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 이야기 8

군대 이야기 8
글쓴이:허허




'85년 12월 31일,
인천 부평동에 소재했던 우리 부대는 국방부차원의 결정으로 민간에게 아파트 부지로 매각되었고, 부대는 사령부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외곽에서 사령부로 들어가는 상황에 대해서 대체로 좋아하는 분위기였으나 대대장과 나만 똥색이 되었었다.
독립부대에서 제왕적 권한을 행사하던 부대장은 사령부로 들어감과 동시에 일개 중령으로서 그 위상이 형편없이 추락하였고, 나는 그야말로 좇됐단 소리 밖에 안 나왔다.
사령부에는 간부 이발소가 이미 있었다.
장성과 영관을 위한 전용 이발소뿐만 아니라 위관 전용 이발소와 하사관 전용 이발소까지 있었으니 당시 내 심정은 패닉상태였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했던가.
외야부대에서는 난방시설이 3구 3탄짜리 연탄 난로였으나 사령부에 있는 막사는 빼치카 난방이었는데, 빼치카 당번병을 맡으라고 했다.
빼치카는 3입방미터 크기의 숯가마처럼 생긴 화로다.
발열판은 내무반 안에 있으나 불을 때는 화구는 실외에 있다.
밖에서 불을 때는 역할이었다.
연료는 석탄 가루와 황토를 섞어서 반죽하여 사용했다.
상식적으로 죽처럼 반죽한 젖은 석탄이 탈 수 있을까 싶지만 밑불의 화력에 의해서 마르면서 불덩이가 되는 시스템이었다.
하지만 이 일은 경험에서 바탕한 노하우를 필요로 하다 보니 전담요원을 필요로 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던 나로서는 최선을 다해서 빼치카를 사랑했다.
진심은 어디서든 통하는 법, 얼마 지나지 않아 빼치카가 나에게 화답을 했다.
뿐만 아니다 자신의 온갖 성감대를 다 알려줬다.
빨리 달아오르게 하는 법도 익혔고 은근히 지속시키는 법도 알게 되었다.
빼치카엔 모두가 초보이다 보니 다른 내무반에서는 불을 꺼는 일이 잦았으나 내 빼치카는 항시 흥분 만땅으로 벌겋게 타오르고 있었다.
다른 내무반에서 당번병이 내게 연애 비법을 전수 받으러 올 정도였다.
빼치카 당번병은 그 업무의 특성상 모든 집합과 근무에서 열외였다.
심지어는 삼시 세 끼 밥조차 타주는 경우가 허다했다.
4~50분 간격으로 연료를 교체해야 하는데, 10분 정도 소요되며 탄재를 뒤집어 써야하다 보니 늘 숯검둥이었다.
내무반에는 항시 당번병이 누울 자리는 깔려있지만 한꺼번에 40분 이상은 잘 수가 없었다.
그런 이유로 다른 사람의 눈엔 빼치카 당번병은 항시 비몽사몽의 상태로 보였다.

