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먼저 한다..

내가 먼저 한다..
작성일:2009.03.20



어제 <누가 먼저 할래?> 물었으나
아무도 나서는 이 없으니 '내가 먼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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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부끄러운 흔적을 지운다는 건 무척 괴로운 일이다.
지운다고 지워지는 게 아님은 하늘이 알고 땅도 알기 때문이다.

어렸을 적, 큰 죄라도 감추듯 자위의 흔적을 없애려던 경험들이 있다.
엄마는 알고도 모른 척하셨다는 걸 커서야 다들 안다.
해할 마음이 없기에 알고도 넘어가줄 뿐이다.
넷에서도 알고도 넘어가주는 그런 엄마의 눈은 도처에 깔렸다.
그러기에 넷에서의 글쓰기는 자위를 할 때처럼 언제나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어떤 형식으로든 흔적은 남아있고 누군가는 주시하고 기억한다.
넷상의 글질에서 완전범죄란 없다.

어제 올렸던 <누가 먼저 할래?>란 글은
나 스스로에게도 숨 한 번 고르는 자극이 되었다.
이 글은 숨 한 번 고르려 쓰는 글이다.

'예끼'란 아이디로 이곳에다 첫 글을 쓴 건 지난 해 늦가을 즈음이다.
뒤늦게 소문 듣고 미네르바를 찾았다가 상승미소님의 글을 만났다.
그 글을 조롱하는 누군가의 댓글에다 짧은 답글로 호통을 쳤다.
그게 아고라에서 악질 알바 예끼가 탄생한 첫 순간이다.
호통을 치느라 급조한 아이디가 '예끼' 였고.

미네르바 구속 전후로 7~8편 정도의 글을 썼지 싶다.
지금은 자삭하고 없는 글들이다.
두어 편은 몇 줄 안 되는 댓글 수준의 글이었으니 별 의미 없다 하겠고,
두세 편은 구속 전의 미네르바를 예찬한 글이었으며,
두세 편은 구속된 박대성을 옹호하는 글이었다.
미네르바를 예찬했던 글 두세 편을 자삭했던 심리적 배경은
<미네르빠에게, 그리고 미네르바에게>란 나의 글에서 다소간 밝힌 바 있다.
박대성을 옹호하는 글 두세 편은
<신동아 기고자의 변명>이란 글과 중복되는 논지여서 자삭하였다.

다른 글들이야 단순 자삭이었으니 크게 개의치 않지만
미네르바 예찬 글 두세 편을 자삭한 행위는 지금도 여전히
낯간지럽고 숨기고픈 부끄러움으로 남아있다.
누군가는 그 글들을 기억할 거라 생각하면 볼이 다 화끈거린다.
광장에 오가는 숱한 아이디 중의 하나일 뿐이니 기억이나 날까마는
미천한 글에 댓글 주셨던 한두 분의 뇌리에는 남았을 법도 하다.

나는 그 글들에서 미네르바를 일러 기꺼이
참스승의 모습이라 추켜세우길 마다지 않았으며
지금은 이리도 욕해대고 있는 readme의 '친구론'에도 큰 거부감을 갖진 않았다.
미네르바를 이민주 회장(검색해서 살피시라)으로 상상했던 글은
비록 소설이라 전제하고 쓴 글이라지만
돌아보고 자성컨대 실로 성급하고 감상적으로 들떠 있었던 글이었음을 고백치 않을 수 없다.
어제 <누가 먼저 할래?>란 글에서 영웅놀이에 빠진 아골러들을 조롱하고 까대었지만
불과 서너달 전 나 스스로도 영웅놀이에 동조하고 있었던 걸 떠올리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졸필에 무명이라 그럴 일이야 없겠지만
행여라도 당시의 나의 글이 누군가의 이성적 판단을 흐리는데 일조했다면
이 지면을 빌어 늦게나마 정중히 사과드린다.

위와 같은 자각은 다른 글에서 이미 밝혔던 '알바짓'(?)하는 목적과 더불어
미네르바의 진위 논란에서 여태 발을 빼지 못하는
또 하나의 언저리 이유가 될런지도 모르겠다.
그리 보면, 리빠들을 향해 던지는 돌팔매는 몇 달 전의 나를 향한 것일 수도 있겠다.
어쩌면 '나'와 '리드미에 동조하는 그들'은 한 몸의 두 얼굴일지도 모른다.
태생은 같되 한 쪽은 박대성을 인정함으로써
자신의 부끄러운 영웅놀이의 흔적을 지우고자 함이고
다른 한 쪽은 박대성을 부정함으로써
자신의 부끄러운 영웅놀이의 흔적을 지우고자 함은 아닌지.

다행스러운 건 근자에 들어 미미하게나마 리빠들에게서 변화가 감지된다는 점이다.
'리드미의 화살'은 풍향계의 화살처럼 바람의 순방향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바람의 역방향을 가리키고 있음을 뒤늦게나마 각성해가는 걸로 믿고 싶다.
긍정과 부정의 위태로운 경계에 서서 머잖아 마지막 바람이 불어올 때
순응과 역행의 선택은 전적으로 자신의 몫이다.
경계에 선 그대들에게 현명한 선택이 있길 진심으로 빈다.

===東山高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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