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봉우리가 아닌 사람을 보라...사랑 서신 제140호


joone4u님이 촬영한 지리산 천왕봉 정상에서 On the top of CheonwangBong in JiriSan.


영란씨가 눈치를 챘었나 보네요.
천왕봉을 눈앞에 두고서 등정을 마다했다면
뭇사람들이 조성한 작위적인 분위기가 못내 어색했었나 봅니다.

교감이 없는 남녀 간을 짝 지우는 게 쉽지가 앉지요.
다른 사람들의 눈에야 두 사람이 천생연분인 것 같아도
둘 중 누구라도 ‘느낌’이 없으면 말짱 도루묵입니다.
다른 건 다 인위적으로 조장할 순 있어도 그 ‘느낌’이란 것만은
절대 강제할 순 없는 법이거든요.
그런 오고가는 느낌이 없다면
주위에서 아무리 신방차려 불까지 꺼준대도 여보당신 하지는 않을 겁니다.

어쨌거나 산행을 통해 영란씨와 태영씨의 짝 만들기 작업은
겉으로만 보면 도로였네요.
어차피 내숭 떨 나이도 아닌데다 영란씨가 그처럼 자존심도 센 만치
그런 은근한 방법보다는 차라리 정공법을 택했으면 어쨌을까요.

한 가지 아쉬운 게 더 있습니다.
이유야 어쨌든 천왕봉을 코앞에 두고 등정을 포기해버린
영란씨를 혼자 두지 않았더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입니다.
나름 ‘목적을 지닌’ 태영씨가 되었든 그 누구든 간에
그 마음을 헤아려 영란씨 곁에 머물러 말벗이라도 좀 되어 주잖고서
다들 한순간 천왕봉의 일출에 눈이 멀었었나 보네요.
그런 의미에서 당사자인 태영씨를 비롯, 짝 만들기에 공모했던
모두의 작당은 안팎으로 모두 실패한 것이라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사람들이란 으레
물에 대를 담그면 물고기만을 생각하고
산에 오르면 산봉우리만을 생각합니다.

여럿이 함께 산엘 가보면 사람들의 성향이 크게 두 부류로 나뉩디다.
그 한 부류는 산봉우리를 우선 챙기는 사람이고
다른 한 부류는 사람을 우선 챙기는 사람입니다.
산행을 하다 보면,
전자의 부류에 속하는 사람의 눈이 줄곧 산봉우리를 향해 있다면
후자의 부류에 속하는 사람의 눈은
산행 중에 뒤처지는 동료들을 향해 있습니다.
전자가 앞을 본다면 후자는 뒤를 보는 거지요.
내가 예전에 몸담았던 공장의 산악회 동료 중에 모씨가
딱 그런 후자에 속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매번 산행 때마다 이 사람이 정상을 먼저 밟는 걸 본 적이 없습니다.
체력이 안돼서도 아니고 게으름을 피워서도 아니건만
그는 언제나 꼴찌였습니다.
산행 중에 가장 뒤처진 사람들의 까진 발을 치료해주거나 무거운 짐을 나누며
후미에서 온갖 궂은일을 다 챙기다 보니 그랬던 겁니다.
뒤처진 동료와는 말벗하면서 보조를 맞추고
때론 등정이 불가능한 동료가 있으면
기꺼이 함께 등정을 포기하여 소외된 동료를 배려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말 그대로 ‘산봉우리를 보지 않고 사람을 보던’ 사람이었습니다.
체구는 자그마했지만 그는 산보다 더 커 보였던 사람이었습니다.
산에서만이 아닌 일상생활에서도
한결같이 향기롭고 신뢰가 가던 사람이었습니다.

어떤가요, 혜송님.
오늘 내 얘기가 천왕봉 일출만한 값어치는 되나요?
살면서 ‘산봉우리만 보지 말고 사람을 보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합니다.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영란씨와 태영씨가
좋은 느낌, 좋은 인연으로 맺어지기를 기대하겠습니다.

산행 후 뻐근해졌을 종아리 주물러주는 건 나중으로 미루겠습니다.


오래 전 11월 14일 **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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