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과 정토회에 드리는 글 2


법륜스님과 정토회에 드리는 글 2
오염보살 2012.01.30

법륜스님 : 아침밥 먹었어요?
(스님이 대답은 하지 않고 갑자기 아침밥을 먹었냐고 묻자 청중들이 크게 웃었습니다.)
질문자 : 먹었습니다.
법륜스님 : 지금 살아 있어요?
질문자 : 예, 살아 있습니다.
법륜스님 : 그럼 됐어요. 쓸데없는 생각 좀 그만하세요. (청중들 하하하 웃음) 그것은 불교가 아니에요. 그런 불교를 자꾸 하면 머리만 아프고 인생이 피곤해져요.
질문자 : (환하게 웃음)
법륜스님 : 그러니까 번뇌다 이 말이에요. 번뇌는 놔버리는 것이에요. 번뇌는 답을 찾는 게 아니에요. 가만히 들어보니 그럴 듯한 얘기로 포장을 해서 꿈같은 소리를 하고 있어요.
질문자 :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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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글은 법륜스님 관련 글 탐색 중에 모 블로그에 소개된 글을 그대로 옮겼습니다.

삘이 한번 꽂히면 길거리에 구르는 개똥도 예술 작품으로 뵈는 법입니다. 저런 소리를 취중의 무명 노인이 씨부렷다면 룡감탱이가 별 잡소릴 다 한다 싶겟지요. ‘너 자신을 알라’는 단순한 말도 소크라테스가 씨부리면 그 심오함이 남달라 뵈고 해석하는 평론가들의 평론은 더욱 가관이거든요.

블로그 쥔장이 무척 감탄한 듯 자랑스레 옮긴 스님의 말씀이 내겐 전혀 다른 방향으로 꽂혓습니다. 말씀 참 쥑이게도 잘 하셨습니다. 아래 장구하게 늘어질 내 잡소리를 잘 요약해 놓은 참으로 명쾌한 즉문즉설이군요. 헌데 스님은 정작 남들에게 내리는 혜안을 자신만은 보지 못하시나 봅니다. 그렇지 않다면 입 따로 몸 따로의 표리부동한 처신을 일삼진 않으셧겟지요.

저 문답을 보며 피식 웃엇습니다. 질문자는 삘이 꽂혀서인지 환한 웃음으로 ‘알겟습니다’ 라며 통한 듯 돌아섯지만 나 같앗음 돌아서서 ‘시발, 뭔 소리야’ 햇을 겁니다(가끔, 글 중에 시정잡배들이나 내뱉을 상소리가 섞인 거는 스님과 정토회 정도의 법력이면 충분히 소화가 될 것이라 봅니다).

글쎄요, 내 소갈머리로는 번뇌를 제대로 놔버린 스님들은 세상일에 하등 관여치 않고 동안거 하안거로 수행타가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신선이 되시는 줄로만 알앗거든요. <선방일기>를 쓰신 지허스님처럼요.

그처럼 남들에게는 번뇌를 놓으라고 혜안을 주시는 스님께서는 무엇을 이루고자 70일 단식을 감행하셨습니까. 생명을 살린다는 명분으로 내 생명에 위해를 가하며 세상을 위협한 행위는, 그거는 지독한 번뇌의 산물이 아니던가요?

지난 연말 언젠가 정토회 게시판에 법륜 스님을 비판하는 글을 올렷다가 이틀도 못가서 짤렷습니다. 세상 비난에 움찔하여 글이나 삭제하는 걸로 대응하는 정토회 게시판의 소심함이 많이 아쉽더군요. 나중에 듣기로는 글 삭제의 기준은 ‘건전한 비판’은 용인하되 ‘악의적인 비난’은 용인하지 않는다더군요.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립니다. ‘무릎’과 ‘무릅’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건전한 비판은 뭐고 악의적인 비난은 뭔가요? 불가에서는 껍데기까지 매우 중시하나 봅니다. 무릅과 무릎은 표현양식의 차이일 뿐 본디 하나가 아니던가요. 애써 무릅과 무릎 사이를 들여다보려니 못 볼 걸 본 양 움찔해지는 거죠.

욕설 좀 담겻대서 표현이 좀 과격햇대서 불가의 여유로 포용 못할 게 뭐가 잇습니까. 그리 소심해서야 총포를 다스리는 일국의 정치권력을 구성하는 일에 감 놔라 배 놔라며 참견인들 제대로 배포 잇게 하겟습니까. 총선과 대선, 새로운 정치권력을 창출해내는 일이 애들 소꿉장난도 아니고 부처님 전에 천 배 만 배 올리는 무릎운동도 아니자나요.

그래요, 지난 연말에 한차례의 소동이 잇엇고 총선과 대선 정국에서 앞으로 또 잇을지도 모를 법륜 스님과 정토회의 '정치지향적'(지난 연말 소동 때 언론의 왜곡과 누명이라면서 하도 잡아떼길래 십분 양보해서 ‘정치적’이라 하지 않고 ‘정치지향적'이라 표현하겟습니다) 행보를 비난(?)하려는 게 이 글의 목적입니다.

(이하 존칭 생략).

내가 개인적으로 가장 경멸하는 인간의 유형이 표리부동한 사람입니다.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거지 물 탄 듯 술 탄 듯 아닌 보살인 양 해대는 부류는 역겹습니다. 정치에 관심을 갖는 게 뭐 죽을죄라도 진 겁니까. 정치할 늠은 날 때부터 정해져 잇는 것도 아니자나요. 개신교든 천주교든 불교든 대순진리회든 정사파를 떠나서 종교단체가 정치에 관여해서는 안 될 법이 잇는 것도 아니고요. 종교에도 자유가 잇듯 정치에도 자유가 잇습니다. 바티칸도 왕국을 세웟고 여호와의 증인들도 왕국을 세웟는데요 멀. 근데 왜들 그리 은밀하고 의뭉스런지요.

