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초 가는 길


40여년만의 최고라는 여름 폭염은 
벌초일을 앞둔 내내 마음 한 켠의 큰 짐이었다
조상 살피는 일을 마음 한 켠 '짐'으로 재워두는 게 불경한 줄 알면서도 
 올 여름 더위는 학시리 몸과 맘을 움츠리게 했다

벌초 가는 길,
한번쯤은 기록으로 남겨보고 싶었다
어느 날 갑자기 다리가 후들거려 오르지 못할 수도 있음에...

후손들이 조상을 잘 둔 탓인지 조상들이 후손을 잘 둔 탓인지
다른 집안의 벌초일은 반나절 수고거리일 뿐이더만
우리네 벌초일은 1박2일의 여정이 아니고선
감당키가 녹녹찮은 년중행사다 

벌초일 전날, 각지에서 모여든 일곱 여덟 남짓 일가 형제들은
벌초를 빙자하여 간만의 회포를 푸는 판을 벌인다
무려 13기에 이르는 산소 벌초는
담날 새벽부터 한 나절, 때론 한 나절 반 이상의 공을 들여야만 하기에 
그런 성전(?)에 나서기 전의 사전 몸풀기인 셈이다

앞산팀, 옆산팀, 뒷산팀
난 작년과 재작년에 이어 올해도 앞산팀을 자원했다
특전사 출신의 조카가 작년 모처럼 조상 학습(?) 삼아
앞산팀에 붙었다가 불어난 뱃살을 감당치 못하고
앞산 절반도 오르지 못하고 중도 하산 했을 만큼
앞산팀은 우리네 벌초팀의
최정예 부대다

모르는 혹자들이야 사서 하는 고생으로 뵐 테지만 
집집마다 사연이 있고
조상님들의 뜻을 거스르면서까지 
후손들의 편의를 위해 약삭빠른 이장을 도모하는 것도 
그리 간단치가 않다.

산소마다 변변한 비석 하나 제대로 놓아드리지 못하는 연유도
조상들이 누운 지세가 호랑이의 꼬리 자락이라
호랑이 꼬리 위에 돌을 놓아서는 안된다는
집안 조상들의 명령 때문이란다 ㅎ~

앞산 4기 옆산 2기 뒷산 7기
내 기준으로 앞산 4기는 증조할아버지, 증조할머니, 할아버지, 5촌 당숙 어른,
옆산 2기는 사촌 형님, 복잡한 사연의 산소1기
뒷산 7기는 할머니, 첫째 큰아버지, 큰어머니, 둘째 큰아버지, 큰어머니, 5촌 당숙,
그리고 아부지의 산소다

동 트기 전 뒷산 7기 중 4기는 이미 초벌을 했고
아침 식사 후 앞산과 옆산 그리고 뒷산으로 3팀을 꾸렸다
새벽부터 뒷산 벌초에서도 나섰던 난 
이번 벌초에서 앞산 뒷산 방방 뛰노라면 올 한해 조상님들께서 많이
예뻐해주시라는(^^) 은근하고도 굳센 믿음과 
고난의 행군을 무탈하게 끝낼 결기를 다잡으며 
이승과 저승으로 가르는 저승문(ㅋ 오죽했으면)으로 들어섰다 



2.8미터 높이의 저승으로 가는 문이다



오름길은 오른쪽길
내림길은 왼쪽이다



저승문에서 100미터 남짓
딱 여기까지만 이승의 여운이 남았다



앞산의 기슭 경계하는 풀밭을 지나고



수확 후의 자두 과수원을 지나서



길 없는 길 저승길의 시작이다



제1과제, 5촌 당숙 어른의 산소.
직계 후손들도 있건만 가는 길 어귀여서
그냥 지나치지는 못한다



사촌 막내 동생의 익숙한 손놀림이 가히 농군의 솜씨다
도회지로 나간 형들 대신 마을을 지키느라
몸고생 맘고생도 많을 텐데도
시골에서 함께 하는 사촌 큰형님의 잔소리를
무던하게 받아내는 모습이 대견함을 넘어 경외스럽기까지 하다



혹자들 보기엔 어떨진 몰라도
처삼촌 벌초하듯 하지 않으려 나름 애도 썼건만
갈 길이 구만리라 이리 사진으로 보니 서둔 티가 역력하다



지금부터의 가시밭길은
특전사도 포기한 고난의 행군길



애초에 길은 없었다
작년처럼 길잃고 헤매지나 않았으면...



