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름 밤의 꿈...사랑 서신 제066호



혜송님,
오늘은 술 때문에 죽을(?) 뻔했던
웃기는(?) 옛날 얘기 하나 들려 줄 게요.

어느 해 뜨거운 여름.
우리는 서해 상의 아주 작고 예쁜 섬을 찾았습니다.
내가 위취해 있던 사업장의 3인의 동료들과 함께
MT를 겸한 여름 휴가 !

시원한 바람, 백설처럼 희고 깨끗한 모래,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
연중 내내 잔업에, 철야에, 특근에 지친 우리들에겐
별천지가 바로 여기다 싶은 그런 아름다운 섬이었지요.
그런데, 그토록 부푼 가슴들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쭈~욱 늘어져버린 건
꿈 같은 해변의 첫날 밤을 하얗게 지새운 바로 그 다음 날이었습니다.

휴가 이틀 째 되던 그 날 정오를 갓 넘긴 시각,
남녀 학생이 어우러진 한 무리의 앳된 고교생들이
우리가 둥지를 틀고 있는 지척에서 집을 짓더군요.

고교 1,2년생 쯤 되어 보이는 남학생 서넛, 여학생 서넛이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대천 시내에 적을 둔 학생들이었지요.
우선 겉보기는 날티 나지 않고 대체로 순진하고 착한 아이들로 보였습니다.
한 동안 집 짓고 짐 풀고 부산을 떨고는 시간이 좀 흐른 후에
학생들의 리더격인 듯 참 잘 생기고 카리스마도 있어 보이는
남학생 하나가 나이에 걸맞지 않게 세련된 어투와 몸가짐으로
우리에게 부탁 하나 들어 주십사 하는 겁니다.

사연인즉슨, 섬에 내려 백사장으로 오는 길목에서
몇 해 전 퇴학 당한 학교 선배를 맞닥뜨렸는데
해 지면 방문할 터이니 술상을 차려 놓고 맞을 준비를 하라고
으름장을 놓았답니다.
그 선배란 녀석, 섬의 토박이로 평소에도
대천 시내를 오가며 시내에서도 다소 알려진 왈패였던 모양입니다.
리더 학생의 입장에선 아무래도 여학생들의 안위가
많이 걱정스러웠던 터라 나름대로 고민 끝에
처음보는 이웃집 형님(?)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던 거지요.
나중에 선배가 나타나면 여학생들 중의 한 명을
사촌 동생이라고 둘러대어 여학생들을 좀 돌봐주십사며 시나리오까지
지가 다 짜주는 걸 보니 참 총명하고 침착해 보이는 학생이다 싶었습니다.

공주들을 지키겠노라는 그 앳된 학생의
기사도 정신을 우리가 어찌 내몰라라 할 수 있었겠습니까.
"오냐, 알았다. 이 형님들이 너의 공주들을 지켜주마."
그런 거침없던 호기가 쭈글스런 긴장감에 빠져든 건
그로부터 두어 시간이 채 지나지도 않아서였습니다.

해질 무렵 석양을 옆으로 받으며 나타난 황야의 무법자 !
어렵쇼, 이 무슨 예상치 못한 그림인가요.
분명 총도 차지 않고 활을 맨 것도 아닌데
우리는 일순 긴장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거 한 두 놈이 아니잖아 !
김두한 같은 덩치 하나,
시라소니 같이 날렵해 보이는 녀석 하나,
등등...제법 힘과 깡이 있어 보이는 너댓 명의 졸개들이
학익진의 대형으로 백사장에 모래 바람을 일으키며 등장하는 본새가
슬로우 모드 영상과 배경 음악만 곁들일라치면
영락없는 영화의 한 장면이었습니다.
짜식들, 폼생 폼사하는 양아치들 아니랄까봐....

그 범상치 않은 예기 앞에서 우리는 일순 긴장하고 말았습니다.
이거 괜한 일에 끼어 낭패보게 생겼다는 우려 반,
그래도 정의의 칼을 높이 들어야 하리라는 호기 반.
하여간 적(?)들과 첫 대면한 그 짧은 순간에 참 마음이 혼란스럽더군요.

빗발치던 최루탄과 지랄탄, 사과탄의 연막 속에서
백골단과 맞서 싸우던 그 숱한 전장에서의 용맹과 기개는 다 어디로 가고
섬 오랑캐 몇 명의 위세 앞에서 얄팍한 비겁함도 살짝 돋는 순간이었습니다.
니내 없이 비슷한 심정이었을 우리는
이내 심란해지는 정신을 다잡고 사태의 수습을 꾀했습니다.

