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유리함...사랑 서신 제015호





지난 번 언젠가 접견 때
나의 담장 안 생활이 끝난 후에라도 나의 편지글이
계속 이어져 갔으면 좋겠다고 했었지요.

장담할 순 없지만 그래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확실히 글이란 말과는 달리
심연의 깊은 소리를 담아낼 수 있는 유력한 수단임엔 틀림없어 보입니다.

순간 판단으로 재바르게 쏟아내는 말은
글에 비해 생동감과 기동성 면에선 한결 앞선 장점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글 보다는 실언의 확률이 높은 것이 단점이겠지요.

그에 비해 글은 말로 하기가 어렵거나 부자연스런 표현들을
충분한 시간을 두고 숙고하다 보면 의외로
자신의 생각이나 심정을 보다 쉽고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다는 점이
강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주선이 달과 별을 오가고
컴퓨터가 사람의 두뇌를 대신하고
전자 통신이 온 세상을 거미줄처럼 얽어 놓은 디지털 문명의 홍수 속에서
'수작업으로 정성스레 한 필 한 필 쓰여지는 편지'는
분명, 디지털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남겨진
몇 안되는 고전적 낭만 중의 한 행태로 여겨집니다.

조금 전까지 편지함을 정리했더랬습니다.
편지함이란 게 별스런 것이 아니고 관에서 파는 운동화 포장 상자입니다.
혜송님께서 보내 주신 각양 각색의 편지들이
제법 소복이 쌓여 있는 모습이 정겹기 이를 데 없습니다.
알록 달록한 편지들이 옹기 종기 모여 있는 모습이
아담한 꽂밭과도 같아 보입니다.

혜송님의 글 상자와 나란히 보관 중인 다른 상자에도 편지글이 수북하네요.
부족한 사람을 아직 기억하고 함께 아파해 주고 격려해 주는
지인들이나 얼굴 한 번 본 적도 이름도 알지 못했던
많은 이들이 정과 관심을 보내 준 흔적들입니다.
파란 눈을 지녔을 법한 먼 나라 사람이 보내온 편지도 들었네요.
나의 담장 안 생활을 윤택하게 하는 소중한 힘들입니다.

전화 한 통에 한 시간만 달려가면
자유롭게 만나 연담을 나눌 수 있는 바깥 세상의 연인들에겐
이 편지 한 통 한 통이 지닌 의미와 가치가 어떤 것인지
헤아릴 길이 없겠지요, 겪어보지 않고선...

혜송님의 편지들이 마치 코스모스 꽃잎처럼 차곡차곡 쌓여감에 따라
배 터지겠노라는 신발 상자의 푸념도 이만 저만 아닌 듯해 보이네요.
내일 어디 가서 신발 상자 하나 구해 봐야겠습니다.
담장 안에선 신발 상자 하나 구하는 일에도
눈치껏 이 방 저 방 다니며 설레발치는 수고가 좀 필요하답니다.

담장을 나설 때 쯤이면 혜송님의 편지들이 큰 꽃밭을 이루겠네요.
이 알록 달록한 꽃잎들은 내 사는 동안 참 소중히 간직해야 할 보물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금은 보화와도 바꿀 수 없는 보물입니다.
혜송님의 분신이나 다름 없기 때문입니다.

이 다음에 담장을 나서면
말고 투명한 유리함 하나 장만할 생각입니다.
그 유리함 속에 우리가 주고받은 이 사랑의 꽃잎들을 소북이 쌓아두고
살다가 힘들고 짜증나고 속상한 일이라도 생길 때면 그 때마다
유리함에 손을 넣어 집히는 대로 꺼내어서 읽어 보고 싶습니다.
그러면 초심을 잃어버릴 일은 없겠지요.

혜송님, 어떤가요.
멋들어진 구상이 아닌가요.
우리의 사랑, 우리의 믿음, 우리의 소망, 우리의 역사가 담긴
사랑의 유리함은 이 다음에 우리의 아들, 딸들에게도
물려줄 만한 귀한 선물이 되지 않겠는지요.
이 소담스런 꽃잎들이 이 볼품없는 신발 상자를 벗어나
맑고 투명한 사랑의 유리함으로 이사갈 날을 손꼽아 갈구해보는 밤입니다.

"당신을 별처럼 멀리 두고..."라던 어느 시인의 싯귀가 생각납니다.
차라리 혜송님이 별이라도 되어 밤새 바라나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담장의 높이가 별 보다도 더 멀고 높게 느껴지는 밤입니다.

혜송님, 좋은 꿈 속에서 좋은 밤 보내세요.


오래 전 1월 19일 **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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