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의 업보...사랑 서신 제025호



여보, 그간 잘 있었소.
며칠 동안 막바지 추위가 기승을 부리더만
오늘 한 낮의 햇살에선 완연한 봄의 기운을 느낀다오.
........
....................

당신과 도희에게 함지박만큼이나 둥글고 변함없는
나의 사랑을 별빛에 실어 보냅니다.
도희에겐 아빠가 오늘 밤 꿈 속에 찾아갈 것이라 귀띔해 주구려.
문 단속 잘하고 좋은 꿈 꾸고
개운한 아침을 맞이하길 빌며..

**년 *월 *일 도희 아빠가.


혜송님,
오늘 글은 참 생뚱맞게 시작되었지요.
오늘 도희와 도희 엄마에게 보내는 편지 내용의 일부입니다.
도희 ?, 도희 엄마 ? 도희 아빠 ?

내가 쓴 글이지만 내가 도희 아빠가 아닌 건 분명합니다.

'도희 엄마'는 도희 엄마이구요.
'도희 아빠'는 도희 아빠랍니다.
'도희'는 담장 안 이웃인 A씨의 외동딸이랍니다.

A씨는 내가 수용된 사동에서 함께 사는 두 방 건넌 이웃입니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이 곳 이웃들은 글쓰기보다는 주먹쓰기에 능한 분들이 많은 지라
글쓰기를 죽기보다(?) 싫어하고 힘들어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떤 이에게는 가족들에게 편지 한 통 쓰는 일이
선무당 첫 굿 치르는 만큼이나 요란스럽고 대단한 행사같아 보입니다.
편지 한 통 쓰는데 몇 날 몇 일이 걸리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아내는 하루가 멀다 하고 편지를 보내오건만 몇 달이 가도록
답장 한 편 변변이 보내지 않는(못하는?) 무뚝뚝이들도 있지요.

그러니 그들에게 '글쟁이'로 보이는 공안수들은
그들이 죽기보다 싫어하는 일을 대행해 줄 담장 안의 대서방인 셈이지요.
때 마다 부탁하기가 뭣한지
한 번에 서너 통의 다른 내용을 담은 편지를 다발로 주문해서는
한 달에 한 통씩 몇 달을 때워내는 이도 있고
또 어떤 이는 그럴싸하게 대필된 연서를 이름만 바꾸어선
여러 여인네들을 관리하는 신기(?)를 발휘키도 하고
하여간 그네들이 피우는 잔재주가 우습기도 하지만
그들 나름대로는 워낙 진지한 작업인지라
대 놓고 거절하거나 웃을 수도 없답니다.

그런 다발성 주문이 들어올 때면 참 죽을 맛이지요.
감정 몰입이 쉽지 않은 남의 일인데다 정보도 부족한 상태에서
각기 다른 내용의 편지글을
단번에 서너 통을 써 내야 하는 일이란, 오호 애재라 !

내게 편지글을 부탁해 오는 이웃들의 연령층은
스무살 남짓의 젏은 친구들에서부터
고희를 넘긴 할아버지에 이르기까지 다양합니다.
남편, 아버지, 삼촌, 아들, 조카, 형님, 할아버지, 친구.....
이 온갖 입장과 위치에서 글을 써댈라 치면
천의 얼굴, 천의 마음으로 무장하여 그들 각자의 수준에 맞춰
대필 흔적 나지 않게 한 편의 편지글을 갈무리해 낼라치면
어떨 땐 머리가 다 지끈거릴 때도 있습니다.
꼬리 아홉 달린 구미호의 재주를 피우지 않고서는
참 감당키 힘든 담장 안의 또 다른 징역살이(?)입니다.

