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사랑 서신 제126호


따듯한 햇살, 파아란 하늘, 솜사탕 같은 구름,
팔랑대는 만국기, 축하 비행인 양 비둘기들도 떼 지어 날던
오늘은 재소자 체육대회 날이었습니다.
년 중 한 번 열리는 체육대회,
1년 내내 창살과 콘크리트 벽 속에서
무미건조하게 살아가는 재소자들이 억압된 끼와 에너지를
맘껏 발산할 수 있는 옥중 최고의 잔칫날이기도 합니다.
공안수들이야 직접 경기에 참여할 순 없었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흥겨웠던 하루였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회에서나 옥중에서나
체육대회의 가장 큰 볼거리를 꼽으라면
단연 응원전, 릴레이, 가장행렬을 들 수 있을 겁니다.
오늘 이곳 옥중 체육대회의 백미도 그랬습니다.
남자들만 사는 곳이어서인지 가장행렬에는
어김없이 여장 남자들이 등장하여 분위기를 한껏 데워 놓는답니다.
그 순간만큼은 분장한 당사자나 지켜보는 남정네들 모두가
억제된 성적 에너지를 간접적으로나마 해소하는
이색적 즐거움을 만끽하는 거지요.
하얀(?) 속살을 훤히 드러낸 채
야시시한 브래지어와 초미니 차림의 늘씬한 미녀(?)들이
눈앞에서 간들거리는 모습을 앞에 두고
굶주린 남정네들의 마른 침 넘기는 소리,
그 미모(?)에 탄성을 내지르는 소리,
애인이나 마누라를 그리워하는 한숨소리에
땅이 꺼지고 하늘도 무너질 것만 같던 걸요, 후후~
자지러지는 듯한 환호와 탄식, 하하 이건 뭐 거의
우리에 갇힌 수컷들의 '난장발광'이라 보면 돼요(이거 너무 저속한 표현인가요?).

근데, 올해 등장한 미녀들은 작년 수준에는 못 미쳤어요.
작년의 그녀 ! 대단했었습니다.
일천여명의 굶주린 남정네들의 마음을 일거에 뒤흔들어 놓았던 그녀 !
생김과 몸매만을 놓고 보면
실제 여인네도 그 앞에선 고개를 떨굴 만큼 수려했던
그녀(그 남자?)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네요.
출소해서 시집간(?) 것일까요. 올해는 볼 수가 없네요.
하지만 작년의 그 하마 같은 몸매의 뚱보아줌마는
그 모습 그대로 또 나타났네요. 뱃살이 더 오른 듯도 했고요.
작달막한 키에 몸무게가 무려 110킬로에 가까웁다니
그야말로 제대로 물이 오른 ‘뭍에 오른 하마’인 게지요.
그 커다란 살집이 브래지어와 초미니 차림으로
이겹인지 삼겹인지도 모를 희멀건 뱃살을 출렁거리며
교태(?)를 부리는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하, 올해는 그래도 두 번째라 면역이라도 생겼으니 망정이지
작년에 처음 그 기괴한 모습을 대했을 땐 정말
‘오 하느님, 실수하셨습니다 !’ 였다니까요.

유난히도 햇살이 따사로왔던 오늘,
운동장 스탠드 응원석 한켠에 앉아서,
이런 저런 놀이들과 경기들에 흠뻑 취해서 흥겨워하는
재소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해맑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그들 개개인의 범죄 이력을 떠올리노라면 ‘해맑다’는 표현이
많이 어색할진 몰라도 오늘 하루만큼은
그들의 표정은 한없이 순수하고 천진난만해 보였습니다.
사랑에 굶주리고, 돈에 굶주리고, 배움에 굶주린 사람들,
삶의 가장 밑바닥에서 허덕이다 사회의 천덕꾸러기들로 내돌린 사람들,
오늘 하루만은 그들의 표정에서 그 어떤 굶주림도 읽을 수 없었습니다.
의외로 이곳의 사람들은 자기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이
다소 거칠고 공격적이긴 해도 가식적이진 않습니다.
사람들은 대저 나이가 들수록 많이 배울수록 많이 가질수록
그에 비례하여 위선과 가식도 늘어나지 싶습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
체육대회 끝나고서 오늘자 신문을 보았습니다.
누구누구의 비자금과 관련된 모 의원의 폭로 기사가 실렸더군요.
죄를 진 자나 알고도 덮어주는 자나 모두 다
참으로 후안무치한 군상들입니다.
그들이야말로 응당 이곳의 가장행렬에 끼어 있었어야 할 작자들입니다.
위선과 가식, 가장의 달인들 아니던가요.
오늘 이곳 재소자들의 해맑았던 웃음과 함성이 한순간,
번연히 죄를 짓고도 응분의 죗값을 치르지 않을 수완을 보여주는
소위 배우고 가진 자들의 교활하고도 뻔뻔스러운
위선과 가식을 향한 비웃음처럼 되살아옵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
누가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


오래 전 10월 20일 **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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