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방일기>...스님, 어디로 가시렵니까?

권노현이 도덕적인가? 박원순은?

좌파 진영의 사람들이 항상 도덕적일 거라고 생각지는 말라.
도덕적으로 살고 싶은 사람들의 착각이다.

좌파 진영의 리더들은 더욱 도덕적일 거라고 생각지도 말라.
보수 진영의 리더들에 비해 덜 타락되었을 뿐이다.

그 판에서 명성을 유지하는 것만으로 그들은 이미 명욕에 사로잡힌 사람들이다.
명욕에 사로잡혀 있는 한 그들의 입에서 진실을 기대하지 말라.
거기는 가슴이 뜨거운 사람은 뒤섞일 수 있어도
가슴이 맑은 사람이 뒤섞이기엔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곳이다.

노무현이 후배들에게 정치하지 말라고 한 연유이지 싶다.

문득 이부영이 떠오른다.
뒤돌아보지 않으니 떠난 자리가 말끔하다.
명욕을 초월한 사람은 자신을 극구 드러내려하지 않는 법이다.

살면서 가슴이 맑은 사람과 가슴이 뜨거운 사람들을 겪었다.
돌아보면, 역시 후자보다는 전자의 삶이 아름답더라.

가끔은 정체모를 어떤 삶에 대한 그리움이 있었다.
그게 무엇인지 몰라 속상해서 분한 마음을
세상을 향한 시비와 조롱으로 채울 때가 많았다.

참 반듯하고 가슴 맑은 지인 한 분께서 책 한 권 소개하셨다.

<선방일기>


지객 스님이 물어왔다.

“스님 어디로 가시렵니까?”

“설악산으로 가렵니다. 그리고 토굴 생활을 하렵니다.
권태와 나태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입니다.
나태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나태의 온상 같은 토굴로 들어가서,
권태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권태의 표본 같은 기계적인 생활을 하렵니다.
견성(見性)은 대중 처소에서보다 토굴 쪽에서 가능하다는 것을
저는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도 지객 스님에게 물었다.

“스님은 어디로 가시렵니까?”

“저는 남방으로 가렵니다. 그리고 선방으로 가렵니다.
내가 나태해질 때마다 탁마가 필요했고 권태로울 때는 뒷방이 필요했습니다.
뒷방을 들여다 볼 때마다 공부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으니까요.”

우리는 월정사 층층계 밑에서 헤어졌다.

“성불하십시오.”

“성불하십시오.”

남방행인 그 스님은 월정사로 들어갔고
나는 월정사를 뒤로 한 채 강릉을 향해 계속 나아갔다.



윗글의 화자는 <선방일기>의 저자이신 지허 스님이다.

오늘 이 글의 기준으로 보면
지허 스님은 가슴이 맑은 사람으로 와 닿고
지객 스님은 가슴이 뜨거운 사람으로 와 닿는다.

‘뒷방’은 <선방일기> 속에 잘 소개되어 있다.
오늘 글에 빗대어 비유하면 뒷방은 곧
명욕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아우성치는 세상이다.

알면 기대도 덜 하고 실망도 덜 하는데
내가 나를 모르는데 남을 어찌 알까.
다만 알 수 있는 건 우리 모두는 명욕의 유혹에 노출된 사람이라는 거다.
부처도 한때 뒷방에서 명욕을 고민했었고
뒷방을 떠나 보리수 아래서 도가 텄을 때 그때서야 비로소
명욕을 멈추진 않았을까.

밑천 한 푼 없이 배짱만으로 안철수를 돌려세운 박원순의 패기도 우숩고
‘야훼여, 나를 고발하는 자들을 고발하시고 나를 치는 자들을 쳐주소서‘라며
야훼에게 간절한 구원을 청하는 곽노현의 기도도 우숩다.

참된 삶이란
이타를 위해 이기를 추구하는 삶이 아니라
이기를 위해 이타를 추구하는 삶은 아닐까.

널 사랑하기에 떠나는 게 아니라
날 사랑하기에 떠나는 거라고 말하면 안될까.

곧 죽어도 꽥하는 게 싫어 바위가 된 사람이 있었다.
적어도 내 눈엔 참된 사람이었다.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아미타불!


===東山高臥===

0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