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아, 너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사랑 서신 제099호





“사랑아, 너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사랑은 인생이라는 이름의 기나긴 산문 가운데 예비된
아름다운 한 편의 시, 찬란하게 타오르는 한여름밤의 불꽃놀이다.
사랑은 청명한 아침 신비스럽게 눈뜨는 한 송이의 꽃,
생명의 순수한 장에서 벌어지는 존재의 축제다.

사랑은 진리요, 사랑은 길이며,
사랑은 선의 선, 미의 미, 온갖 참된 것의 근원이다.
사랑은 깊고, 사랑은 드높다.
사랑은 우리를 정열의 격랑 속에 휘몰아 넣기도 하고,
견고한 기쁨과 폭발할 것 같은 환희의 세계로 인도하기도 한다.

사랑은 꿈이다
사랑은 안개, 사랑은 미로이며,
사랑은 불가해한 영토에서 일어나는 포착할 수 없는 율동이다.
사랑의 선율은 우리를 환희와 함께 비탄의 감정 속으로 빠뜨리며,
사랑의 채색은 우리를 경탄과 더불어 눈물의 나라에 몰입시킨다.

사랑은 빛이다.
그 빛 앞에서 우리의 가엾은 이성은 눈을 잃고 맹목이 되어 버린다.
그러나 사랑하는 이는 제3의 눈을 갖는다.
그 눈은 자기 도취의 눈이며, 신비를 투시하는 눈이다.
사랑의 눈은 어리석은 자의 눈이면서 동시에 가장 용기있는 자의 눈이다.

등반과도 같은 우리의 삶,
그늘에 가려져 있는 풀딸기 같은 사랑이 아니었다면
그것은 얼마나 가혹한 여로가 되었을까.
사막처럼 메마른 인정의 세태 속에서
나를 잊은 채 너를 위해서 가슴 졸이는 사랑의 우물물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작렬하는 가혹한 태양열을 견뎌낼 수가 있었겠는가.

사랑은 남풍이다.
사랑의 마음은 가장 연약한 것들 중에서도 가장 연약하고,
사랑의 결은 가장 부드러운 것들 중에서도 가장 부드럽다.
사랑은 갈릴리 호수 위에 잔잔한 물결을 일으키는 한 줄기의 미풍,
그러나 히말라야의 준령을 뒤덮은 겨울의 혹한도
이 연약한 ‘어린 생명’을 거역할 수는 없다.
그것은 시작되는 곳도 없이 태어나고,
어떤 목적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순수한 꽃을 피운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미묘하게 작용하며,
보상을 바라지 않는 풍성한 수확을 낳는다.

사랑은 모든 것들의 어머니이다.
그것은 바다며 하늘이요, 대지를 적시는 자애로운 봄비다.
사랑은 거대하면서 섬세하고, 웅장하면서도 따뜻하며,
영원하면서도 현실적이다.
사랑 속에서 우리는 신과 진리의 현현을 보고,
사랑 속에서 우리는 절대와 무한을 체험한다.
그것은 언어 논변에 때묻지 않은 참된 앎이며 참된 삶이요,
우리가 마침내 겸허하게 귀의하여야 할 궁극의 위 격이다.

‘비온 뒤의 햇살같이’ 사랑은 그렇게 스며든다.
한 자락의 달빛이 은령 위에 떨어지듯이 사랑은 그렇게 은근하다.
그런가 하면 사랑은 불현듯 다가와
우리로 하여금 채 경이의 탄성을 지를 여유조차도
허락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미처 사랑을 예비하는 ‘마음의 치장’을 마치기도 전에
벌서 사랑의 한 가운데에 서 있게 될 때,
우리는 그 사랑이 끝나기까지는
자신이 사랑 속에 있음을 미처 알지 못한다.

사랑은 하나의 마법이다.
따라서 사랑은 그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은 ‘무엇 무엇이다’라는 말 속에 가둘 수가 없다.
사랑을 넣고도 비좁지 않은 목장은 없다.
사랑이 살기에 모자라지 않을 만큼의 영토를 가진 제국은 없다.
그러면서도 사랑은 모든 존재 속에,
모든 인간 속에 깃들 수 있을 만큼 미세하고 미묘하기도 하다.
사랑은 결코 ‘무엇 무엇’이 아니다.
또한 사랑은 그 모든 것 바로 그것이다.

