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미, 인간 그리고 신...사랑 서신 제090호


뒷마당에 잣나무 한 그루가 있습니다.
떡 버티고 선 모습이 흡사 경교대 초병 같은 모습입니다.
2층 옥방에서 찬찬이 내려 보면
그 밑둥 어귀에 개미성이 두어 군데 눈에 띕니다.
올해는 작년보다 한 켠 더 비껴서 자리를 잡았네요.
터가 센 탓인지 올해는 유난히 개미들이 수난을 겪고 있네요.

징역사는(?) 개미들에게 가장 큰 재난은 삽질과 홍수(?)입니다.
담장 안에서는 열 흘 내지 보름에 한 번 꼴로
담장 안 구석구석에 돋아 있는 잡초들을 제거코자
삽질과 갈쿠리질이 여름철 내내 정기 행사처럼 행해집니다.
그 우악스런 삽질과 갈쿠리질에
그 솜뭉치 같은 개미성이 무사할 리는 없지요.

행여라도 삽과 갈쿠리가 개미성 외곽만을 파손하고 지나간다면
그건 개미들에겐 굉장한 횡재수입니다.
헌데 가끔 짖꿎은 작업자가 작정한 듯 개미성을 통째로
한 삽 푹 펌질이라도 할라치면 그건 개미들에겐 엄청난 재앙이 되고 맙니다.
그런 상황은 개미들에겐 데프콘A(군대 용어로 1급 비상 사태)와도 같습니다.
봄철 내내 파낸 굴과 쌓은 성이 한 순간에 쑥대밭이 되는 만큼
개미들로선 정말 분하고 통탄스런 일일 겝니다.
그런 재앙 말고도 개미들에겐 또 다른 재앙이 다가들기도 합니다.
소나기라도 퍼부을 때면 어김없이 찾아 드는 홍수는
개미들에겐 삽질과 갈쿠리질에 버금가는 또 하나의 재앙입니다.

작년엔 잣나무 밑둥 어귀에 위치했을 땐
그 지대가 약간 솟은 데다 잡초도 별로 돋질 않아
홍수나 무지막지한 삽질과 갈쿠리질을 용케 피해 갈 수 있는 명당이었건만
올해 개미들이 새로 자리 잡은 집터는
여러모로 개미들에겐 수난의 터인 듯합니다.
약간 저지대여서인지 작은 비에도 홍수 나고
툭하면 삽질과 갈쿠리질에다 정말 눈 뜨고는 못 볼 정도로
개미들이 겪는 고난이 이만 저만이 아닙니다.

재난이 닥칠 때마다 몇 날 씩이나 복구 작업에 매달리는
개미들을 보면 일꾼도 저런 일꾼들이 있나 싶을 정도로 악착 같습니다.
부서진 집을 쌓고 또 쌓고 또 쌓는 걸 보면
개미 부지런하다는 말이 정말 실감이 납니다.
겨울나기용 식량을 비축하기에도 이 여름이 빠듯할 터인데
허구 많은 날 저리도 집수리하느라 시간을 다 빼앗기니
개미들의 가는 허리가 이 여름이 가기 전에 어디 붙어나 있을런가 싶습니다.

개미들이 참 불쌍합니다.
말이라도 통하면 잣나무 밑둥 아래 고지대로
집터를 옮기라고 일러 주고도 싶건만
그리도 모질게 온갖 재난을 겪으면서도
그저 무너지면 쌓고 또 무너지면 또 쌓고
미련스러울 정도의 그 모습이 흡사 시지푸스가 바위 굴리는 듯해 보입니다.

기왕에 개미 얘기 나왔으니 말인데
혜송님, 혹시 <개미>라는 소설 본 적 있나요 ?
차원이 다른 두 세계, 개미들의 세계와 인간들의 세계간의
인위적 결합(상상적 결합)을 통해 또 다른 차원의 두 세계, 즉
인간의 세계과 신의 세계간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소설입니다.