작년 우중 벌초 때보단 
그나마 덜 미끄러워 다행이다 



등짝엔 제수 한 배낭 왼 손에는 낫을
오른손엔 갈퀴
길 없는 산비탈 
종군 사진기자 놀이를 보태기가 무척이나 버겁다



누군가는 신발장에 1억4천 거금을 꼬불쳐 두었다는데
여차하면 구를 듯
비탈에 발목이 휘청일 때마다  
아끼느라 신발장에 꼬불쳐 둔
질 좋은 내 등산화가 억만금보다 더 사무치더라



거의 80도를 넘어



직벽에 가까운 경사면을 다시금 보노라니
지난해 뱃살 무거워 중도 하산했던
특전사 출신 조카의 맘도 이해간다
오죽했음 올해는 따라나서지도 않았을까
장가도 안 간 조카녀석, 
불혹과 지천명을 넘고 낼 모래 환갑을 앞둔
삼촌, 오촌 아재비들의 날렵한 몸놀림 앞에선
특전사 무용담일랑 다시는 못 꺼낼 성싶다
대한민국 특전사도 능가하는 벌초특공대!



높은 산 깊은 골 적막한 산하~
가시덤불 헤치고~~
우리는 간다



차라리 소수 정예가 낫더라
대여섯 정도 무리지었던 작년에 비해
소수 정예 3인이 움직이는 이동 속도는 한결 빨랐다
헥헥거리며 뒤쳐지던 특전사 챙길 일도 없으니 ㅋ~
특전사 출신 조카에겐 두고두고 치욕(?)으로 남을 듯 ㅎ~



다리에 쥐가 내릴 즈음 



해발 200여미터 높이의 산중턱



이윽고 할아버지의 산소에 도착



해마다 멧돼지 파헤친 흔적에
맘이 짠해도 어쩌지도 못한다
종손인 사촌 큰형님의 벌초 후 제가 이어지고



다시 비탈진 산길을 횡단하여
몇 구비 골을 지난 뒤



증조 할머니를 뵌다
작년 봉분에 그늘 드리우던 주변의 솔가지를 
쳐낸 탓에 햇살이 밝다



내 몫은 낫과 갈퀴였기에
벌초중인 형제들을
짬짬이 사진에 담을 여유가 가능했다



산중 깊은 곳이라 자주 돌볼 수 없음에 
세월의 흔적 만큼 봉분은 일그러졌어도
연중 한 번 작은 정성이라도 들이니 한결 낫다



다시 산비탈을 비스듬히 따라 올라



사촌 형님의 발끝 감을 따라 걷는다
작년에 참 많이도 헤맸었다



올해는 사촌 형님의 촉이 살아 있나 보다



발목을 휘감는 칡넝쿨과 가시덤불을
헤치며 나아가니



오늘의 마지막 정성을 들일 
증조할아버지의 묘소에 이른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내겐 사촌형님이 한마디 하신다
아직 한창인데 이거 갖고 헥헥거리나!
겸연쩍은 웃음 머금고 속으로 나직히
행님, 한창 아임니더. 저도 물 만큼 뭇심니더^^
라고 읊조려 보는데 이그 못낫다 싶다



사촌 동생과



사촌 형님의 익숙한 마지막 손놀림이 끝나고



깊은 산중 봉분 위로 뻥 뚫린 하늘에
뭉게구름이 비죽이 지나간다. 
등짝은 땀으로 범벅인데 마지막 벌초를 끝낸 맘은
뻥뚫린 하늘 구멍만큼이나 시원하다



내려가는 길



가시덤불 우거진
내려가는 길은 더욱 난관이다



오를 때는 횡단도 있었지만  
하향 직진으로 뚫고 내려가는 길은 더욱 가파르다
신발장에 꼬불쳐둔 등산화여!
낚시용 경등산화를 신고 나섰던 걸
두고두고 후회케 만드는 내림길이었다



산도 말이 없고 앞서가는 동생도 형님도
말이 없다



산기슭을 벗어날 즈음



환한 이승의 세상이 멀찌감치 보인다
시원하다 바람없어도
눈이 다 시원하다



밭둑을 따라




밭고랑이 반갑다 
오전 내내 첨 밟아보는 길 아닌 길이다



우측길로 올랐다가 산을 한 바퀴 휘감아
좌측으로 내려오게 된다 



이윽고 도착한 이승과 저승의 경계
2.8미터 이승으로 가는 문! 



이쪽에서 보면 저기가 앞산
저기서 보면 여기가 앞산



뒷산을 맡았던
 다른 형제들의 매끈한 솜씨에서
앞산 특공대에 비하면
한결 여유가 느껴진다



저곳이 앞산
오전 내내 헤매고 다녔던
조상들의 얼이 숨쉬는
마치 저승과도 같았던...

그렇듯 해마다 녹록치 않은 벌초가
돌아서면 기쁨인 것은



아부지 잘 계신 걸
볼 수 있기 때문이리라. 아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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