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기와 채동욱 - 절망의 두 아이콘


이석기와 채동욱, 내 눈엔 이란성 쌍둥이와도 같은 존재들이다. 이석기가 진보의 이성을 말아 먹었다면 채동욱은 진보의 감성을 말아 먹었다. 이 둘로 인해 진보진영은 졸지에 무뇌아 집단으로 매도당해도 할 말 없을 난관에 직면했다. 진보의 좌뇌는 이석기에 의해 진보의 우뇌는 채동욱에 의해 도매금으로 전락하고 만 지금이야말로 가히 진보진영의 총체적 멘붕의 시대라 할 만하다.
 
긴가민가하며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았으나 다시 한 번 ‘사람을 믿는’ 일이 참으로 쉽지 않은 일임을 통감하게 된다. 동화책속에나 있었어야 할 동키호테가 알라딘의 요술램프의 힘으로 현실 세계로 뛰쳐나와 망동을 벌이듯 이석기와 그의 로시난테들로부터 상처받은 진보의 좌뇌가 채 아물기도 전에 채동욱이 진보의 우뇌를 강타하고 있다. 이석기가 사람들을 황당케하더니 채동욱은 사람들을 당황케 한다. ‘사람 사는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은 사람만이 희망이라고들 한다. 그런 그들에게 언제부턴가 사람 사는 세상을 일구는 희망의 아이콘으로 상징되던 채동욱이 어제오늘 졸지에 사람 사는 세상을 송두리째 허무는 절망의 아이콘으로 전락하며 사람들의 가슴을 후벼파고 있다. 사람이 희망이 아니라 사람이 절망이 되었다. 희망세상을 갈구하는 사람들의 가슴속 깊이 트라우마로 남을까봐 걱정이다. 사람을 믿지 못하고 사람에게 절망하는 세상은 너무도 슬프고 우울하기에...그것도 믿었던 사람에게서 비롯된 절망이라면...
 
 
하나를 얻고자 하면 다른 하나를 내어놓아야만 한다. 진실을 얻으려면 사람을 버려야 하고 사람을 얻으려면 진실을 버려야 한다. 내 삶의 경험적 셈법인데 사람과 세상일을 살피는 데는 대체로 틀림이 없더라. 이석기를 나무랄 때 썼던 말 다시 써보면,
 
‘목사도 거짓말 하고 스님도 대통령도 거짓말 한다. 예쁜 여자 선생님도 똥을 누고 혁명가도 사기를 칠 수 있다. 진실에 근접하려면 빨갛든 파랗든 노랗든 색안경은 걷고 보는 게 좋다.’
 

우리네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피해의식이 강해서인지 어떤 형태로든 끼리끼리 뭉치고 편 먹길 좋아하는 듯하다. 무리짓기는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약자들이 자신을 보호하고 자신들보다 더 센 대상에 대항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일 수 있다. 그래서일까, 무슨 모임들과 단체들이 그리도 많은지 한국만큼 온갖 형태의 모임과 단체가 많은 나라도 드물지 싶다. 한국 사회에서의 ‘편 먹기’(무리짓기)는 사람들의 삶 속에 매우 깊이 뿌리내린 주요한 행동양태다. 편 먹기는 이내 편 가르기로 귀결되는데 그 과정에서 내 편은 영원토록 무조건 옳고 네 편은 영원토록 무조건 나쁘다는 대항논리가 생성된다. 그게 진영논리다. 이석기와 그의 로시난테들이 자신들의 뇌를 북쪽의 수령에게 송두리째 갖다 바치고도 당당할 수 있는 것도 그런 우리네 문화에서 기인하지 싶다. 자신이 속한 편에 대한 기대가 있기에 곧 죽어도 호가호위라도 해보고픈 것이다. 

진영의 이해관계가 걸린 문제에선 진실이 음모로, 음모가 진실로 둔갑키도 한다. 진영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왜곡과 날조, 아집과 편견도 마다 않으며 소인배를 영웅으로 미화하거나 대인을 모리배로 몰아서 잡도리치는 일에도 머뭇거림이 없다. 진영논리는 사람들의 주체적 사고나 자발적 의지를 억제함으로써 부화뇌동하는 군중심리나 맹목적 추종에 의해 확대 재생산되곤 한다. 진영논리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제 아무리 의심의 여지가 없는 진실이나 정의라 할지라도 그것이 진영의 이익에 반하는 한 가차없이 내팽개치는 뻔뻔함을 보인다. 진영논리에 사로잡혀 맹목화된 사람들이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게 된다. 진영논리로서 이석기나 채동욱을 우리편으로 한번 등재해 놓으면 그들이 설령 살인 강간을 저질렀대도 그들은 진영논리에 따라 옹호될 터다. 작금의 이석기와 채동욱 사태에서 보여주는 민주당과 진보진영의 갈팡질팡하는 처신이 그렇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아닌 건 아닌 거고 맞는 건 맞는 거다. 민주당과 진보진영이 이석기와 채동욱 사태에서 분명하고 일관되게 공명정대한 태도를 보이지 못하는 건 아쉬운 대목이다. 국민들의 눈높이에서 많이 벗어난 행보다. 그런 애매모호한 갈짓자 행보를 보이노라니 진보진영 전체가 아전인수에만 능한 생떼쟁이로 비칠 수밖에.
 