소설에서나, 실제에서나
언제나 차원이 다른 세계간의 결합과 교통에는
그 교량적 역할을 맡은 ‘연락자’인 양 하는 존재들이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진짜든 가짜든 자칭 타칭의 연락자들은 그들이 알고 있는
다른 차원의 세계에 대한 ‘정보와 비밀’이 지니는
신비성, 비상식성 때문에 정작 그들 자신이 속한 세계에서는
대개 이단아 취급을 받으며 박해의 대상이 되기가 십상입니다.

저차원 세계의 연락자가 자신이 속한 차원의 세계에서는
제 아무리 걸출한 인식 능력과 지적 능력과 통찰력을 지녔을지라도
차원이 다른 세계간의 근본적인 인식 능력의 한계 탓에
고차원의 세계를 인식하기란 어쩌면 ‘완전히’ 불가능하다고 봐야겠지요.

차원이 다른 두 세계간의 인식의 방향은 언제나
고차원 세계에서 저차원 세계로 향하는 일방통행만이 존재할 뿐이며
왕복통행의 대등한 인식의 교류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건 마치 고차원의 세계에 존재하는 인간은
개미의 세계를 궤뚫어 볼 순 있어도
저차원의 세계에 존재하는 개미가
인간 세계를 결단코 인식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런 차원 세계간의 맥락으로 인간 세계의 종교를 한번 살펴볼까요.
개미에 대해선 고차원 세계의 존재였으나 신에 대해선 상대적으로
저차원 세계의 존재인 인간은
고차원 세계의 존재들(신)에 대한 신앙 행위를 통해서
그들을 인식하고 그들과 교신할 수 있으며
나아가 궁극에는 차원이 다른 두 세계,
즉 인간과 신의 세계 간에 존재의 전이와 통일이 가능하다는 설정이
대개 종교들의 교리의 핵심이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앞서의 개미와 인간의 차원 세계간의 설명에서 언급되었듯이
차원이 다른 두 세계인 인간과 신의 세계 간에
대등한 쌍방향적 인식과 교신이란 불가능하며
소위 기독교에서의 예수란 존재는
뛰어난 감수성과 예지 능력과 지적 통찰력을 지니고
다른 차원의 세계에 대한 느낌(정보?)을 인간 세계에 설파한
선각자(연락자?)일 뿐이라는 게 나의 생각입니다.
사실, 예수를 차원이 다른 세계에서 파견된
'신적 존재가 아닌 인간'으로 보는 나는
그가 설파하는 차원이 다른 세계(하느님이 사는 세계)에 대한
‘정보와 비밀’(복음)의 진실성을 쉽게 용인할 수는 없습니다.
그건 앞서도 말했듯이
저차원 세계의 존재가 고차원 세계의 존재를 인식하는 일은
‘완전히 불가능한’ 일로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허나 나는, 인식할 수 없다 해서 인간 세계보다 고차원의
또 다른 세계가 존재할 가능성마저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고차원의 다른 세계가 저차원의 세계에 존재하는 인간에 의해
인식되고 설명되는 자체를 인정할 수 없을 뿐입니다.

그런 나의 생각과는 달리 백 번을 양보하여 설령 차원이 다른 세계 간에
의사 소통(교신)과 교감이 가능하고 실제 그 교량적 역할을 맡은
연락자가 실재한다손 쳐도 우리는
다른 차원의 세계에 대한 정보와 비밀을 전파하는 연락자의 역할이
과연 정당하고 긍정적인 것인지에 대한 문제를
차원 세계 간의 관계 점검을 통해서 한 번 쯤은 짚어 볼 일입니다.

각 차원의 세계는
저마다의 독특한 삶의 양식과 가치 체계와 질서가 존재합니다.
A차원의 세계에서는 ‘악과 불행’인 가치나 삶의 양식도
B차원의 세계의 기준으로 보면 ‘선과 행복’의 가치나 삶의 양식일 수 있으며
그 역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성립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볼 때 차원 세계 간을 연락하는 어떤 연락자(예언자, 선각자)가 있어
자신이 우연(혹은 필연)으로 얻은 다른 차원의 세계에 관한 ‘정보와 비밀’을
소개하는 것은 자칫 그 차원의 세계에서
그간 통용되어온 가치 체계나 삶의 양식 전반에
대혼란과 재앙을 초래하는 불씨로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궁극적으로 화가 될지 복이 될지는
차원 세계 간의 관계 점검을 통해서 유추해 볼 수는 있을 겁니다.