법륜과 정토회(평화재단 및 JTS까지 포괄하는 의미로 사용하겠습니다)는 유독 그 정치지향적 행보에 대해서 누가 쓴소리라도 좀 해댈라치면 꼭 자위하다 들킨 사춘기 가시내처럼 어마 뜨거라며 강력하게 결백을 주장합니다. 인명진과 박세일, 윤여진과 김종인, 안철수 등이 직간접으로 법륜의 정치지향적 발언이나 관여를 증언하고 잇음에도 언론의 농간일 뿐이라며 딱 잡아떼는 모습은 대단히 실망스럽고 솔직하지 못하고 표리부동하다는 느낌마저 듭니다.

내가 법륜과 정토회의 정치지향적 행보에 비판적인 이유는 법륜이 각종 인터뷰에서 언급해온 ‘새로운 정치세력의 필요’라는 화두가 몹시도 추상적이고 식상한데다 그 아마츄어적인 발상의 순진함이 사회적 혼란을 크게 야기할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비록 아마츄어적이라곤 하나 법륜과 정토회가 한마음으로 떨쳐 일어나 x축을 이루고 안철수가 y축으로 호응만 해준다면 법륜과 정토회는 온 나라를 통째로 흔들어 놓을 잠재력도 지니고 잇음을 지난 년말에 보앗습니다. 물론 안철수라는 y축이 빠진 법륜과 정토회는 깃 빠진 공작꼴로 기성정치판의 안중에도 없겟지만요. 어쨋든 양축의 뽕짝이 맞는다면야 안철수를 대통령으로 만드는 일도 요즘 분위기로 봐선 못할 것도 없겟습디다.

그렇게 정치권력을 얻고 나선 그 다음엔? 김제동 문화부 장관 시키고 김여진이 여성부 장관 시키고 법륜은 통일부 장관시켜 놓으면 당장이라도 굶어 죽어가는 북녘의 어린 생명들을 원 없이 살려 놓을 수 잇을까요. 나랏일이 동네 곗일처럼 그리 호락호락하던가요. 생명을 이념의 아랫가치 정도로 얕잡아 보는 기성정치인들은 도저히 믿을 수 없겟어서 맘씨 좋아 보이는 안철수를 간택하셧습니까. 차라리 안철수 못지않게 젊은이들의 대세인 소녀시대를 집단대통령으로 옹립해보는 건 어떨지요. 대통령 하나 바뀐다고 희망세상이 그처럼 쉽게 도래할 것 같으면 김대중, 노무현 때 천년왕국은 이미 건설되었을 겁니다.

믿도록 노력해 보겟습니다. 법륜과 정토회가 안철수와 연관이 없다는 걸. 당사자들이 그토록 극구 멘토와 멘티가 아니라고 우기는데 믿어야죠. 그럼 법륜은 도대체 누굴, 어떤 세력을 염두에 두고서 새로운 정치세력을 그토록 역설했던 것일까요. 설마, 새로운 대안세력을 주문을 외듯 역설하다 보면 홍길동 손바닥에서 구름이 피어오르듯 그들이 짠하고 나타나서 희망세상을 일구어 줄 걸로 생각하셧던 건 아니겟지요.

“신랑이 바람을 피는데 이혼을 할까요, 말까요 스님?”
“쓸데없는 생각 좀 그만하세요, 번뇌를 놓아 버리세요!”

“결혼을 꼭 해야 하나요. 스님?”
“지금 살아 있어요? 그럼 됐습니다.”

이혼 상담, 결혼 상담, 자식 상담, 직업 상담이나 하려고 100강이다 뭐다 하며 방방곡곡 발바닥 부르트도록 다니시진 않앗을 텐데요. 늦바람난 도둑들처럼 홍보전단을 들고 밤거리 골목길을 배회하느라 여념이 없던 봉사단원들의 노고가 그런데 쓰이기에는 아까와 뵈더군요. 법륜과 희망세상 기획자에겐 미안한 얘기지만 전국순회공연 그거 조직적 홍보 없이 순수하게 법륜 이름만 내걸고 한다면 독고다이로 뛰고 잇는 도올만큼 청중들 불러 모으겟어요? 낮 시간에 별로 바쁘지도 않을 부녀자들이나 잔뜩 불러 모아놓고서 온갖 고민 나누다가 그 속에서 세상의 종말 징후라도 보셧습니까. 하긴 실직을 앞둔 신랑, 이혼을 앞둔 주부, 자식 취업 걱정하는 부모들과 주야로 마주치다보면 세상이 절망적으로 보일 수도 잇겟습니다. 그 속에서 변혁의 열기를 느꼇을 수도 잇겟고 희망세상이 절실햇을 수도 잇겟습니다. 내 보기엔 그들 속에서 발견한 절망은 십년 전에도 이십년 전에도 십년 후에도 이십년 후에도 별반 달라질 것 같지 않은데요. 정치와 상관없이 사람들이 헤어날 수 없는 생로병사의 원초적 절망입니다. 정권이 해결해주지 못할.

희망세상이 도대체 뭘까요? 희망세상에서 정치는, 경제는, 사회는, 교육은, 문화는 어떻게 시스템을 갖추고 꾸려지는 걸까요. 그 희망세상이 칠팔구십년대 모두가 주야장천 외쳣던 참세상과는 어떻게 다른 건가요? 민주노동당에서 말하는 세상, 진보신당에서 말하는 세상, 민주당에서 또는 한나라당에서 말하는 세상과는 어떻게 다른 세상인가요.

뭔가 새로운 세상인가 본데 그거 좀 보여주세요. 두루뭉술하게 사람답게 사는 세상, 정의와 평등이 구현된 세상, 빈부격차 없이 모두가 윤택한 세상, 모든 인간이 존중받는 세상, 인권의 사각지대가 없는 세상, 이런 건 천년왕국인 거죠. 여호와의 증인들이나 대순진리회에서도 말하는 세상이고 민노당, 진보신당, 민주당, 하다못해 한나라당에서도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세상 아니던가요. 제가 보기엔 희망세상이란 정치적 의도가 없다면 전혀 새로울 것도 없는 유토피아적 혹세무민일 뿐입니다. 차라리 ‘북한 어린이를 살립시다. 제3세계의 어린 생명들을 살립시다.’라고 외쳣던 예전의 정토회의 모습이 훨씬 구체적이고 가슴에 와 닿습니다. 근데 작금의 법륜과 정토회는 희망세상이라는 추상적 구호 아래 무슨 최면이라도 걸린 듯 일사불란해 보이지만 내 눈엔 갈팡질팡입니다. 상층 따로 하층 따로 희망세상이 뭘 말하고 어떻게 이뤄갈 세상인지 모두가 저마다 선문답 중입니다.

