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공이산, 그대는 조성(釣聖)이었소..

노공이산, 그대는 조성(釣聖)이었소..
작성일:2009.06.23



소설가 이외수는 낚시인의 단계를 조졸(釣卒)에서 조성(釣聖)까지의 14단계, 구조오작위(九釣五作慰)로 구분하였다. 바둑이나 무술이 수많은 등급을 거쳐 입신(入神)의 경지에 이르듯, 낚시도 신선(神仙)의 도(道)에 이르는 과정을 14단계로 나누어 본 것이다. 낚시인들이 고개 끄덕일 만한 재밌는 구분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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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오작위(九釣五作慰) - 낚시14단계


1. 조졸(釣卒)
행동, 태도 모두 치졸함을 벗어나지 못한 초보의 단계. 낚시대를 든 것만으로 태공인 체 하다가 고기가 잡히지 않는 날은 술에 취해 고성방가 하는 것으로 화풀이를 한다.

2. 조사(釣肆)
조사(釣士) 아닌 방자할 사(肆)자가 붙는 단계. 대어를 한두 번 올린 경험만으로 낚시에 대해 모르는 게 없는 듯 기고만장해 있다. 허풍이 세어지기 시작하는 것도 이 때쯤일 껄???

3. 조마(釣麻)
홍역을 앓듯 밤이나 낮이나 빨간 찌가 눈앞에 어른거리고 주말에 낚시를 못하면 한 주 내내 끙끙 앓는다. 아내의 바가지도 불사, 친구, 친지의 결혼식 불사, 결근도 불사, 오직 낚시터로!

4. 조상(釣孀)
과부 ‘상’(孀). 드디어 아내는 주말 과부=필수, 주중 과부=선택이 된다. 직장생활이 제대로 될 리 만무하다. 집에 쌀이 있는지, 자식이 대학에 붙었는지, 아내가 이혼소송을 했는지 어쨌는지….

5. 조포(釣怖)
공포를 느끼고 절제를 시작한다. 낚시가 인생을 망칠지 모른다는 생각에 낚시대를 접어둔다. 아내와 자식들은 "돌아온 아빠"를 기쁨 반, 우려 반으로 반긴다.

6. 조차(釣且)
인생을 망칠지 모른다는 공포로 멀리했던 낚시대를 다시 찾는 단계. 행동이나 태도가 한결 성숙해져 낚시대는 세월을 낚는 도구가 된다. 그러나 세월을 낚기에는 아직 역부족.....

7. 조궁(釣窮)
다할 궁(窮). 낚시를 통해서 도를 닦을 수 있는 수준의 단계. 낚시를 통해 삶의 진리를 하나 둘 깨닫기 시작한다. 초보 낚시꾼의 때를 완전히 벗어 버리는 것도 이때다.

8. 남작(藍作)
인생을 담고 세월을 품는 넉넉한 바구니가 가슴에 있다. 펼쳐진 자연 앞에 한없는 겸허함을 느낀다. 술을 즐기되 결코 취하지 않으며 사람과 쉽게 친하되 경망해지지 않는다.

9. 자작(慈作)
마음에 자비의 싹이 튼다. 거짓 없는 자연과 한 몸이 된다. 잡은 고기를 방생하면서 자기 자신까지 방생할 수 있다. 욕심이 사라지고 인생의 희로애락이 낚시대를 타고 전해온다.

10. 백작(百作)
마음 안에 백 사람의 어른을 만든다. 아직도 참으로 배울 것이 많으니, 인생의 지혜를 하나하나 깨우치는 기쁨에 세월의 흐름을 알지 못한다. 자연도 세월도 한 몸이 된다.

11. 후작(厚作)
마음 안에 두터운 믿음을 만드는 단계. 낚시의 도(道)의 깊이가 상당한 수준에 이르지만 결코 지혜를 가벼이 드러내지 않으며, 몸가짐 하나에도 연륜과 무게가 엿보인다.

12. 공작(空作)
모든 것을 다 비우는 무아의 지경. 이쯤 되면 이미 입신의 경지에 거의 도달한 상태. 지나온 낚시 인생을 무심한 미소로 돌아보며 신선이 되는 때를 기다린다.

13. 조선(釣仙)
수많은 낚시의 희로애락을 겪은 후에 드디어 입신의 경지에 이르니, 이는 도인이나 신선이 됨을 뜻한다. 낚시대를 드리우면 어느 곳이나 무릉도원이요, 낚시대를 걷으면 어느 곳이나 삶의 안식처가 된다.

