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변에 약산 진달래꽃...사랑 서신 제196호



이 글부터는 글보다 내가 먼저 혜송님에게로 갈지도 모르겠네요.
몸은 이미 담장 밖인데 뒤차 타고 오는 감옥으로부터의 편지라?
묘한 맛이 날 것 같은데요.

봄이 왔다 갔다 합니다.
이곳의 내일 아침 최저 기온이 영하 5도까지 내려 갈 거라네요.
바람이 봄꽃 피는 걸 시기하는 ‘꽃샘추위’가 아니라
나의 출소를 샘하는 감옥의 ‘옥샘추위’인 양 합니다.
어제 봄비 내릴 때는
‘이 비 그치면 십오 척 담장 따라 싱그러운 풀빛이 짙어 오것다’ 싶더니만
웬걸 싱그러운 풀빛은커녕 징그러운 꽃샘 한파가 짙어오네요.

이 지역의 겨울이 꼬리가 길다고들 하더라만 올해는 유독 더해 보입니다.
이곳에서 맞는 세 번의 봄 중에서 가장 더딘 봄인 듯 느껴지는 것도
어쩌면 다 내 맘 급한 탓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봄’ 타령한 김에 어느 책에서 본
‘진달래꽃에 얽힌 사랑’ 이야기 하나 옮겨보겠습니다.
이미 아는 얘기일련지도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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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평안도 땅 영변 고을 약산은 진달래꽃으로 아주 유명합니다.
얼마나 유명하냐고요?
아무려나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이라는
소월의 시구만큼은 모르는 이가 없지 않겠어요?

누구나 알고 있듯이 진달래꽃은 우리나라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꽃입니다.
봄철만 되면 우리나라의 모든 산과 들에서 진달래꽃이 피지요.
그런데도 유독 평안도 땅 영변 고을 약산의 진달래꽃이
그처럼 유명하게 된 것은 까닭이 없는 것도 아니랍니다.

옛날, 그 약산 기슭 작은 마을에 한 젊은이가 살았습니다.
젊은이는 너무너무 가난했습니다.
남의 집 품팔이도 하고 산에 올라가 부지런히 나무를 해다가
시장에 내다 팔기도 했지만 살림은 조금도 나아지질 않았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젊은이는 앓아누워 계신 홀어머니를 보살펴 드려야 했거든요.
돈을 버는 대로 어머니의 병구완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약값이라는 건 가난한 사람의 사정 같은 것과는 아랑곳없이
턱없이 비싼 법이어서 젊은이는 내내 가난에 쪼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봄날이었습니다.
젊은이는 어느 아름다운 아가씨를 만나 그만 사랑에 푹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걸 어떡합니까.
그 아가씨는 바로 이 고을 원님의 무남 외동딸이었으니 말입니다.
가진 거라곤 한 푼도 없는 가난한 젊은이로선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황송할 뿐인 귀한 아가씨를 감히 사랑하게 되었으니!
그건 참으로 여간 딱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젊은이는 물불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아가씨를 한 번 본 순간 가슴 속에서 뜨거운 불이 활활 타올랐기 때문입니다.
젊은이는 앞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아가씨를 붙들고 자기의 뜨거운 마음을 호소하였습니다.
정말이지 아름다운 소녀였습니다.
일과 어머니를 돌보는 것 밖에 모르던 젊은이에게
그 아가씨는 마치 선녀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얼굴이 곱다고 해서 마음씨까지 고운 것은 아니지요.
더구나 원님의 외동따님쯤 되고 보면
좀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점이 있게 마련입니다.
바로 그 아가씨가 그랬습니다.
금이야 옥이야 응석받이로 자란데다가
무어든지 부탁만 하면 다 들어주는 사람들 사이에 있었기 때문에
여간 도도한 게 아니었지요.

“좋아요! 그런데 당신은 내게 무엇을 해줄 수가 있지요?”

하고 아가씨는 말했습니다.