어제, 종편 TV조선의 속보에서 채동욱 총장의 내연녀로 알려진 임여인의 집에서 가사를 돌본 적이 있었다는 가정부의 충격적인 증언이 폭로되었다. 채 총장이 가정부에게 보냈다고 하는 연하장도 공개되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좌뇌와 우뇌를 손상 없이 잘 간직해온 사람들이라면 이쯤 되면 채 총장에 대한 더 이상의 미련을 유지키가 힘든 게 정상이다. 같은 편이란 진영논리를 배제하면 더 이상 채동욱은 희망의 아이콘이 아닌 절망의 아이콘임을 인지할 수 있다. 십분 양보해서 도저히 진영논리를 포기할 수 없다면 ‘청와대와 국정원의 채동욱 찍어내기도 맞고, 채동욱의 축첩과 혼외자도 맞다’라는 선에서 정리하는 게 옳다. ‘찍어내기’라는 진영의 이익을 위해 ‘채동욱의 축첩’을 마냥 음모와 날조로 호도해서는 곤란하다. 나는 다른 글에서 이석기가 보인 행태에 대해 ‘대국민 사기극’으로 비난했듯 채동욱 역시 이석기 못지않은 ‘대국민 사기극’을 벌이고 있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이쯤 되었는데도 막 나가는 채동욱을 보노라니 무모한 게 아니라면 그가 지나치게 교활해서 진영논리에 함몰된 사람들의 맹목과 군중심리를 교묘하게 악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은 의구심이 든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 든다는 점에선 이석기와 채동욱이 결코 다르지 않다. 이석기를 비난하는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그들의 항변과 저항이 자신을 지키려는 자기보호본능에서 비롯된 몸부림이란 걸 십분 이해하면서도 그 몸부림이 몹시도 기분 나쁜 건 그들이 자신들의 부정을 감추기 위해 ‘국민과 정의’를 방패막이로 내세우는 그 위선이 가증스럽기 때문이다.
 
난 개인적으로 그 누군가들의 ‘가증스런 위선’ 탓에 많이 아파본 경험이 있기에 위선적 인간형들을 마주하게 되면 본능적으로 반발심이 울컥 솟구치는 건지도 모르겠다. 애국심을 배제하고 보면 황우석의 위선이 보였듯이 주체사상을 배제하면 이석기의 위선이 보이고 진영을 배제하면 채동욱의 위선이 보인다.
 
써다보니 이석기를 비난할 때 썼던 글과 대동소이한 어투의 연속이다. 이석기와 이름만 바꿔 놓으면 복사와 붙여놓기만으로 끝내도 좋을 글을 이어가고 있는 것만 같다. 고백컨대, 나 역시 어제까지만 해도 채동욱 총장을 믿고 싶은 진영논리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마지막 남은 일말의 애정으로 채동욱 전 총장에게 권하고 싶다. 자신이 그토록 강력한 버팀목으로 삼고 있는 ‘유전자 검사’는 꼭 하시길 바란다. 그것만이 채 총장이 살 길이란 생각이다. 채 총장을 같은편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생각하듯 ‘지금까지 알려진 모든 게 조선일보와 청와대, 국정원의 채동욱 찍어내기를 위한 모함날조극’이란 걸 까밝혀줄 마지막 신의 한 수로서의 유전자 검사가 아니라, 조선일보가 보도한' 채 총장의 축첩과 혼외자와 관련된 사실적 내용'은 틀림이 없되, 만에 하나 채 총장도 임여인에게 속아서 속으로는 자신의 아들로 여기고 있던 해당 아동이 남의 자식일 가능성은 없겠는지 짚어보란 뜻에서의 유전자 검사다. 임여인의 행실이 어쨌는지 모르지만 고검장 사무실을 박차고 들어선 여인이라면 행실이 참한 요조숙녀는 아녔지 싶다. 채총장마저 속으로는 철썩같이 자신의 아들로 여기던 아이가 남의 씨일 가능성도? 
 
오죽 답답하고 참담했으면 내 입으로 이런 억측까지 다 해 볼까... 채 총장을 비난하면서도 인간적으론 내내 걱정이다.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일로 인해 채 총장 본인은 물론이거니와 그의 아내와 딸의 심경이 어떨지 참으로 안타깝기가 그지없다. 이러다 또 한 번 생사람 잡을까봐도 걱정이고...
 
막장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스토리의 마지막 결말만큼은 자신의 가족과 가정부 및 채 총장을 비롯하여 온 세상을 속여온 임여인이 채총장을 닮은 또 다른 채모씨란 남편과 해당아이와 함께 기자회견을 여는 대반전이라도 일어났으면 좋겠다. 이 모든 불편한 진실이 차라리 꿈이었으면... 비슷한 연배의 딸 둔 아빠의 입장으로 그가 처한 지경을 생각하니 우뇌가 몹시도 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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