14. 조성(釣聖)
낚시와 자연이 엮어내는 기본원리는 터득하고, 그 순결함에 즐거워한다. 간혹 낚시를 할 경우에는 양팔 길이의 대나무에 두꺼운 무명줄을 감아 마당 수채 구멍 근처에서 파낸 몇 마리 지렁이를 들고 집 앞의 개울로 즐거이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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낚시를 시작한 지 어언 20년, 스스로 진단컨대 자작(慈作)의 언저리쯤엔 이른 듯도 하다. 오래 전 조마지절(釣麻之節)에는 미끼가 동났어도 쉬 물가를 뜨지 못하고 빈 바늘을 드리운 채 두어 시간을 버틸 때도 있었다. 욕심에서 비롯된 집착이리라. 그 때에 비하면 지금은 자작(慈作)이라 참칭(?)한대도 마냥 낯간지럽지만은 않다. 낚시에서도 삶에서도 그렇다. 더뎠어도 세월 따른 성장은 있었다. 지금은, 고기 없는 썩은 물가라도 대 드리우면 그곳을 무릉으로 여길 줄 아니 일말의 ‘낚도’는 튼 셈이다. 더 나아가 종국에는 ‘삶과 죽음이 자연의 한 조각’임을 깨닫는 조선, 조성의 경지에 이를 날도 있을 터 낚시에서든 삶에서든 修身에 멈춤은 없어야겠다.

노짱이 귀향한다 했을 때 ‘저 양반, 낚시를 알면 주천강수로(진영수로)에서 대 드리운 모습으로 한 번쯤 조우할지도....’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었다. 봉하 마을 초입 진영공설운동장 뒤로 주천강수로가 길게 흘러내린다. 함안이나 군북 지역의 낚시터를 찾았다가 돌아서 오는 길에 가끔 들르던 곳이었다. 이제는 그 곳에서 혹시라도 노짱을 마주할 일일랑 없다. 그냥 뒀으면 유연자적 휘적휘적 잘 살아갈 양반인데 수로에 대라도 드리우게 가만 좀 놔둘 것이지... 아쉽다, 참 많이 아쉽다. 노짱만이 아쉬운 게 아니라 사생결단하는 정치인들 보면서 그 인생들이 참 안됐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노짱이 오죽했으면 ‘정치하지 마라’ 했을까. 안상영씨가 부산 시장 재임 중에 비리 사건에 연루되어 수치심으로 옥중 자살했을 때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이 ‘저 양반, 낚시라도 한 번 하고 가는 걸까’였다.

골프든 바둑이든 등산이든 사람은 누구나 저 좋아죽는 여가생활을 최고로 여길 테지만 낚시인의 입장에선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을 목표로 하는 여가생활 중에 낚시만한 게 또 있을까도 싶다. 난 물가에 앉으면 무아지경에 들고 자연으로부터 소욕과 지족을 학습한다. 少欲과 知足, 이 두 가지 화두는 내가 낚시와 삶을 대하는 근간이다. 낚시를 할 때나 세상을 대할 때 무욕할 수는 없지만 과욕을 금하고 소욕으로 절제하니 마침내 지족에 이른다. 살면서 화근은 언제나 과욕에서 오는 것임을 누구나 한 번 정도는 경험으로 알 때가 있다. 허나 그런 깨달음을 얻고서도 소욕을 교훈으로 삼는 일이 쉽지가 않은 모양이다. 지족할 줄 모르니 과욕하고 과욕을 하니 지족할 줄 모르는 악순환의 굴레를 돌고 돌다 다들 그렇게 허망하게 가고 마는 것을... 누구도 원치 않는 바쁜 세상을 살면서 ‘낚시 한 번 못하고서 가는 이’들이 못내 아쉬운 것도 그런 까닭이다.

숨이 막히고 머리가 무겁고 세상일이 내 맘 같지 않다면 양팔 길이의 대나무에 두꺼운 무명줄을 감아 마당 수채 구멍 근처에서 파낸 몇 마리 지렁이를 들고 가까운 물가로 나서보라. 물가에 서면 무위자연을 가르치는 스승들이 참 많더라.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붕어도 스승이요, 실바람에 살랑거리는 부들과 갈대도 스승이요, 찌 끝에 앉아 졸고 있는 잠자리도 스승이다. 모두 소욕과 지족의 이치를 알려주는 스승들이다. 그런 스승들의 가르침을 잘 받잡다 보면, 어느 날 문득 새벽녘 어스름에 피어오르는 물안개 자욱한 저 편 동산 너머로 떠오르는 아침해를 보면서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임을 깨닫는 순간도 있으리라.

7월 10일, 그대 가실 날이 점점 다가오난가. 여보시오~ 노공이산, 격외선당 가는 길 서둘러 가지 말고 물가라도 만나면 쉬엄쉬엄 놀며 가라고 내 맘 속의 낚시대 하나 선물하려오. 옛소, 챙겼다가 세외로 가는 길에 가져가오..

===東山高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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