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하의 ‘죶 같아서’란 표현에 반대한다

난 기본적으로 '죶'이란 단어를 좋게 바라보고 그 의미 또한 좋은 방향에서 사용되었으면 하는 입장이다.
기존의 관성 탓에 쉽진 않겠지만 ‘죶 같은’이란 표현보다는 ‘죶 같지도 않은’ 이란 표현의 사용을 권장하고 싶다.

배설이라는 생리적 기능에 더해 인류의 존속에 기여하는 그 숭고한 기능까지 나아갈 것도 없다.
난, ‘체’ 떠는 세상에서 죶 만큼 진실한 걸 못 봤다.
다룬 만큼 즐거움을 주는 정직한 놈이다.
그 즐거움 앞에선 남녀노소, 동서양이 따로 없고 고금이 따로 없다.
때에 따라 요놈을 잘못 놀려 인생을 잡치거나 ‘죶 같지도 않은’ 난망한 상황이 벌어지는 부작용만 조심하면 말이다.
하긴 머 이 부작용조차 점차 일상화되고 보편화되어가는 세상이니 부작용을 부작용이라 하기도 멋쩍은 세상이 곧 올런지도 모를 일이다.

‘죶’을 유독 싫어하는 사람도 많은데 ‘죶’을 자주 들먹거려서 미안하다.
아침에 아고라의 일기들을 보다가 ‘해피니스’라는 분이 인용한 김지하의 글을 보고서 삘 받아서 예정도 없이 쓰는 글이다.
이 분의 글에선 정작 ‘죶’이란 단어를 공개게시판에 쓰기가 쑥쓰러우셨던지 배꼽기호로 표현하셨다.(아니면 조선일보에 기고된 시론의 원문을 그대로 옮겼을 수도 있다)

소개된 내용은 조선일보 시론에서 김지하의 이런 언급이 있었다 한다.

“죶 같아서 얼굴 돌린 것뿐이지!"

그리고 그 글 바로 아래선,

“이 '죶'이란 말 꼭 지우지 말기 바란다.”라는 당부까지 했다.

나아가 김지하는

“조선일보가 물론 '막말 코리아'란 특집까지 내면서 쌍소리 천국에 개탄을 거듭하는 줄은 잘 안다. 그러나 15세기 피렌체와 베네치아는 막말 천지였다. 르네상스의 도화선이었다. 지금 이 나라에 네오 르네상스가 오고 있다는 증거다. 르네상스 없었으면 오늘까지 세계를 잡아 흔든 유럽 권력과 서구문명은 없다. 그런데 그 네오 르네상스가 다가오는 발자국이 곧 막말이니 지우지 말기 바란다는 말이다.“라며 친절하게도 부연까지 달았다.

과연 욕질의 해학에 달통한 사람이다.
‘죶 같아서’를 ‘죶 같지도 않아서’라고 사용했음 더 좋았을 껄 하는 개인적 아쉬움은 남지만 글 내용을 떠나 내숭 없는 저 글빨 하나는 맘에 든다.

7,80년대 드라마에서 가장 흔했던 고전적 주제가 개천에서 용 나는 이야기다.
그럴듯하게 표현하면 ‘사랑과 야망’ 정도 되겠다.
흔하다는 건 공감을 얻기가 쉽다는 거고 그만큼 우리 주변에서 흔히 일어나는 이야기란 것이다.

근데 세월을 한참이나 건너뛴 21세기 개명천지의 대한민국에서는 여적지 그런 일들이 드라마처럼 일어나기도 한가 보다. 지인에게 전해들은 얘기다.

개천에 한 남자가 있었다. 그를 사랑하는 한 여자도 있었다.
개천 출신의 남자는 고시에 매달렸고 여자는 자신의 온 몸을 바쳐 희생했다.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투자는 로또 복권 당첨되기를 바라는 그런 투기가 아니라 그 자체로 지순한 사랑이었다.
책값도 주었고 배때지에 기름도 제때제때 칠해주었다.
고시공부에 매달린 그의 스트레스가 쌓일 때면 기꺼이 하꼬방의 침대가 되기도 했었고 그야말로 ‘온 몸을 다한 기약없는 희생’을 다한 지 어언 몇 년, 남자는 해냈다.
그리고...........................................................................................
가란다. 사랑이 아니었단다. 자신은 여자를 처음부터 사랑한 것은 아니었단다...............


아뿔싸, 이걸 어째.
이런 상황이 드라마속에서 벌어졌대도 애꿎은 TV가 20층 난간 밖으로 날아갈 상황 아닌가.
이 일을 당신 딸이 겪었다면?
이런 일을 당신 여동생이 겪었다면?
아니 딸이나 여동생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겪었다면?

“엉엉엉, 제게 왜 이러세요. 전 당신을 사랑했어요. 다시 한 번 생각해 주세요. 이럴 수는 없자나요..엉엉...엉엉엉...흑흑...매달리고 매달리고....또 매달리고..우리 사랑했자나요..흑흑흑~~~~~~~~”

이러면서 바지가래이 부여잡고 매달리실래요? 아니면

“야 이런 개씨바르 개죠까치도 않은 새퀴야. 이 개호르 샹녀르느무씨바르 새퀴야. 니가 사람 닮은 짐승 새퀴야 짐승 닮은 사람 새퀴야. 검, 판사 뺏지 다는 날 술 쳐먹고 길가다가 동네 개색퀴랑 흘레붙어 먹다가 죶이 낑겨서 고대로 동물병원에 실려 가서 개망신이나 당하거라. 이 호랑말코개쌥숑가리샹녀르느므개씨바르새퀴야! 으휴 재섭서!”

이러면서 샤대기를 후려치고 죶몽딩이를 부러뜨려버리실래요?

전 제 딸에게 좀 더 크면 때와 장소와 상황에 따라 욕질하는 법도 갈차줄 생각입니다.
똘똘하게 크다보면 제 알아서 배우기도 하겠지만.

이야기 속 개천 출신의 남자는 이미 인간되기 글러먹은 개새퀴입니다.
울며불며 매달리거나 설득할 대상이 아니란 거죠.
그런 늠들을 상대하면서 욕 말고 고상하고 우아한 ‘인격의 나눔’을 가져보시겠다구요?
빛 좋은 개살구죠.
쉰 국에 따끈한 밥 말아봤자 개밥거리도 못됩니다.

후~, 그래도 근자에 ‘죶’ 관련해서 저를 포함 어중이떠중이들 간에 대화가 잦다보니 경방에서 ‘죶’이란 단어가 자연스럽고 우아하게 떠다니는 일이 잦아졌군요.
김지하의 권위까지 빌었으니 앞으론 더욱 탄력을 받겠군요.
이 모두 죶밥님의 눈에 뵈지 않는 공로입니다.
죶을 아이디로 걸치는 그 깊은 해학에서 각설이를 봅니다.
밍크를 걸친 사모님의 눈은 막걸리보다 탁해 보이는데 누더기를 걸친 각설이의 그 눈은 수정처럼 맑아 보입니다.

주말 아침, 살다보면 참 씨잘데기 많을 '죶’에 대한 단상이었습니다.

===東山高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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