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치산?...사랑 서신 제104호



오늘 문득 과거를 돌아보던 중에
마치 어제 겪었던 일인 양 생생하게 떠오는
조금은 별스러웠던 학창 시절의 수배와 도피 생활 얘기 하나 들려 줄 게요.
혜송님 듣기에 썩 유쾌한 얘기도 아니고
나 스스로도 즐거운 기억도 아니건만
세월 지난 지금엔 스쳐 지나는 얘깃거린 될 듯합니다.

빨치산!
그랬네요, 흡사 그런 생활이었습니다.
대학 4학년 때네요.
10개월여 지속되는 수배 중에 은신할 만한 곳은 이미 다 노출된 터라
이 넓은 땅에 내 몸 하나 편히 뉘어
한 밤 지샐만한 곳도 마땅찮던 그런 날들이었지요.

돌아보면 내 어찌 그리할 수 있었던지 감회가 새롭기도 합니다.
어쩌면 동료들에 비해 장기간 검거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집회와 시위를
추동하고 꾸려갈 수 있었던 것도
나의 그런 유별난 도피 행적이 뒷받침된 때문이었을 겝니다.

학창 시절이 끝나갈 무렵 ‘그 때 그 사건’은
후배들의 대규모 구속을 불러왔고
당시 구속된 후배들의 모든 알리바이가 내게로 집중되었던 터라
나의 이름 석 자는 구속된 후배들의 부모님들껜 이미
‘자식 농사 망쳐 놓은 죽일 놈’의 대명사가 되었더군요.
운동권 학생 조직의 실태와 생리를 전혀 알 길 없는
부모님들로서는 너무도 당연한 반응이었지요.
내가 당시에 겪던 심리적 압박과 고통은
실로 감내하기에 벅찰 만큼 무거운 것이었답니다.
살아 남은 자의 슬픔과 고뇌는
수배 생활 중에 자학적 충동을 불러일으키기에도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였던지 약간의 자학적 충동도 전혀 없다고는 볼 수 없었던
나만의 신종 ‘빨치산식(?) 수배 생활과 투쟁’이
그 장을 열게 되었던 것도 같습니다.

당시의 상황은 지속적인 집회와 시위가 요구되고 있었고
그 또한 공개 투쟁 조직의 장인 내게 주어진 과제였기에
경찰의 감시망을 뚫고 학내외를 들락거리며 집회와 시위를 꾸려가는 일은
그 무엇보다 가장 큰 고역이었습니다.
감시망 탓에 정상적인 학내외 출입이 불가능한 나로서는
학내외를 출입하는 유일한 방편이 캠퍼스 뒷산을 넘나드는 것이었습니다.
야심한 밤에 후래쉬 전등 하나 없이
산을 넘나드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답니다.
한 번은 나 홀로 깊은 밤에 산을 넘다가 산중에서 길을 잃고서
아주 많이 끔찍스러운 산중의 밤을 지샌 적도 있었답니다.

가을이 깊어가면서
검경의 포위망이 점점 빡빡해져 오는 걸 느낀 데다
'그 사건' 이후 이미 피신 가능한 은신처도 모두 동나 있던 터라
그야말로 오갈 곳 없는 유랑 수배 생활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그 때
무책이 상책이라고 가장 위험한 곳이 가장 안전하다는 역발상을 하였댔습니다.

캠퍼스!
이미 오갈 곳 없던 내게 그 곳은 가장 위험한 곳이면서도
아무런 대책없던 내게는 어쩌면 가장 안전한 곳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학우들 속에 묻혀버리면 그만이던 낮 시간 동안의 캠퍼스는
내겐 가장 안전한 공간이었으나 학우들이 한적해지는 야간 시간대에는
캠퍼스를 배회하는 일은 참으로 위험천만한 일이었지요.
언제 경찰들의 학내 일제 수색이 뜰 지도 모를 일이고
그렇다고 캠퍼스를 빠져나가는 일은 더더욱 어려웠지요.
야밤에 산을 넘는 일도 한 두 번이지 매번 그럴 수도 없고
참으로 진퇴양난의 지경에서 생각해 낸 것이
바로 나만의 학내 빨치산식 생활이었던 겁니다.

그 시절 캠퍼스 안에서 내가 몸을 숨겨 밤을 지새운 장소는
정경대 옥상, 도서관 뒤쪽 건물 바닥 틈새, 콘크리트 물탱크 틈새,
법대 건물 뒤편 숲속 등등 으슥하고 후미진 캠퍼스 구석 구석
내 몸을 뉘인 곳은 참으로 다양하였고
한 장소에서 며칠을 머무는 일은 없었습니다.

가장 으슥하고 후미진 캠퍼스의 구석구석을 전전하던 중에
내가 가장 애착을 지니고 몸을 뉘이던 명당 자리를 발견했지요.
거기는 바로 도서관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 야산이었습니다.
내가 굳이 그 곳을 자주 찾게 된 건
어쩌면 수배 생활 중에 문득 문득 찾아오는 외로움과 공포를 이겨내기엔
최적의 장소였기 때문일 겁니다.
적당히 밤이 깊은 시간일지라도
불 밝혀진 도서관 창을 통해 공부하는 학우들을 바라보노라면
어느 정도는 홀로 있다는 느낌을 제어할 수가 있었거든요.
늦은 밤 캠퍼스, 적막한 야산에 홀로 누워 멀찌기 도서관 불빛 창 사이로
공부하는 학우들을 어둠 속에서 바라보는 수배 학생의 고뇌와 고독감이란
참으로 필설로는 형용키 어려운 야릇한 것이었답니다.
밝은 대낮 캠퍼스의 광장에서
수백의 학우들을 꾸려 열변을 토하며 집회와 시위를 주동하고
최루탄을 뒤집어쓴 지친 몸을 얼기설기 추슬리고는
이윽고 캠퍼스에 어둠이 내리면
아무도 없고 아무도 모를 적막한 야산의 맨 땅에 지친 몸을 모로 뉘여
어렴풋이 불빛 사이로 평화로이 공부하는 학우들을 지켜 보노라면
불현듯 밀려드는 그 고독감이란!

