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가 빗자루로 학생 머리 때려 5바늘 꿰매


‘정직한 사람들만이 사는 정직한 사회’는 유토피아입니다. 예수나 부처, 공자, 맑스나 체게바라, 그리고 너와 나 우리 모두가 꿈꿔왔던 세상이지만 그렇게 온전히 정직한 세상은 ‘불완전한 인간’들로서는 꿈속에서나 만날 법한 유토피아란 걸 인정해야만 합니다. 유토피아를 향한 꿈조차 꾸지 말자는 게 아니라 피안의 세상을 과도하게 의식하여 무리를 하거나 목숨을 걸지 말자는 겁니다.

한 집 건너 가훈이 정직이고 한 학교 건너 교훈이 정직입니다. 관공서의 액자에도 교도소의 현판에도 아로새겨진 정직은 틀어진 세상을 바로잡는 만병통치의 표상처럼 여겨집니다. 확실히 정직은, 말귀를 알아듣는 유아 때부터 죽는 순간까지 일생을 통해 우리가 반드시 지키고 행해야 할 소중한 가치들 중의 하나라는 건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끝없이 정직과 거짓의 경계에서 줄타기를 하면서 살아갑니다. 제아무리 이성적 인간이라 할지라도 때론 동물적 본능에 좌지우지되는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그렇습니다.

인간의 본능과 교육(이성)은 언제나 상충하고 있습니다. 자기보호 본능, 성적 본능, 식욕 본능 등은 시도 때도 없이 사회적 교육에 의해 단련된 이성을 마비시키곤 합니다. 충동적 본능이 이성을 압도함으로써 ‘사고’를 치는 일에는 아이, 어른이 따로 없습니다. 나이나 교육의 기간이나 질이 무색할 정도로 어이없는 사고를 목도할 때도 많습니다. 대학총장이나 고위 관료 때론 명망 있는 성직자나 일국의 대통령까지도 본능적 충동에 따른 사고를 저지르기도 합니다.

어떤 위기가 닥쳤을 때 그 누구에게도 예외 없이 발현되는 본능이 한 가지 있습니다. ‘자기보호 본능’이 그것입니다. 세상의 존경을 받아온 명망 있는 사회지도층 인사들조차 위기에 처하여선 자기보호 본능에 따라 유치하고 뻔뻔하기 이를 데 없는 모르쇠(거짓말)로 일관하는 모습을 우린 익히 보았습니다. 사람들이 어떤 위기의 순간에서 자기보호 본능에 따라 거짓을 고하는 건 말 그대로 본능입니다.

눈을 부라리는 선생님 앞에서 거짓말로 위기를 모면해보려는 생각을 갖지 않을 정직한 아이가 과연 얼마나 될까요. 그토록 비난을 받으면서도 아직도 몽둥이를 통제와 훈육의 효율적 수단으로 삼고 계신 선생님들이 교단에 여전하군요. 소신인지 고집인지 거 참.

http://kr.news.yahoo.com/service/news/shellview.htm?linkid=33&fid=547&articleid=2011070810551697880

정직과 거짓의 경계에서 줄타기를 하면서 아이 머리를 빵꾸낼 만큼 거짓말 척결에 목숨을 거신 선생님, 선생님께서는 얼마나 정직하신가요? 정직한 사회의 선량으로 키울 의지가 너무도 굳세었던 탓일까요, 아니면 ‘감히 날 속여’라는 자격지심에서 아이들을 분노의 제물로 휘둘러 보고 싶으셨던 걸까요. 오장풍 교사는 적어도 후자였던 것 같습니다.