분명 즐거운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보람을 느낄 때도 많습니다.
예를 들면, 부부나 연인 간의 불화가 조성된 상황에서
그럴듯한 편지글이 그들 사이에 갈라지는 애정의 틈을
메꿔주는 좋은 결과를 얻는다든지
징역 살면서 외려 의젓해진 자식의 편지에
흐뭇해하는 시골 노부모의 회신이 왔을 때라든지 등등
내가 대필해 준 편지들이 이런 저런 좋은 결과들로 나타날 경우는 정말
남의 일 같지 않게 함께 기쁨과 슬픔을 나누기도 한답니다.

몇 해 전 미결 사동에 있었을 때입니다.
미결 사동엔 주로 재판 대기 중인 사범들이 많아서인지
그 때는 편지 대필 보다는 주로 항소 이유서나 탄원서 등
재판과 관련된 문서형 글들을 부탁 받는 경우가 많았었지요.
변호사를 살 만한 여유있는 사범들이야 큰 문제가 아니었겠지만
외부의 지원을 거의 받지 못하고 의지할 곳 없는 어린 소년수들에겐
그들로서는 믿기 힘들고 성의 없는 국선 변호인에 의존하느니
차라리 공안수 형이 써주는 항소 이유서 한 장, 탄원서 한 장이
더욱 듬직해 보였던 게지요.

어떨 땐 강도의 심정으로
또 어떨 땐 살인범의 심정으로
또 어떨 땐 강간범, 절도범, 교통사범 등등
온갖 범죄자의 심정을 헤아려 각자의 수준과 정황에 맞추어서
반성과 호소, 변명, 탄원, 읍소, 자기 합리화, 요구와 주장 등의 변화 무쌍한
글 내용을 지어내는 일은 편지글 대필 보다는 한결
신경을 곧추세워야하는 고역이었지요.

이 때의 보람은 편지글 대필로 얻는 보람과는
사뭇 다른 기쁨을 줄 때가 있습니다.
그들 탓에 피해를 입은 피해자의 입장을 생각하면
마냥 기뻐하고 보람있는 일이라 단언 할 수는 없겠지만
아직은 살아온 날 보다는 살아가야 할 날들이 훨씬 많은 소년수들이기에
변호사도 없이 재판에 임하는 그네들의 딱한 처지를 나몰라라 외면하는 일은
나로서는 결코 그냥 넘어갈 순 없는 안타가운 일이었댔지요.

재판 결과가 예상보다 잘 나왔노라며 기뻐하던 소년수,
법정에서 항소 이유서 참 잘 썼다는 판사의 칭찬 한 마디에
희망을 놓지 않던 소년수,
형 덕분(?)에 집행 유예로 풀려난다며 연신 감사를 표하던 소년수,등등....
그 중에서 강도 살인죄를 저지른 한 소년수를 위해 몇 날 며칠에 걸쳐
장문의 항소 이유서를 작성하던 일이 가장 진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내가 이감온 이후 그가 어찌되었는지 알 순 없으나
좋은 결과를 얻었기를 기도해 봅니다.

혜송님,
이처럼 난 가는 곳마다 일거리를 몰고 다니는 본새가
꼭 무슨 전생의 업보인듯 합니다.
다른 사람에겐 쉬이 청탁하는 것 같진 않던데 내겐 유별나게 사람들이
청탁을 해 오니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가늠할 수가 없습니다.
혜송님은 은연 중에 나의 편지글 횟수가 많지 않다 압박하지만
난 이렇게 매일 같이 편지 쓰는 일에 파묻혀 지내고 있답니다.
나름대로 담장 안 봉사 활동(?)으로 바쁜 탓이거니 이삐 봐 주세요.

혜송님, 어째 오늘 글은 시작과 끝이 생뚱맞기 그지 없습니다.
이쯤에서 잠 자리 인사해야겠습니다.
시간이 꽤 늦은 밤입니다.
"당신이 나를 좋아하고 사랑하고 있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세상은 온통 내 것 같습니다. 혜송님, 내일 아침도 힘차게 시작하세요 !"


오래 전 2월 21일 **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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