젊은이는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가진 것 없는 자기를 비웃고 있는 게 분명했습니다.
아가씨의 거만한 눈길은 젊은이의 아주 아픈 곳을 건드리고 말았습니다.
젊은이의 눈은 활활 타올랐습니다.
그는 큰 결심을 한 듯
입을 굳게 다물고 침을 꿀꺽 삼키더니 마침내 소리쳤습니다.

“무엇이든지! 무엇이든지 해드리지요! 아가씨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그러자 아가씨는 차가운 표정으로 웃었습니다.
그것은 아주 짓궂은 데가 있는 웃음이었습니다.
‘정말이에요?’하는 것과도 같고
‘아마 할 수 없을 텐데요!’하는 것도 같은 웃음이었지요.
아름다운 대신 좀 쌀쌀하고 짓궂은 데가 있었던 그 아가씨는
조용히 손을 들어서 아래쪽을 가리켰습니다.
아가씨가 가리킨 곳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었고,
그 절벽 깊은 한 가운데에는
붉은 진달래꽃 한 무더기가 소담스레 피어 있었습니다.

“저 꽃을 꺾어다 주시겠어요? 당신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표시로 말이어요.”

비웃음을 띠며 아가씨가 이렇게 말했을 때 모두들 깜짝 놀랐습니다.
도대체 누가 저 까마득한 낭떠러지에 내려가서
진달래꽃을 꺾어 올 수가 있단 말인가요.
공중을 날아다니는 새가 아닌 다음에야 말입니다.
대담하고도 깜찍한 소녀였습니다.
사람들은 옆에서 숨을 죽이고 젊은이의 대답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이 어찌된 일입니까!
젊은이는 아무 불평도 없이 바위를 타고서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젊은이는 마치 넋이 나간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지켜보던 사람들은 모두 새파랗게 질리고 말았습니다.
놀란 것은 깜찍한 제안을 던진 아가씨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아가씨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핼쑥하게 바뀌었습니다.
모두들 개미소리 하나 없이 젊은이의 무서운 집념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사랑에 취한 젊은이의 몸은 마치 잔나비와도 같이 날렵했습니다.
그리하여 젊은이는 마침내 그 소담스러운 진달래꽃을 꺾었고,
땀을 비 오듯 쏟으며 위쪽을 바라보고는 싱긋 웃어 보이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같은 승리의 웃음도 잠시뿐,
젊은이는 한순간 몸을 기우뚱하더니 그만 저 까마득한 벼랑 아래로 떨어져
지푸라기처럼 흔들리며 아득하게 사라져가고 말았습니다.

잠시 후 사람들이 가위눌린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아! 하고 정신을 차렸을 때였습니다.
이번에는 새파랗게 질려 떨고 있던 아가씨가
몸을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리더니 젊은이의 뒤를 따라
그 깊은 벼랑 속으로 빨려들 듯 미끄러져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두 사람의 꽃다운 생명을 삼킨 깊은 골짜기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고,
다만 바위 위에는 몇 방울의 붉은 피가 점점이 스며 있을 뿐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젊은이와 아가씨의 무덤을 나란히 만들었습니다.
이듬해 봄이 오자 그 무덤가에는 유난히 더 붉고 짙은 진달래꽃이 피었습니다.
그리고 진달래꽃은 불이 번지듯 번져서 온 골짜기와 산을 붉게 물들였습니다.
사람들은 그 진달래꽃이야말로 두 젊은이의 넋이며 사랑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지금도 평안도 땅 영변 고을 약산은
봄철만 되면 온통 짙은 진달래꽃 속에 묻히게 됩니다.
그걸 보고서 소월 시인은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하는 시를 지었던가 봅니다.
어쨌거나 분홍빛 아름다운 진달래꽃에 얽힌 이 슬프고 안타까운 이야기는
아직까지 남아서 사람들로 하여금
한 젊은이의 불타는 사랑을 생각하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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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연인들을 위해 이 봄을 축복합니다.
아울러 진달래꽃처럼 붉고 짙은 사랑들을 나누기를 희망합니다.


오래 전 3월 17일 **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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