그 시기에 육군에선 "예방헌병제도"가 시범적으로 운영되었다.
구타를 근절할 목적으로 1개 대대당 군경력 20개월 이내의 사병을 열 명씩 선발하여 소정의 교육을 시킨 후 다른 부대로 파견을 보내어서 구타행위를 감시하여 그 결과를 소속 부대장을 거치지 않고 헌병대장에게 바로 보고하는 시스템이었다.
졸병들로선 환영할 일이지만 고참들 눈에는 자신들의 감시자라는 인식 탓에 싫어했다.
우리 부대에서도 열 명이 선발되어 다른 부대로 파견 나갔고 우리 부대에 온 예방헌병은 다른 부대 출신이었다.
이들을 한꺼번에 수용할 막사가 없는 관계로 각 내무반에 분산 수용하였다.
사병들 사회에서 군 생활 20개월 경력이면 위로는 모셔야 하면서도 아래로는 군림하는 중간적 위치였다.
예방헌병 입장서 보면 상전이 없다는 점과 감시자로서의 특권을 맘껏 누리는 반면에 다른 부대에서 얹혀 지내는 처지다 보니 군림할 수 없다는 단점도 있다.
기존 부대의 고참들은 암암리에 졸병들에게 협박했다.
"내 밑으로 한 넘이라도 예방헌병에게 친절을 베풀거나 편리를 도모하면 지기삘기다."
그네들은 맘 붙이고 있을 곳이 없다 보니 낮으론 삼삼오오 모여서 양지쪽을 찾아 웅크리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뿐만 아니라 2주일에 한 번 정도는 이발을 해야 하는데, 아무도 깎아주질 않는 게 여간 고충이 아니었다.
우연한 기회에 한 예방헌병에게 머리를 깎아줬다.
여태 군에서 깎은 머리 중에서 제일 마음에 든다면서 아주 고마워하길래 언제라도 오면 깎아주겠다고 했더니 한두 명씩 찾아오더니 며칠 지나지 않아서 내 빼치카 움막은 그들의 아지트가 되어 버렸다.
예방헌병에게 편리를 제공하면 지기삐겠다고 공언했던 고참들도 열 명 모두가 내 빼치카 움막에서 죽쳤으나 정작 내게는 어떤 제재도 가하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나는 적이 없는 편이기도 했다.
그러길 삼 주 가량 지났을 무렵이었다.
허허는 만사 제쳐두고 대대장께 신고 준비를 하라고 연락이 왔다.
육군참모총장 전화 통지문으로 나를 용산역 옆에 있는 용사의 집으로 보내라는 지시가 내려왔다고 했다.
이유인 즉 시범운영중인 예방헌병제도 중에서 예방헌병이 추천하는 모범용사로 내가 선출되었다고 했다.
오갈 데 없던 예방헌병들에게 이발해주고 틈틈이 빼치카에서 라면 끓여준 게 그들로서는 고마웠던지 나를 우리부대를 대표하는 모범용사로 추천해 주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빼치카 당번병은 겨울이 끝나기 전에는 빠질 수 없다는 전통은 육참총장의 명령(?)으로 무너졌다.
빼치카 당번병 자리는 평소 내 밥을 자주 타줬던 박칠주를 추천하여 넘겨줬다.
(빼치카 당번병은 끝나면 일주일의 위로 휴가가 있었다)
용산에 있는 용사의 집을 숙소로 하여 일주일간 산업시찰과 유적지 관광을 시켜주더니, 마지막 날에는 육군참모총장 직인이 찍힌 상장과(부상은 없었지만 그 자리서 일계급 특진했다) 보름짜리 휴가증을 받았다.

휴가 마지막 날,
복귀를 위해서 마산서 고속버스에 올랐으나 복귀하기 싫다는 갈등이 생겼다.
차는 출발하여 동마산 인터체인지로 접어들 무렵 차를 세워라고 고함을 질렀다.
고속버스는 중간에 정차 할 수 없다는 차장과 기사를 협박하여 내렸다.
막상 미복귀를 실행하면서도 분명히 잡혀 들어갈 거라는 예감에 두려웠으나 애써 무시했다.
13일 후, 진영 장날이었다. 우시장을 배회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는 순간 옆구리를 채여서 엎어졌다.
DP조(탈영병 체포조)에 의해서 사단 헌병대에 도착하니 밤 11시가 넘었다.
유치장 출입문을 들어서니 간수병이 기존 수감자들에게 고함을 지른다.
"어이~ 예방 헌병들, 허허가 잡혀 들어왔다, 야식 먹어야쥐~" 순식간에 아수라장이었다.
통상 유치장은 군기가 세어서 수감자는 소리를 낼 수 없지만 그날은 예외였다.
사방에서 욕설이 들린다.
"으아악~!! 저 씹새끼 드뎌 들어왔네.
우리 나가기 전에 안 잡히면 분해서 죽을려 했는데, 근무자님,(헌병을 지칭) 저 새끼 제발 우리 방으로 넣어주십시오. 죽여 버리게"
헌병 넘들은 피의자 인권보호에 너무 무지했다.
그냥 집어 넣어줬다.
사방팔방에서 주먹과 발길질이 날라 온다.
2~3분 만에 떡 되어 버렸다.
뻗어있는 내게 온갖 욕설에서부터 저주로 이어지더니 나중에는 하소연으로 바뀌었다.
"씨팔넘아, 뭐라고 말 좀 해 봐라.
우리 호의를 이런 식으로 갚았으면 뭐라고 말을 해야 할 거 아냐~!"
억시기 할 말이 없는데 자꾸 뭔 소리라도 말을 해보란다.
뒷머리를 긁적이며 한소리 했다.

"머리들 많이 길었네예, 깎을 때가 지났네예...."
(END)

written by ===허허===
(이 글의 저작권은 '허허'님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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