대체로 각급 차원 세계의 존재들은
자신보다 상급(고급) 차원 세계의 존재에 대해선
무한한 경외감을 갖는 반면
자신들보다 하급(저급)의 차원 세계의 존재에 대해선
무관심하거나 무시하고 경시하는 태도를 갖기 마련입니다.
이것은 개미와 인간의 관계를 유추해보면 충분히 이해 가능합니다.
인간이 개미에 대해 갖는 관심의 정도는
신이 인간에 대해 갖는 관심의 정도와 별반 다를 바 없으리라 봅니다.

각급 차원 세계의 존재들은 근본적으로 자신들보다 하급 차원의 존재들과는
수평적으로 대등하게 결합하고 교감할 만큼의
진중한 애정과 관심을 지니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최선의 관심이랬자 기껏 동정심이겠거나 지적 호기심의 수준일 겁니다.
내가 개미들이 겪는 재난을 측은지심으로 바라보긴 하지만
흔쾌히 그들을 구조해 줄 의욕은 없는 호기심 수준의
관심인 것과 마찬가지인 게지요.
아마 핵전쟁에 기인하든 전염병에 기인하든 그 어떤 연유에서든
인류 최후의 날을 부르는 재앙이 닥친다해도
우리를 충분히 구원해 줄 수 있는 능력을 지닌 고차원 세계의 존재(신)들은
인간 세계의 멸망을 그저 무관심하게 바라보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어쩌면 재앙 그 자체가 신들의 장난일 수도 있지요.
마치 인간들이 장난 삼아 개미의 세계를 한 삽 푹 뒤엎어 버리듯 말입니다.

인간들이 저급한 차원의 세계에 대해선
무관심하고 무시하고 때로는 재앙을 내리면서도
인간 세계보다 고급한 차원의 세계의 존재들에 대해선
지나치게 경모하고 추앙하는 행태를 보이는 건
어쩌면 반인간적, 반‘차원세계’적 태도일 수 있습니다.
개미들이 자신들에게 재앙을 내릴 수도 있는 인간들의 속성도 모른 채
자신들을 구원해 줄 구세주인 양 떠받들고 추앙하는 것은 맹목적인 추종입니다.
차원이 고급한 세계에 대한 비밀스런 정보의 신비성에 현혹되어
자신이 존재하는 차원의 세계를 부정하는 태도는
차원 세계 간의 굴욕적 근성입니다.

설령, 지식과 능력 면에서 인간이 존재하는 차원 세계의 수준이
고급 차원의 세계에 비해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뒤떨어지고
그야말로 저차원적인 것이라 해도
자기가 속한 차원 세계에 대한 자부심은 잃지 말아야겠습니다.

인간 세계 내에서도
나라 간에, 민족 간의 부당한 개입을 침략이라 규정하고 적대하듯
차원 세계 간에도 부당한 개입은 침략과 다를 바 없습니다.
차원 세계 간의 부당한 개입과 간섭, 즉 침략은 언제나 고차원의 세계에서
저차원의 세계로 향하는 일방적인 것일 테지요.
그 역방향은 사실상 성립이 완전 불가능한 것일 테고요.
인식할 수도 없는 고차원의 세계를 침략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일테니까요.

인간 세계에 대한 신들의 부당한 간섭과 개입, 왠지 기분 나쁜 설정입니다.
그렇다면 인간들 역시 더 낮은 차원의 세계에 대한 부당한 개입과 침략 행위는
중지되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이치입니다.

혜송님, 뜬금없는 장광설이 많이 지루했지요.

차원이 다른 세계들에 대한 존중 !!

제헌절 날 아침 또 한 번 인간들의 부당한 개입과 침략 앞에서 혼비 백산하여
데프콘1이 발동된 개미들에게 인간 세계의 일원으로서 미안한 마음을
대신 전하며 떠올려본 사색이었습니다.

혜송님, 좋은 꿈 꾸고 내일도 참 좋은 하루를 맞이하세요...


오래 전 7월 17일 **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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