세상이란 게 곧 정치체계의 산물임에도 희망세상 만들기가 비정치운동이라고 하는 것도 우습고 뚜렷한 정책이나 로드맵도 없이 정치운동이라 자처하는 건 더욱 우습습니다. 정토회는 비정치적인 수행자 단체인데 상층부 인사들이 벌이는 짓은 대단히 정치지향적이고 그들에 의해 추동되는 희망세상 만들기는 정치 운동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럼 대체 뭡니까 이게? 의식개혁운동인가요? 아님 하기 좋은 말로 사회운동인가요?

앞서도 말햇지만 정치를 지향하는 건 죽을죄도 아니고 정치할 늠이 날 때부터 정해진 것도 아닙니다. 인간을 두고 정치적 동물이라고 일컬을 만큼 ‘정치지향성’은 인간의 유전자속에 자리 잡은 태생적 본성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정치를 외면하는 비정치적인 인간들이 외려 이상한 겁니다. 때론 정치권력은 인간의 일상에서 오는 모든 번뇌의 근원을 해소해줄 수도 잇는 만병통치약이란 생각마저 들 때가 있습니다. 법륜이 70일의 단식 끝에 북녘의 꺼져가는 생명을 외면하는 기성의 정치권력에 절망하고 새로운 정치권력을 꿈꿔 왓던 것처럼요.

근데요, 대통령 한 사람 바뀐다고 앉은뱅이가 벌떡 일어나고 길거리 걸뱅이가 재벌로 둔갑하고 시골촌구석 망해가던 족발집이 명동으로 확장 개업하게 되지 않습니다. 안철수가 대통령이 되면 집집마다 방구들 뭉개고 앉아 잇던 청년실업자들이 한꺼번에 사무실에서 넥타이 매고 컴퓨터 두들기며 앉아 잇게 될 것 같습니까.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입니다. 안철수가 대통령이 된대도 말기의 모습은 이명박과 하등 다를 것도 없을 것 같습니다만.

대통령이 바뀌는 건 역사적 일상입니다. 사람에게 일상이 잇듯이 역사에도 일상이 잇습니다. 혁명이 아닌 일상으로서의 정권교체가 결코 희망세상으로 가는 만병통치약일 순 없고 희망세상이란 게 그렇게 벼락처럼 찾아오는 것도 아니란 건 우리의 지난 경험을 통해서도 충분히 압니다. 김대중 정부 들어섯다고 통일국가가 된 거 아녓고 노무현 정부 들어섯다고 자주국가가 완성된 것도 아녓습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섯다고 대한민국이 일등경제대국이 된 것도 아녓습니다.

대통령의 역할이 지대하다고는 하나 막상 겪고 나면 실생활에서의 그 변화는 미미하고 도진개진이며 정권교체기에는 입신양명에 눈먼 정치인들만 호떡집 불난 거 맹키로 극성스럽고 요란을 떤 것일 뿐이엇습니다. 혁명이 창궐하는 역사적 격변기가 아닌 다음에야 세상은 그렇게 서서히 변화해 갑니다. 역사적 일상이란 게 그렇습니다. 천지개벽을 말하는 사람들의 요설을 우리는 혹세무민이라고 하죠? 희망세상이 요설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희망세상’은 1970~80년대에는 재야권에선 ‘그 날’, ‘참세상’ 등으로 지칭되었고 제도권에선 ‘평등사회’, ‘정의사회’, ‘복지사회’ 등으로 지칭되엇습니다. 전두환조차 희망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했노라고 자부하고 잇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만큼 희망세상이란 화두가 새삼스럽고 식상하다는 겁니다. 희망세상 만들기가 무슨 구체적 실천강령을 두고 잇는 사회변혁의 로드맵이 아니라면 희망세상 만들기에서 정치색을 완전히 배제하고 예전의 정토 역할에 충실하라는 게 나의 제안입니다.

첨부터 권력을 지향하는 조직도 잇겟지만 권력을 지향하는 조직이 아녓음에도 조직의 덩어리가 커지고 단체에 힘이 실리면 권력을 지향하는 정치모리배가 끼여듭니다. 정토회가 언제부터 정치지향적이었습니까. 법륜은요? 안철수는요? 정토는 정토 본연의 일을 하고 정치적 지향은 각 개인별로 자기 정치색에 맞는 기성 정당에 가입해서 펼치는 걸로는 부족합니까. 한나라당 당원도 민주당 당원도 노동당 당원도 모두 정토의 밀알이 될 때 비로소 정토의 진정성은 만방만인에 통합니다. 그거야말로 중도죠. 화합과 통합의 실천이념이기도 하고. 중도의 가치는 만인이 거역할 수 없는 가치여야 합니다. 중도는 탈이념적이고 비정치적이며 궁극적 이데올로기의 완성태인데 그걸 현실 정치에서 지금 당장 실천해보겟다고 나서는 게 대단히 아마추어적이고 이상주의자의 환상 같아서 지적하고 싶은 겁니다.

정토 본연의 임무를 망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법륜과 정토가 제아무리 구시대적 이념대결과 갈등을 넘어서는, 좌우 공존과 화합을 도모하는, 새로운 세력에 의한 새시대의 사회상을 추구한대도 정치권력이라는 현실적 이해 아래서는 그 어떤 연유로든 절반의 반대세력이 탄생하기 마련입니다. 진정성 하나면 다 통할 거라는 순진한 생각은 버리는 게 좋습니다. 행여 정토회 내부에 대단히 정지지향적인 인사들이 잇어 법륜의 생각과 판단에 나쁜 영향을 미치고 잇다면 법륜과 정토회에만 불행일 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꺼져가는 생명에게도 불행입니다. 법륜과 정토회는 그간 세상이 돌아보지 않는 외진 곳에서 꺼져가는 생명들을 살리는 데 대단히 큰 공헌을 해왓고 칭송받아 마땅한 분들이란 걸 압니다.