매질이 만사형통일 것 같겠지만 매질은 근본적인 훈육의 수단이 될 수 없다는 걸 인정하시고 대안을 찾으셔야만 할 겁니다. 패지 말라는데 극구 패겠다는 선생님들, 제발 스스로를 먼저 돌아보세요. 매에는 장사가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시는 만큼만 본능적 충동에도 장사가 없다는 걸 헤아리고 역지사지의 입장에서 아이들의 마음을 이해해보는 건 어떨까요. 위기 앞에서 행하는 거짓말은 자신을 지키려는 자기보호본능입니다. 어느 정도는 이해해줘야지 않겠어요. 정직과 거짓에 목숨 거는 충심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닌데 왜 하필 몽둥이냐고요. 후진국과 미개인의 산물인 몽둥이가 질리지도 않습니까. 나도 각종의 위기에 처했을 땐 숱한 거짓말로 위기를 모면하면서 살아 왔습니다. 제발 아이들 앞에서 우리 조금만 더 솔직해집시다. 너도 나도 선생님도 대통령까지도 말입니다. 아이들 보기가 차마 부끄럽습니다.

부모의 자격이든 선생의 자격이든 훈육하는 자의 자격으로 아이들을 가르칠 때 이상하게도 너나없이 가장 흥분하는 문제가 ‘정직과 거짓’의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이상하리만치 거짓말하는 대상을 혹독하게 증오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이러닉한 건 그런 자신들 역시 누군가에게 끝없이 거짓말을 하면서 살아간다는 겁니다. 저 링크 뉴스에 달린 댓글들을 보니 사람들의 이중성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몽둥이보다 거짓말을 더 문제 삼는 분들이 적질 않더군요. 딱 한 달만 이랬으면 좋겠습니다. 사람들이 거짓말 한 번 할 때마다 하느님이 몽둥이로 대가리를 빵꾸 내는 겁니다. 그러노라면 대한민국에 빵꾸 안 날 대가리가 과연 몇이나 남겠습니까. 대통령 머리는 멀쩡할까요. 엄마 아빠 머리는? 선생님 머리는?

자신의 거짓말에는 관대하면서도 타인의 거짓말만큼은 혹독하게 단죄하려는 심리는 다분히 이율배반적이고 이기적입니다. 사람들의 그런 심리는 대체로 위계질서와 존재에 대한 위기의식에서 출발하는 것 같습니다. ‘감히 네가 날 속여. 선생을 무시하는 거야’, ‘감히 사장한테 거짓 보고를 하다니, 자넨 당장 해고야’, ‘어떻게 나한테 거짓말을 할 수가 있어. 난 네게 무슨 존재야?’,.......

교사와 학생의 관계든 연인이나 부부의 관계든 직장 상하의 관계이든 친구 관계이든 정직과 거짓이 문제가 되었을 때 속은 대상들에게서 보이는 공통적인 모습은 ‘무시당한 것에 대한 분노’입니다. 거짓말을 ‘자신의 존재를 무시하는 폭거’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역지사지의 입장에서 상대방의 자기보호 본능에 대한 이해는 전혀 상관치 않습니다.

학시리 ‘속는다는 건’ 참 기분 나쁜 일임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속이려는 대상에게 불같이 화가 뻗칠 때 딱 3초만 여유를 갖고 호흡을 가다듬고 생각해봅시다. 매질을 하기 전에, 해고명령을 내리기 전에, 절교나 이혼을 선언하기 전에, 자기 자신은 그 누군가에게 한번쯤은 거짓말쟁이가 아녔는지 말입니다.

정직한 사회를 꿈꾸며, 자라는 학생들에게 거짓을 교정하고 정직을 가르치고자 하는 의욕은 훌륭합니다만 아이 머리를 빵구낼 정도의 매질로 거짓을 교정하려는 자신의 감정은 과연 정직한 것인지 자문해 봅시다. 혹여라도 자격지심에 스스로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자신의 감정을 아이에게 쏟아 부은 건 아닌지 말입니다. 교육청에서 진상조사를 할 때 선생님은 조사관 앞에서 절대로 거짓말을 하시진 않을 거라 믿습니다만. 꿈속에서는.

정직을 가르치긴 쉬워도 스스로 정직하기란 어렵다


===東山高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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