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안 쓰고 그래 !"...사랑 서신 제108호





1.
혜송님 보고 나서 날아갈 듯 하네요.
기쁜 마음에, 들뜬 마음에, 행복한 마음에
운동 시간에 농구하면서 덩크슛이라도 가능할 듯 펄펄 날았지요.
밥맛도 꿀맛이고 머리도 무겁질 않아 책 읽는 일도 한층 가벼웁네요.
오늘 밤엔 잠자리도 아늑할 듯 싶은 걸요.

2.
오늘은 시간에 쫒기질 않고 제법 여유로웠지요.
준비한 얘기들 빠뜨린 것도 없는 것 같고.
그래도 눈치 보이대요.
면회 담당자가 출근 길에 돈지갑이라도 주웠던 걸까요.
모처럼 시간 눈치 보질 않는 한가로운 면회를 가졌었네요.
그래봐야 1시간 남짓인 걸.
1시간 정도 약속 시간 어기는 걸 너무도 수이 여기는
바깥 세상 시간 많은 연인들이 무려 1시간이나 되는 긴(?) 만남에
이토록 감읍(?)하는 연인들도 있음을 알까요.
1시간이 주는 여유, 오늘 참 새삼스러웠습니다.

3.
나를 보지 않을 땐 얼굴도 연심도 망각할 듯 하다는
혜송님의 감정이 천박한 게 아니라
그런 걸 두고 인지상정이라 하지 않나요.
눈에 보이면 좋아라 하고
보이진 않을 땐 샐쭉 토라지는 건
세상 많은 연인들의 한결 같은 심보일 겁니다.
세상의 평범한 이치로 보더래도
헤어져 흐리지 않는 얼굴 없고 멀어져 잊히지 않는 얼굴 없다잖아요.
못보아도 안보아도 그 연이 끊길래야 끊기지 않는 혈육과는 달리
연인들 간엔 끊임없는 부대낌을 통해
사랑을 확인하고 다져가는 사랑의 작업은
결혼 이후에도 끝없이 이어가야만 하는 평생의 업이라 할 테지요.
연애도 결혼도 지극히 현실적이어야 한다는 게 나의 지론입니다.
흔히 ‘순애보’란 관념적으로 형상화된
소설에서나 구전을 통해 전해지는 아주 특별한 사례로서의 얘깃거린 아닐까요.
누구나 특별한 사랑의 주인공이 되고픈 꿈을 갖지만
그런 꿈은 아무나 이룰 수 있는 그리 흔한 건 아닐 겝니다.
예나 지금이나 동양에서나 서양에서나
절대 다수 사람들의 평범한 삶 속에선
아무래도 사랑이란 여타의 다른 가치들과 마찬가지로
주고 받는 데서 그 특유의 생동감과 현실감이 우러나고 유지되어 가는
지극히 현실적인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4.
한 나절만 나다녀도 몸이 쉬이 피곤해진다는 걸
나이 탓으로 돌리는 건 건강에 대한 태만이네요.
우리가 육, 칠십 넘은 노인네는 아니잖아요.
내 볼 땐, 나이 탓이 아니고
혜송님의 몸이 활동량을 감당해내기에 버거운 듯 보여지네요.
건강 관리 잘 하세요.
혜송님의 몸이 건강하질 못하면
우리들의 2세 계획은 요원해질 수도 있습니다.
사랑도, 결혼도, 2세도 내겐 처음부터 사치스런 욕심으로 작정된 터였기에
처음부터 없던 욕심을 버리는 일은
남들과 달리 내겐 의외로 간단한 일이 될 수도 있답니다.
지금의 내겐 혜송님의 건강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소중한 욕심이자 소망임을 잊지 않길 바래요.

5.
“왜, 안 쓰고 그래 !”
하하, 혜송님의 토라진 모습이 눈에 선하네요.
아무리 썩은 고목나무처럼 멋대가리 없고 무뚝뚝하대도
샐쭉 토라진 여인네의 흘김 앞에서 버텨낼 재간을 지닌 남정네들이 있을까요.
토라진 혜송님의 모습을 글로서 밖에 볼 수 없음이
마냥 아쉬울(?) 따름입니다.
어느덧 그렇게 되었네요.
지금의 우리들에겐 편지는 마약과도 다를 바 없지요.
사방 밖으로 구두 발자욱 소리라도 들릴라치면
그저 머리 속엔 온통 혜송님의 사랑글에 대한 기대로만 가득하게 된답니다.
혜송님이나 내나
편지글 쓰느라 잠 시간 줄이지 마세요 하면서도
속심은 전혀 그렇지 않은 걸 이거 참 금단 현상도 아니고...
누구는 하루라도 글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댔는데
우린 하루라도 편지글을 읽지 않으면 눈에 가시가 돋을 판이네요.
편지 한 장 받고서
몇 번이고 보고 또 보며 저녁 내내 갖고 놀다가
다음 날 눈 뜨면 ‘또 편지 안 오나’하고
들뜬 기대에 하루 하루를 넘겨가게 되지요, 그렇지요?
징역살이 이거 아무래도 오래 하다간 편집증이라도 생길까 겁납니다.
워낙에 보고 듣고 느끼는 게 제한된 닫힌 공간이다 보니
애착이 가는 사물과 현상에 집착하는 증세가 날로 심해가는 듯
은근히 걱정도 됩니다.
사실, 기다림과 그리움의 아픔을 이겨내는 데는 편지만큼 큰 힘도 없지요.
혜송님이 예전에 말했듯이,
그 어떤 영화도 소설도 우리가 주고받는 편지글만큼
신나고 재미있고 설레는 감동을 안겨주진 못할 성 싶습니다.
혜송님, 혜송님보단 내가 아무래도 시간이 많으니
여기 저기 편지 쓸 곳이 많더래도
혜송님께 글 쓰는 일을 가장 우선으로 열심히 쓸 게요.
이제 그만 토라진 표정 풀고 밥 많이 챙겨 드세요.

6.
오늘은 유정 후배가 정면에 않았대서
혜송님을 찬찬히 살펴보기가 못내 쑥스럽고 눈치보였답니다.
유정 후배가 알기나 할래나, 내 이런 유치한 삐짐을 말입니다.
유정 후배 언제 봐도 씩씩하고 참 고맙고 정겨운 사람입니다.
먼 길 마다 않은 수고와 격려에
무척이나 고마워 하더라고 다시 한 번 인사 전해 주세요.
찰나간이었지만 접견장을 나서는 혜송님의 바지 차림 뒷모습이
참 예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잘 지내요!!
특히, 새벽녘엔 이불 잘 덮어야 합니다!!


오래 전 8월 28일 **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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