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출기...사랑 서신 제123호





언젠가 ‘빨치산?’의 후속편으로
‘탈출기’를 쓸 거라 했었지요. 오늘 글이 그것입니다.
**년 어느 여름날이던가 가을날이던가요.
교내에서 모방송국 차량 한 대가 전소되었던 그 날, 혜송님도 기억나지요?
그날의 교내 집회와 시위를 제가 이끌었댔지요.

그 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집회 후 정문을 막고선 전경대를 돌파하려는
시위가 공식처럼 진행되었습니다. 혜린 님도 있었던가요?
나가려는 자들과 막으려는 자들 간의 격렬한 공방,
돌과 각목, 화염병, 최루탄과 지랄탄이 난무하던 전장이었지요.
언제나처럼 난 그 격렬했던 전장의 최전방에서 시위대를 지휘하고 있었습니다.
혜송님도 아실려나 모르겠지만
원래 최루탄이 난무할 때는 시위대의 최전방은 의외로 안전지대랍니다.
백골단이 뛰어들 때야 다소의 위험 부담도 없잖지만
주동을 보호하는 각목조가 따로 배치되니까 방어는 가능하지요.
외려 부상자가 가장 많이 발생하는 위험 지대는
시위 대열의 가운데나 후미입니다.
전경들이 발사하는 최루탄이 경사각을 이루면서
시위대의 가운데를 겨냥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일단 최루탄이 발사되면 절대 고개를 돌리고 달려서는 안 되지요.
그랬다간 무수히 날아드는 최루탄에 뒷머리를 맞을 수 있습니다.
최루탄이란 게 총알처럼 빠르지는 않기에 조금만 훈련되면 육안으로 감지하고
피할 수가 있으므로 최루탄이 발사되면
가급적 되돌아 뛰기보다는 뒷걸음으로 정면을 주시하면서
날아오는 최루탄의 방향과 탄착 지점을 적절히 계산하여 피하는 게 상책입니다.
아무래도 여학생들이나 후배 학번들이 그런 게 잘 안되다 보니
최루탄에 맞아 큰 부상을 입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곤 했었지요.
허나, 가끔 시위 진압대 중에 시위대 전열을 향하여 직격탄을 날리는
성깔 못되먹은 천둥벌거숭이 같은 전경들이 한 둘 씩 끼어 있을 경우에는
시위대의 전열도 상당히 위험 부담이 커지긴 하지요.
이한열 열사도 아마 그런 경우에 의한 희생이었으리라 봅니다.

빠바방 ! 빵 ! 빵 ! 빠바바방 !
베토벤의 교향곡 <운명>의 첫 시작음이 터져나오듯
셀 수도 없이 들어왔던 그 익숙한 소리가 귓전을 울렸습니다.
그리고 모든 건 운명처럼 찰나지간이었지요.
습관처럼 하늘을 보았습니다.
파란 하늘을 가르며 먹이를 쫒아가는 사나운 매들처럼
날아오는 시커먼 뭉치들, 하나, 둘, 셋, 넷, 다섯,..............................
별을 세듯 백주의 하늘을 주시하던 일순간,
왼쪽 숲 속에서 시커먼 뭉치 하나가 예기치 않게 불쑥 삐져 나오더만요.

빨간 메가폰을 향하여 처음부터 겨냥된 것이었을까요.
날다가 나뭇가지에 걸려 방향을 틀며 불시착한 것이었을까요.
사과탄 정도야 재기를 차듯 하고
빗발치던 최루탄도 훌라우프 돌리듯 요리조리 허리만 돌려 피하며
지랄탄 숲을 누비던 역전의 싸움꾼도 그 순간만은
양발이 땅에 붙박힌 듯 속수무책으로 굳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순간의 느낌, 기분? 아득했던 것 같습니다.
천 길 만 길 낭떠러지로 떨어져내리는 느낌이 그럴 것이라 어림해 봅니다.
나의 반사신경도 결코 무딘 편이 아닌데 열추적 미사일과도 같이
어느새 눈 앞에 꽉차오는 그 놈을 피한다는 건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체념의 순간, 내가 기껏 할 수 있는 동작이라곤
눈을 질끈 감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려버리는 것이었지요.
그랬네요, 그런 일이 있었네요. 삼신 할매가 돌보셨을까요.
고개를 돌림으로써 정면 타격은 피했으나 눈가에서 터져버린 최루탄에
이미 얼굴은 희뿌연 최루가루 범벅이었고 왼쪽 눈을 뜰 수조차 없었지요.

‘안경이 없다. 눈이 따갑다. 최루가스에 따가운 건지 영문을 모르겠다.
왼쪽 눈가를 만져보니 손에는 선홍빛 피가 묻어난다.
아, 이런, 아뿔싸, 제기럴~~아무 생각이 없다.
실명, 실명, 실명, 실명, 실명..............‘

텅 빈 것 같은데도 머릿속에선 온갖 회한이 끊임없이 밀려들더군요.