근데 새삼 지금에 와서 70일 단식 고행 끝에 내린 결론인지 아니면 어느 순간 정치색 짙은 인사들이 정토회의 상층을 잠식한 탓인지 몰겟으나 법륜과 정토회가 근자에 보여준 정치지향적 처신은 대단히 조급하고 근시안적 행보라 여겨집니다.

NGO 활동에선 최대한 정치색을 배제하는 게 좋습니다. 특히나 우리나라와 같이 정치적 반대 세력에 대한 대립과 배척이 극심한 곳에선 더욱 그렇습니다. 당장 올해 생명살리기 길거리 모금에 나갓을 때 작년 초입까지만 해도 정치적 판단 없이 흔쾌히 모금에 응하던 사람들이 어, 이거 법륜인지 머시긴지가 이끄는 그 단체인거야라면서 외면한다면, 그 탓에 한 생명이 꺼질 수도 있다는 생각들은 안 해보셨습니까.

법륜과 정토회의 활동은 이념과 정치색을 넘어선 그야말로 범국민적, 범세계적, 범종교적 중도적 가치로 받아들여져야 함에도 절반의 사람들이 법륜과 정토회가 추구하는 가치를 정치적 색안경을 끼고 바라볼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한다면 어디 정토 본연의 임무와 역할에 온전히 충실할 수 잇겟습니까. 앞서도 말햇지만 진정성만 잇으면 통할 거라는 생각은 버리시길 바랍니다. 현실 정치에서 진정성이 그리 쉽게 통하는 거라면 노무현이 천애절벽에서 몸을 내던질 일은 없엇을 겁니다. 반노무현 정서는 그의 사후에도 대단히 공고하고 김대중도 그렇습니다.

뭐 그런 진정성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이야 버리고 가면 되지라는 마음이라면 더 이상 할 말도 없겟습니다만 제 알기론 부처님의 눈에 또는 예수님의 눈에 버리고 가도 좋을 사람은, 생명은 없엇던 걸로 압니다. 가치나 지향이 나랑 맞지 않고 나의 진정성을 몰라준다고 버리고 간다면 정토회는 감히 수행자 단체임을 자처할 순 없겟지요.

수행자들이 정치권력의 불의에 항거하여 떨쳐 일어날 순 잇겟지만 수행자들이 스스로 정치권력이 되고자 하는 건 어불성설입니다. 그래도 정녕 정치권력을 만드는 일에 뛰어들려한다면 차라리 자신들의 정치적 로드맵을 제시하고 커밍아웃하는 게 낫습니다. 그러면 적어도 표리부동하다는 비난으로부터는 자유로울 겁니다. 해놓고도 안 햇다고 우기시면 보는 대중의 가슴엔 ‘화’가 오릅니다.

화가 올라서 글 초입에서 인용한 법륜스님의 말씀을 법륜스님과 정토회에 반사해 드리고 싶습니다.

"그럼 됐어요. 쓸데없는 생각 좀 그만하세요. 그것은 불교가 아니에요. 그런 불교를 자꾸 하면 머리만 아프고 인생이 피곤해져요.."

"그러니까 번뇌다 이 말이에요. 번뇌는 놔버리는 것이에요. 번뇌는 답을 찾는 게 아니에요. 가만히 들어보니 그럴 듯한 얘기로 포장을 해서 꿈같은 소리를 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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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어느 정도 소동이 잦아든 집에 뜬금없이 기어들어 어깃장을 놔서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해 바뀌고 나이 한 살 더 먹으니 노파심만 커졋나 봅니다. 행여, 앞으로 다가올 총선 대선 국면에서 다시 또 법륜과 정토회가 지난겨울의 교훈을 잊고 조급한 맘에 오버페이스 할까봐, 견제해보는 글입니다. 저도 희망세상을 누구보다 갈망하고 진정정이 잇는 사람이거든요. 과거 운동권에 몸을 담앗던 사람들의 가장 큰 결함이 조급성과 성과주의엿습니다. 사람들이 너무 똘똘해서 단박에 대박을 이뤄내지 않으면 자책을 하던 결벽주의자들이 참 많았거든요. 그때 그 사람들 여전히 어디 가서 뭘 해도 그런 습성이 쉽게 고쳐지질 않습니다. 이번에 정권교체 실패한다고 쇠고랑 차지 않습니다. 경찰 출동 안 합니다. 제발 우리 더디 가더라도 함께 갑시다!

이상, 맘도 혼도 삐딱한 오염보살이 음력 새해벽두에 부린 꼬장이었습니다. 성불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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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윗글에 대해 '예상대로' 많은 타박이 잇엇습니다.
비난(?)의 대상 본영에다 글을 올렷으니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든 격이겟죠.
사실, 저 글을 쓰면서 어휘의 장치나 글의 형식을 두고 고민 좀 햇더랫습니다.

어휘의 장치는 호칭 문제엿고 글의 형식은 건방 컨셉이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고민햇던 부분들에서 정확하게 작살 좀 맞앗습니다. 의도한대로!
이럼 매저히스트인가요^^.
중간에 분명 (이하 존칭 생략)이라는 괄호 멘트로 안전장치를 두엇음에도
남의 집에 와서 어른 이름을 함부로 불러삿냐는 불호령 작살도 잇엇고,
스님은 감히 니가 언급할 수준의 사람이 아니다 네 꼬라지나 알라는 식의 무시 작살도 잇엇죠.ㅎ~

심지어는 맞춤법 작살까지 날아듭니다. 햐~, 이건 좀 그렇슴다.
무릎을 보랫더니 무릎은 보질 않고 무릎 사이를 보신 분에 해당합니다.
넷질을 두루 해보신 분이면 단박에 '의도적'이란 걸 알 텐데
매우 순진한 분이신 듯 해서 그리고 또 있을 순진한 분들을 위해서
이 부분은 특뼈리 추가로 정성스레 언급해 놋습니다.
일단 거슬리셨다니 유감입니다만
자칫 형식에 치우치면 본질을 놓칠 수도 있음을 귀띔해 드리고 싶습니다.