우선 공주들을 우리의 진중으로 대피시키고 적들의 동태를 살폈습니다.
이윽고 남학생들만 남아 있던 전초 기지에 도착한 녀석들이
파죽지세의 기세로 남학생들을 압도하며 희롱하는 동안
그 적장 또한 거침없는 기세로 우리가 포진한 본영을 넘보며
슬금슬금 다가서지 않겠습니까.

나이도 어린 놈이 위, 아래도 없는 양
게슴츠레한 족제비 눈을 이리 저리 굴리고 째는 폼이 참으로 가당찮더군요.
오늘 여학생들과 함께 좀 놀아야겠으니 협조하라는
협박 반, 회유 반의 언동이 어디서 제법 많이 해 본 듯
은근슬쩍 시비를 붙여오는 게 오늘 일 한 번 치르겠다 싶었습니다.

글을 잠시 돌려 우리 편 장수들의 면면을 한번 살펴보아야겠습니다.
노조 없는 척박한 사업장에
노조 깃발 한 번 올려보자며 의기 투합하여 도원 결의를 한 연후에
대장정에 나서기 전 투지와 결속을 도모키 위해 이 작은 섬으로
MT겸 휴가길에 나섰던 우리의 장수들은
체형으로 보나 평소 성정을 보더래도 나를 제외한 3인은
영락없는 현덕 유비, 운장 관우, 익덕 장비의 풍모와 기개를 가진
천하의 명장들이었습니다.
사실, 나 하나 빼고는 우리 측 장수들은
오랜 노동으로 단련된 제법 단단한 몸들이라
인상에서나 덩치에서나 적들에 비해 결코 전력이 뒤진다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 일촉즉발 위기의 순간에서
그나마 우리가 가장 믿고 기대하던 장수는 역시 운장이었습니다.
중,고교 다니던 소시 적에 좀 놀았노라는 평소의 허세도 있었던데다
그를 증명키라도 하듯 무짝만한 상박 팔뚝엔
큐피트의 화살이 하트 문양 위로
선명히 관통하는 그림도 당당히(?) 아로새겨져 있었습니다.
하긴 지금에사 돌아보면
이 곳에서 만나는 조폭들의 등짝에서 꿈틀대는 용 문신이나 호랑이 문신에
비하면 그건 유치원생들의 조잡한 낙서일 뿐이었습니다.

어쨌거나 우리들의 영웅은 그 바쁜 일상 중에도
헬스 클럽 다니며 끝없는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다져온 몸매만을 놓고 보면
우리들 중에선 단연 군계일학이었고
기대를 한 몸에 받기에도 손색 없었습니다.
우리들의 최고 떡대에 대한 나머지 3인의 한없는 믿음과 기대는
그 오고가는 눈빛들 속에서 충분히 교감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저 위 아래도 없는 치기와 객기로
우리들의 어린 백성들을 위협하며 핍박하고 있는
섬나라 오랑캐들을 어떻게 무찔러야 하나...
일단 한 덩빨 하는 관운장의 청룡 언월도를 앞세워
찰나지간에 적장의 수급을 베게 한 다음
장비로 하여금 좌,우익에 포진한 적졸들을 장팔사모로 휘저은 연후에
혼비 백산한 적들의 후방을 나와 유비가 협공하면
그나마 승산이 있지 않을까....

전경들과 맞붙는 기술과 작전이라면 모를까
양아치와 맨 몸으로 맞장뜨는 싸움박질엔 도통 대책이 안서는 지라
머릿속은 들녘 바람에 뒹구는 낙엽처럼 돌돌 굴렀습니다.

그 때였습니다.
우리의 희망, 관운장이 일순 침묵을 깨고 나서는 것이었습니다.
나와 비슷한 심정이었을 유비나 장비 그리고 난
일순, 아 ~ 드디어 우리의 떡대, 우리의 희망, 우리의 해결사가
그 소시 적의 끼를 발산하여 적토마를 내달려
이 난국을 일거에 잠재우려 일갈하려나 보다 하고
모두들 들뜨고 기대서린 눈으로 그를 응시했지요.

