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이 있는 기다림, 기다림이 있는 그리움...사랑 서신 제042호







오늘, 맥이 빠지도록 오랜 기다림 탓에 속 많이 상했었지요.

혜송님,
일주일 내내 월요일 오기를 기다리고
막상 월요일이 되면 또 다른 많은 기다림들과 맞닥뜨리게 되지요.

열차를 타기 위해 지하철을 기다리고,
버스를 타기 위해 열차를 기다리고,
택시를 타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고,
담장 앞까지 태워줄 택시를 기다리고,
담장 안 접견 대기실에서의 기다림 끝에
주어지는 고작 이,삼십여 분의 만남, 이 찰나지간과도 같은 애틋한 만남은
그 숱한 기다림의 여정에 바친 정성을 무색케하는 너무도 짧은 순간이건만
당신은 여전히 그 먼길을 마다 않고 달려옵니다.
그런 당신으로 해서 나는 징역살이를 고역이라 느끼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리움이 있는 기다림은 아름답습니다.
기다림이 있는 그리움도 아름답습니다.
그에 비하면 기다림 없는 그리움, 그리움 없는 기다림이란
얼마나 허황되고 아픈 것일까요.

오늘,
새벽 동 트기 전에 깨어
반 나절의 여정 끝에야 담장 안에 들어서는
혜린 님의 부단히 움직이는 동적인 기다림과 그리움을 맞이하기 위하여
1.5평 남짓의 폐쇄된 공간에서 꼼짝 않고 행해지는
나의 정적인 그리움과 기다림은 이랬습니다.

09:40분 ; 오늘은 몇 시 쯤에나 도착할련가....
10시 15분 쯤? 아니면 11시 15분 쯤?

10:00분 ; 곧 도착할래나...1분이라도 덜 기다리게 미리 옷이나 입어둘까...

10:05분 ; 설레어 책도 손에 잡히질 않는데 옥창 너머 먼 산이나 바라볼까나...

10:15분 ; 아직 도착 소식이 없는 걸 보면 11시 15분? 1시간 더 기다려야겠네...

10:25분 ; 정말 11시 넘어서 도착할 모양이네...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10:30분 ; 앉아서 다시 책이나 봐야지...

11:00분 ; 담당 부장이 일찍 결재를 받게 되면 10분 쯤 빠를 때도 있었으니
11시 5분 경에 접견 호출이 있을 지도 모르니 준비해야겠네...

11:05분 ; 그 동작 굼뜬 양반이 웬 일로 빨리 결재했을라고...
아무래도 15분께나 되어야 올래나...다시 창 밖이나 내다 볼까...

11:15분 ; 지금 쯤엔 올 때가 되었는데 왜 안 오는 걸까...
담당 부장 결재가 늦는 건가...이 사람들 일하는 게 늘 그렇지 뭐....

11:25분 ; 지난 번 접견 때도 25분 경에 했으니 오늘도 그럴래나...
지금 날 데리러 오는 담당 부장 발걸음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아...

11:30분 ; 이상타, 정말 이상하다...무슨 일이 생긴 건가...
조금 후면 점심 시간인데...
어지간해선 이리 늦은 적이 없었는데...무슨 일일까...
아무래도 면회 오지 못할 무슨 급한 사정이라도 생겼나 보다...
이럴 때 전화라도 할 수 있었으면...
지방 출장 중인가...그런 얘긴 편지에선 없었는데...분명 온다고 했었는데...
일요일날 너무 피곤해서 늦잠을 자 버린 걸까...
아님, 수요일로 면회 일정을 다시 바꾼 것일까...
혹시 엉뚱한 사건에라도 연루되어 구속이라도 당한 건 아니겠지...
에이 이 무슨 재수없는 생각이람...설마 그런 일이야 있을라고...이거 참...
행여라도 아픈 건 아니어야 할 텐데......

12:00분 ; 그래, 오늘은 오지 못하는 걸로 생각하자...
확실히 무슨 급한 사정이라도 생겼나 보다...
오늘 못 보면 수요일 쯤엔 볼 수 있겠지...에라, 보고 싶어도 며칠만 참자...
제발 아프지나 말았으면...나쁜 일 당하지나 않았으면...

12:50분 ; 오늘 날씨가 맑았다가 찌푸렸다 하는 게 꼭 내 마음 같구나...

13:05분 ; "***씨, 면회 !!!"
아니, 이렇게 늦은 시간에 !
드디어 왔다, 왔어 ! 혜송님 만세, 만세, 만세 !!!

위의 내용이 오늘 오전 내내 시시각각으로 변화무쌍하던
나의 기다림과 그리움의 전개 과정이었습니다.
대략 재구성해 놓아서 그렇지 실제는 이보다도 훨씬 초조해 하고 긴장하며
좌불안석하였던 순간들이었습니다.

특히나 평상시 면회 시간이던 11시 15분 경부터
기다림을 끝내기로 결정하던 11시 45분 경까지의 약 30여분 간은
한 순간도 자리에 않질 못하고 동동 거리느라
옥방 마루바닥이 꺼져 내려 앉을 뻔 했답니다.

지난 일주일 간 잘 먹고 잘 찌워 놓은 살집이
오늘 삼심여 분만에 다 날라가 버렸으니
혜송님 보시기에 홀쭉해(?) 보였을 수 밖에요.

내가 말입니다.
살찌는 건 무지 어려운데 살빠지는 건 순식간인 그런 체질이랍니다.
아마 다이어트 중인 세상의 많은 처자들이 이 소릴 들으면
날 만나 보겠노라고 접견실이 북새통이 되지 안을까요.
비법 좀 알려달라고, 순식간에 살 빠지는 그런 비법.

혹시 그런 일이 있다손치면 난 이렇게 점잖게 대답해 줄랍니다.
"아, 그건 말이지요. 누군가를 사무치게 그리워하고 기다리다가
허탕쳐 보십시요. 그러면 한 순간에 살이 쭈우욱 빠져 달아날 겁니다."

살빼기로 고생하시는 세상의 모든 처자 여러분,
누군가를 죽도록 그리워하고 기다리며 사랑해 보십시요.
그리하면 그대들의 숙원이 기필코 이루어지리이다 !

혜송님, 내가 이렇게 살고 있네요.

올해 꽃샘 추위는 유난히도 질긴 듯 합니다.
곱지 않은 날씨들입니다.
더디 오는 만큼 새 봄은 더욱 큰 기쁨과 설레임으로 다가 올 테지요.
기다림과 그리움이 사무칠수록
만남의 기쁨과 설레임도 더욱 크듯이 말입니다.

내일도 참 좋은 하루 맞이하세요 !


오래 전 3월 27일 **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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