한글 맞춤법 쉽지 않은 분야입니다. 제 글들에서 발견되는 맞춤법 에러들은
일종의 글 읽는 재미를 위한 '장치'로 봐주셨으면 합니다.
권장할만한 건 아니지만 넷세상에선 흔한 유행성 언어유희인 거죠.
무엇보다 제가 가끔 제 글들에서 의도적으로 한글맞춤법에서 일탈하는 건
정식 발표글이나 논문도 아닌데
지나치게 반듯한 맞춤법으로 너무 곱게 치장된 글은 낯간지럽고 오글거려서
저의 삐딱한 체질상 맞질 않는 탓이 클 겁니다.ㅎ~

제가 대표적으로 삐딱하게 취하는 맞춤법 일탈에는,

1. 쒸프트 쌍시옷 치는 게 구차나서
단시옷으로 처리하고 맙니다. 예)하였습니다->하엿습니다.

2. 읽기에 뭉툭한 겹받침은
때론 읽기 좋게 연음으로 처리합니다. 예)아니잖아요->아니자나요

3. 가끔은 갱상도 원주민의 사투리를
구수하게 발음 그대로 표현키도 합니다. 예)어쨌든->우짜든동

4. 또 가끔은 문득 장난끼가 발동해서
참 예쁜 한글을 비틀고 꼬집기도 합니다. 예)하였습니다->하엿슴미다

5. 또 어떨 땐 단어 자체를 왜곡하기도 합니다. 예)웃기는->욱끼는

6. 2와 5를 병합하기도 합니다. 예)귀찮아서->구차나서

7. 표현에 생동감을 주느라 욕설을 넣기도 합니다. 예)시발, 우이 싯퐁, 니미뤌

8. 그 외 등등

이런 것들 대부분은 이미 많은 네티즌들이 즐겨 쓰고 있는 패턴들입니다.

저의 이런 의도된 한글맞춤법 왜곡 중에서 특히,
쌍자음이나 겹받침의 변형과 축소는
타자 중심의 글쓰기 문화와 발음의 연음성을 고려해 볼 때
특별히 한글학회에도 그 필요성을 건의해 보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한동안 한글학회가 주도하여
한글의 발성에서 경음 축소 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엿던 것처럼요.
예)김빱->김밥, 효꽈->효과

전 개인적으로 우리말과 글을 구성하는 쌍자음과 겹받침들은
가급적 그 사용을 축소했으면 하는 입장입니다.
자판 중심의 글쓰기 문화에서 쌍자음과 겹받침은 쓰기에도 불편하고
아무래도 글자나 발음이 쎄면 사람 맘도 야멸치고 쎄지거든요.
'씨팔늠아'보다는 '시밸류마', '개새끼'보다는 '개새키'가
말하기도 좋고 듣기도 좋잖아요(?).^^
많은 연구와 언어 실생활에서의 실험과정이 필요하겟죠.

맟춤법 작살을 날려주신 님,
모른다고 구박키보다는 고운 한글을 그리 꺾어 쓰면 되겠냐고 퉁박을 주셨으면
제가 조금은 피박을 썻을 텐데요.(또 시건방 컨셉 멘트네요^^)
이제라도 양해를 구하면 거슬림이 덜해질까요.
어차피 내용이 지랄 맞아서 건 시비일 거란 생각이 짙어서
부질없는 장광설이 아닐까도 싶습니다.^^


(위 밑줄글은 추후 별도로 덧댄 글입니다.
눈치 빠르고 아실 만한 분들께선
뭐 그딴 걸 굳이 언급하냐며 소심한 반응이라 나무라실 텐데
한번쯤은 '인터넷 글쓰기'와 관련해서 따로 글을 세워 보고픈 내용이어서요^^.)

어쨋든, 작정한 도발이고 예상된 반응이니 작살을 맞고도 아무런 감정 없이 그저 웃음만.
누군가는 흥분해서 저더러 심보가 배배 꼬인 사람이라고도 하는데 옳은 지적입니다.
크흐, 제 심보가 많이 꼬여 잇습니다. 적어도 위 글 사안과 관련해서만큼은.

사실, 저 분들이 무지 착하고 고운 분들입니다.
자기 수행과 사회 봉사와 나라 걱정에 많은 시간과 열정을 쏟으며
그 속에서 삶의 의미를 벼려가는 분들입니다.
세상에 이토록 아름다운 분들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요.
심뽀가 배배 꼬인 저같은 사람이 함부로 재단하기에는 벅찬 곳입니다.
근데 그런 사람들을 왜 건드리냐고요?

너무 착해서 건드려줘야 한다는 꼬인 생각이 불현듯 들엇습니다.
너무 착하면 저처럼 나쁜 류의 사람들한테 당하거든요.
나쁜 남자 훈련이 좀 필요해 보엿습니다.
건드려보니 금세 드러나더군요.
적당히 약아빠지고 여우같은 사람은 건드려도 별 반응이 없습니다.
댓글에서 흥분하신 분들은 저 때문에
그간에 공들인 수행 법력이 다 날아가게 생겻습디다.ㅎ~
내 가슴에 실바늘이 꽂혓다고
다른 사람 가슴에 대바늘을 박고 싶은 ‘화’가 치밀엇을 테니 말이죠.
‘화’를 다스리는 법은
법륜스님이 그간 수행자들에게 크게 공들엿던 부분인데 이거 어쩌죠.
세상에서 젤 못된 늠이 실컷 남 약 올려놓고 '약 오르지 메롱!'하는 늠이라는데.
크흐, 제 심뽀가 많이 못 됏죠.
그래도 그들로선 잃은 만큼 얻은 것도 잇을 겁니다. 믿슙니다.

학시리 제가 못된 심뽀의 소유자인 건 분명합니다.

근데요 저분들, 자신들 스스로는 무지 지혜롭고 영민하다 생각하시는데
너무 착해서 자칫 우상화놀음에 빠져드는 오류를 범할 수도 잇는 사람들입니다.
신성의 영역에서 노니는 종교단체들에 몸담은 사람들이 쉬 빠져드는 오류입니다.
신앙인들에겐 절대 권위에 복종하지 않으면
죄를 짓는 거 같은 결벽 증세 같은 게 잇습니다.

