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대성씨에게 그리고 아고리언들에게...

박대성씨에게 그리고 아고리언들에게...
작성일:2009.03.14



"나의 진심을 사람들이 너무 몰라준다. 내가 여태껏 왜 글을 썼는지 너무도 사람들이 몰라주는 것이 마음이 아프다"

윗글은 박찬종 변호사 보좌역인 김승민 씨가 전한 옥중 박대성 씨의 외마디다. 박대성씨가 이번에 <한국 경제에 대한 전망 보고서>를 쓴 동기라고도 한다.

며칠 사이 옥중 보고서를 쓴 박대성씨를 탓하는 이들도 있었다. 어차피 readme처럼 눈에 콩깍지가 씌인 자들이야 쓰면 쓴 대로 안 쓰면 안 쓴 대로 박대성 물어뜯기를 그칠 리 만무하다. 오직 사는 길이 그 길 뿐이니....뚜벅뚜벅 악랄하게 가보겠다는데 누가 말리랴! 80억 인구 중에 별종은 많다. 상상도 못할 정도의 별종도 참 많다. 그래도 지구는 돌고 JMS는 여전히 떵떵거리는 교주이시며 다단계에 뛰어드는 젊은이는 줄지 않고 여기저기서 성공하는 사기꾼들의 콧노래 소리가 들리며 교회에서도 절에서도 바람은 분다. 이성과 상식이 통하지 않는 인간들도 세상을 구성하는 구성물인 것을, 지척에서 우리는 그들과 함께 호흡하고 있음을 그저 '서늘하게' '가만히' 받아들이면 된다.

피를 토하듯 쓰인 저 글을 보고서도 readme의 교활한 감언이설 선동에 뻑간 리빠들이야 당연히 '생쇼하고 자빠졌네!'라고 외칠 테지만 저 고통이 어떤 것인지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 파출소도 안 가본 자들이 외부와 단절된 옥중의 고통이 어떤 것인지 알리도 없겠거니와 나아가 한 때는 세상이 주목하던 그 명예가 길거리의 개똥보다 못하도록 난도질 당한 지금에서 박대성씨가 겪고 있을 고통의 정도를 어찌 헤아릴 수 있으랴. 모두가 상상하는 열 배, 백 배 그 이상이지 싶다.

허나 어쩌랴, 일부에서 비난하듯 일이 그리 된 데에는 일정 부분 자업자득의 소지도 있는 것을. 박대성씨가 누린 위명의 근간에는 상당할 정도의 fake도 작용했던 건 엄연한 사실이다. 글의 목적과 글의 내용의 수준 여부를 떠나 글에 장치되었던 fake는 그의 진면목이 세상에 노출된 순간 순진한 대중들의 얼을 빼놓기에 충분했고 그들의 등을 돌려세우는 데 일정한 빌미를 제공했다. 여전히 익명의 상태라면야 굳이 그럴 필요야 없겠지만 노출된 공인의 반열에 올라선 박대성씨가 풀어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옥중보고서>를 필두로 누군가의 주술에 걸려 광기가 든 사람들을 제자리로 돌려 세우는 퇴마사의 역할이 박대성씨에게 주어진 또 하나의 과제가 될 것이다. 명예를 포기하라는 readme의 협박에 굴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빼앗긴 명예를 되찾는 쟁투가 있어야 할 것이다. 난데없는 옥살이로 잃은 것도 크겠지만 아픈 만큼 단련도 되었으리라. 강철은 처음부터 강철이 아니라 숱한 담금질로 단련되는 것이기에....지금은 답답하고 가슴에 품은 한도 크겠지만 그 답답한 가슴에 서린 한을 차게 식히지 말고 용광로 속의 쇳물처럼 달구어 더 큰 미네르바로 돌아오길 기대한다. readme 따위의 저열한 선동꾼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전문대졸 경제전문가 박대성'으로!

어제 난 <'readme, 그는 과연 志士(지사)인가 機詐(기사)인가'>라는 글에서 미네르바식의 fake를 사용하여 readme를 공박하여 보았다. 도입부의 집안 얘기는 모두 가공된 상상이었다. 당연 나는 메누리나 손주를 둘 만한 영감도 아니고 그저 그런 글짓기가 가능한 적당한 연배의 사람일 뿐이다. 막상 해보니 30초반 박대성씨의 천연덕스런 노인 연기에 그저 혀를 내두르게 된다. 돆똑하고 상상력이 풍부한 젊은이임에 틀림없다. 난 어제 단 한 편의 글에서조차 완벽한 연기를 해내지 못했던지 누군가가 댓글에서 '놀고 있네'라며 바로 똥침을 날리더라, 크~~. 서늘하고 예리한 눈매다. 댓글 보고서 그저 피시식 웃다가 연이어 드는 생각이 '에레이, 이 양반 그런 예리하고 '서늘한' 눈매로 readme의 허와 실이나 제대로 가려볼 것이지 하는 퉁박이 입속에서 맴돌고 말았다.

그래도 처음보다는 많이 좋아졌다. 룰루님, 박해일님, 보수우익님, 수수님 등 일부 진짜 '서늘한' 눈매를 지니신 분들의 맹활약 덕에 그나마 일천에 서넛은 구제했지 싶다. 영화 <포세이돈>에서 보듯 '길의 선택'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몫이다. 미네 할배의 말처럼 자신을 구원하는 건 오직 자신 뿐이다. 내가 틀릴 수도 있고 네가 틀릴 수도 있고 너나나나 모두가 틀릴 수도 있다. 틀린다고 그 무슨 죽을 죄를 짓는 것도 아니다. 다만 양심이 조금(많이?) 찔릴 뿐이고 시간 지나면 잊어질 적당한 쪽팔림만 감수하면 그 뿐이다. 별 것도 아닌 일로 호들갑 떠는 일로 가벼이 보아 넘길 수도 있겠다. 그런가? 과연 그런가? 담담당당은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하여 <월간조선>을 상대로 대단한 기세로 덤벼들고 있다. 그 기세로 한 젊은이의 명예를 작살낸 것에는 굳이 눈길을 외면하고 자신의 명예는 그리도 소중한 모양이다. 한때나마 그의 글 한 단락을 내 글에 인용했던 일이 못내 부끄럽다.

좋은 말은 천 냥 빚을 갚는다지만 나쁜 말은 천 냥 빚을 질 수도 있음을 각자 깊이 되새기면서 진실일 수도 있는 한 젊은이의 가슴을 후벼대는 일일랑 정녕 지양되었으면 간절한 바람을 전해본다.

===東山高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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