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도둑의 궤변...사랑 서신 제113호







***역 꽃밭에서 봉숭아 꽃잎을 탐하다가 혼났었다구요?
이럴 때 웃는다면 놀려먹는 것일 테지요.
근데, 그 양반도 좀 그러네요.
‘당연히’ 혼쭐을 내는 거야 뉘라서 뭐라겠냐마는
기왕에 딴 것마저 싹 빼앗아 가다니 조금은 야박한 응징이네요.
주위에 눈들이라도 있었으면 많이 멋쩍었을 터인데, 쩝.
원래 아저씨들이 아가씨들한테는 맘 약해지는 법이거늘
역 근무 중에 유사한 일들이 잦아서 어지간히도 짜증났었나 봅니다.
내 키우던 봉숭아가 에프킬라 먹고 죽지 않았으면
지금쯤 한 움큼 수확해서 편지에 담아 보낼 수도 있었을 것을.

‘봉숭아는 여느 꽃들과 달리
꽃잎을 따다 물들이는 게 보는 것보다 우선하는 꽃‘이라 항변했다면서요.
크~, 혜송님도 보기보단 참 맹랑하네요.
떽끼, 죄 지어 놓고 고딴 궤변이나 늘어놓으니
역무원 아저씨가 당연히 손에 든 것마저 홀라당 뺏을 수밖에요.
살살 웃으면서 아저씨 비위를 맞춰드려도 시원찮을 판에
꽃 도둑 아가씨의 맹랑한 항변이라니, 그 상황이면 내라도 뺐겠네.

무릇 사람들이란 너나없이
비록 알량한 수준의 것일지라도
사회나 조직이 자신에게 부여해준 권한과 권위를 행사하면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은근~히 과시하고 싶은 욕구를 지니고 있거든요.
사실 그런 것도 다 세상사는 맛의 하나 아니던가요.
아저씨의 나름 세상사는 맛에 고처럼 맹랑(명랑?)하게 초를 쳤으니
역무원 아저씨께서야 당연히 적개심을 드러내셨겠지요.
혜송님은 역무원 아저씨의 세상사는 맛에 초를 쳤을 뿐만 아니라
생뚱맞게도 ‘꽃은 따는 게 아니라 보고 즐기는 것’이라는
아저씨의 ‘소신’에도 정면 도전했던 겁니다.
그러니 이미 딴 봉숭아조차 몰수당하는 그런 가혹한(?) 응징이 가해질 수밖에요.
아니 어쩌면 혜송님 앞에서 몰수한 봉숭아를 발로
쿡쿡 짓밟아 버리지 않은 것만도 감지덕지 하셔야지요, 풉.
하하, 파란 가을 하늘 아래 한적한 간이역 꽃밭,
시꺼먼 늑대 같은 우람한 아저씨와
하얀 여우 같은 조그만 아가씨가
붉으락푸르락, 떽떽, 쫑알쫑알, 궁시렁궁시렁, 투덜투덜대며
대치하고 있는 모습, 정말 볼만했겠습니다.
생각만 해도 정겹고 재미난(?) 한 폭의 그림이네요.
내가 옆에 서 있었음 누구 편을 들었을까 생각해보니
참 난처한 상황이네요.
혜송님, 이다음에 함께 나들이라도 나갔을 때
이번처럼 엉뚱한 사고 쳐 놓고서 나로 하여금
시험에 들게 하는 건 아니겠지요.
고런 방향도 예측할 수 없는 럭비공 같은 엉뚱함이
조신한 혜송님의 또 다른 얼굴이라니 이거 참 많이(?) 고민되네요.
고민, 고민, 고민....................................


벌써 가을인가요.
아침에 깨면 옥창너머 뒷마당 풍경이 제법 풍성합니다.
창을 열면 상큼한 가을바람이 기다렸다는 듯 두 뺨에 살갑습니다.
언제 만나도 반갑고 정겨운 가을 아침 바람입니다.
오늘 아침엔 한동안 뜸하던 까치가
뒷마당에 장승처럼 뻗친 잣나무 가지에 앉았습니다.
교도소 까치는 신통력이 덜한 건지 저리도 요란스레
까치까치 울어대도 별로 덕 본 일도 없습니다.
예전에 내 옆방에 살던 어떤 이웃은 외려
까치 울면 재수 없노라고 그러데요.
하기는 빤한 징역살이에 좋고 나쁜 일의 구분이 무에 그리 대수겠어요.
매번 지녔던 기대가 실망으로 축적되던 끝에 나온 푸념이었을 겁니다.

