뼈아픈 후회...사랑 서신 제04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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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뼈아픈 후회는 바로 그거다;
그 누구를 위해 그 누구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

젊은 시절, 도덕적 경쟁심에서
내가 자청한 고난도 그 누구를 위한 헌신은 아녔다
나를 위한 헌신, 나를 위한 희생, 나의 자기 부정;

그러므로 나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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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지우 시인의 '뼈아픈 후회'라는 시의 일부입니다.
상당히 솔직한 고백이란 생각을 갖습니다.
나로서도 충분히 공감이 가는 그런 고백입니다.
허나, 시인 스스로가 그런 고백적 내용을 '뼈아픈 후회거리'로 치부하는 건
지나치게 자학적인 인식 태도로 여겨집니다.

사실, 전적으로 순수하고 완전한 의미에서의
이타적 사랑과 헌신이 존재한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 어떤 사랑과 헌신에도 자기 만족을 지향하는 감정과 욕망이
은연 중에라도 내재되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 자기 만족적 지향과 욕망이 없는
'완전 무결한 이타적 사랑과 헌신'이란 아마
예수나 붓다의 사랑과 실천에나 적용될 법한 수사이지 싶습니다.

어쩌면 '그 누구를 위한 사랑과 헌신'이란 말은
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을 위한 사랑과 헌신'이라는 내적 동력에 의해 유지되는
보기 좋고 듣기 좋게 잘 위장된 허울일 수도 있겠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자신의 신념과 의지에 따른 실천을 통해
정신적 자유와 자기 만족의 행복을 추구합니다.
그 어떤 사랑과 헌신이 실천 주체의 선의의 신념과 의지에 따른 선택이라면
그 실천 행위 속에서 은밀히 구현되는 '자기 만족의 쾌감'은
이타적 사랑과 헌신의 행위가 보상해주는 '덤'의 행복이 아닐까도 싶습니다.

이는 봉사 행위 후에 느끼는 보람과도 같은 의미일 것입니다.
다만, 이 덤의 행복이 이타적 실천 행위의 동기와 목적에 해당하는지
아니면 이타적 실천 행위를 통해 얻어지는 자연스런 결과물인지에 관한
문제는 이 다음에 다시 지면을 빌어 언급해 볼 필요도 있을 듯 합니다.

지난 날들의 나의 사상과 실천 과정에서도
그런 정신적 자유와 자기 만족적 쾌감이 덤으로 주어지지 않는 것이었으면
이 끝없는 고행을 자청하거나 감내하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겝니다.
아니,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말하는 게
더 분명하고 정직한 표현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누구를 위한 사랑과 헌신이
부화뇌동하거나 강요받은 타의적 선택이 아니라
자신의 선의의 신념과 의지로부터 시작된 것이라면
그것은 비록 그 속에 자기 만족적 지향과 욕망이라는
또다른 이기적 동기가 내재되어 있을지라도 고의적 위선이 아닌 한
비난과 지탄의 대상일 수는 없으며
나아가 '고로, 나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라는
반성과 고백, 뼈아픈 후회는 지나친 자학 같아 보입니다.

혜송님,
오늘 시 한 편 읽으며 가져 본 생각이었습니다
어머님 모시고 꽃 구경 가자는 얘기는 쌍수를 들어 환영합니다.
올해는 가능할까요...
김칫국을 마셔도 오지게 마시고 있는건가요 ?


오래 전 4월 5일 **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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