사랑은 참된 생명, 참된 자기에의 눈뜸이다.
사랑이 우리 속에 깃들고,
우리가 사랑 가운데 머물 때 세계는 뚜렷한 그 본래의 모습을 드러낸다.
평범한 일상이 신선하게 눈을 씻고 다가오며,
권태롭던 하루하루가 빗물에 씻긴 신록의 생생함으로 우리를 매혹시킨다.
사랑의 고운 선율은 맑은 아침 공기 속에
청아한 웃음소리와 함께 흐르고,
사랑의 아름다운 승화는 섧게 죽어간
우리의 덧없던 지난 날들조차 찬란한 성좌로 오늘에 부활시킨다.

사랑은 우리의 가슴을 떨게 한다.
사랑은 우리의 두뇌를 무력화시킨다.
또한 사랑은 우리의 영혼을 뿌리째 뒤흔들어
저 가을 하늘처럼 드높은 감동과 감명의 세계로 인도한다.
사랑은 선연한 전율을 동반하는 거역할 수 없는 파도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수많은 말과 개념을 나열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사랑의 개념은 다만 사랑의 개념일 뿐이다.
그리고 또한 우리는 알고 있다.
결국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
고정 불변하는 개념으로서의 사랑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은 생명력의 빛나는 현현이다.
사랑은 생동하는 것이다.
사랑은 ‘살아 있음’이다.
살아 있는 것은 결코 정체하는 것일 수 엇다.
사랑은 변해야 하며, 변할 수밖에 없고,
그 변화는 성장을 의미하는 것이어야 한다.
사랑은 탄생되어야 하고, 사랑은 가꾸어져야 하며, 사랑은 창조되어야 한다.
정지하고 있는 사랑은 이미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사랑의 차디찬 시신, 사랑이 남긴 껍질이요, 잔재일 뿐이다.
사랑은 결코 없다.
과거 완료의 사랑, 현재 완료의 사랑이란 없다.
단지 ‘사랑하는 창조 행위’가,
현재 진행형의 사랑이 있을 뿐이다.

어떤 철학자도, 그 어떤 논변가도 사랑을 분석하지는 못한다.
그것은 결코 객관화시킬 수 없다.
분석을 위한 메스가 닿는 순간 그것은 죽어버린다.
차디찬 과학의 객관적 시선 앞에
사랑은 그 본질을 결코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사랑은 자로 잴 수 없고, 저울로 가늠할 수 없으며, 수치로 환산할 수 없다.
사랑은 결코 현미경으로 관찰할 수 없다.
사랑의 원리는 태양과 같다.
스스로의 힘으로 생성하고 소멸하면서,
태양의 살아 있음은 결코 중지되지 않는다.
태양은 영원히 변함없으나 그 변함없음은
결코 정지된 변함없음이 아니라 살아 있는 유구함이다.

또한 사랑의 원리는 새의 노래함과 같다.
그것은 논리가 침투될 수 없는 장에서 일어나는 완벽한 존재 양식이다.
누가 새의 노래함을 보거나 듣지 못한 자에게 전할 수 있을까?
‘새가 노래한다’고 우리는 말한다.
그러나 그 순간 새는 노래를 멈추었거나,
호흡을 가다듬었거나, 음조를 바꾸었을 것이다.
‘새가 나뭇가지에 앉아 울고 있다’고 우리는 말하리라.
그러나 그것은 이미 지나간 순간의 일일 뿐,
지금 이 순간 새는 벌써 나뭇가지를 떠났다.
또는 지금 이 순간 다른 모양으로 가지가 흔들리고,
다른 광선이 허공 주에 비쳐들었으며,
문득 바람결에 실려서 물소리가 맑게 들려오기 시작하였다.
흐르는 모든 것, 살아 잇는 모든 것은
결코 그것에 참여하지 못한 자에게 전달할 수가 없다.
따라서 사랑 또한 그 누구에게도 전달할 수가 없다.