참, 개미들이 드디어 이사를 했네요.
먼저 번 비 난리 때 내내 물에 잠겨 지내더니
도저히 힘겨웠던지 잣나무 밑동 높은 지대로 옮겨 갔답니다.
여름 내내 농사는 안 짓고 집수리에만 매달린 터라
찬바람 나기 전에 월동 준비나 제대로 할 수 있을래나 모르겠네요.
내년 봄 집터 잡을 때는
여왕개미가 ‘올여름의 고생’을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할 터인데요.
사람이나 짐승이나 미물이나 여하간 대장 잘못 만나면
것도 큰 고생이라니까요.

잣나무는 참새들도 잘 노는 곳이랍니다.
참새라면 길거리 돌멩이만큼이나 흔하디흔한 새이건만
이젠 도심지에선 참새 보기가 쉽지 않지요.
참새가 참 이쁘다는 생각을 이곳에 와서 새삼 지니게 되었습니다.
다소 경망스러워 보이는 그 움직임이
생기 없는 옥중에선 그게 더 큰 매력으로 보이네요.
그 재바른 움직임이 옥중의 아침을 한결 활기차고 생기 넘치게 한답니다.

그리고 가끔 누런 고양이 한 마리가 어슬렁대지요.
이 고양이는 내가 이곳에 왔던 2년 전부터 보아 왔었는데
무슨 죄를 지었는지 징역 꽤 오래 사네요.
밤낮없이 옥중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는 이곳의 무법자랍니다.
몇 마리 다른 고양이들도 있지만 이 누렁 고양이가 대장인 듯합니다.
하여간 얼마나 능글맞고 거들먹거리는지
어떨 땐 가만 보고 있으면 헛웃음 날 때도 있다니까요.

그래도 매일 아침 하루도 거르지 않고
뒷마당에 찾아드는 단골손님은 비둘기랍니다.
많을 땐 3~40마리가 떼거리로 다니다가도
적을 땐 한 쌍, 혹은 달랑 한 마리만 올 때도 있습니다.
오늘 아침엔 열 댓 마리 정도 왔는데 아주 웃긴 장면을 보았어요.
다른 비둘기들은 먹이 찾느라 시골 장날처럼 분주한데
비둘기 한 쌍이 술래잡기 하듯 까불거리는 모습이 유별나데요.
뽀빠이처럼 떡대 좋은 수컷 한 마리가
날씬하고 빛 고운 깃털을 가진 암컷 뒤를
쉼 없이 종종거리며 쫓아다니는 겁니다.
싫은 건지 내숭인 건지 내 보기엔 암컷이 아주 귀찮다는 듯 피하는데도
수컷의 고집이 꽤나 억척스럽더군요.
사람이나 비둘기나 하여간 수컷들이란 암컷을 ‘귀찮게’ 하는 건 거서 거네요.
근데 한 순간 웃기는 일이 벌어지데요.
암컷이 도망을 다니는 와중에도 먹이를 발견하고는 콕 쪼아 물었는데
그걸 본 수컷이 느닷없이 암컷 입에 물린 먹이를
뺏으려 험악하게 달려드는 거 있지요, 그거 참.
지켜보던 내가 다 민망해지던 걸요.
죽어라고 쫓아다닐 땐 언제고 먹이 앞에서 그런 결정적인 추태를 보이다니
고놈이 세상 수컷 망신 다 시켜놓지 뭡니까.
아마 오늘 중에, 그 한 쌍의 비둘기가 부부였으면
도장 찍고 서류작성해서 비둘기 법원 갔을 게고
연인이었으면 그 암컷 비둘기가 중대 선언을 하진 않았을까요?

어떤가요? 혜송님,
이런 장면들이 아침이면 내가 보는 옥 뒷마당의 정경들입니다.
아 참, 오늘 아침엔 한 가지를 더 보았네요.
파란 하늘 점점이 떠가는 구름 사이로 혜송님도 보았습니다.
혜송님의 생활 구석구석에 내가 있다 했나요.
마찬가지로 혜송님도 내 머문 곳 어디에나 함께 자리하고 있네요.
바람 속에도 구름 속에도 별 속에도 달 속에도 있고
아침에도 있고 밤에도 있고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머물지 않는 곳이 없답니다.

내일이면 혜송님이 오시는 날이네요.
혜송님이 내게로 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혜송님에게로 갈 수 있는 그 날이 어서어서 오길
파란 하늘 하얀 구름에게 한껏 소망해보는 아침입니다.


오래 전 9월 17일 **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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