나쁜 종교 지도자들은 어떤 형태로든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절대권위의 대행자라는 이미지를 신도들에게
심어주기 위해 노력합니다. 법륜스님이 그렇다는 건 아닙니다.
지도자를 바라보는 수행자들의 마음가짐이 문제겟죠.
무오류의 인간형은 없다고 보고 세상사는 게 옳을 겁니다.
법륜스님 역시 자신의 분야에선 전문가일지 모르겟으나
정치판에선 생초보에 가까운 분입니다.
혜안으로 가정사를 논할 순 잇겟으나
가정생활에선 생초보에 가까운 나이든 총각일 뿐입니다.

허나 사람들은 환상을 갖습니다.
하나를 알면 열을 다 알 것이라고 착각에 빠지는 거죠. 저 역시 예외는 아니고.
그런 착각으로부터 '스님은 감히 네 따위가 논할 분이 아니다'라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식의 선언이 나오는 거죠.
이런 정도면 이미 그 개인에겐 신격화가 진행된 수준입니다.

다른 종교단체들도 마찬가지지만 지도자의 신성 권위가 부여된 곳에서는
조직내 상호비판이나 자기비판 등의 순기능이 현격하게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모두들 고운 소리 맑은 소리만을 듣기를 원하고 하기를 원하니
쓴소리는 외부에서 해주지 않으면 자신들의 모습을 돌아볼 길 없습니다.

위 글에서 언급햇지만 덩어리를 갖춘 조직엔
반드시 권력을 지향하는 정치모리배가 끼어들게 마련입니다.
정토회 상층에 정치적인 목적을 지닌 인사들이
충분히 자생하거나 기생할 수 있다는 겁니다.
법륜 스님의 생각과 판단에 영향을 끼칠 수도 있는 자리에서 말이죠.

강연은 법륜 스님이 하지만
공연의 목적과 로드맵은 정치적인 사람들이 쥐고 있을 거란 느낌이 있습니다.
정치적 사욕을 가진 표리부동한 사람들이지 않앗으면 좋겟습니다.

각설하고, 다시 글에서 채택한 호칭문제와 건방컨셉에 대해 부언합니다.
원래 제 글 스타일이기도 한데
때와 장소를 가려서 변형을 주는 분별력 정도는 잇습니다만
굳이 저 곳에서만큼 그러지 않은 이유는
고운 목소리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고운 목소리로 말하면
사돈 간 첫인사 자리처럼 짐짓 젠체하고 그 속내를 서로 알 길이 없습니다.
사람이란 게 화가 좀 나야 속도 보이고 하는데
저 곳은 무조건 화를 다스리는 걸 수행자의 큰 덕목으로 아는지라
점잖아서는 그 속을 볼 수가 없거든요.ㅎ~
학창시절 때 우리 가끔 그런 경험들 겪잖아요.
무지 착하고 얌전했던 애가 화를 내면 더 무섭다는 걸.
신부님이나 스님들 열 받으면 아마 저보다 욕 더 잘 할 것 같습니다.
스님한테 쓴소리 좀 햇다고 수행자님들 댓글 단 거 보니
맞댓글로 응대하다간 작살에 제 심장이 남아나덜 않겟더군요.(엄살살살^^)

어쨋거나 그 결과물인지 모르겟으나
어느 분께선 글 내용과 관련된 속내도 내보이셧더군요.
역시 발끈해야 그 속이 보이거든요. 글이 노렷던 아주 작은 성과 중 하나입니다.
글의 최종 목표는 정토 내부에서 제 글에 공감을 하는 누군가들에 의해서
정토회의 활동사업과 진로에 대한 내부 토론과 비판이
일상적으로 활성화되는 계기로 삼앗으면 하는 겁니다.

기본적으로 저는 그쪽 사람들 사람 좋은 거는 인정하는데
사람 좋은 것과 그 사람의 행위를 두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과는
구별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습니다.

사람이 착하니까 하는 일도 모두 옳은 것이다는 명제는 틀렷다는 거죠.
착한 사람은 항상 옳다는 식의 전제가 들어가면 맹목을 유발합니다.
그게 개인이면 상관없는데 조직인 경우엔 자칫 문제가 크게 야기될 수 잇습니다.
지도자의 잘못된 판단을 맹목으로 접수하고서
열과 성을 다해서 자신이 헌신하는 일이 자신이나
또는 사회전체구성원에게도 해가 될 수도 잇습니다.

팔 구십년대 운동권 인사들은 비판하는 일에 몹시 익숙합니다.
그 시절엔 시위할 때를 제외하곤 독서와 토론과 비판이 운동권 사람들의 일상이엇습니다.
감옥안에서까지 토론과 비판은 일상이엇습니다.
오죽 하면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 얘기가 잇을까요.
아침 먹고 상호 비판, 점심 먹고 자기 비판, 저녁 먹고 세상 비판........

그런 습성을 가진 누군가가 비판 없는 저런 고운 단체의 활동가가 된다면
고기가 물을 만난 듯 할 겁니다.
비판이 피곤하긴 해도 비판 없는 맹목보다는 옳은 결과물을 만듭니다.
비판과 견제가 없는 조직과 사회는 죽은 조직이고 죽은 사회입니다.
비판과 견제는 남들 보기에는 지루하고 짜증나 보여도 민주사회의 근간입니다.

누군가 견제하지 않으면 야심가들에게 손쉽게 휘둘립니다.
나랑 상관없다 냅둬버려도 좋을 테지만 내 주변에 가까운 누군가가 저 단체를 위해
애쓰는 걸 보면서 한 소리 정도는 놓아야겟다는 생각이 들엇습니다.

물론 제 생각이 옳고 저 곳이 틀렷다고 단정하는 건 아니지만
글에서 애써 그런 컨셉을 채택햇습니다.
비판적 주장의 전달 외에도 맹목화될 수 있는 곳에
비판기능의 활성화라는 잠재된 목적도 잇기 때문입니다.
쓴소리의 형식을 그래서 최대한 건방 컨셉으로 잡앗습니다.
법륜스님의 권위를 없애기 위해 '법륜'이라 칭하고
만인이 좋아하는 겸손의 대명사 '저' 대신 '나'라고 호칭햇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바라기는, 아무리 종교단체라지만 내부에서 모두가 ‘예스’라고 외칠 때
‘노우’라고 외치는 분이 몇 분 정도는 잇엇으면 합니다.
내부 비판 기능이 상실된 집단의 비민주성은
종국에는 사람과 조직을 해치고 말 거라는 건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이 나라의 지난햇던 민주화 오십여년이 남긴 교훈입니다.

