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밤 먼 산 뻐꾸기의 청아한 울음...사랑 서신 제075호


어제 밤엔 깊이 잠들었다가 깊은 밤 까닭없이 문득 깨었습니다.
깨어 보니 먼 산 어디선가 뻐꾸기 울어예는 소리가
지척인 듯 어쩜 그리도 낭랑한지요.
자다 깨어 한참을 옥창에 기대서서 상념에 빠졌더랬습니다.

깊은 밤, 옥창을 넘어오는 뻐꾸기의 청아한 울음 소리 !

혜송님, 이거 뭔가 의미 심장한 영화의 오프닝 무드 같질 않나요.
실제로 어제 밤 별안간 솟아나는 어떤 느낌으로 해서
한순간 머리가 텅 빈 듯 했습니다.

금새라도 도 통할 것 같은 느낌 !

허나 그 찰나간의 느낌은 이내 꺼져버리고 말았답니다.
역시 도는 아무나 통하는 게 아닌 모양입니다.
아니, 사실은 혜송님의 모습이 불현듯 떠오르며
그 도통하려는 듯한 느낌을 지워버렸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그런 탓에 도 통하려는 수도자들이
속세와의 연을 끊고 깊은 산사로 들어가나 봅니다.
속세는 아무래도 득도를 방해하는
온갖 미련과 집착과 상념들의 진탕이기 때문일 겁니다.

아무튼 어제 밤 내가 도 통할 것 같은 그 순간에
혜송님이 나타나지 않았으면 큰 일 날 뻔 했습니다.
그런 말이 있잖아요.
도는 장님이 눈을 뜨듯 어느 한 순간에 홀연히 깨쳐진다잖아요.
어쨌을까요, 깊은 밤 옥방에서 자다 깨어
뻐꾸기 울음 소리에 도가 트여 모든 속세와의 연을 끊고
어느 이름모를 심산유곡을 감아도는 한 줄기 바람인 양
휘적휘적 산길을 따라 걷는 나의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혜송님이 처녀 귀신 될 뻔 했던 아찔한 순간이었습니다.
고승의 득도를 훼방하는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구미호(?) 같은 혜송님,
아닐새라 그걸 눈치채고 그 늦은 밤에 자다 깨어
나의 득도를 방해한 것이었지요 ?

꿈 깨세요 !
얼른 냉수 마시고 정신 차리세요 !
혜송님의 호통이 어제 밤 뻐꾸기 소리와도 같이 낭랑해져오니
엉터리 수도자의 억지 소리는 예서 멎겠습니다.

채근담에서 이런 구절을 보았습니다.

聽靜夜之鐘聲(청정야지종성) 하여는 喚醒夢中之夢(환성몽중지몽) 하며
觀澄潭之月影(관징담지월영) 하여는 窺見身外之身(규견신외지신) 이니라
(고요한 밤 종소리를 듣고 꿈 속의 꿈을 불러깨우며
맑은 연못의 달 그림자를 보고 몸 밖의 몸을 엿본다)

이 경구의 의미는 고요한 밤의 종소리와 연못 속에 비친
달 그림자를 통해 인생 그 자체가 덧없는 꿈과 같을진대
그런 인생을 살면서 또 부질없는 욕망들에 사로잡혀 아옹다옹하는
어리석음으로부터 깨어나 인생의 허상과 본질을 참되게
통찰하게 된다는 뜻일 겝니다.
어제 밤 옥창에 기대서서 뻐꾸기 소리를 들으며
나의 뇌리를 스쳐 지나던 어떤 상념들과
유사한 느낌이 있어 채근담을 인용해 보았습니다.

이젠 제법 살 만큼 살고 닳을 만큼 닳기도 하겠건만
이렇듯 가끔은 사춘기적 감수성으로
세상을, 인생을 음미해 볼 때가 있습니다.
사실 난 행여라도 도가 통하는 걸 원치는 않는답니다.
그렇대매요, 도통한 사람의 눈엔 인생 세간의 모든 일이
헛되고 헛된 뜬구름 처럼 보인다면서요.
여차저차해서 내가 진짜 도라도 통할라치면
혜송님의 이쁜 모습도, 우리들의 사랑도
다 부질없이 뭉그러드는 한 조각 뜬 구름 같이 여겨질진대
그건 너무 끔찍스런 일이지 않겠습니까.

이 독거 선방(?)에서 벗어날 날이 머잖았다는 게 정말 다행입니다.
아무래도 담장살이를 몇 년만 더 하게 되믄 웬지 도 통할 것 같아서요.
근데 난 아마 평생 도 통하긴 글렀습니다.
혜송님이 천년 구렁이처럼
내 머리 속 가득 또아리 틀고 앉았으니 말입니다.

어제 밤, 처음엔 깊은 산사 어느 현자의 메시지처럼 들려오던
뻐꾸기 울음 소리가 종내는 혜송님이 날 부르는 소리가 되고 말던 걸요.
그렇게 그렇게
혜송님은 어느덧 이젠 나의 온 몸 온 마음 속에 스며든
또 다른 내가 되었습니다.
그렇네요, 어제 밤 뻐꾸기 울음이 내게 남긴 깨달음이란
바로 혜송님과 내가 몸은 떨어져 있어도
서로를 향하는 마음만은 하나라는 것이었네요.

나의 반쪽, 또 다른 나에게 사랑과 행운을 !!!


오래 전 6월 4일 **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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