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 가꾸기...사랑 서신 제078호


혜송님, 지난 번에 했던 나의 거친 얘기들을
잘 다듬어 그 논지를 참 잘 정리해 주셨네요.

사람을 사랑하며 서로 조화롭게 살아가는 것 !

그것만이 가치 혼돈의 격변기를 살면서
그나마 추슬러 볼 수 있는 우리들의 사상과 실천의
총체적 좌표와 희망이 아닐까 싶습니다.

무엇보다도, 혜송님 스스로가 그간 자신의 한계라고 생각해 오던
소박하고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지향과 가치들이
시공을 초월하여 변함없이 추구되는
인류 보편의 지향과 가치들에 부합됨을 재확신하면서
혜송님의 삶에 자신감과 자부심을 회복하고
새로운 이상과 희망을 일구어 낼 수 있게 되었다는 건
참으로 기뻐할 일입니다.

혜송님의 ‘희망 가꾸기’에 작은 보탬과 격려라도 될까 해서
오늘 글에서는 ‘운동하는 사람들의 삶의 의미와 자세’에 관한
나의 몇 가지 생각을 언급해 보고자 합니다.

예전에 내가 ‘전적으로 순수하고 완전한 의미에서의
이타적 사랑과 희생과 헌신이란 거의 존재할 수 없는 것'이라는 얘길 했었지요.
예수나 붓다 정도의 고매한 풍모와 비범함을 지닌
극히 극소수의 선각자들이나 의인들을 제외하곤
대부분의 인간들의 삶의 행위의 근저에는
자기 만족과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려는 원초적 욕구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그런 원초적 욕구를 달리 표현하면
곧 ‘자아 실현의 욕구’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원초적 욕구는
운동하는 삶의 행위의 내면에도 어김없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간혹 운동하는 사람들 중에 자신의 운동하는 삶이
전적으로 순수한 이타적 동기에서 출발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없지는 않을 겝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일종의 자기 기만이자 교만입니다.
운동하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 보다 솔직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운동하는 삶이 뭐 특별히 유별난 희생과 헌신을 전제로 하는
이타적 동기나 대의 명분에 의해서라기보다는
궁극적으로 자신의 정신적 자유와 자신의 행복과 자기 만족을
지향하는 원초적 욕구, 즉 자아 실현의 욕구라는 또다른 내면적 동기에 의해
안받침되고 있음을 인정하는 게 보다 솔직한 태도이리라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운동하는 삶이 얼핏 보기엔 이타적 삶의 형태로 보여질 지라도
궁극에는 그 또한 일종의 이기적 삶의 범주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입니다.

무릇, 자신의 운동하는 삶이 전적으로 이타적 헌신과 희생이라 생각하는
교만한 마음 탓에 성과에 집착하는 조급함과 보상 심리가 생겨나게 됩니다.
성과를 얻기에 조급해 하고 은연 중에라도 보상 심리가 작동하는
그런 운동적 삶은 결코 오래갈 수 없습니다.

타인을 위한 운동은 성과를 중시하지만
자신을 위한 운동은 성과보다는 과정을 소중히 여기며
성과 얻기에 조급해 하거나 보상을 바라지도 않습니다.
지 좋아서 하는 일에 ‘보상’이란 단어는 그 얼마나 어불성설인가요.
운동하는 삶을 통해 자기 만족과 행복이 있으면 그게 가장 큰 보상인 게지요.
그러기에 뚜렷한 성과가 없을 지라도 크게 실망하지도 않으며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지도 않습니다.
시대적 상황의 열악함을 탓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묵묵히 자신의 운동하는 삶의 매 순간 매 순간마다
최선을 다해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뻐하고 만족할 수 있게 됩니다.
타인을 위하노라는 교만에서 시작한 운동은 한 순간의 열정으로 끝날 수 있으나
자신을 위한 운동은 평생 지속되어지는 자아 실현의 과정이며
그 자체가 곧 삶이고 행복이 되는 것입니다.
남을 위해서라면 단 하루도 못할 일도 자신을 위해서라면
평생이라도 할 수 있는 게 인지상정 아니던가요.

오늘 나는 혜송님에게 운동하는 삶을 즐기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물론 말처럼 그리 쉽지 않은 일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나 자신도 그러질 못하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운동하는 삶이 자신에게 충분한 자기 만족과 행복을 가져다 주지 못하고
양심과 도덕심, 정의감, 역사적 소명의식 따위의 대의 명분에 밀려
마지 못해 행하는 고통스런 헌신과 희생으로 여겨질 뿐이라면
차라리 아니함만도 못한 거지요.

운동하는 사람은 언제 어느 순간에라도
낙천적인 기품을 유지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운동하는 삶 그 자체가 이상과 희망이고 행복이어야 합니다.
이상과 희망이 있는 사람은 매사에 적극적이고 낙천적일 수 있습니다.
일찍이 키에르 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을
‘절망’이라고 진단한 바 있습니다.
이상과 희망을 상실한 삶이란 곧 죽은 삶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이상과 희망이 있는 한
우리의 삶은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상과 희망을 간직한 사람은 죽는 그 순간까지도
죽어가는 게 아니라 살아가는 것일 테지만
이상과 희망을 상실한 사람은
이상과 희망을 잃어버린 바로 그 절망의 순간부터
죽어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삶이란 곧 ‘자아 실현을 위한 이상과 희망의 실천 과정’이 아닐까요.
여기서 말하는 자아 실현이란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현실 속에서 구현해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운동하는 삶을 선택한 것은 운동하는 삶이야말로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가장 잘 구현해 나갈 수 있는 삶의 한 형태로 판단하고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체 게바라가 혁명의 성공 후에도 일국에 안주하지 않고 끝없이 떠돌며
역동적인 삶을 살았던 것도 바로 그런 까닭이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자아를 실현해 가는 삶의 형태는 사람들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혹자는 종교인으로서, 혹자는 문인으로서, 혹자는 경제인으로서,
또 혹자는 예술인으로서, 노동자로서, 스포츠인으로서
저마다의 자아 실현을 위한 삶의 형태는 수없이 다양하고
그것들은 각기 저마다의 의미와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각기의 다양한 삶의 의미와 가치들을 상호 존중하고 이해하며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상생 조화의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들이 선택하고 가꾸어가야 할 이상과 희망이 아닐까요.
혜송님이 최근에 그려가고 있는 이상과 희망도
바로 그런 것의 연장선에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혜송님, 오늘 나의 두서없이 주절거린 글들이 혜송님의 ‘희망 가꾸기’에
자그마한 밑거름이라도 될 수 있었으면 하는 작은 바람을 갖습니다.

오늘의 만남도 참 짧게만 느껴졌습니다.
접견실을 나서자 말자 후회스러웠습니다.
담당 부장 눈치볼 것 없이 좀 더 붙들고 늘어질 걸 그랬나 싶었습니다.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작질 않았습니다.
앞으로 접견 때는 좀 더 낯짝을 두껍게 하여
내 소중한 몫을 단단히 챙겨야겠다는 다짐을 동여매어 놓습니다.

글 다 쓰고서 옥창 밖 밤 하늘을 올려보니
노란 달이 무척이나 동그랗네요.
혜송님의 고운 모습이 행여 저 달 속에 있나 싶어 빤히 쳐다봅니다.


오래 전 6월 10일 **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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