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정은 반성하는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이성의 선물..

동정은 반성하는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이성의 선물..
작성일:2009.05.08



세상에서 쌈구경, 불구경이 젤 재밋다지만
그건 남의 일일 때 하는 말이고
제 집안 일일 때는 흉사임에 틀림없다.

알밥 진영에서 묘한 흐름이 감지된다.
알밥들이 지령대로 움직여야지 제멋대로면 안된다.
제멋대로인 순간 알밥은 알밥이 아닌 게 된다.
알밥들이 원칙과 기준을 잃어버리면
그간 무수히도 들어온 ‘알밥’이란 모욕은
역설적 명예가 아닌 정말 모욕이 된다.
떠나고 싶음 말 없이 떠나는 게 좋고
방귀는 뀌고 가지 말아야 한다.
남은 사람일랑 밥은 먹게 해줘야지.

누누이 말해왔던 바,
파시즘을 생성하는 건 파워풀한 소수의 선동적 엘리뜨가 아니라
무지한 대중들의 감성이다.
완장을 채워 놓으면
도시의 동건이보다 시골의 삼돌이가 더 무섭다.
무지한 자가 부지런 떨면 사고뭉치가 된다.

알밥들에게 내려진 지령은 광신도들을 각성시키라! 라는 거다.
각성도, 반성도 하기 전에 용서해버리면 곤란하다.
호로 색휘라는 욕 먹지 않으려면
벌초 때는 쑥대를 뿌리 채 뽑아야 한다.
동정은 반성하는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이성의 선물이다.
그 선물을 내릴 대상의 선별은 안드로메다 알밥 총단에서 한다.
반성 없는 자들을 향한 알량한 동정은
다 된 밥에 코 빠뜨리는 분별없는 행위다.

어물쩡 끝낼 일이었으면
그 긴 시간, 그 가당찮은 모욕, 오호라~마조히스트들은 아니잖는가!
뉘라서 사람 까는 일이 즐거운가.
그저 비뚤어진 줄을 바로 세우고 헝커러진 퍼즐을 맞추려 나섰는가.
결벽증들이라도 있어서?
여린 가슴에 상처 받으며 그래도 ‘깠던’ 것은
결벽증에서가 아니라 세상을 흐리는 사술을 퇴마하기 위함이었다.
혼탁한 세상 고거라도 해야 존재의 의미라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기에.
다들 아니 그랬는가?

관용은 아무 때나 베푸는 게 아니다.
무지하다고 아무나 용서받는 것도 아니다.
무지는 각성시켜야 할 대상이지 관용의 대상이 아니다.
무지가 공동체를 말아먹는 사술에 활용된다면
그런 무지는 퇴치시켜야만 할 범죄가 된다.

미네르바 같은 우상을 만든 것도 무지한 대중들이었고
리드미 같은 선무당을 만든 것도 무지한 대중들이었고
히틀러 같은 독재자를 만든 것도 무지한 대중들이었고
그들 모두를 잡아먹은 것도 무지한 대중들이었다.
무지는 용서받을 권한이 아니라 깨우쳐야 할 의무다.
무지하여 공동체에 위해를 가하는 자들을
무지하니 용서하자고, 천만에!

글을 쓰는 것도 자유고 철수하는 것도 자유다.
그러나, 남은 자들을 뻘쭘하게 하지는 말았으면 한다.
남은 알밥이든, 떠나는 알밥이든, 떠나갈 알밥이든,
몹시도 정든 알밥들이여!

===東山高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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