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지다>와 <잊히다>

<잊혀지다>와 <잊히다>
작성일:2009.04.18



님들은 혹시 <잊혀지다>와 <잊히다>를 아시나요.

언젠가 어느 포털 기사에 달린 댓글 하나가 기억납니다.
기사 원문에서 <잊어진>이란 어휘를 사용한 기자를
아주 맹렬하게 나무라는 댓글이었습니다.
‘<잊어진>은 잘못된 사용이고 <잊혀진>이 맞다’면서
기자의 학력을 의심하는 핀잔과 더불어
그런 기자를 채용한 신문사까지 싸잡아 혼쭐내시는데 서슬이 퍼렇더군요.
댓글 다신 분이 한글사랑의 자부심이 꽤 높았던 분이었나 봅니다.

이와 관련된 국문법 지식을 포털에서 검색해보면,
<잊혀지다>는 경상도 지방에서 많이 사용하는 <히>라는 피동접미사에
<-어지다>라는 피동형이 중복된 ‘이중피동’이기에 잘못된 용례로 적시합니다.

<잊혀지다> --> <잊히다>, <잊어지다>
<잊혀지지> --> <잊히지>, <잊어지지>
<잊혀질> --> <잊힐>, <잊어질> 로 사용함이 옳고

좀 더 엄격히 구분하면,
<잊혀지다>는 ‘틀린 사용’이고
<잊어지다>도 ‘틀린 건 아니나 잘못된 사용’으로 분류키도 합니다.
‘잊히다’라는 올바른 피동형이 엄연히 존재하는 터에
굳이 ‘잊어지다’라는 피동형을 이중으로 구사할 필요가 없다는 거지요.
따라서 <잊다>의 피동형으로 가장 올바른 용법은 <잊히다>입니다.

잊혀진 사람, 잊어진 사람--->잊힌 사람
잊혀질 사람, 잊어질 사람--->잊힐 사람
이런 식으로 어미 활용하여 사용함이 옳고 바른 사용법이라 합니다.

우리의 일상 언어생활에서 참 많이도 사용하고 있는 이 단어를
저 역시 작년에서야 비로소 그 정확한 용법을 깨쳤습니다.

한글 워드로 문서를 작성하다보면 어휘 아래 ‘빨간 줄이 쫙 그일 때’가 있습니다.
문법상 잘못된 사용임을 지적하는 한글 워드의 프로그램 장치이지요.
개인적으론 한두 해 전까지만 해도 빨간 줄을 아주 가배얍게 무시했더랬지요.
오랜 기간 확신 속에 거침없이 사용해왔던 내 어휘에다 ‘감히’(?) 빨간 줄이라니!
쉬이 용납할 수 없는 지적으로 여겼습니다.
‘컴이 틀릴 수도 있자나...까불어봤자 제까짓 프로그램 주제에...
한컴 프로그래머가 대한민국 최고의 국문법 박사라도 되나...홍홍홍!’

제대로 알고 많이 아는 사람은 겸손합니다.
저처럼 무지한 자들이나 위와 같이 턱도 아닌 시건방을 떱니다.
진리처럼 확신하던 자신의 앎이 깨어졌을 때
그 누구나 그 현실을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습니다.
저 역시 <잊혀지다>에 대한 확신이 깨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한글 워드 2005에게 굴복했고 한글 2005 앞에서 많이 고분고분해졌습니다.

글 서두에 예를 든 스포츠 신문 기자의 <잊어진>의 용법은
<잊힌>으로 했으면 완벽했겠으나 틀린 건 아니었습니다.
그는 틀리지 않았음에도 정말 억울한 욕을 얻어 쳐먹어야만 했습니다.
스포츠 신문 그것도 모 일간지 소속이었으니 오죽했겠습니까.
지적하신 분의 글쓰기 품새를 볼 때 나름 국문법에 자신이 있었던 것 같고
자신의 앎에 대한 확신 또한 대단해 보였습니다.
저 역시 재작년까지만 해도 한글 워드를 업수이보고,
단 한 번도 자신이 틀렸을 가능성을 의심해보지도 않은 채,
자신만만하게 <잊혀지다>를 사용하면서 한글 2005의 빨간 줄을 무시했습니다.
'잘못 알고 있는 자'가 '제대로 알고 있는 자'를 나무라는 적반하장입니다.
자신의 무지를 돌아보지 않는 편견과 선입견과 아집과 무관심이란 그래서 무섭습니다.
선무당이 사람 잡고 우물 안 개구리가 호랑이를 비웃는 꼴입니다.
위 소개된 댓글 다신 분이나 제가 바로 선무당이고 우물 안 개구리였던 겁니다.
‘고개 한 번 돌리니 극락이 예구나’라는 불가의 말이 있습니다.
<잊혀지다>의 한 뼘 바로 옆 고개 한 번 돌리면 <잊히다>가 있건만
고개 한 번 돌리는 게 그토록 어려웠던 겁니다.
수십 년의 세월 끝에야..

진실에 다가서는 길을 막는 건 외부의 장벽이 아니라
자신 속에 있는 아집과 편견과 무지와 무관심임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담담하고 당당하게 정도에 선 자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모두가 ‘예’라고 할 때 ‘아니오’를 말하고,
모두가 ‘아니오’라고 할 때 ‘예’라고 할 수 있는 용기(때론 ‘무모함’)는
자신의 무지를 인정할 때 누릴 수 있는 ‘행복한 자유’입니다.

아고라의 알바들이,
누구들처럼 찬양하고 지지해주는 사람이 기백이 아닌 수 명 뿐일지라도
‘알바’란 모욕조차 즐기며 담담하고 당당할 수 있는 건,
모두 다 그런 ‘행복한 자유’를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박대성의 스펙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미네르바가 될 수 없고
고매한 인격의 신선 같은 존재로 미네르바를 환상하는 자들의 맹목으로는
열 번을 죽었다 깨어나도 바로 눈 앞에 선 미네르바를 볼 수 없습니다.
환상이 깨어지는 두려움에 떨며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기 싫은 여러분의 알량한 자존심이
벌거벗은 미네르바를 직시할 용기를 막아서고 있음을 한시바삐 깨치시길 바랍니다.
나는 리빠나 담빠들에게서 젊은 예수를 부정했던 유대인들의 위선을 봅니다.

모두가 아집이고 미련이며 환상입니다.
박대성을 탓하기 전에 눈앞에 있어도 볼 수 없는 자신의 맹목을 탓하시고
아집과 미련과 환상과 무관심에서 깨어나시길 바랍니다.

미네르바 진위 건이,
단순히 인터넷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저 그런 티격태격이라면
이다지 집착할 일도 없겠으나
미네르바는 작년 말과 올 초에 걸쳐
위기의 대한민국의 한 단면을 상징했던 ‘아이콘’이었고
그는 지금 인신이 구속된 고난에 처해있는 과거가 아닌 현재임으로 해서
그의 글을 클릭했던 우리 모두는 아직은 ‘적어도 아직은’
그가 겪고 있는 고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미네르바를 만든 것도 우리였고 그를 구속시킨 것도 우리였으며
박대성을 부정함으로써 미네르바를 두 번 죽이고 있는 것도 우리란 사실을
통렬하게 깨닫는 게 멍박 정부 비난하는 일보다
훨씬 시급하고 중요한 일임을 망각하지 마시길....

그 이유는 바로,
거짓된 자들의 백 마디 외침보다
진실한 자들의 한 줄기 눈빛이 세상을 바꾸는 참된 힘이기 때문입니다.
그게 바로 ‘묵언의 내공’인 것을!!


===東山高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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