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프킬러가 봉숭아를 먹었네요!...사랑 서신 제101호


혜송님, 봉숭아 안부를 물었지요.
이럴 땐 쥐구멍이라도 있어야 하는 건데
말 그대로 감방이란 곳이 어디 쥐구멍이라도 하나 있으면
이미 그건 감방 자격을 상실한 것이겠지요.

봉숭아가요, 글쎄 그 봉숭아가, 우리들의 봉숭아가
그만 에프킬라 먹고 망했답니다.
꽃이란 게 물 주고 햇볕만 잘 쬐면
지대로 크는 줄 알았던 무지가
우리들의 예쁜 봉숭아를 잡고 말았네요.
이상하게 얼마 전부터 봉숭아 잎 끝이 시들시들 말라 들기에
원인을 몰라 안절부절하고 있었댔는데
며칠 전에서야 그 원인을 확연히 깨달았습니다.

2~3일 전에 문득 봉숭아 잎 사이사이에 진딧물 비슷한 게
다닥다닥 붙어 있는 걸 보고 냅다 에프킬라를 아낌없이 분사했지요.
그 옛날, 약이 턱없이 부족하던 시절,
빨간 약(일명 아까징끼-아래지방에선 이리 불렀답니다)과
안티푸라민을 만병 통치약으로 여기고선 배탈이 나도 이런 약을
배에 갖다 바르던 그 무대뽀 심정과도 같은 것이었을까요.
모기든, 파리든, 바퀴벌레든, 화초에 앉은 진딧물이든
일단 해충들은 무조건 에프킬라를 발사하고 볼 일이다는 나의 무지가
결국은 일을 내고 말았던 겁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에프킬라 잔뜩 먹은 봉숭아의 참혹한 형상!
잎과 줄기의 절반 이상이나 시커멓게 타들어서는
나를 원망키라도 하는 듯 축 늘어진 봉숭아!
어지간히도 미안스럽더군요.
간밤에 겪었을 고초를 떠올리자니
봉숭아에게 내가 참으로 몹쓸 죄를 짓고 말았네요.
이전부터 조금씩 잎 끝이 삭아 내린 것도 모기 쫓느라
뿌려대는 에프킬라가 그 원인이었던 걸 아뿔싸...
한창 예쁜 분홍빛 꽃잎을 틔워 내고 있었댔는데
졸지에 이런 낭패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를 어찌하나요.
그간에도 봉숭아가 얼마나 괴로웠을까요.
인간들의 무지가 동식물을 포함한 자연환경들을
얼마나 해꼬지하고 괴롭히고 있을 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

좋은 소식이 못되어서 은근 슬쩍 넘어갈까 했는데
혜송님이 여적지 봉숭아를 기억하고서 안부를 물어 오니
감방에는 없는 쥐구멍, 억지로라도 하나 파두어야 할까 봅니다.

한 달여 전에 했던 봉숭아 꽃잎 먼저 피우기 내기는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나의 무지 탓에 말짱 도루묵이 되고 말았네요.
밑둥만 덩그러니 남은 봉숭아를 볼 때마다
게림칙하고 떨떠름합니다. 허전하기도 하고요.
이 여름, 거미와 더불어 감방 안 나의 소중한 식구였는데.....
이 적막한 공간에서 봉숭아가 내게 준 생기와 즐거움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나의 무지가 봉숭아에겐 은혜를 원수로 갚고 만 꼴입니다.

가을이 오면, 이번 일을 거울삼아 다시 한 번 도전해 볼랍니다.
이번엔 무슨 꽃을 키울 지 혜린 님이 정해 보세요.
에프 킬라 먹고도 끄떡없는 그런 꽃 어디 없을까요?
이건 너스레고 이번엔 모기에게 내 살 다 뜯기는 한이 있더래도
꽃들에게 에프킬라 없는 맑은 공기를 제공토록 노력해 볼 게요.
이번 가을엔 정말 꽃 잘 피워서
접견실에서 혜송님께 보여 줄 작정입니다.
사실, 봉숭아도 두 그루 모두 꽃을 잘 틔우면
접견 때 자랑하려 마음 다잡고 있었는데 이게 웬일이랍니까.

반성하는 의미로 오늘 밤은 에프킬라 뿌리지 않고
봉숭아를 대신하여 모기들이 주는 형벌을 달게 받잡도록 하겠습니다.

혜송님,
이래 저래 어수선한 통에 이번 주엔 글을 많이 써질 못했네요.
여러모로 심란할 터인데 텅 빈 우체함이
기운을 더 빼 놓진 않을런지......
그리고, 토요일 일요일 주말 면회는
오늘처럼 시간에 쫒기는 경우가 십중팔구이니
여건이 된다면 가급적 피해가는 게 낫겠습니다.
장시간을 허겁지겁 쫓아와서는
시간에 쫓기운 짧은 만남 후엔 혜송님이나 내나
밀려오는 아쉬움과 허전함을 감내키가 힘들잖아요, 오늘처럼.

혜송님,
꿈에서라도 못 다핀 봉숭아 분홍꽃 활짝 핀 꽃밭에서 산책해 봅시다.
좋은 꽃꿈, 예쁜 꿈 꾸며 잘 자세요!!


오래 전 8월 12일, **옥에서

0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