사랑은 살아 숨쉬는 하나의 생명이다.
그 생명을 박제화시키지 않는 한
그것은 도저히 객관화시키거나 제시할 수가 없다.
사랑은 체험이며, 그것은 존재의 가장 심오한 부분에서 일어난다.
그것은 결코 논리화, 언어화, 객관화시킬 수 없는 그 무엇이다.
나의 사랑은 다만 나의 사랑이며, 너의 사랑은 너의 사랑이다.
그것은 결코 그 무슨 ‘소유물’처럼 드러내 보이며 자랑할 수 없고,
교환 가치를 가지고 있지도 않으며, 소비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사랑은 절대의 자산이다.
그것은 신조차도 앗아갈 수 없는, 생명보다도 우선하는 가치이며,
소유하거나 소비될 수도 없고 다만 표현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사랑은 줄어들지 않는다.
‘소유물’은 소비할수록 줄어든다.
그러나 사랑은 표현할수록 풍유해진다.
이는 사랑의 세계가 결코 수치나 합리의 세계가 아님을 뜻한다.
인간이 추구하는 모든 가치들은 교환 가능성 때문에 유용할 뿐이다.
따라서 그것은 절대의 가치가 아니라 유동적이며 상대적인 가치일 뿐이다.
다만 사랑만이 절대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사랑만이 독립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사랑은 결코 보상을 바라지 않는다.
거저 사랑할 분이다.
사랑은 결코 ‘무엇 무엇’ 때문에 사랑하지 않는다.
그냥 사랑할 뿐이다.
이 ‘거저’와 ‘그냥’은 순수의 다른 이름이다.
거기에 아무런 이기심이 없다.
거기에 불순한 어떤 티끌 하나도 없다.
사랑에는 까닭이 없다.
사랑에는 이유가 없다.
따라서 사랑의 봉사는 결코 봉사가 아니며,
사랑의 희생은 결코 희생이 아니다.
봉사하는 자의 자각이 거기에 없고,
희생당하는 자의 에고가 거기에 없을 때
그것은 결코 봉사나 희생이 아니다.
그것은 생명의 축제, 존재의 하모니라 불려야 마땅하다.

그러므로 결코 사랑에 ‘순’하다고 말하지 말라.
그것은 사랑에 대한 모독이다.
순애의 주인공들은 결코 슬퍼한 일이 없다.
그들은 결코 두려워하거나 망설이지 않았고,
고통스러워하지도 않았다.
이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사랑 속에서는 죽음조차도 축제이기 때문에.
다만 그런 절대의 사랑을 체험하지 못한 자들이
‘가장 드높은 기쁨의 죽음’을 일컬어 ‘순애’라고 부르는 것 뿐이다.
이는 아주 세속적인 표현이다.

유한한 존재인 우리는 오직 사랑 속에서만 무한에 참여할 수 있다.
사랑하는 자의 ‘지금, 여기’는 곧 영원과 절대이다.
사랑하는 동안 우리는 피조물인 채 신의 영역에 참여하고,
사랑 속에서 우리는 모든 불평등과 무지의 근원인
자아의 견고한 굴레에서 해방된다.
내가 사랑 속에 구속되었을 때 그 구속은 도리어 참된 해방이 되고,
내가 사랑에 부림을 당하는 한
나는 오히려 참으로 자유로운 자가 될 수 있다.
자기를 잃음으로써 오히려 모든 것을 소유할 수 있다는
역설적 진리가 사랑을 통해서처럼 극명하게 제시되는 경우는 드물다.

사랑은 조화이다.
오직 그것을 통해서만이 우리는 참된 평화에 도달할 수 있다.
사랑은 모든 개성과 특성을 부정하지 않은 채
각각의 개성과 특성이 행복하게 조화할 수 있게 한다.
사랑을 통해서 우리는 개성을 손상당하지 않고
보편의 세계에 발디딜 수가 있다.
사랑 속에서 남성과 여성은
저울질, 경쟁, 대립, 적대의 관계가 아니라 조화의 관계가 된다.
사랑 속에서 인종과 인종이, 신념과 신념이
대치가 아니라 조화의 관계가 된다.
바이올린이 바이올린임을 인정하는 피아노,
피아노가 피아노임을 인정하는 바이올린이 참된 협연을 가능하게 하듯이,
너가 너임을 인정하는 관계가 참된 사랑을 가늠하게 한다.
조화는 결코 동화가 아니다.
그것은 전혀 다른 차원에서의 만남이며,
그 만남은 지극한 행복감을 창출하게 된다.