바로 그 장소, 나의 은밀한 ‘숲속의 방’에서 은신 중에 겪은
유별난 일화는 아직도 기억 속에 생생하게 떠오네요.
말이 늦가을이지 초겨울의 기운이 감돌 때인데
나의 캠퍼스내 야산 생활 침구라고는
검정색 광목 한 겹과 비닐 한 장이 전부였습니다.
비닐은 마치 커다란 봉투 같아서
비닐 속에 몸을 넣고 광목 한 장 덮는 것으로
맨 땅의 습기와 한 밤의 추위를 견뎌내어야만 했지요.

한 번은 비닐과 광목으로 몸을 감싼 채 얼마나 잠이 들었을까
갑작스레 투둑 투둑 빗방울이 뜯기 시작하더군요.
새벽 두어 시쯤 되는 시간이었을 겝니다.
순식간에 빗방울이 점점 굵어져만 가는데 참으로 난감하더군요.
그순간 그저 멍하니 아무런 생각도 나질 않더군요.
고행을 자처한 수도승마냥 그저 그냥 그렇게 하염없이 비를 맞았습니다.
그렇게 야산에서 비닐 거적 하나와 광목 한 겹으로 두 어 시간을
장대같은 소나기를 온 몸으로 받쳐내었던 그 때를 생각하면
나도 참 어지간했다는 생각에 쓴 웃음이 다 난답니다.
일제 치하의 독립군도 아니고 전쟁 통에 작전을 수행하는 것도 아닌 세상에
이 무슨 캠퍼스 신종 빨치산의 탄생인가요!
그런데 그 때 그 시절엔 그리하는 게
내겐 최선의 선택으로 여겨질 뿐 아무런 다른 대안이 없었습니다.
하여간 대단한 열정이었지요.

열정? 글쎄요, 열정이라 하기엔 좀 부족하고
그건 어쩌면 일종의 ‘광기’였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싸우는 자나 막는 자나 모두가 미쳐 날뛰던 광란의 세월,
그 광란의 세월을 거쳐 난 아직도 광란의 세월을 다 흘려 보내지 못하고
여전히 그 한자락 끝 어딘가에서 이렇게 머물러
담장과 창살을 사이에 두고 가족과 사랑을 대하고 있으니
언제나 내게 평화가 올까요.

얘기가 삼천포로 빠져들고 있네요.
각설하고, 오늘 나의 추억 여행의 종착역을 향해 가야겠습니다.

겨울이 점점 다가오면서 근 한 달여간의 캠퍼스내 야인 생활을 끝내고
나의 학창 시절의 투쟁의 끝 무렵에서 나의 마지막 겨울나기를 보살피고
변함없이 나의 버팀목이 되어 주었던 선 후배, 동료, 지인들이 있었습니다.
특히나 지혜 누님의 위험을 무릅쓴 헌신적인 보살핌은
정말 가슴 뭉클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들이 있었기에 나의 첫 구속을 앞 둔
내 학창 시절의 마지막 겨울은 참으로 아름다왔습니다.
예정된 이별을 준비하면서 그 해 겨울 그들과 나눈 정은
그 얼마나 끈끈한 것이었는지 그것은 아직도 나와 그들과의 관계를
남다르게 엮고 유지해주는 밑바탕이 되고 있답니다.
그렇게 어려운 시기에 기꺼이 이타적 희생을 마다지 않았던
그 때 그 시절 그 사람들의 우정은
앞으로 남은 내 삶에서도 커다란 희망으로
자리하게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내 생애에서 가장 험난하고 어려웠던 시기는
아무래도 이번의 2차 구속 때라 할 수 있을 겁니다.
이런 암울한 때에 혜송님은 나의 혼란스런 삶에 길을 밝히는
북극성과도 같은 존재가 되어 내게로 왔습니다.
오랜 세월, 기꺼이 머물러 기쁨과 힘이 되어온 혜송님이야말로
정녕 내 생애 가장 소중한 벗으로 자리매김된 지금 나는 혜송님으로 해서
잃어버린 자유의 양 만큼보다 더욱 더 큰 평화를 느끼고 있습니다.
혜송님의 그 가없는 정과 사랑이 있어
비록 닫혀 있을지라도 내 삶은 여전히 가슴 벅찬 희망 속에 설렌답니다.
내게 힘을 주는 혜송님, 정말 고맙습니다.

오늘 글의 후속편으로 기회가 되면 ‘탈출’이란 제목으로
그 때 그 시절의 추억 여행을 다시 한 번 떠나 볼 까 합니다.
이 얘기 역시 아찔함과 스릴 넘치는 얘기이니 기대해도 좋을 겁니다.

혜송님, 잘 자요!!


오래 전 8월 22일 **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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