 사로잡히지 않고서는 내뱉을 수 없는 말이다. 그런 찬사를 듣는 다면, 얼른 그 사람에게서 멀어지라고 권하고 싶다. 그 '우주의 신'이 언제 마음이 변하여, '내가 당신을 싫어하니 당신은 모든 것에 있어서 다 나빠요! 소멸되어라! 죽어!' 할지도 모르니까. 이것을 반장난삼아 '당신만을 오류'라 칭해본다.

5) 나는 나름대로 열심히 했으니 비판하지 말아주세요.

-> 열심히 한 것은 아무리 나름대로 했건, 알아줄만큼 열심히 했건 비판할 일이 아니다.

그러나 열심히 했다는 것이 비판받지 않을 이유나 행동의 정당성을 뒷받침해주는 이유는 되지 못한다. 일종의 동정심 유도의 작전일 뿐이다. 열심히 했다는 것은 '열심히 했느냐'는 비판에 대해서만 해답이 된다. 도둑질도 열심히 하면 비판 받을 수 없는 것이고, 살인도 연쇄살인을 하면 비판받지 못하는 것인가? 하긴 중국에는 '한 사람을 죽이면 살인자지만 백만명을 죽이면 영웅이 된다'는 속담도 있긴 하다. 그러나 그것은 비유일 뿐이다. 정말 백만명을 때려 죽여봐라. 영웅으로 변하나.

열심히 한 것이 모든 근거의 척도가 된다면 고시도 가장 오래 시험본 사람을 무조건 붙여줘야 하고, 미술 국전도 제일 나이 많은 사람에게 무조건 대상 줘야 하고, 가장 긴 영화가 가장 명작이 되어야 하고, 수능도 굳이 시험 칠 것이 아니라 학생 하나하나마다 씨씨티비라도 설치하여 '누가 더 덜자고 열심히 했나' 로 뽑는게 맞겠다. 앞에 든 예를 한 번 정정해보자면 '열심히 했으니...' 가 아니라 '나름대로의 뜻을 가지고 열심히 했으니...' 라고 하는 편이 맞겠다. 그런데 이러려면, 굳이 열심히... 라기 보다는 그 나름대로의 뜻이 뭐였는지 밝히는 편이 맞을 것이다. 즉 '나름대로 이러이러한 근거 하에서 이러이러한 목적으로 이러이러하게 한 행동이니...' 정도가 설득력있게 전개된다면 된다면 합격점이다. 그리고 '비판하지 말아주세요...' 가 아니라 '타당성 있게 비판해주세요...'로 바꾸어야 설득력이 생긴다. 무조건 비판만 하지 말아달라니? '열심히'는 우주적 면죄부를 지닌 단어였단 말인가? 이것을 일단 '열심히 오류'라 지어두자.

6) 그래. 나는 못배워서 무식하다! 나이 어려서 모른다. 그렇다고 나를 무시해도 되는 거냐?

-> 물론 못배워서 무식하다고 말하거나 나이 어리다고 무시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런데 그 잘못의 범위는 그냥 도의적이고 윤리적인 선의 잘못이지, 원칙적으로는 잘못이 아니다. 그 잘못도 어리기 때문에 건드리지 못하거나 무식하기 때문에 건드리지 못하는 것이 아니고, '무시했기 때문에' 잘못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경우 이 '무시'라는 말이 대단히 우습게 쓰인다. 무조건 자기 말을 안들어 주면 무시한다고 한다. 이 문제에 있어서의 정당성은 '무시'가 정말 무시인가? 아니면 무조건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무시'로 받아 들이느냐에 있다. 일단 두 경우를 함께 생각할 때, 여기서는 두 가지의 오류를 검출 할 수 있다.

첫번째는 못배워서 무식한 것을 면죄부라도 되는 양 들고 일어난 오류이다.

못배운 것은 죄가 아니지만, 떳떳하거나 자랑할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모두 많이 배우고 유식해지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면 스스로 그 대열에서 뒤쳐진 낙오자라는 뜻이오, 그러지 못할 여건이 있었다면 하고 싶은 바를 하지 못했다는 울분이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못배우고 무식한 것은 바람직 하지 못한 일이다. 그래서 그 부분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겸손을 가지고 잘 언급하거나 약점 삼지 않으려고 한다. 그런 남의 쓰라린 부분을 건드리는 것은 도의적으로 좋지 않다 여기기 때문에, 혹은 그 사람에게 너무 충격을 줄 지 모르므로 좋은 의도에서 그런 행동을 삼가는 것 뿐이다. 그런데 그런 약점을 둘러 잡아 그것을 가면처럼 둘러 쓰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그것을 방패 삼으려 한다면, 더 이상 인의도덕을 따질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그 사람에게는 앞장서서 스스로 둘러썼으니 만큼 그것이 치부도 아니고, 그런 치부를 공격한다고 도의적이지 못한 것이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좀 못할 짓이지만 처절하게 못배운 것을 놀려주고, 못 알아먹을 말만 해주고, 배운 다음에 다시 오라고 끊어버려도 논리적으로는 결코 죄가 되거나 무시한 것이 되지 않는다. 일단 이렇게 자신의 약점을 방패삼아 둘러써서 상대의 윤리관을 이용해먹는 것은 행동패턴이고 오류 자체는 아니지만 일단 대별하여 대강 '무식의 오류'라 해두자.

