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신당은 깃발을 내릴 때가 되었다



6.2지자체 선거가 막을 내린 지금에도 선거 유세장 못잖은 열기가 넘쳐나는 곳이 있다. 외부의 비난과 더불어 내부 분란으로 존망의 귀로에 선 진보신당이 그곳이다. 6.2지자체 선거에서 반MB 범야 연대를 거부하고 외골수 독자 노선을 고집함으로써 서울시장 선거 패배에 빌미를 제공한 신당의 행보는 분명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반MB 범야권 후보 유시민을 지지하며 진보신당 경기도지사 후보직에서 사퇴했던 심상정이 엊그제 프레시안과 가진 인터뷰에서 당의 진로와 관련하여 ‘진보대연합’을 제기하였다. 대중정당의 기치를 내걸고 명멸을 거듭했던 한국의 진보정당사를 돌아보면 딱히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해묵은 주제이건만 민노당으로부터 분화하여 창당 2년을 맞은 진보신당 역시 이 해묵은 의제를 피해가지 못하고 당내 노선투쟁이 한창이다. 심상정의 독단적인 경기도지사 후보직 사퇴에 대한 징계 문제와 결부되어 그녀가 제기한 진보대연합을 둘러싼 신당 내부 논쟁은 그 결과에 따라 신당의 존망이 결정될 전망이다.

1. 실험은 충분했다. 진보신당은 깃발을 내려라

진보대연합은 진보신당의 노선과 정책이 대중들로부터 외면당하는 현실적 위기감에서 진보 신당의 한계를 타개하는 대안으로 제기되었으나 신당의 주류는 당이 처한 위기의 원인을 당 내부가 아닌 외부 탓으로 규정하며 진보대연합 주장에 대한 반발로서 당의 정체성을 더욱 공고히 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당의 정체성을 포기하는 진보대연합은 우경화이자 신자유주의자들에 대한 백기투항이며 사적 이익을 도모하는 출세주의자의 잔꾀일 뿐이라는 것이다.

진보대연합이 단순히 진보적인 세력들 간의 합종연횡을 전제한 소규모 정계 개편에 국한된 것이 아닌 ‘정체성’의 문제라는 신당 주류의 인식은 옳다. 하여, 진보대연합은 신당의 정체성을 포기하는 것이라는 그들의 강도 높은 비판은 대중들로부터의 괴리라는 당의 현상적 위기감과 더불어 동전의 양면처럼 존재하는 내면의 위기감이 반영된 것으로 그들로서는 너무도 당연한 반응이다. 선명성을 표방하며 민노당으로부터 탈당한 지가 엊그제적 일이기에 더욱 그렇다.

그런데, 정체성을 강조하는 이 ‘너무도 당연한 반발’은 작금의 진보신당이 처한 순환 모순의 매개로 작용한다. 진보에 대한 순혈주의적 차별화와 경직된 원칙의 강조는 대중들로부터의 괴리라는 필연적 결과를 야기하고 이에 대한 반발로서 대중노선의 모색은 정체성의 문제로 재 노정되고 그 반발로서 정체성 강화는 또 다시 대중과 괴리되게 한다. 정체성과 대중성의 순환모순, 이것이 곧 한국 진보정당의 역사이고 모든 진보논쟁의 알파이자 오메가였다. 이 해묵은 논쟁은 진보정당이 존재하는 한 끊임없이 야기될 것이다.

이에 나는 감히 진보신당을 향하여 “실험은 충분했다. 진보신당의 깃발을 내리라”고 권하고 싶다. 사회주의자로서의 정체성에 채워놓은 곳비를 풀라는 거다. 꿈과 이상을 놓으라는 게 아니고 꿈과 이상에 현실성을 부여하라는 소리다. 사회주의의 실험은 끝났고 평가는 부정적이다. 사회주의의 실현을 전제한 진보신당의 깃발을 이제 그만 내리자는 거다. 유럽식 사민주의와 복지국가의 실현이 꿈과 이상이라면 그것은 혁명적 좌파가 아닌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에 의해서도 단계적으로 실현 가능한 지향점이다.

심상정이 제안한 진보대연합에서 진보의 범주는 신당의 주류가 우려하듯 진보신당이 내건 진보와는 차별화되는 보다 포괄적 범주의 의미를 지녔을 것이다. 진보의 가치란 절대적이지 않고 나라마다 시대마다 다르게 통용되는 상대적 가치다. 그러기에 절대 가치로서의 유일 진보나 참진보란 형용은 모순이며 ‘유일’과 ‘참’을 자처하는 건 오만이다.

사람은 누구나 기준에 따라 보수와 진보의 양면성을 동시에 갖는 존재다. 진보나 보수의 상대성을 설명할 때 흔히들 사용하는, ‘내 왼쪽의 오른쪽인 나는 상대적으로 보수이지만 동시에 내 오른쪽의 왼쪽인 나는 상대적으로 진보다‘는 궤변(?)에 대해 포용력 있는 이해를 가질 수만 있다면 더 이상 참진보나 유일 진보라는 언어적 가치에 매몰되는 오류를 범하게 되진 않을 것이다. 북한에선 자유주의자가 혁명적 진보일 수 있고 공산주의자는 부패한 보수 세력으로 낙인 될 수 있는 것처럼. 다만, 가치의 문제가 아닌 정책과 노선의 문제라면 앞서도 말했듯 이미 실험은 끝났고 평가는 부정적인 사회주의자로서의 길은 현 세기에선 결코 현실적 대안일 수 없노라고 충고하겠고 실현 가능한 꿈과 이상을 지닌 개혁적(진보적) 자유주의자의 길을 권하고 싶다. 노동자가 반드시 사회주의자여야 하는가.

진보를 상대적 가치 체계로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사회주의자만이 진보인 것도 아니고 자유주의자라고 모두가 보수인 것도 아니다. 진보를 정의할 때 이 정도의 유연성만 갖춘다면 심상정이 제기한 진보 대연합을 용인 못할 바 없고 그것이 정체성을 상실한 배반이거나 변절이 되는 건 더욱 아니다. 내 눈에 심상정의 선택은 굳어 있는 정체성에 다만 온기를 더했을 뿐이다. 진보신당의 6.2지자체 선거에서 보여준 전략 전술적 실패는 바로 진보에 대한 이해의 경직성에 기인했던 필연적 결과라고 봐야할 것이다.

진보는 이상이 아니고 현실이어야 한다. 국가보안법을 송두리째 없앨 수 없다면 실현 가능한 독소 조항부터 폐기토록 하는 것도 진보의 한 내용이다. 그 부족함을 개량이라 비난하고 부정하기 보다는 더 큰 진보로 나아가기 위한 작은 진보의 실천쯤으로 긍정하자. 진보는 부단히 변화하고 성장하는 역동적인 가치여야 한다. 한 폭의 정물화처럼 액자 속에 갇혀 꿈속에서나 만나는 ‘정형화되고 절대화된 가치’가 아니어야 한다는 것이다. (계속)

오늘 이 글의 주제와 지극히 잘 부합하기에 신당 자게에서 본 글 한 편 링크로서 소개한다.
(http://www.newjinbo.org/xe/?mid=bd_jinbo_freeboard&page=3&document_srl=717294)


===東山高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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