누군가 고꾸라진 날 부축하고 시위 대열에서 빠져나가더군요.
수배 중이었던 난 학교 근처 병원을 이용할 수조차 없는 처지였었지요.
간단한 응급치료 후에 ‘탈출’을 계획해야만 했습니다.
그 상태로는 정문이고 후문이고
학교 밖으로 나가는 출구를 걸어서 나가기란 불가능했었지요.
아직도 내가 해야 할 일이 남았기에 피검을 각오할 수는 없었습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했던가요.
‘나와 우리들의 주장와 행동’에 대해 언제나 응원을 보내주시던
일부 교직원들과 교수님이 ‘비상탈출작전’을 계획하고 나서주시더군요.
그 위기의 순간에, 그들은 기꺼이 내게 솟아날 구멍이 되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길지 않은 시간 나는 쥐도 새도 모르게 어디론가 증발되었지요.

캠퍼스에서 멀찍이 떨어진 어느 안과 의원,
눈꺼풀 안팎으로 박혀있는 안경유리 조각을 제거하던 의사가
천만다행히도 각막이나 동공 쪽으론 큰 손상이 없으며
외상의 정도도 그리 심각한 것은 아니라네요.
의사의 그 한마디, 내겐 천상에서 내리는 복음이 따로 없었습니다.
그 날, 의사와 간호사는 내내 울면서 날 치료했더랬습니다.
뭐 그게 가냘픈 학생의 애처로운 몰골을 보고 가슴이 저미어서거나
시국이 서글퍼서 그랬던 건 아니었던 것 같고
치료 중에 내 몸과 옷가지에 범벅이 되어있던 최루가스 매운내를
종내 참아내질 못하고서 재채기 뒤섞인 통곡(?)을 했던 게지요, 풉.
우리들이야 객기 부리느라 최루가루를 막걸리에 타서도 마신다지만
최루가스가 익숙치 않은 사람들에겐 그게 아주 독가스나 다름없거든요.

나중에 전해들으니 후배들은 내가 최류탄을 맞고
쥐도 새도 모르게 어디론가 증발된 것을 두고
학생처에서 날 경찰에 넘겨준 걸로 오해하여 대단히 격앙된 항의를 하였고
그 와중에 학내에 있던 모 방송국 차량이 화염병에 전소되는
애꿎은 피해를 입었다는 얘길 전해 들었습니다.

사실, 그 시간에 나는 이미 학교에서 멀리 떨어진
외곽도로를 달리는 검은 세단 트렁크 속에 웅크리고 있었습니다.
그랬지요, 그 비상계획이란 건
바로 교수님의 승용차 뒤트렁크를 이용한 탈출이었습니다.
이거 무슨 영화 속 한 장면과도 같지요.
씁쓸하지만 그 시절엔 우리 모두 그렇게 살지 않았던가요.
그 비상탈출은 날 진심으로 걱정해준 교수님이나 일부 교직원들의
헌신적인 도움이 아니었다면 도저히 불가능했을 겁니다.
지금 돌아봐도 존경받아 마땅한 참 좋은 은사이셨고 교직원들이었습니다.
그 때, 차 트렁크 속에서 칠흑처럼 암울했던 이삼십 분 남짓의 순간에
절망과 체념의 감정이 어떤 것인지를 제대로 느껴 보았습니다.
사람이 위기에 처하면 살아온 지난 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잖아요.
그 어두운 공간에서 ‘실명과 구속’을 우려하며
피 내린 눈두덩을 다독이던 그 순간은 자못 처연하기까지 했었지요.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그런 황망한 경험이었습니다.

물론, 독재에 항거하다 분연히 산화해가신 이들에 비하면
그런 걸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도 않은 아픔’이라고 말하기조차
쑥스럽기 그지없지만 얘깃거리 삼아 이런 기억을 편지글로 옮겨 보았습니다.
별 재미도 없는데다 무슨 연서가 맨날 이리 딱딱한가 싶기도 하겠네요.
교도소에서 검열 받아 밖으로 나가는 연서이다보니
사랑글다운 촉촉한 표현들을 어디 맘 놓고 쓸 수나 있어야 말이지요.
이런 전후 사정을 넉넉히 감안해 주시옵고 너무 투덜대지 않기를 바래요.

낙엽도 아직인데 요즈음의 내 마음은 이렇답니다.
‘빨리 빨리 눈이라도 좀 내렸으면!’
‘저 멀리 산등성 위로 개나리와 진달래가 쑥쑥 기어왔으면!’


오래 전 10월 12일 **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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