아, 그러나 그토록 우리의 우리의 믿음과 기대를 한 몸에 모으며
우리들의 가장 든든한 빽이던 운장이 잠시 멈칫하는가 싶더니
적들의 간담을 서늘케하는 천둥같은 일갈을 내놓기는 커녕
기어들어가는 모기 소리로 슬그머니 쪼질쪼질 내어 뱉는 말,

“나, 화장실 좀 다녀 올 게”

이를 어쩔꼬, 하필 이런 긴박한 순간에
이 무슨 날벼락과도 같은 뒤통수 후리기인가.
우리 전력의 50%를 뒷간에다 꼬불쳐 두어야 한다니, 오호 애재라 !

그 때까지만 해도 우리 남은 3인의 장수는
'설마 '하는 상념을 조심스레 달래고 있었댔지요.
아하, 절정의 고수는 임전에 앞서 부양신공의 초식을 전개하기 위해
밑으로 물갈이를 하여 몸을 가벼이 하려나 보다 하고 말입니다.
허나 그 일말의 마지막 기대마저 깨어진 건
긴박한 순간들이 모두 가시우고 한참이나 지나서였습니다.
사태가 수습될 때 쯤 해서 보무도 당당히 나타난
그의 발그레해진 얼굴을 대하는 그 떱떨함이란, 맙소사 !
운장으로 하여금 청룡 언월도를 높이 들어 적장의 수급을 베랬더니
그의 적토마는 작은 섬 어딘가에 있을 화장실을 찾아
한참을 내달리고 내달렸던지 언제까지나 돌아오질 않았던 겁니다.

아뿔싸, 싸움박질을 나이로 한다면야
단연 승리는 우리의 것이건만
운장도 없는 터에 예닐곱의 어린 양들을
한 무리의 늑대들로부터 지켜내야하는 절체절명의 순간 !
문득 스쳐가는 손자의 삼십육계 중의 제 칠계인 무중생유 !

행여 한 여름 밤의 혈투라도 벌여봐야 남는 건 없다.
모두가 피만 볼 뿐이다.
애들이 어찌될 지도 장담할 수 없다.
전세로 보아도 이길 수 있다라고 장담할 수도 없다.
우리가 우세한 건 단지 나이 뿐이다.
그래 싸우지 않고 이기는 건 회유가 최선이다.
회유하는 일을 가능케 하는 건 바로 무중생유의 전술이다.

앞뒤 따지고 생각할 겨를도 없는 긴박한 순간이라
위의 작전은 생각으로서 정리된 게 아니라
본능적으로 떠오르던 느낌일 뿐이었습니다.

제법 인상 구기며 시비조로 나서던 예의 그 선배란 녀석에게
적당한 언변을 곁들여 대뜸 술을 한 잔 건넸지요.
술잔이 거부되었으면 다음 수순이 참 난감했을 터인데
그 녀석 애주가였던지 건네주는 술을 마다진 않는다는
나름의 술철학이라도 있었던 모양입니다.

녀석이 잔을 되건네며 술을 따르려는 순간,
기회는 이 때다 싶어 말투를 자네투로 바꾸며 잔을 내려 놓고
옆에 있던 사발반한 코펠통을 내밀었습니다.
“자네, 여기다가 따라 봐 ~”
소주 한 병 거의 다 따르다시피 한 대접을 막걸리 마시듯
쭈욱 들이켰댔지요, 그것도 원 샷으로 말입니다.
그랬더니 일순 녀석의 얼굴이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하더군요.
다시 따라 놓은 지 잔을 마시는 둥 마는 둥 하더니만
시비조의 으름장을 놓던 초장의 기세가 한 풀 꺾인 듯 보였습니다.
그 순간을 놓칠 새라,
숨쉬고 생각할 틈도 주지 않고 회유에 돌입했지요.
“사촌 여동생이 있으니 따로 놀게 할 순 없고,
자네들하고 저기 남학생들 다 이리로 와서 놀도록 하세나“

그 제안이 통했습니다.
건너편 남학생들과 적졸들에게도 상황을 알렸더니
그제서야 애들 얼굴에 안심과 웃음이 돌더군요.
그리고는 학생들이 애써 잡아끄는 손길을 뿌리치지도 못한 채 그 나이에
어린 학생들과 스무살 남짓의 꼴통들과 한데 어울려
백사장의 한 판 디스코 춤사위 속에 휴가 둘 째날 밤을 밝혔습니다.
녀석들과는 이미 형님 한 잔, 아우 한 잔 하며 건네는
술잔 속에서 초장의 험악스런 분위기는 마치 고향 선후배간의
간만의 해후처럼 화기 애애한 무드로 전환되었지요.