사랑은 유일한 참된 관계이다.
어떤 사람의 삶의 무게는 그가 관계지은 사람의 총화에 지나지 않는다.
사랑의 풍요함은 곧 삶의 풍요로움이다.
사랑의 창조는 곧 삶의 창조이다.
사랑은 우리의 소망이다.
사랑은 우리의 믿음이다.
사랑은 우리가 갈구하는 최후의 것이다.
사랑이 사랑하기를 그칠 때 우리에게 남는 것은 절망 뿐이다.
사랑이 변절될 때 우리에게 남는 것은 암흑 뿐이다.
사랑이야말로 우리가 붙들고 신뢰할 수 있는 마지막 이상이며,
사랑이야말로 우리가 전생애를 바쳐 궁구하지 않으면 안될 최선의 가치이다.
자기애의 변형으로서의 사랑이 아니라
순수한 생명의 정수요, 정화로서의 사랑,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활현해야 할 생의 지표이다.

그리고...그리고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사랑함’이어야 한다.
단 한 순간의 ‘사랑함’이야말로 천만어의 사랑 예찬을 능가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론을 읽고 그것을 버린다.
그리고 우리는 ‘사랑’이 아니라
‘사랑함’의 저 찬란한 빛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대여, 먼동이 트고 있다.
희뿌연 새벽 안개 속에 하늘은 신선한 새 하루를 잉태하고 있다.
사랑을 ‘아는 자’가 아니라, 사랑을 ‘하는 자’가 되라.
그대가 사랑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그대를 일으키게 하라.
그리하여 존재의 근원으로 돌아가 순수하게 꽃피어나라.
거기 그 어떤 의미도 부여할 수 없으리만치 참되고 선하고 아름다운
저기 저 겸허한 장미 한 송이처럼.....



혜송님, 아닌 밤중에 이 무슨 장황한 사춘기식 사령 타령인가 싶지요?
위의 사랑 타령은 제가 쓴 글이 아니고 김정빈이란 시인의 사랑 예찬론입니다.
‘사랑은 장땡이다’이다 하면 될 것을
사랑을 예찬하는 시인의 욕심이 다소 과했던 탓일까요.
다소 지리한 중언부언과 견강부회식의 억지도 엿보이지요.
허나, 사랑의 열병을 현재진행형으로 앓고 있는 이들에겐
위의 사랑 예찬론의 열 배, 백 배 되는 장론도
그들의 아리고 시린 가슴을 메울 수는 없을 듯도 하네요.
시인의 말마따나 사랑에 참여하지 못한 이들에게사
위와 같은 사랑 예찬은 그저 지리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겠지요.
아마도 시인은 시리도록 지독한 사랑의 열병을 앓은 경험이 있나 보네요.
세상의 많은 연인들의 그것처럼...

사람들 저마다 생김이 다른 만큼이나 사랑 또한
각양각색일 터이지만 그 어느 사랑일지라도 소중하지 않은 사랑이 있을까요.
세상의 모든 연인들의 사랑의 형태가 천차만별일지라도
다만 한 가지 세상의 모든 연인들이 동의 가능한 사랑의 정의가 있다면
그건 ‘사랑은 가슴으로 하는 것’이란 생각을 가져 보았습니다.

오늘 밤엔 혜송님과 함께 꿈속에서라도
가슴사랑 주전자에 오이채 가늘게 썰어 넣은 소주 한잔 나눠보고 싶습니다.
참, 혜송님의 막내 동생 직접 보니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살갑고 정겨웠습니다.
그래서 이 밤, 준비되어야 할 소주잔은 세 개입니다!!!


오래 전 8월 3일 **옥에서

0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