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입니다...사랑 서신 제037호





<사적 소유의 원리와 행동 양식은 '필연적'으로 인간 성품을 퇴폐시키는 것일까.(p164)>

<인간의 이기심, 소유욕은 영원히 변할 수 없는 인간의 본질인가. 마르크스주의의 인간성 존중의 철학 사상과 그 물질적 사회적 환경으로서의 사회주의는 인간성을 변화하기에는 부족한 것인가. 아니면 원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인가.(p165)>

<나는 괴로운 심정으로 생각하곤 한다. 인간성은 본질적인 것으로서 사회 환경의 개조를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이기주의인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자본주의적 사유 재산 제도를 낳은 바로 그 인간성이다. 도덕주의적 인간과 사회의 실현은 꿈일 뿐이란 말인가.(p166)>

<소수의 종교적, 사상적 또는 혁명적 순교자만이 생명 탄생의 시간부터 사망의 시간까지 '도덕주의적 인간'으로서 90도로 꼿꼿이 서서 살 수 있다. 거의 모든 인간은 더 많은 안일, 쾌락, 소유를 원하는 이기주의자들일 수 밖에 없음이 수많은 사회주의 국가 사회에서도 입증된 셈이다. 그들 대중은 90도로 빳빳이 선 생존과 행동 양식을 오래 수락할 수 없다.(p166)>



나 같으면 저러지는 않겠는데...
이건 저래 주었으면 좋겠고 저건 이래 주었으면 좋겠건만...
왜 내 마음 같지 않을까...
내게 덕이 없어 그러겠지...
지성이면 감천이라는데 좀 더 참고 기다려 볼까...
지금보다 더 많이 이해하고 포용하고 양보하고 부지런 떨다 보면
뭔가 달라지겠지...

혜송님,
살다 보면 내 마음 같질 않은 사람들을 만날 때가 많지요.
익히 잘 알고 지내는 사람들 중에도
예기찮은 실망을 안겨주는 이들도 더러 있을 테구요.

글 서두에 인용된 글들은
리영희 선생의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라는 평론집에서 발췌해 본 글입니다.
혜송님의 지난 편지 글에서 언급된
사람 관계에서의 고충들을 접하면서
문득 연관지어 생각해 봄직한 내용들이라 굳이 옮겨 보았습니다.

양보가 항상 미덕일 순 없습니다.
나의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보더래도 양보가 능사일 수 없을 때가 많더군요.
나나 혜송님처럼 양보의 습성이 몸에 배인 사람들일수록
잦은 양보 탓에 응어리진 고충이 상대적으로 클 수도 있습니다.
쉽게 자신의 잘못을 깨치지 못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지속적인 양보를 이어가야 하는 일처럼 곤혹스런 일도 없을 것입니다.

혜송님이 지금 당면하고 있는 문제의 해결 방식은
혜송님의 일방적 희생과 양보가 능사일 순 없고
맺고 끊음을 분명히 하는 상호 비판의 과정이 필요해 보입니다.
물론 상호 비판의 과정에서는
최대한 상호간의 입장과 처지를 이해하고 존중하되
그렇다고 해서 지나치게 온정적 태도를 취하는 것도
상호 비판의 의미를 무색케 할 것입니다.

이러한 상호 비판과 더불어 혜송님의
사람에 대한 외곬적 믿음과 기대를 현실적 수준으로 하향 조정하는 일도
동반되어야 하리라 봅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고 기대가 작으면 실망도 작아지는 법입니다.

사회주의적 환경에 속해 있어도
사회주의적 인간형으로 충분히 숙성될 수 없는
인간들의 근본적인 이기적 속성에 대한 리영희 선생의 지적처럼
무릇 인간이 빈틈없는 도덕적 풍모를 다듬고 유지하는 일이란
그 얼마나 힘든 것입니까.

젊어 한 때 사회주의와 사회주의적 인간형을 숭모하면서
운동에 헌신해 온 이들이라 해서 조그마한 환경적 변화에도
맥없이 무너져 내리지 말란 법은 없습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그런 사례들을 익히 보아 왔습니다.
나 또한 변화하는 환경 앞에서
또 어떤 식의 변화를 거쳐갈 지 장담할 수 없구요.

이런 현상들은 어찌보면 '물질(환경)이 의식을 규정한다'라는
유물론의 제 1 명제에 타당성을 부여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달리 보면 인간의 타고난 이기적 천성을 교육과 환경적 변화 만으로
개선하고 변화시킨다는 것 또한
얼마나 어려운 지에 대한 역설일 수도 있습니다.

리영희 선생의 언급처럼 소수의 종교적, 사상적, 혁명적 순교자를 제외하곤
거의 모든 인간은 더 많은 안일과 괘락과 소유를 원하는
이기주의자들일 수 밖에 없음을 인정하면서
사람에 대한(특히 운동하는 사람들에 대한) 믿음과 기대치를 낮추는 것도
혜송님이 당면한 고충과 실망감을 줄이는 한 방편이 될 겝니다.

기실, 운동을 해 온 사람들이란
남들에 비해 이타적 성향과 실천적 의지와 용기 면에서 약간 앞서 있을 뿐
인간 본래의 이기적 천성으로부터 충분히 자유로울 수는 없어 보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마음가짐은 항상
'운동을 해 온 사람이 이 정도 밖에 안되나'라고 생각키 보다는
'운동을 해 온 사람이기에 그나마 이 정도는 되나 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차라리 마음 편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함께 운동을 해 온 사람들에 대해 유별난 선입견을 지니면 지닐수록
그에 따른 실망감도 더욱 커져갈 수도 있음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관계하는 대상의 잘못이 커서라기보다는 그 대상을 향한 나의 기대가
큰 탓이 아니었는지도 돌아볼 일입니다.

그간 믿고 애정을 보내던 사람들에 대한 믿음과 기대치를 낮춘다는 건
참 서글픈 일이긴 하겠습니다만
자신의 문제점을 잘 깨닫지 못하고
개선의 가능성을 쉬이 보이지 않는 대상을 향한 맹목적인 양보와 희생은
상대를 위해서나 자신을 위해서도 결코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혜송님이 지혜롭게 잘 처신해 나갈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기쁨을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된다'고 하던가요.
혜송님이 현재 겪고 있는 생활상의 고충들을 솔직히 알려주니 고맙습니다.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어려움이 있었네요.
사람에 치이고 부대끼는 일 만큼이나 속 상하고 곤혹스런 일도 없을 겝니다.
그런 곤경을 그간 묵묵히 헤쳐 나온 혜송님이
자랑스럽기도 하고 안스럽기도 합니다.

혜송님, 힘 내세요 !
힘들고 짜증스런 일이 있을 때면 차라리 내게라도 화풀이 하시구요.
그리고, 혜송님에겐 혜송님이 힘들고 괴로울 때 언제든 기댈 수 있는
포근하고 따뜻한 어깨가 늘 곁에 있음을
상기하면서 모쪼록 미소 잃지 마세요.

오늘 밤 꿈에선 하루 웬 종일 사람과 격무에 시달렸을
혜송님의 어깨를 주물러 드리러 가겠습니다.


오래 전 3월 13일 **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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