혜송님, 한번 상상 속에 떠올려 보세요.
나이 좀 든 공장 노동자 4인과
앳된 남녀 학생 칠, 팔명에
섬 토박이 꼴통들 5,6명이 작고 예쁜 섬 백사장을 스테이지로 하여
요란한 팝 가락과 어설픈 디스코 춤사위로 어우러진 그 ‘부자연스런 조화’ !
어쨌거나 무중생유의 전술은 어린 학생들로 하여금
공포와 불안에서 벗어나게 하고 웃음과 생기를 불러온
결과적으로는 탁월한 선택이 되었던 것입니다.

근데, 전혀 엉뚱한 데서 문제가 생겼났지요.
분위기는 이제 크게 우려치 않아도 되겠다 싶어
꼬옥 조여 매었던 긴장의 끈을 놓는 순간
하늘의 별들이 마치 뽑기판처럼 빙글 빙글 돌아가기 시작하더군요.
젠장, 무중생유의 전술을 구사하느라 한 대접으로 원샷했던
소주가 한 시간 쯤 지나면서 슬슬 그 본색을 드러내었던 겁니다.
발작하는 술기운을 끝내 참지 못하고 백사장에서 가장 시원한 곳을
찾아 허우적거리며 닻을 내린 곳이
파도의 꼬리가 닿고 돌아서는 백사장 끝자락이었습니다.
참 시원하다 싶고 술이 깰 만한 곳이다 싶어
두 다리 쫘악 펴고 등짝을 깔았더니 무릉도원이 여긴가 싶더군요.
내 오늘 저 하늘의 별을 모두 다 세어 보리라며
별 하나 나 하나, 별 둘 나 둘....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 지 꿈결인 듯 누군가 깨우더군요.
화들짝 일어나 보니
바닷물이 거의 종아리를 타고 무릎 녘까지 적셔오는 중이었습니다.
밀물이 시작되고 있을 무렵이었나 봅니다.
나를 깨운 건 장비였습니다.
익덕과 운장이 한참을 찾아 다녔다고 합디다.
그들이 그 순간에 날 찾지 못했으면 아마 영원히 찾지 못할 수도 있었을
아찔한 순간이었길래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휴가 일정 마지막 날인 다음 날 아침,
학생들과 함께 짐을 꾸렸습니다.
학생들도 원래 일정은 하루 더 머물 요량이었나 본데
우리가 떠난다니 더 이상 그 곳에 머물 엄두를 못내고
우리를 따라 나섰던 겁니다.
섬을 떠날 때 어제 밤 사이 호형 호제하는 사이가 되었던
섬나라 오랑캐들(?)의 배웅을 받으며
한 여름 날의 해프닝은 그렇게 막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몇 주가 지나서
우리는 아주 작고 예쁜 편지 한 통을 받았지요.
“**, **, **, **오빠께.”로 시작되는.....
편지를 둘러싸고 기름때 절은 4인의 노동자들의 얼굴에는
‘한 여름밤의 꿈’이 되살아나는 듯
얼굴 가득 송골 송골 미소가 피어올랐습니다.

혜송님, 오늘 얘기 재미있었나요.
난세를 평정한 건 운장의 담대함도, 익덕의 용맹함도, 현덕의 후덕함도 아닌
조조의 무중생유의 잔꾀였습니다.
한 여름 밤 조용하던 섬의 반란을 제압한 나의 활약이
영락없이 조조의 잔꾀와 다를 바 없었지요.
혜송님, 설령 그렇게 생각이 들더래도 ‘조조의 잔꾀’라는 수사보다는
‘공명의 지혜’라는 수사로 추켜 세워 주시면 안될까요.
사랑을 하면 눈에 콩깍지가 씌워 연인의 눈꼽도 보석처럼 빛나 보인다잖아요.

아직도 봄, 봄 하기엔 담장 안 수은주의 키가 너무 자랐습니다.
곧 들이닥칠 담장 안의 불볕 여름과 싸울때도
무중생유의 전술이 통하면 좋겠습니다.
여름과의 전쟁에선 아무래도 무중생유의 전술보다는
이 바다로 저 바다로 달아나는
삼십육계 줄행랑이 단연 으뜸의 전술이지 싶습니다.


오래 전 5월 13일 **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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