물론 정말 상대가 못배운 것을 조롱거리로 삼아 선공을 한 경우에 응답으로 이 말을 쓴다면 그것은 한맺힌 정당한 항의의 표현이 될 것이다. 허나 뻔히 논거를 들어 정연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갑자기 이런 말이 튀어나오는 경우가 많다. 이 경우는 일고의 가치도 없다. 스스로가 쓰레기임을 공인한 처사이니 고민하거나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지 말고 그냥 청소기로 쓸어서 밖으로 치워버리면 그만이다. 나이도 마찬가지다.

나이가 어리다는 건 많은 가능성을 지녔다는 의미이므로 많은 잘못이 있어도 넘어가주며, 봐주는 경우가 많다. 가령 미성년자는 어른보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훨씬 가벼운 처벌을 받는다. 이것은 미성년자가 잘나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못배우고 아직 생각이 짧기 때문에, 아울러 앞으로의 가능성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정한 것이다. 즉 좀 심한 말로 표현하면 '아직 모자라고 덜 되었기 때문에 스스로의 행동에 책임 질 수 없을 수 있으며' 그때문에 그만큼 많은 여유를 주는 것이다. 그러한 많은 특권을 주는 것을 권한으로 인정하는 되바라진 미성년자라면, 혼부터 내는 것이 맞다.

미성년자에게도 성인과 동등한 권리가 있다. 다만 그것이 달라서, 어린사람의 잘못은 처벌보다는 훈계나 가르침으로 넘어가며, 대신 어린 사람은 나이 많은 사람들의 지도를 따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물론 정당하지 못하거나 나쁜 어른의 말을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른의 말이라고 하여 무조건 이렇게 앞장세우며 거부하는 것은 같은 미성년자 입장에서 보아도 옳지 않을 것이다. 이것 역시 오류라고 부르기에는 좀 어패가 있지만 관성의 법칙에 따라 '미성년의 오류'라 해두자.

아울러 이 두 오류의 전제가 되는, 타당한 논거도 자기가 패배할만하면 '무시'라고 이름붙이는 못된 습관을 일단 '무시의 오류'라고 해두자

7) 저런 *가 있는 저기는 쓰레기통이야...

-> 완벽한 일반화의 오류 형태이다.

만약 *라는 인간말종이 어딘가의 단체에 들어간다 치자. 그렇다고 그 단체를 모조리 *와 똑같은 쓰레기통으로 생각하고 일반화, 정형화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쓰레기나 다를 바 없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그렇게 따진다면 최소한 그 *가 있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에 모두 같이 있으므로 모두가 다 쓰레기이며, 자신도 쓰레기가 될 것이다. 단체라고 했지만, 집단, 가족, 기타 등등 모두 포함된다. *가 속한 집단을 욕하려면 그 집단의 행동양태를 볼 것이지, * 자체의 존재가 집단의 성격을 대별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오류를 저질러서는 안된다. 이것을 '일반화의 오류'라고 해두자.

이 외에도 수백가지의 오류들이 있으나 가만히 살펴보면 그 거의 모두가 논리학에서 나오는 대여섯가지의 기본적 오류체계로 이루어져 그것들이 중복, 혼합되어 이루어져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대여섯가지의 기본오류는 여러분들에게 숙제로 남겨 두겠다. 그래야 책을 보고 나름대로 공부를 할 것 아닌가?

좌우간 이 글을 읽고, 논리를 생각한 사람은 우선은 그 스스로가 쌍무식한 사람이자 아무리 잘 보아주어도 궤변론자 뿐인, 입하고 밥통만 달린 기형적 인간이 되지 말고, 혹 그러한 인간을 만났을 적에도 잘 대처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논리학은 아주 중요한 학문이다. 서양 중세에서도 일단 언어만 습득하고 나면, 다른 무엇보다도 이 논리학부터 먼저 가르치고, 다음에 형이상학을 가르쳤으며, 그 다음에야 실제 전문과목을 가르쳤다.

(괴테의 '파우스트'참조)
서양이 수천년간 앞서가던 동양을 이기고 수백년만에 급속하게 번성하게 된 근본적 힘이 바로 이 논리학에 있다고 본인은 생각한다. 아울러 우리나라 교육에서 가장 부족한 부분이 이 논리학이며, 특히 인터넷이라는 가상공간에서 이 논리학은 가장 중요한 기본 소양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논리에 대해 흥미를 가지는 사람이 많아져서 보다 원활하고 발전적인 인터넷 생활이 이루어지는 꿈을 꾸며 대강 잡글을 마친다.

copyright 이우혁(이우혁은 퇴마록의 작가다.)

출처 : [기타] 누리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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