법륜 스님을 존경하는 건 좋지만 ‘오, 법륜느님!’ 하셔서는 곤란합니다.
댓글에서 그런 분위기를 감지한 게 그닥 좋은 느낌으로 와닿지는 않지만
그래도 저분들 워낙 고운분들이란 믿음으로 극복합니다.

그곳에다 괜한 맞댓글로 이런 저런 생각을 피력하는 것보다는
원글은 그곳에 던지고 댓글에 대한 답글은 이곳에다 후기로서 대신합니다.
곱지 않은 글에 댓글들 주셧는데 아무런 반응도 없어 김샌 분들 중에
저와 불가에서 말하는 인연이 닿는 분들께선 인터넷을 오가다가
이곳에서 제 속내의 일단이라도 엿보고 가시겟지요.

님들 모두, 성불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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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륜스님과 정토회에 드리는 글 2 - 후기
2012.02.12 오염보살)


저의 지난 글에 댓글을 주신 분들 중에는 ‘글’을 읽지 않고 ‘글자’만 읽으신 분이 태반이고, 화두를 던졌으나 명상은 뒷전이고 화부터 올리신 분이 거진이더군요. 깨장과 불대 등의 용맹정진(?) 끝에 나름 반열에 오른 줄 아셨을 텐데 찰나지간에 도로와 허방이 되었으니 님들에겐 제가 마구니와도 같았겠습니다.

불전과 불어 몇 자 암송으로 선지식인 양 행세하는 분도 계시더군요. 불가의 문외한들을 호되게 나무라시는데 그 건방과 허세만큼은 저 못지않아 보입니다. ‘성불하시라’는 덕담 저 너머에 존재하고 싶으셨으니 어련하셨을까요.

그 가식들에 살짝 삐쳐서 오늘 한 번 더 장문 테러를 감행합니다. 스님도 법문 중에 많이 질타하시는 것 같던데 스스로 생각하고 해답을 구하는 생각여행을 무척 게을리 하는 분들이 의외로 많은 것 같습니다. 습관처럼 스님께서 던져주시는 해법만 받아먹기에 길들여진 탓일까요. 세 줄 소화력도 안 되시는 분들은 투덜대지 말고 첫줄과 끝줄 두 줄만 읽으세요.

지난 글에 대해선 '예상대로' 많은 타박이 있었습니다. 비난(?)의 대상 본영에다 글을 올렸으니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든 격이겠지요. 사실, 지난 글을 쓰면서 어휘의 장치나 글의 형식을 두고 고민 좀 했더랬습니다. 어휘의 장치는 호칭의 문제였고 글의 형식은 건방 컨셉이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고민했던 과녁들을 향해 정확하게 화살들이 꽂혀들더군요. 예상한대로! 이럼 매저히스트인가요^^. 중간에 분명 ‘이하 존칭 생략’이라는 괄호 멘트로 안전장치를 두었음에도 남의 집에 와서 싸가지 없이 어른 이름을 함부로 불러샀냐는 불호령 화살도 있었고, ‘스님은 감히 네가 언급할 수준의 사람이 아니니 네 꼬라지나 알라’는 식의 개무시 화살도 있었습니다.ㅎ~

심지어는 맞춤법을 질타하는 화살까지 날아듭니다. 무릎을 보랬더니 무릎은 보질 않고 무릅과 무릎 사이를 보신 분에 해당합니다. 눈치 좀 있는 분이면 단박에 '고의적'이란 걸 알았을 텐데요. 오늘 글을 읽고서는 ‘맞춤법 때문에 나신 화’는 푸시기 바랍니다.^^ 어차피 내용이 지랄 맞아서 건 시비일 터, 부질없는 충고일진 모르겠으나, 추후론 ‘글자’를 읽을 때와 ‘글’을 읽을 때를 분간하는 눈도 좀 키우셔야 할 것 같습니다. 무릎 사이를 왜 자꾸 들다보려 하시는지.ㅜㅜ 순진한 수행자들이 마구잡이로 나다니시기에는 인터넷 세상이 마구니로 가득 차 있음을 아셨으면 합니다.

어쨌든, 작정한 도발이고 예상된 반응이니 화살을 맞고도 그다지 큰 감정의 동요는 없었습니다. 누군가는 저더러 심보가 배배 꼬인 사람이라고도 하는데 옳은 지적입니다. 크흐, 제 심보가 많이 꼬여 있습니다. 적어도 지난 글 사안과 관련해서만큼은.

사실, 이곳 분들이 무지 착하고 고운 분들이란 걸 압니다. 자기 수행과 사회봉사와 나라 걱정에 많은 시간과 열정을 쏟으며 그 속에서 삶의 의미를 벼려가는 분들이란 것도 압니다. 세상에 이토록 아름다운 분들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요. 정토회란 곳이 심보가 배배 꼬인 저 같은 사람이 함부로 재단하기에는 벅찬 곳이란 것도 압니다. 근데 그런 사람들을 왜 건드리냐고요?

너무 착해서 건드려줘야겠다는 삐딱한 생각이 불현듯 들었습니다. 너무 착하면 저처럼 나쁜 류의 사람들한테 후달리게 되거든요. 나쁜 사람 훈련이 좀 필요해 보였습니다. 그래요, 제가 오지랖이 좀 넓습니다. 건드려보니 금세 드러나더군요. 적당히 약고 여우같은 사람은 건드려도 별 반응이 없습니다. 댓글에서 흥분하신 분들은 저 때문에 그간에 공들인 수행 법력이 다 날아가게 생겼습디다ㅎ~. 내 가슴에 실바늘이 꽂혔다고 다른 사람 가슴에는 대화살을 박고 싶은 ‘화’가 치밀었을 테니 말입니다. ‘화’를 다스리는 법은 법륜스님이 그간 수행자들에게 크게 공들였던 부분인데 이거 어쩝니까.

세상에서 젤 못된 놈이 실컷 남 약 올려놓고 '약 오르지 메롱!'하는 놈이라지요. 확실히 제가 못된 심보의 소유자인 건 분명합니다. 그래도 댓글 주신 분들께서도 잃은 만큼 얻은 것도 분명히 있을 거라 믿습니다.

