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노래 자랑...사랑 서신 제053호





지금은 비 개인 화창한 일요일 오후입니다.
높은 담장 너머 저 멀리 보이는 산과 들이
망원경 렌즈에 비친 듯 청명하고 한 눈에 쏘옥 들어옵니다.
역시 하늘은 비갠 뒤 하늘과 가을 하늘이 보기엔 제일 좋습니다.

혜송님, 지금 뭣하고 있나요.
강의 노트를 정리하고 있나요, 아니면 전화통 수다 중인가요.
난 방금 설겆이 끝내고서 옥방 스피커에서 울려나는 전국 노래 자랑을
청취하며 글을 쓰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대표 사회자 송해님의 걸쭉한 입담과
약간의 푼수끼마저 엿보이는 향토 서민들의
소박하고 정겹고 요란스런 어울림이 보지 않고 귀로만 들어도
입가에 미소가 절로 납니다.
짧은 시간이나마 담장 안의 시름을 잊게 하는 순간입니다.

전국 노래 자랑을 볼 때면 가끔,
나도 저런 곳에서 노래 하라면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글쎄요, 나로선 누가 억만금을 준대도 가능할련가 의문입니다.
다중들 앞에서 정치 연설 하라면 거리낌 없던 뻔뻔함도
저런 노래 자랑 무대에 서면 다 빛 좋은 개살구지 싶습니다.

아무튼, 전국 노래 자랑에서
특급의 푼수끼를 발산하는 사람들은(인기상을 주로 노리는?)
웬만큼 얼굴을 꼬집어도하나도 아파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너무 두꺼워서.

스스럼없는 서민들의 그런 소박하고 자연스런 정서는
언제 보아도 친근하고 정겹습니다.
반면에 소위 많이 갖고 많이 배운 사람들의 겉치레와 내숭과 체병은
다분히 가식적이어서인지 역겨울 때가 많습니다.
이리 말하고 있는 나 역시 그런 가식으로부터
완전 자유로울 수는 없을 터이지만 계급적 잔때를 벗어내기 위해
이 곳에서도 부단히 노력해 왔던 편입니다.

그 부단한 노력의 결과로서 이 곳에서 얻은 훈장이 하나 있습니다.
'타락한 공안수 !'
이 곳에 사는 내 이웃인 어린 친구들 몇몇이 내게 붙여준 애칭입니다.
욕 잘하고 별 내숭 안 떨고 쓸데없는 점잔 떨지 않고
그러다 보니 그들 눈에 배운 사람 같지 않고 무식해 보인다나요.
공안수 같지 않고 도둑질한 지네들 공범 같답니다.
그리 살다 보니 이 곳의 이웃들인 강도, 도둑, 조폭, 소매치기, 사기범들과
이젠 다 친구가 되고 호형 호제하는 사이가 된 지 오래입니다.
그네들이 붙여준 '명예롭지 못한'(?) 애칭 속에 함유된 의미를 잘 알기에
난 결코 그 애칭을 마다지는 않는답니다.

언제 어느 공간에서든
격없는 사람, 대화하고 싶은 사람,
이질감을 느끼지 않게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건
내 작은 소망들 중의 하나입니다.
대중들 속에서 때와 장소와 분위기를 적절히 가늠하지 못하고
언제나 '배운 사람 답게' 우아하고 고상하게 지식인인양 처신하는 모습,
그거 대중들의 눈엔 한낱 '꼴값'으로 보일 때가 참 많습니다.

자기 감정을 위장하는 데 익숙한 잘나디 잘난 사람들의 눈엔
자기 감정 표현이 너무 솔직해서 탈(?)인 소박하고 소탈한 서민들의 처신이
그저 천박하고 상스러운 것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요.
허나, 고인 물이 잘 썩듯이 자연스레 발산되지 못하고
지나치게 억제되고 절제된 감정은
사람의 심성을 썩게 만드는 독소가 됩니다.
겉보기에는 우아하고 고상해 보일 진 모르겠으나
지나치게 감정이 절제되고 억제된 처신의 이면에서
위선적이고 가식적인 음흉한 심성이 독버섯처럼 기생할 수 있습니다.

편견일 수도 있겠지만
위선과 가식은 많이 배울수록 많이 가질수록 그 정도가 심하다는 게
나의 생각이자 지론입니다.
접대업에 종사하는 처자들의 통설에 의하면
술집 매너가 가장 치사하고 난삽한 사람들이 소위 '사'자들이라는 것도
다 그 나름의 근거가 있기 때문이지요.
평소 공개된 장소에서 '사'자 신분에 걸맞게 고상하고 아닌 척 점잔 빼느라
지나치게 억제되고 절제된 인간 본연의 욕구들이
밀폐된 장소에서 일시에 발산되다 보니 그 업계 처자들의 눈엔
'사'자들이란 '꼴값을 떠는 저질 손님'으로 각인될 수도 있었겠지요.
근거가 분명한 속설은 아닐지라도
이런 게 바로 많이 가지고 많이 배운 사람들의 음과 양의 모습,
그 위선과 가식의 단면일 수도 있겠습니다.

전국 노래 자랑 마당에서 신명나게 놀고 있는
소박하고 소탈한 서민들의 아낌없는 감정 발산을 두고
그 뉘라서 천박한 대중문화라 일컬을 수 있겠습니까.
행여라도 그리 생각하고 있을 법도 한 점잖은 체, 우아한 체, 고상한 체하며
오늘도 '체병'으로 속이 썩어 들어가는 잘난 님들 들으라는 듯
어느 씩씩한 처녀의 '남행 열차'는
한층 더 신명나고 걸쭉허니 남쪽으로 달려갑니다.

혜송님, 정말 화사한 봄날 오후입니다.
이토록 화사한 날엔 문득 밖에 있고 싶어집니다.
혜송님과 덕수궁 돌담길이라도 함께 걷고 싶은 욕망이 솟구치는
청명한 날입니다.
혜송님도 집에 있질 말고 봄 햇살과 봄바람을
한 몸 한 마음 가득 담아 보시길 바랍니다.
좀 더 많은 날이 지난 다음에
우리가 함께 맞을 청명하고 한가로운 일요일 오후를 상상하면서
오늘은 여기까지만.


오래 전 4월 23일 **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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