근데요 이곳 분들, 자신들 스스로는 무지 지혜롭고 영민하다 생각하시는데 너무 착해서 자칫 우상화놀음에 빠져드는 오류를 범할 수도 있는 사람들입니다. 신성의 영역에서 노니는 종교단체들에 몸담은 사람들이 쉬 빠져드는 오류입니다. 신앙인들에겐 신성화된 권위에 복종하지 않으면 죄를 짓는 듯한 결벽 증세 같은 게 있습니다.

나쁜 종교 지도자들은 어떤 형태로든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절대권위의 대행자라는 이미지를 신도들에게 심어주기 위해 노력합니다. 법륜스님이 그렇다는 건 아닙니다. 지도자를 바라보는 수행자들의 마음가짐이 문제겠지요. 무오류의 인간형은 없다고 보고 세상사는 게 옳을 겁니다. 법륜스님 역시 자신의 분야에선 전문가일지 모르겠으나 정치판의 생리에 대해선 생초보에 가까운 분입니다. 혜안으로 가정사를 논할 순 있겠으나 가정생활에선 생초보에 가까운 나이든 총각일 뿐입니다. 스님 말마따나 훈수 둘 때 수가 더 잘 보이는 건 분명하지만 하수가 고수에게 훈수를 내릴 수는 없듯 비전문가가 전문가에게 훈수를 내릴 수는 없습니다. 사람이 신이 아닌 이상 세상일을 다 꿰고 알 순 없으며 저 마다의 전문 영역에서 최상의 능력을 발휘할 뿐입니다.

허나 사람들은 환상을 갖습니다. 하나를 알면 열을 다 알 것이라는 착각에 빠집니다. 저 역시 예외 아니고. 그런 착각으로부터 '스님은 감히 네 따위가 논할 분이 아니다'라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식의 선언이 나오게 되는 겁니다. 이런 정도면 이미 그 개인에겐 신격화가 진행된 수준입니다. 우상화라는 게 김일성, 김정일만의 얘기가 아니고 사람 사는 곳이면 어디나 존재하는 사람들의 정신활동의 산물입니다.

다른 종교단체들도 마찬가지지만 지도자의 신성 권위가 부여된 곳에서는 조직 내 상호비판이나 자기비판 등의 순기능이 현격하게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모두들 고운 소리 맑은 소리만을 듣기를 원하고 하기를 원하니 쓴 소리는 외부에서 해주지 않으면 자신들의 모습을 돌아볼 길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저는 이쪽 사람들 사람 좋은 거는 인정하는데 사람 좋은 것과 그 사람의 행위를 두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과는 구별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습니다.

‘사람이 착하니까 하는 일도 모두 옳은 것이다’는 명제는 틀렸다는 겁니다. ‘착한 사람은 항상 옳다’는 식의 전제가 들어가면 맹목을 유발합니다. 그게 개인이면 상관없는데 조직인 경우엔 자칫 문제가 크게 야기될 수 있습니다. 지도자의 잘못된 판단을 맹목으로 접수하고서 열과 성을 다해서 헌신하는 일이 자신이나 또는 사회전체구성원에게 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지난 글에서 언급했지만 덩어리를 갖춘 조직엔 반드시 권력을 지향하는 정치모리배가 끼어들게 마련입니다. 요즘 안철수 팬클럽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거 보세요. 정토회 상층에도 정치적인 목적을 지닌 인사들이 충분히 자생하거나 기생할 수도 있다는 겁니다. 법륜 스님의 생각과 판단에 영향을 끼칠 수도 있는 자리에서 말이지요. 누군가 견제하지 않으면 정토회 전체가 야심가들에게 손쉽게 휘둘립니다.

비판이 피곤하긴 해도 비판 없는 맹목보다는 옳은 결과물을 만듭니다. 비판과 견제가 없는 조직과 사회는 죽은 조직이고 죽은 사회입니다. 비판과 견제는 남들 보기에는 지루하고 짜증나 보여도 민주사회의 근간입니다.

물론 제 생각이 전적으로 옳고 이곳이 틀렸다고 단정하는 건 아니지만 지난 글에서는 애써 그런 컨셉을 채택했습니다. 비판적 주장의 전달 외에도 자칫 맹목화 될 수 있는 곳에서 비판기능의 활성화라는 잠재된 목적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쓴 소리의 형식을 그래서 최대한 건방 컨셉으로 잡았습니다. 불필요한 법륜스님의 권위를 없애기 위해 '법륜'이라 칭했고 만인이 좋아하는 겸손의 대명사 '저' 대신 '나'라고 호칭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모쪼록, 제 글을 계기로 정토회의 활동사업과 진로에 대한 내부 토론과 비판이 일상적으로 활성화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습니다. 아무리 종교단체라지만 모두가 ‘예스’라고 외칠 때 ‘노우’라고 외치는 분이 몇 분 정도는 있었으면 합니다. 내부 비판 기능이 상실된 집단의 비민주성은 종국에는 사람과 조직을 해치고 말 거라는 건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이 나라의 지난했던 민주화 오십여 년이 남긴 교훈입니다.

법륜 스님을 존경하는 건 좋지만 ‘오, 법륜느님!’ 하셔서는 곤란합니다. 댓글에서 그런 분위기를 감지한 게 그다지 좋은 느낌으로 와 닿지는 않지만 그래도 고운 분들일 거란 믿음으로 극복합니다.

꼴같잖았을 글에 댓글들 주셨는데 아무런 반응도 없어 김샌 분들도 계셨을 겁니다. 늦었지만 후기로서 답글을 대신합니다. 누가 그랬더군요. 오염보살에게 관심 좀 주라고. 그간 관심들 많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성불하세요’는 싫다시니 오늘은 ‘여러분, 부울~자 되세요~!’라고 인사드리면서 몸도 맘도 더럽게 삐딱해서 구제불능인 오염보살 이만 물러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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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원래 지난 글을 올린 이삼일 뒤 후기 삼아 제 개인 소장글로 써둔 것이었는데 불식간에 맘이 변해서 처음 작성된 글의 내용을 추가로 수정해서 올립니다.



===東山高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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